리퍼와의 기나긴 싸움이 끝난 후, 셰퍼드는 시타델 카운슬에 휴가계(라고는 해도 거의 통보였지만)를 내고 케이든과 함께 지구로 돌아왔다. 얼라이언스에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고 셰퍼드가 그걸 해결한 과정이라던가 향후 어떻게 될지에 대해 알고 싶어했지만, 그는 과감하게 노르망디의 비상 라인을 제외한 모든 통신을 끊어버렸고 이번엔 케이든도 말리지 않았다. 이 휴가를 떠나기 전에 셰퍼드가 했던 한 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이번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줘."

 "갑자기 듣기도 전에 불안해지는데요."

 "이런. 그렇게 신뢰가 없나?"


 셰퍼드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케이든은 아직 붕대를 온 몸에 칭칭 감고 있는 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벌써 두 번이나 죽을 뻔 했잖아요. 그 중에 한 번은 진짜 죽었었고. 셰퍼드는 끄응, 하는 침음성을 낼 뿐 거기에 별다른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겠는가. 처음부터 죽자고 마음먹었던 적은 없었지만 지난 임무들은 하나같이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겁고 깊은 무엇이었다. 케이든 또한 그걸 알고 있기에 셰퍼드에게 그 이상의 타박이나 원망을 던지지 않았다. 병원에서의 일주일은 그렇게 흘러갔고 퇴원하는 날 셰퍼드는 휴가계를 던지고 바로 이렇게 잠적해 버렸다.



 "와, 경치 끝내주네."

 "탁 트여서 좋기는 하군요."


 제법 감격한 얼굴로 호텔 방에서 바닷가를 내려다보는 셰퍼드와 달리, 케이든은 별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여기 와본 적 있어? 셰퍼드는 괜히 심술이 나서 케이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안 어울리게 간지러움을 타는(특히 허리는 쥐약이었다) 그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몸을 꺾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랑 와봤던 것 같아요. 희미해서 잘 기억나진 않지만.."

 "하와이에 왔단 말이야? 집이 바닷가에 있었다면서."

 "일단 그래도 유명하잖아요."

 "관광지 느낌으로 왔었다는 소리로 들리는걸."


 셰퍼드는 이제 반쯤은 대놓고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케이든이 난처하게 웃었다. 셰퍼드는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때엔 늘 침착하고 냉정을 유지하는 편이지만 자신과 둘이 있을 때면 어린애처럼 굴곤 했다. 처음엔 그게 적응이 안 되서 무척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으나 이젠 어떤 타이밍에 달래고 어떤 타이밍에 받아쳐줘야 하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셰퍼드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난간에 등을 기대어 섰다.


 "내가 여기 오자고 한 이유가 뭔지 아나? 알렌코."

 "갑자기 또 그렇게... 모르겠는데요. 여행? 휴양?"

 "아. 역시 전혀 눈치채지 못했군. 실망이야.. 상처받았어."


 그는 어울리지 않게도 시무룩한 팔자 눈썹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케이든은 이번에야말로 당황해서 셰퍼드에게 다가갔다. 왜요? 대체 뭡니까? 셰퍼드는 케이든이 완전히 방심하기를 기다렸다가, 두 팔을 뻗어 그를 품 안에 가두어 버렸다. 존! 이번엔 케이든 쪽이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탄탄하게 감겨드는 몸이 기분 좋았다.


 "우린 말이야. 허니문을 온 거라고."

 "......에?"

 "Honeymoon.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아니, 그야 당연히, 그렇지만 아직..."


 반지는 끼고 있으니 식은 나중에 올리는 걸로 하자고. 셰퍼드가 개구쟁이처럼 씩 미소를 짓자, 불편한 듯 몸을 꿈지럭거리던 케이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어버렸다. 당신은 이럴 때 보면 정말 제멋대로야. 투덜거리는 말 속엔 불만보다는 애정이 녹아 있었다. 그럼 이제 바닷가 구경 갈까? 여기 오면 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어. 



 "그래서 해보고 싶었다는 게...."


 겨우 이런 촌스러운 하와이안 티셔츠를 입고 해변을 산책하는 거였어요? 케이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텐션이 올라간 셰퍼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바야흐로 여기가 하와이다! 난 관광객이다! 하고 외치는 것 같은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에 약간 무릎 위로 올라오는 반바지를 입고 모래사장을 거닐고 있었다. 


 "뭐 어때. 커플 티잖아. 이래야 오히려 사람들이 신경을 안 써."

 "근데, 셰퍼드.. 그 머리에 그 옷, 엄청 수상해 보여요."

 "나같이 순박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셰퍼드는 일부러 양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최대한 어색하게 웃어 보였고, 케이든은 그 얼굴에 그만 폭소를 터트렸다. 당신 그건 임무할 때 겁주는 용으로만 써요. 무서우니까. 웃음기 어린 케이든의 말에 셰퍼드는 짐짓 기분이 상한 것처럼 이마를 찌푸렸지만 뭐라고 말하는 대신 부드러운 동작으로 케이든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금방 거리가 좁혀지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고,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를 천천히 포옹했다. 


그리고- 마침내 입술이 맞닿았다. 


by 치우타 2015. 8. 3. 23:16

 "꼭 어미새와 새끼새 같네요."

 

 타워 내에 어디를 가던지 꼭 같이 붙어다니는 토니와 캡틴을 보고 페퍼가 한 마디로 평했다. 그렇게 보여? 토니는 씩 웃으며 캡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캡틴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얌전히 토니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당신이 새끼새 쪽이에요, 토니."

 "뭐? 내가 왜??"

 "멍!"

 

 그제서야 캡틴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기쁘게 짖었다. 동물에게도 표정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던 페퍼도 생긋 미소지었다. 부루퉁해진 토니에게서 빠져나온 캡틴이 페퍼를 올려다보며 꼬리를 살랑대었고, 그녀는 기꺼이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애 같은 사람이지만 토니를 잘 부탁해. 캡틴. 그녀의 속삭임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캡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멍, 하고 대답했다.

 

 확실히 캡틴은 토니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늘 몇시간이고 랩실에 처박혀서(그나마 배너가 있을때는 나았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올 생각을 않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개를 주워왔다며 기르기 시작했다. 토니의 일상은 캡틴에게 맞춰져서 점점 괜찮아지고 있었고 얼굴 표정도 어둡지 않았다. 어딜 가든 토니 옆엔 캡틴이 있었고 즐거움이 있었다. 정말 평온한 일상이었다.

 

 

 오랜만에 스티브는 악몽을 꾸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돌아갈 곳이 없는 자신, 잃어버린 친구, 놓쳐버린 시간들. 젊은 페기의 얼굴, 나이든 페기의 약해진 모습과 모자를 쓰고 웃는 버키, 강철 팔을 장착한 채 스티브를 노려보는 버키가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버키, 내 친구. 너를 구하지 못해서 미안해. 포기해서 미안해. 주위가 시꺼멓게 물들었다.

 

{데이트가 있었어요.}
이번엔 라디오처럼 지직거리는 노이즈 사이로, 그의 허탈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스티브, 우린 집에 갈 수 있어요.}

다시 노이즈가 섞이더니 이번엔 희망과 기쁨에 찬 페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뒤를 돌아보자, 스티브 외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때 보았던 환상과 거의 완전히 똑같았다. 이건 꿈이야. 깨어날 수 있어. 깨어나야 해. 점점 어두워지는 공간 속에서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몸이 무거웠다. 점점 늪에라도 빠져드는 것 같았다.

 

 "끄으응..."

 

 어디선가 미약한 신음 소리 같은것이 들려와서 토니는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완전히 각성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워낙 늘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탓에 그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끙, 끄응.. 끼잉. 다시 한 번 들어보니 사람이 아니라 개가 끼잉거리는 소리였다. 이 방에는 딱 둘 뿐이다. 토니와, 캡틴. 그는 상체를 일으켜 살금살금 침대가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나처럼 앞발에 고개를 얹고 잠든 캡틴이 무척 괴로운 듯이 신음하고 있었다. 개도 꿈 같은걸 꾸나? 토니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충실한 조수를 불러냈다.

 

 "자비스. 개도 꿈을 꿀 수 있어?"

 [연구 결과, 동물들에게서도 REM수면 상태가 나타났고 말을 배운 고릴라가 꿈과 현실을 혼동하여 말한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음.. 그렇군."

 

 소리나 표정, 몸짓으로 미루어 보아 캡틴은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자는 중에 깨워서 미안하지만 악몽은 길어질수록 더 오래 상처가 남게 된다는 걸 토니는 알고 있었기에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가서 캡틴의 몸을 흔들었다. Hey, buddy. 일어나 봐. 응? 캡틴. 이윽고 잠에서 깼는지 캡틴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드러났다.

 

 "악몽이라도 꿨어? 응?"

 "...끄응.. 낑, 끄응."

 "그래그래. 이리 와. 나랑 같이 자자."

 

 토니는 팔을 벌렸다. 캡틴은 망설임 없이 그의 품으로 뛰어들더니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서럽게 낑낑거리며 고개를 부볐다. 그래, 무서웠어? 착하지. 이제 괜찮아. 나 여기 있어. 토니는 캡틴을 안고 달래며 침대 위에 올라가 그의 바로 옆에 뉘였다. 떨리던 푸른 눈동자가 다시 감기고, 고른 숨소리를 색색 낼 때까지 토니는 캡틴을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캡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산을 떨어 토니를 깨우고 하루를 시작했다. 너 어제 내가 재워줬는데.. 라며 토니가 반쯤 감긴 눈으로 항의했지만 자비스의 스케줄러 낭독을 듣고 축 처진 어깨로 욕실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캡틴, 스티브는 뿌듯한 얼굴을 한 채 욕실 앞에 앉았다. 스티브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흔들어 깨우던 토니의 걱정스러운 표정, 다정한 목소리, 따뜻한 손.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는 느낌에 스티브는 그대로 토니에게 괴로움을 토로했다. '스타크. 토니. 토니. 악몽을 꿨어. 내가 있을 곳이 없었어.' 그 내용들을 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토니는 그저 가만히 그를 안고 달래주었다. 괜찮다고, 옆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무척 단순한 위로였지만 어쩐지 안심이 되어 스티브는 토니의 옆에서 푹 잠들 수 있었다. 스티브는 아주 조금이지만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할 일이 많아서 그럴 수는 없을 터였다. 곧 자신에 대한 연락도 토니에게 닿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이대로 느긋하게 지내도 되겠지. 가운을 두르고 나오며 씩 웃는 토니에게 스티브는 꼬리를 흔들어 주었다.

 

by 치우타 2015. 8. 3. 14:02

 캡틴의 애완용품이 도착한 뒤 토니는 우선 반짝반짝 빛나는 밥그릇에(아주 비싼 브랜드품이었다) 사료를 부어 주었다. 하루에 2-3회 정도라고 했지. 왠일로 세세한 정보까지 기억해 가며 챙기려던 토니였으나, 정작 캡틴은 하루 내내 사료의 냄새만 몇 번 맡을 뿐 입도 대지 않았다. 왜 그래? 사료가 별로야? 잘 시간이 되어 방으로 돌아와 러그 위에 엎드린 캡틴에게 물어보아도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볼 뿐 짖거나 끙끙거리지도 않았다. 며칠 간 사료의 종류를 바꿔서 주기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고 결국 토니는 처음처럼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식사를 주었다. 캡틴은 꼬리를 살랑이며 맛있게 먹어치웠다.

 

 "너 입맛 까다롭구나."

 "멍!"

 "그러다 이빨 약해져. 뭐 이것저것 생식으로도 관리 가능하다고는 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이랑은 관계가 없나보다. 토니는 캡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캡틴은 고개를 위로 들어 젖히며 토니의 손을 넘기고는 무릎께에 머리를 비볐다. 제법 친근하게 굴 줄도 알고. 역시 주인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먹이도 맛있는 것만 먹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토니는 급작 마음이 짠해지는 걸 느꼈다.

 

 "캡틴, 우리 놀까? 여긴 넓어서 프리스비 던지기도 할 수 있어."

 "멍! 멍!"

 "좋아. 그럼 이걸로 하자."

 

 토니가 방패 모양 프리스비를 들고 흔들었다. 구입한 장난감들이 영 시원찮아서 그가 직접 만든 작품이었다. 캡틴이 다시 멍, 하고 짖었다.

 

 

 한편 스티브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든 사료를 먹지 않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제법 맛있는 냄새가 나서 하마터면 그대로 고개를 그릇에 처박을 뻔 했다), 토니가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거나 목을 끌어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꼬리를 살랑거리는 건 기본이었다! 아니, 애초에 의견이 맞지 않을때를 제외하면 그렇게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반가운 느낌은 아니었는데. 게다가 그는 지금 무려 토니와 프리스비 던지고 받기(물어오기)를 하고 있었다. 토니가 랩실에서 직접 만든 방패 모양 프리스비는 쓸데없이 실제 방패와 매우 비슷해서, 날아가는 방향을 예측하기가 쉬웠고 스티브는 백발백중으로 잡아냈다.

 

 "캡틴! 굉장해! 역시 넌 보통 개들이랑은 다른 것 같아."

 "멍! 멍멍!"

 "아주 잘 했어. 착하다."

 

 스티브는 입에 물고 온 방패를 토니에게 순순히 건네주었다.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은 토니가 뿌듯하고 행복한 얼굴로 스티브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더니 아예 와락 끌어안고 뽀뽀를 퍼부었다. '세상에, 스타크!' 스티브는 깜짝 놀라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실제로 취한 행동은 반대였다. 토니의 품에 얌전히 고개를 부비적거리며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야말로 주인에게 사랑받아서 한껏 기분이 고양된 개의 모습이었다. 그가 정말 캡틴이라는 걸 알리고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게 급선무였으나,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 얼음 속에서 깨어난 후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인정하기 싫었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스티브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토니의 웃는 얼굴을 힐끔 올려다 보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밝은 모습이었다. 요 근래에 발견한 '새로운 스타크'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스티브는 좀 더 느긋하게 토니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토닥이며 만져오는 손길이 무척 기분 좋았다. 

 

by 치우타 2015. 8. 3. 09:23

 토니는 캡틴을 자기 방에서 재웠다. 곧 도착할 개 용품들도 있고 해서 처음엔 가장 가까운 옆방을 줄까 싶었지만, 이 녀석은 토니가 랩실에서 일하는 동안 꿋꿋이 옆에 앉아 있다가 늦게사 방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나니 부리나케 뒤를 따라왔다. 혼자 있는게 싫은가? 기본적으로 혼자 자유롭게 지내는 걸 선호하는 편인(이라기보다 익숙한) 토니로서는 잠깐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그 낌새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캡틴은 토니의 무릎에 고개를 부비며 작게 끄응거리는 소리를 냈고, 날 떼어놓을 거냐는 애처로운 눈빛에 패배한 토니는 에라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래! 내 방에 가자!" 고 외쳤다.

 

 그리고 그는 다음 문제에 봉착했는데, 그것은 바로 캡틴을 침대에서 재울 것이냐 바닥에서 재울것이냐 하는 거였다. 어차피 방에 데려왔으니 까짓거 침대에서 재워도 상관없겠지만 최근 자신이 가끔 악몽을 꾸곤 하는걸 생각하면 쉬이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동물들은 기본적으로 낌새나 기척에 민감하니까 같이 잠에서 깨어나 버리겠지.

 

 "어디서 잘래?"

 

 토니의 물음에 캡틴은 타박타박 걸어서 침대 옆 러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기가 좋아? 토니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긍정하는 듯 앞발에 고개를 내리며 푸른 눈으로 조용히 토니를 올려다 보는 것이었다. 얌전하고 의젓한 그 모습에 마음이 간질간질해진 토니는 양 손으로 캡틴을 쓰다듬고 토닥이며 거의 뽀뽀할 듯이 귀여워해주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괜히 들썩이며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잘 자, 캡틴. 토니의 목소리에 방 불이 꺼졌다.

 

 다음 날 아침, 스티브는 일찍 일어나서 토니 방의 창가를 서성거렸다. 해가 떠오르고 주위가 밝아진 시간인데도 토니는 도통 침대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방 안은 블라인드와 커튼으로 가려져 여전히 어두웠다. 그는 허공을 향해 짖으려다가 자비스가 알아들을 리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레 침대 위로 올라갔다.

 

"끄으응."

"..........."

"멍!"

 

 '일어나게, 스타크. 아침이야.' 스티브는 코로 토니의 팔을 밀며 그를 깨우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장본인은 이불을 둘러쓴 채(답답하지도 않은가?) 미동도 없이 쿨쿨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스타크!' 스티브는 한번 더 멍, 하고 짖었다. 그러자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끊어질 듯 말듯 울리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아무래도 그를 깨우려면 조금 더 부산스럽게 굴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스티브는 결심하고 이불을 입에 물어 슬슬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저항 없이 딸려온 이불 너머로 피곤한 얼굴을 한 토니가 숨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가슴이 작게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았다면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스티브는 갑자기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걸 느끼며 토니의 몸을 본격적으로 흔들었다.

 

"멍멍! 멍!"

"....으으... 뭐야..."

"멍! 멍! 끄으응, 끙."

 

 토니가 괴로운 듯 신음하며 작게 뒤척거리더니, 이내 게슴츠레하니 눈을 떴다. 아침부터 왠 개 짖는 소리가... 그는 아직도 멍한 머리로 금빛 털뭉치를 바라보았다. 저게 뭐더라. 멍! 다시 개가 짖었고, 토니는 흠칫 놀라며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아, 그래. 내가 개를 주워왔었던 것 같은데 이름은 캡틴이고.. 토니가 깨어난 걸 알아차렸는지 캡틴은 코를 킁킁거리며 앞발로 토니의 가슴을 툭툭 두들겼다.

 

"너 지금 아침이라고 나 깨운 거야...?"

"멍!"

"....이름을 잘못 지었나.."

 

 토니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새벽에 두 번 정도 잠을 설치는 바람에 아직도 머릿속은 안개가 낀 것처럼 부옇게 흐려져 있었다. 캡틴이 그를 깨우지 않았다면 아마 낮까지는 그대로 기절해 있었을 것이다. 토니는 잠시동안 정말 개의 이름에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지만 꼬리를 흔들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캡틴의 얼굴에 약간의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그냥 부지런한 개인가보지 뭐. 종도 리트리버고. 그는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다음 캡틴과 함께 침대를 빠져나왔다. 아침 먹을래? 배고파? 멍! 토니의 물음에 캡틴은 기뻐하며 앞장서 달려나갔다. 아무래도 밥 때문에 깨웠나 보다. 토니는 실없이 웃으면서 자비스에게 식사를 준비시키고 애견용품 도착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by 치우타 2015. 7. 30. 15:13

 토니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에도 개는 여전히 소파 위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주인에게 버려져서(이미 토니의 머릿속에는 그런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있었다) 정처없이 헤메이다가, 혹은 주인을 기다리다가 세찬 비를 맞고 비틀거리고 있었으니, 지쳤을만도 하겠지. 오늘 저녁은 사이좋게 스테이크로 할까? 토니는 자비스에게 자신의 저녁식사와 하나는 개에게 줄 양으로 아무 조미료 없이 레어로 구워진 소고기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잘 자네, 숨소리도 잘 안 내고. ....자비스, 얘 몇 살쯤 되어 보여?"

 [사람 나이로 치면 20대 후반쯤인 것 같습니다.]

 "다 컸다는 거군. 어릴때만 귀여워하다가 버렸다는 건가.. 완전 쓰레기같은 놈이네."


 토니는 혀를 차며 숨을 쉬느라 들썩이는 개의 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털도 부드럽고, 관리가 잘 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홀대를 받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토니는 가능하면 전 주인의 여러 가지 이유에 대해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결론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귀여운 개를 버리다니 인간 실격' 으로 돌아왔다. 사람이란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때론 죽이기도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애정을 퍼부어주던 애완동물을 질렸다는 이유로 내다 버릴 수 있는게 바로 인간이었다. 정말 자기 편할대로 사는 생물이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음식이 준비되었다는 자비스의 알림에 그는 잠들어 있는 개를 토닥였다.


 "Hey, buddy. 저녁 먹어야지. 잠은 이따가 더 자."

 "....끙..."

 "배고프잖아. 자, 이리 와. 맛있는 거 준비했어."


 스티브는 무거운 눈을 끔벅이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멍한 머리로 눈 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실루엣과, 익숙한 목소리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이내 그것이 브루넷의 동그란 머리와 토니의 목소리라는 걸 깨닫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래, 갑자기 개가 되는 바람에 무작정 그를 찾아와서- 스티브는 고개를 털듯 흔들었다.


 "이제 깼어? 테이블은 이쪽이야."

 "멍!"


 '스타크, 내 말 좀 들어 봐.' 스티브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번 짖었지만 토니는 그것이 저녁식사를 반기는 소리로 알아들은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할 뿐이었다. 어떡하면 좋지. 그는 소파 위에서 안절부절하다가 코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 정확히는 환상적인 고기 냄새에 이끌려 토니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게 아닌데! 스티브는 순간 본능에 따라 행동한 자신을 보고 경악했지만 토니가 웃는 얼굴로 접시에 담아 내민 음식을 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수긍했다. 넓은 접시엔 보기에도 훌륭한, 겉만 살짝 익은 소고기 스테이크가 고급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너한테 줄 만한 음식은 지금 고기밖에 없더라고. 사료는 내일 도착할 것 같거든." 

 "멍! 멍!"


 '아니, 사료를 준비할 것까진 없는데.' 스티브는 그런 뜻으로 짖은 다음에야 본인이 개로 변해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 조금 시무룩해졌다. 일반적으로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은 사료를 먹는다. 사람이 먹는 것으로는 소화기관에 문제가 생길수도 있고, 영양 균형에 맞추어 요즘은 좋은 사료들도 많이 나오는 모양이었다(가끔 지나가는 펫샵을 구경한 적이 있다). 스티브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기 접시를 쳐다보거나 말거나, 토니는 긍정의 신호로 알아듣고는 자비스와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오, 마음에 들어? 실컷 먹어. 또 있으니까. 잠깐만, 자비스, 개도 먹는 양을 스스로는 조절 못하던가?"

 [보통은 그렇습니다. 견종이나 각자의 특성에 따라 적게는 하루 1회~3회 정도 준다고 하는군요.]

 "골든 리트리버는 어떤데?"

 [저 정도의 나이라면 2-3회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흠. 좋아. 관련 정보는 카테고리로 묶어놨으니까.. 어서 먹어, 멍멍아. 살짝 익히기만 해서 뜨겁지도 않아."


 스티브는 그제야 접시에 고개를 들이밀고 식사를 시작했다. 토니의 말대로 겉만 약간 익힌 고기는 부드럽고 신선했으며, 끝내주는 맛이 났다. 사람일 때 먹어본 어떤 종류의 스테이크도 이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군. 스티브는 거의 전투적으로 커다란 고기를 공격했다. 토니는 아주 잘 먹는다며 기뻐하더니 두어 덩이를 더 덜어 주었고 그는 사양않고 맛있게 먹어치웠다. 배가 채워지고 나자 갑작스레 하품이 나오는 바람에 스티브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런.


 "그러고보니 네 이름을 지어줄까 하는데."


 스티브는 입맛을 다시다가 토니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좋을까. 토니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개를 잠시 말없이 응시했다. 푸른 눈. 금빛 털. 이건 뭐 이름 후보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약간 바보처럼 느껴지는걸. 토니는 허공에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스티브가 눈을 크게 뜨며 짖었다. 


 '스타크! 설마!'

 "너도 알아? 캡틴 아메리카의 상징이지. 비브라늄 방패. 널 보고 있으니 생각나더라고."

 "멍! 멍멍! 멍!"

 "안다고? 왠지 그렇게 들리는데. 아무튼 그래서 이제부터는 널- 캡틴이라고 부를거야. 어때? 캡틴."

 '내가 그 캡틴이야! 스티브 로저스라고!'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멍멍 짖으며 빙글빙글 도는 개를 바라보고 토니가 씩 웃었다. 나중에 진짜 캡틴이 알면 화내려나? 하지만 당신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보라고. 개도 마음에 드는 이름이랬어. 그는 변명, 아니 설명할 이유를 몇 가지 떠올리며 여전히 토니의 발치를 빙빙 도는 캡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by 치우타 2015. 7. 29. 21:09

 토니는 최상층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직행했다. 개는 푹 젖은 채로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고, 이대로 놔뒀다간 팔자 사납게도 여름 감기에 걸릴 판이었다. 자비스, 따뜻한 물 좀 틀어. 토니는 욕실 문을 닫고 개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오는 내내 얌전했던 개는 기운 없는 얼굴로 바닥에 푹 퍼졌다. 


"씻고 나서 밥 먹자. 기운내, 너 그래도 운 좋은거야. 내가 누군지 알면 까무라칠걸."


 소매를 걷어붙이며 씩 웃어보이는 토니를 멀뚱멀뚱 올려다보며 스티브는 눈을 굴렸다. 개구쟁이 같으면서도 다정한 미소였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나? 처음 보는군. 제 의사와는 달리 한없이 늘어지는 몸을 최대한 추스르며 스티브는 푸르르, 하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 욕조에 사람 외엔 니가 처음이야. 토니는 조심스레 스티브를 안아올려 욕조에 앉혔다. 따뜻한 물에 몸이 잠기자 나른함 반, 위기감 반이 몰려왔다. 스티브는 본능적으로 발을 허우적거렸지만 처음부터 낮은 높이로 채워져 있어서 첨벙,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튀길 뿐이었다. 


 "아, 가만히 있어야지. 비누칠만 하면 되니까.. 응? 착하다."


 버둥거리는 스티브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토니가 속삭였다. 거기엔 숨길 수 없는 따뜻함이 녹아들어 있어서 그는 얌전히 발을 멈추고 섰다. Good boy. 칭찬하는 목소리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 스티브는 토니가 비누칠을 마치고 물을 끼얹을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 다 했다. 토니의 말이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그는 축축히 젖은 털을 말리기 위해 자연스레 온 몸을 힘껏 털었고, 바로 옆에 있던 토니가 고스란히 물벼락을 맞고 말았다. Hey! 꼬리까지 완벽하게 무아지경으로 털던 스티브는 토니의 짧은 외침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얼굴과 옷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짐짓 화난 얼굴을 한 토니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사람이 아니라, 개로서 무례하게 행동해버린 것도 문제였지만 토니를 물에 빠진 새앙쥐마냥 만들어버린 것에 미안함을 느낀 스티브는 주눅든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끙끙거렸다. 


'미안해, 스타크. 나도 모르게...'

"털고 나니까 좀 시원해? "


 곧 몰아칠 토니의 분노나, 비난 등을 생각하며 잔뜩 위축되어 있던 스티브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토니가 젖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넘기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화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휘유, 나도 샤워를 다시 해야겠는걸. 그 전에... 네 털부터 말리자. 사료같은건 없으니 오늘은 그냥 고기로 줄게. 자비스! 얘 품종이랑.. 최근에 비슷한 개 실종신고나 뭐 그런거 없었는지 알아보고, 목록 작성해."

[그 개는 골든 리트리버 종입니다. 뉴욕 근방에는 같은 품종의 실종 신고는 없군요.]


 물을 맞은 건 제 쪽인데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는 개를 보고 토니는 입맛이 썼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자비스의 말로 보아 주인이 아무렇게나 내다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젖은 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일단 샤워 가운을 주워입은 토니는 어리둥절해 있는 개를 안아다가 밖으로 나왔다. 혹시 겁을 먹을걸 대비해서 바로 옆에 앉히고 드라이기를 느릿하게 틀었다. 


"털 말릴 거니까 그대로 있어. 이거 무서운 거 아니야. 그냥 뭐, 뜨뜻한 바람이지."

"끄으응."

"뜨거워? 이 정도는 어때? 괜찮아?"


 제 손에 바람을 대어 온도를 몇 번이고 확인하는 토니를 보며 스티브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알던 그 토니 스타크가 이런 사람이었나? 제멋대로에, 틱틱거리고, 장난과 진심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남자가 아니고? 적당히 미지근하면서 따뜻한 바람과 조심스러운 손길이 털을 매만지며 말려주기 시작하자 그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처음 보는 개에게 보통 이렇게까지 잘 해주는 사람이란 드물 것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자신의 삶을 살기에도 바쁜 시대에는. 스티브는 눈을 천천히 끔벅이며 제법 열중하고 있는 토니를 힐끔거렸다. 잠이 오는군. 피곤하고 지친 몸은 배고픔을 호소하고는 있었으나 긴장이 풀렸는지 졸음이 먼저 쏟아져 왔다. 졸려? 토니의 말이 조금 멀게 들려온다. 식사 준비시킬 동안 나도 씻을 테니까 조금만 자. 다정한 목소리. 그는 앞발에 머리를 기대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토닥이는 손길에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든 개를 천천히 쓰다듬던 토니는 소파에서 살그머니 일어났다. 늦은 저녁과, 샤워, 약간의 일거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언제까지고 늑장을 부릴 순 없었다. 그 일거리엔 잠든 개도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앞으로 쟤를 어쩐다. 어차피 토니는 자유 재택근무라서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개를 보살펴줄 수 있었고, 기르는 비용도 전혀 문제되지 않을 것이었다. 어렸을 때 이후로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품에 달려들어 젖은 몸을 부비고, 애처롭게 울면서 올려다보던 푸른 눈동자를 떠올리자 토니는 급작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왜 하필 골든 리트리버여서는. 꼭 누가 생각나잖아. 토니는 투덜거리며 괜히 팔을 휘저었다. 한동안 진짜 주인이 나타나거나, 개가 떠나고 싶어한다면(그럴 지는 의문이지만) 보내줘야지. 그 전까지만 데리고 있을 거야.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토니는 욕실로 들어섰다. 밥 주면서 이름도 생각해야겠군. 쏴아- 시원한 물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by 치우타 2015. 7. 28. 22:33

 인생은 언제 어떤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다고 스티브는 늘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수퍼솔져 혈청의 수혜자가 되기 전까지는 몇 번이나 군 입대에 실패했으며, 제 의지를 따라주지 않는 병약한 몸에 슬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하이드라의 무기를 처리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바다에 돌진한 다음에도 살아남아서 70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보면, 반 강제적으로 세상만사에 어느 정도는 해탈하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스티브는 가지런히 모아져 있는 제 앞발을 바라보았다. 손이 아니라 '발' 이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센트럴 파크의 한적한 곳에서 산책하던 그는 갑작스레 덮쳐오는 고통을 느꼈고, 구조 요청을 할 새도 없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더랬다. 잠시 후 눈을 떠 보니 널브러진 옷가지들 위에 모로 누워있었다. 왠 옷이지? 하고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그게 자신의 것임을 알아본 스티브는 황급히 손을 움직였지만 시선에 들어온 것은 개의 앞발이었다. 깽! 심지어 입에서 나온 비명소리조차 개의 울음소리였다! 근처에 있던 호숫가에 달려가 얼굴을 비춰 보니- 거기엔 두려움에 사로잡힌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스티브는 한동안 충격으로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우선 옷가지를 보이지 않는 덤불에 숨겼다. 그는 산책하러나오면서 겨우 작은 수첩과 연필, 낡은 시계를 챙겼을 뿐이었지만 이런곳에서 엉뚱하게 옷이 발견될 경우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이 커질 수도 있었다(경찰이라거나). 그 다음엔 이렇게 된 원인과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무언가 계기라던지 배경이 있었을 터,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갑작스럽게 개로 변하는 일이 일어날 리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자면 도움이 필요한데. 스티브는 몇몇 동료들을 떠올렸다.

 

 처음 그는 샘을 생각했다. 버키 일로 가까워진 그는 믿을 만한 친구였고, 물심양면으로 스티브를 도와주려고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내가 스티브 로저스임을 알리는가' 였다. 지금 그는 개였다. 아무리 말을 하려고 노력해 봐도 그저 왕, 멍, 하는 개의 짖는 소리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뿐 소용이 없었다. 이어 떠오른 로마노프나 바튼(그는 농장에 가서 가족들과 지내는 중이다)도 논외였다. 배너 박사는 피지 섬에 있다고 했던가. 신 뉴욕지부는 여기에서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개의 몸으로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게다가 그 많은 인원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게 비효율적인 거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스티브는 문득 고개를 돌려 도심 쪽을 바라보았다. 크고 늠름한 어벤져스 타워가 마치 그가 봐주기를 기다렸다는 양 거기 서 있었다. 그는 거기에 상주하는 집주인을 떠올렸다. 토니 스타크. 미래 속에 사는 남자. 어쩌면 그가 스티브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설령 아니라고 해도, 지금 스티브에게는 선택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마음을 정한 스티브는 다시 한 번 옷을 감춘 덤불을 흘낏 바라보고는 타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센트럴 파크에서 어벤져스 타워에 가는 길은 보기보다 거리가 꽤 되었다. 개가 되어버린 바람에 더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가는 도중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거센 소나기마저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멋지군. 비로 인해 체온이 떨어지자 처음만큼 속도가 나질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 산책 나온 후 아무것도 먹질 못해서인지 점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수퍼 솔져는 개가 되면 수퍼 개는 아니라는 건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스티브는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멤버들이 이용하는 전용 입구가 보일 터였다. 젖은 털이 물 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어라? 왠 개지?"

 

 거의 흐느적거리면서 입구에 다다랐을 때, 특유의 울림이 있는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스티브는 지옥에서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색하며 뒤를 돌아보았고 거기엔 역시나 토니가 서 있었다. '스타크!' 그는 토니를 외쳐 불렀지만 멍! 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안녕.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아무나 들어오는 데가 아닌데. 응? 멍멍아."

 "멍, 멍멍!"

 "그리고 너 완전 쫄딱 젖었는데.. 우왓, 잠깐!"

 

 스티브는 무작정 토니에게 달려들었다. '스타크, 나 스티브 로저스야. 나 좀 도와줘. 그냥 산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렸어.' 폭포수처럼 쏟아낸 말은 지치고 서러운 마음이 듬뿍 담긴 낑낑거림으로 흘러나왔다. 토니는 왠 개가 비에 젖은 채로 타워 전용 출입구를 서성거리던 것도 모자라 그에게 달려들어 애처롭게 끙끙거리고 있는 걸 보고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주인을 찾거나 내보내야 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금빛 털을 가진 개는 토니의 옷이 온통 젖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부벼왔다. 버려진 개인가. 토니는 씁쓸한 얼굴로 개를 바라보다가 이내 품에 안아들었다(뭐가 이렇게 무거워? 깜짝 놀란 그는 허리에 힘을 줘야만 했다).

 

"일단 나랑 같이 올라가자. 너 목욕도 좀 하고.. 밥도 먹고. 나머진 다음에 생각하지 뭐."

"멍!"

"좋다고? 잘 됐네. 자비스, 최상층."

 

 토니는 개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개(스티브)는 얌전히 토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자신의 존재를 토니에게 증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지금은 두근거리는 토니의 심장 소리가 듣기 좋아 스티브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by 치우타 2015. 7. 28. 15:06

안녕하세요!!!

펑크라고 쓴 지 일주일 만에... 얇은 카피본 신간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ㅠㅠ

처음 구상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단편입니다만 괜찮으신 분들은 들러 주세요!

 

<Hooked on a Feeling>

부스위치 : 우4-b

A5, 16p, 중철본, 가격 2000원 예정 / 50부 출력

MCU 퀼x토니

어느날 갑자기 타워에 뚝 떨어진 퀼과 토니의 이야기. 해피엔딩.

 

*샘플 - 바로 이어지는 내용은 아닙니다.

 

 

 

부스 위치는 이쪽입니다 :) 내일 행사장에서 뵈어요!!!!

 

 

by 치우타 2015. 7. 24. 09:25

 우주를 구한 영웅에게도 휴식은 필요하지. 셰퍼드는 부상에서 회복되자마자 약간의 휴가를 얻었다. 하루 내내 병상을 지키던 케이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해켓 제독이 직접 방문해서 그의 상태를 체크하더니, 2주 정도 마음대로 쉬고 와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너무 늦진 말라는 당부도 짧게 붙인 제독은 무심한 걸음으로 금방 사라져 버렸다. 케이든이 마실 걸 사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셰퍼드는 멍한 얼굴로 병실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셰퍼드? 왜 그래요?"

 "아, 어... 해켓 제독이 왔다 갔어."

 "제독님께서..? 무슨 일로요."


 조건반사적으로 얼굴을 굳히며 자세까지 바로 하는 케이든의 모습에 그제야 셰퍼드는 피식 웃었다. 


 "별 거 아냐. 곧 퇴원이라고 했더니 2주 정도 마음대로 쉬고 오라더군."

 "....음, 그거 휴가라는 뜻이죠?"

 "그렇지. 포상 휴가치고는 너무 짧지만."

 "이거 시타델 카운슬에도 알려야 되는 걸까요?"

 "그건 걱정 말라던데."


 셰퍼드는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해켓 제독에게는 곧 퇴원이라는 말만 했지만 사실 내일 오전이면 여기를 나갈 계획이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게 체질에 안 맞기도 했지만 워낙 케이든이 엄격하게 그의 상태를 관리한 덕분에 평소보다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셰퍼드는 몇 번 투덜거렸지만 그럴 때마다 케이든의 '커맨더' 라는 부름에 두 손을 들며 항복을 표시했다. 


 "여기도 오늘이 마지막이군. 왠지-"

 "섭섭하다고 하시면 화낼 겁니다."

 "....나 모르는 새에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요즘 좀 무서운데."


 아니면 당신이 알기 쉬운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죠. 케이든이 부러 침대 시트를 팡팡 털었고 셰퍼드는 재채기를 하지 않기 위해 잽싸게 손으로 코를 쥐었다. 우주와는 달리 지구의 군 병원은, 그것도 셰퍼드가 묵고 있는 병실은 특 VIP급 같은 것으로 상당히 넓고 조용했으며 조금 쓸데없이 호화로웠다. 그래서 침대 또한 우주의 시설들처럼 딱딱한 철제가 아니라 최고급 매트리스에 시트, 푹신한 베개 등을 갖추고 있었다. 케이든이 잠을 청한 간병인용 (방문자용) 침대도 싱글베드 급이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으리라. 


 슬슬 잘 시간이 다가오자(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환자니까 빨리 자요, 라고 케이든이 엄하게 말했다) 셰퍼드는 갑자기 안절부절한 모습을 보였다. 케이든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는 것 같았다. 답지 않게 왜 저러시지. 케이든은 모르는 척 정리된 침대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고 했다. 셰퍼드가 그의 팔목을 낚아채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왜 그래요?"

 "오늘은 여기서 같이 자자."

 "여기?"

 "내 침대."


 셰퍼드가 다른 손으로 옆자리를 토닥였다. 아까도 말했듯이 침대는 쓸데없이 고급이었기 때문에 성인 남자 두명이 누워도 충분히 공간이 남을 정도로 컸다. 그것과 별개로 케이든은 입을 벌리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왜 그래? 뭐가 문제야? 셰퍼드는 아주 태연한 얼굴이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죠?"

 "병원이지."

 "군 병원입니다."

 "뭐.. 그렇지. 그래서?"

 "그래서, 라뇨! 군 병원에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케이든은 얼굴을 붉히며 뒷말을 얼버무렸다. 젠장. 말을 꺼낸건 저 사람인데 왜 내가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지? 정작 셰퍼드는 도대체 그게 왜 문제냐는 식으로 말을 던져왔다.


 "별로 다른 생각 한 거 없어. 그냥 같이... 잠깐, 설마. 오, 알렌코."

 "좋은 말 할때 거기서 멈추시죠."

 "내가 물론 종종 생각없이 키스하거나 포옹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병원 침대에서 섹스하자고 달려들진 않아."

 "그런 생각 한 거 아닙니다."


 귀까지 빨개졌으면서. 셰퍼드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대신 케이든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인데 하루 쯤 같이 자도 되잖아. 간호사들이 들릴 일도 없을 거야. 셰퍼드는 조근조근 논리적으로 그를 설득했고 케이든은 그게 어디까지나 들키지 않았을 경우에나 해당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그 말에 넘어갈 것을 알았다. 알았으니까 옆으로 좀 가요. 케이든은 괜히 셰퍼드를 밀면서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셰퍼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소리 죽여 웃으며 시트를 높게 들어주었다. 이윽고, 병실의 불이 꺼졌다.


 잘 자. 잘 자요, 셰퍼드.


 마주 안은 체온이 따스했다.

by 치우타 2015. 7. 20. 21:47

 나무 판자가 발걸음에 따라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스티브는 문득 마법 같은걸로 발소리를 죽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부질없는 소망이라는 것을 알고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차피 눈치챌 거라면 입구에서부터 그 낌새를 느꼈을 터. 스티브는 허리에 찬 무기와 집 안의 구조를 차분하게 되새기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다. 풋내기 헌터로 시작했던 스티브가 5년이 넘도록 쫓아왔던 뱀파이어 일족의 수장- 군주의 자리에 있는 자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헌터 협회에 이 사실을 알리고 추가적인 지원을 받아야 했지만 스티브는 누구에게도 이 정보를 흘리지 않고 혼자 움직였다. 닉이 알면 인상을 쓰면서 규칙에 대해 하루 종일 읊어대겠지. 콜슨도 곤란한 얼굴로 그에게 주어질 벌칙에 대해 설명할 거고. 스티브는 특별히 제작된 총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가는 언제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곳에 와 있건만, 뇌는 제멋대로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슬슬 집 안쪽에 다 들어왔는데. 


 "늦었네, 스티비. 나 오래 기다렸어."


 귓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스티브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지는 그를 보며 갑자기 나타난 인영이 짧게 혀를 찼다.


 "조심해. 이 집은 낡아서 언제 부서질 지 모른다고.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네 피에서는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난단 말이야. 어둠 속에서 남자가 낮게 웃었다. 스티브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총을 겨누었다. 방심했다. 언제든 원하는 곳에서 나타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잊어버린 것도 아니건만, 평소보다 더 헐렁한 마음가짐으로 와 버리다니. 전부 저 남자 때문이었다. 스티브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나타나는 게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하나?"

 "오, 뱀파이어에게 지금 도리를 논하는 거야? 스티비. 귀엽기는."

 "귀엽다고 하지 마."

 "그럼 섹시하다는 건 어때?"

 "토니!"


 아, 드디어 이름을 불러 주는군. 토니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스티브의 총이 정확하게 심장을 겨누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태도에 오히려 스티브가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스티비, 난 너를 해치지 않아. 알고 있잖아."

 "내가 널 죽일 거라고 해도?"


 토니가 다시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그는 일부러 달빛이 비추는 곳으로 움직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금방이라도 어둠 속에 녹아들 것만 같은 검은색의 연미복, 갈색의 머리칼과 반짝이는 그린 헤이즐넛 눈동자. 창백한 피부는 달빛에 반사되어 오히려 생기가 있어 보였다. 스티브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금방이라도 쏠 것처럼 총에 손가락을 걸었다. 토니의 눈이 아주 잠깐이지만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영생을 살아본 적이 있어?"

 ".........."

 "스티브, 5백년 정도를 살다 보면... 누군가 내 목숨을 끝장내는 상상을 하게 되거든. 물론 당시엔 우리 일족이 워낙 개판이라서 그런 생각은 꿈도 못 꿨지만, 어쨌거나. 지저분한 일도 처리했고 인간을 죽이는 놈들도 다 잡아다 처형한 지금은.. 난 당장에라도 죽고 싶어."


 특히 너처럼 섹시하고 잘 생긴 헌터가 그렇게 해준다면 금상첨화겠지. 토니가 다시 웃었다. 


 "오늘은 사냥의 밤, 만월이지. 십년 전부터 내 후계자도 정해 뒀고, 걔도 나처럼 사람 죽여가며 피 마시는거 싫어하는 애라 괜찮을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사정없이 은 탄환을 쏴도 좋아. 스티브. 속삭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달콤해서,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더 확실하려면 나무로 심장에 말뚝을 박아야 하겠지만.. 너무 끔찍하겠지? 토니는 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 물건의 실체에 놀란 것은 스티브 쪽이었다.


 "넌 착하니까, 이건 내가 직접 할게.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돼."


 바로 여기에. 토니는 총구를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스티브는 흠칫하며 고리에서 손가락을 뺐지만 총을 완전히 치우지는 않았다. 상대는 뱀파이어 군주였다. 가장 오래되고, 순혈 중에서도 당해낼 자가 없으며, 사람을 죽이지 않는- 별종 뱀파이어. 스티브는 가만히 토니를 내려다보았다. 토니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생의 끝을 말하며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감히 내 앞에서. 나에게. 스티브는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싫어."

 "스티브?"

 "당신이, 날 살려냈잖아. 당신이 나를 키웠잖아. 날 헌터로 만들었잖아! 그래놓고 이젠 죽이라고? 아무런 설명도, 말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으면서! 사랑한다고 했잖아. 내 옆에 있을 거라고 했잖아!"

 ".....스티브..."


 총을 아무렇게나 구석에 집어던진 스티브는 눈 앞의 토니를 품에 억지로 잡아당겨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어차피 이 정도로는 아픔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정작 토니는 미약하게 신음소리를 냈지만 스티브의 팔에 더 힘이 들어가게 했을 뿐이었다. 


 내가 당신을 사냥했으니까, 이제 나한테 줘. 죽을 거라면 그 목숨은 내 거야. 


 토니의 목줄기에 자신의 피가 든 주사기를 꽂아 넣으며 스티브가 속삭였다. 송곳니를 통해 마시는 피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혈관에 파고 들어오는 피냄새에 토니가 짧게 고통어린 목소리를 냈다. 스티브, 스티브. 애처로운 부름이 몇 번 이어지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스티브는 품 안에 늘어진 몸을 고쳐 안았다. 그들에게 남겨진 밤은 아주 길었다.


by 치우타 2015. 7. 18.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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