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티엘은 늘 갑작스럽게 나타났다가 말없이 사라졌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절대로 변하지 않았던 한 가지. 아니, 거기에 복장을 포함시키면 두 가지일까. 하나뿐인 친동생, 샘 윈체스터와는 다른 유대로 이어져 있던 그와 조금 더 '특별' 한 사이가 된 다음에도 그 점에 있어서는 딱히 변화가 없었다. 아주 가끔씩 혼자 있는 게 영 싫을 때 -그렇다고 샘과 같이 있길 원하는 건 아니었다- 옆에 있어주는 걸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리고 그 날도 카스티엘은 아무런 예고 없이 딘의 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딘."

"...제발, 캐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날개 퍼덕이는 소리라도 내면서 와. 애 떨어지겠다고!"

"애가 떨어진다니? 임신이라도 했나, 딘?"

"뭔 헛소리야!! 그럴리가 없잖아! 이건 비유적 표현이야."

"비유...? 무슨?"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을 얼굴 가득 띄우면서도 뚫어져라 눈을 마주쳐오는 천사를 보고 딘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지식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주제에, 비유적인 어구나 문장에는 터무니없이 약하다. 그야 천사니까 당연하겠지만. 그럼 대체 그건 어떻게... 딘은 생각을 넓혀나가려다가 그만두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쩐지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놈의 머리는 이럴 때만 풀가동으로 영상을 재생해버리는 탓이었다. 망할 뇌세포!


"...됐고. 무슨일인데?"

"이걸."


카스티엘이 팔을 들어 딘의 머리에 무언가를 씌웠다. 딘은 눈썹을 찌푸리며 슬그머니 머리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부드럽고 얇은 천이 만져졌다. 왠지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재빨리 잡아당겨보자, 이게 왠걸. 시스루처럼 약간 투명하게 비치는 흰색의 천이 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어디선가 비슷한 물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하고 딘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카스티엘이 재빨리 딘의 손에서 천을 낚아채어 머리에 다시 얌전하게 씌웠다.


"어이, 캐스! 이게 뭐하는 거야?"

"잠깐만 그대로."


카스티엘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미술작품이라도 감상하듯이 딘의 모습을 천천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거 면사포야? 엉? 딘은 소리 높여서 말을 뱉으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입 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팔을 움직여 천이라도 끌어내리려는 시도를 했으나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빌어먹을, 캐스! 뭐하자는 거야!! 딘은 있는 힘껏 눈앞의 천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카스티엘은 딘의 화난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면서 부드럽게 미소지었고, 그 웃음에 딘은 잠시 멍한 표정을 해보였다가, 이내 재차 눈살을 찌푸렸다.


"캐스! 너 정말 뭐하자는....!"


그대로 카스티엘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하자 눌려있던 말이 급하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적인 해방에 딘이 어리둥절해져서 입술을 뻐끔거렸고, 카스티엘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딘을 끌어안고 입술을 겹쳤다. 갑작스레 덮쳐온 따스한 입맞춤에 딘은 무의식적으로 반항했지만 다정하게 감싸온 팔에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해보는 것 같아.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입술이 조금 멀어졌다.


"딘."

".....뭐."

"사랑한다."

"?!!?!!?!?!?"


딘이 카스티엘의 고백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는 3초가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의 천사가 무슨 말을 속삭였는지 완벽하게 알아챈 딘의 얼굴이란, 그야말로- 볼만했다.


"너,너..너너,너너너.. 너...너어!!"

"얼굴이 새빨개졌다, 딘. 목덜미까지 같은 색이 되었는데.. 괜찮은가?"

"!#$%#!%&!!!!! 시끄러워! 닥쳐!!! 저리 가!! 보지 마!!!!!!"

"딘?"

"저리 꺼지라니까!!"


딘은 잔뜩 화를 내며 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고 카스티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멀뚱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끄럽다고 항의하러 온 옆방사람이 오갈 데 없었던 딘의 화풀이를 다 뒤집어썼다는 것과, 조사를 마치고 늦게 귀가한 샘이 면사포 비슷한 걸 쓰고 있는 딘을 보곤 주저앉아서 웃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는 건 그 후의 이야기.

by 치우타 2011. 7. 28. 00:55

 

전장의 한복판에 그는 서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은 훨씬 더 빨리, 간단하게 정리되었다. 이렇게나 쉬운 일을 그동안 미루고 있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도덕적인 기준에 의한 망설임과 약간의 자비. 그것만이 결정의 걸림돌이었다. 권능과 힘에 의한 굴복. 무력행사.

평정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지옥은 영영 닫히고, 지구는 한차례 시련을 겪었다. 인류의 숫자가 좀 줄어들었고 자연의 파괴는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죽이고 전쟁을 치렀다.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으로 불러온 희생과 피는 그들을 비로소 눈뜨게 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정화'되었다. 모든 것이 운명의 나침반대로 흘러갔다. 이제 남은 건 딱 한 가지뿐이다.


"딘."


 그는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던 사랑스러운 존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깊은 심연이 자리하고 있던 녹색 눈동자에는 한 점의 티끌조차 보이지 않았다. 늘 희노애락을 강하게 표현하던 얼굴에는 어딘가 편안한 듯 무심한 듯, 희미한 미소만이 입가에 걸려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얌전히 자신의 손을 얹어온다.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품에 안는다.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이 고개를 부벼오는 행동에 그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달콤한 시간. 살짝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다 끝났다. 너를, 아니... 우리를 위협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천천히 뺨을 쓸어내린다. 손길에 가만히 기대오는 모습이 애처롭고, 사랑스럽다. 갈 곳을 잃은 새끼고양이처럼 가만히 응시해오는 그 눈동자에 왠지 모를 가학심이 고개를 든다. 쓰다듬던 손을 내려 목에 가져간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손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점점 죄어드는 손에 숨이 막혀옴에도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호흡이 가빠지고, 신음이 갈라지고, 입술이 바싹 말라도 그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왠지 가엾어져서 그만두자, 몇 번 콜록대며 기침을 하더니 휘청거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재빨리 꽉 껴안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살아있다. 여기에, 내 옆에. 숨을 쉬고 있다.

갑자기 격한 안도감이 덮쳐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짧게 입맞춤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전에 네가 말하던 음악을 찾았다."


품에 끌어안다시피 해서 함께 걸었다. 부서지고 무너져서 형태를 찾기 힘든 집들 사이로, 축음기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입술에서 말이 흘러나온다.


"듣고 싶어."

"얼마든지, 딘."


품에서 잠시 놓아주었더니 축음기에 직접 판을 놓고 바늘을 맞춘다. 능숙한 손동작에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의 영상이 머리를 헤집고 지나간다. 총을 만지던 손가락. 칼을 던지던 그 손가락. 어떤 상황에서든지 아름답던 그 손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피 냄새에서 해방되었다. 그 사실이 기뻐서 가만히 등을 끌어안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딘. 사랑스러운 딘.

바늘이 자리를 찾더니 이윽고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Non, Rien de rien  아무것도 아니에요

Non, Je ne regrette rien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Ni le bien qu'on m'a fait   사람들이 내게 줬던 행복이건 불행이건 간에.

Ni le mal tout ca m'est bien egal  그건 모두 나완 상관없어요.

Non, Rien de rien  아무것도 아니에요

Non, Je ne regrette rien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Car ma vie, car mes joies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Aujourd'hui, ca commence avec toi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딘은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카스티엘도 따라 미소지었다.

여기는 낙원.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by 치우타 2011. 7. 28. 00:54

 

"바다에 가자."



그 제안은 너무나 갑작스럽고도 낯선 것이라, 카스티엘은 고개를 갸웃하며 딘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에 순수한 의문이 서리는 걸 보고 딘은 생각했다. 언제든 변하지 않는구만. 하지만 그 점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죽어도 자기 입으로는 말 못하겠지만.



"그냥. 가고 싶어서."

"어디의 바다가 좋은가? 딘."

"조용한 모래사장이 있는 곳이라면 상관없어."



카스티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딘의 이마에 손을 뻗으려다가 잠시 주춤했다. 그 동작에 오히려 놀란 것은 딘이었다. "워, 캐스. 갑자기 왜 그래?"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듯 말을 던져오는 딘에게 카스티엘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뭐야?" "전에 그렇게 이동했을 때 네가 싫어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게 뭔데?" "손을, 딘." 잡아주기를 기다리며 내밀어진 오른손을 조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며 조심조심 딘이 손을 얹었다. 잠깐 주위가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둘은 슬슬 해가 넘어가는 바닷가에 서 있었다.



"..와우."

"어떤가? 전에 비해서..."

"흠. 어지럽거나 하진 않네."

"그렇다니 다행이다."



둘의 손은 아직 이어져 있었다. 그걸 먼저 자각한 것은 늘 그렇듯이 딘 쪽이었고, 목까지 시뻘개져서 황급히 털어내듯이 놓은 것도 딘이었다. 그 순간 카스티엘의 눈에 언뜻 아쉬움의 빛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딘은 그의 푸른 눈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언제나의 고요하고 맑은 눈이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기분 탓인가. 딘은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그에게서 등을 돌려 성큼성큼 바닷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딘 본인은 쑥스러움을 꽤 잘 감추었다고 생각했겠지만 뒤에서 카스티엘은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딘이 앞장서고, 카스티엘은 그 뒤를 따랐다. 둘의 발자국은 점점이 모래사장 위로 이어지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이런 풍경을 보는 게 대체 얼마만이더라. 모르긴 몰라도 아주 먼 옛날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언제나 쫓고 쫓기는 생활을 이어왔던 탓에 주변이 어떻게 생겼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딘은 씁쓸하게 웃으며 조금 발걸음을 늦추었다.



"이봐, 캐스. 오늘따라 너도 말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농담조로 말하며 뒤를 돌아본 딘은 눈을 조금 커다랗게 떴다. 카스티엘이 파도에 휩쓸려 지워지려는 자신의 발자국 위를 그대로 밟아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어떤 자그마한 것을 대하듯이 발자국을 되밟는 그의 모습에 이번엔 딘 쪽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하는 거야? 강박증이라도 있어?"

"...아니. 어쩐지 너의 흔적이 사라져가는 게... 아쉬워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딘은 순간적으로 뜨거운 것이 목까지 확 치받아오는 걸 느끼고 세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신 차려, 딘 윈체스터.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는 입장이 아니잖아. 네가 가져도 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마음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었다. 이대로는 멋대로 마음속의 감정들이 흘러넘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딘은 황급히 등을 돌렸다.



"딘?"

"나 배고픈데."

".....알았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나온다. Damn it! 딘은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 옆으로 카스티엘이 가만히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전해져오는 온기에 기껏 참아냈던 눈물이 왈칵 다시 차오르는 걸 느끼고 반대쪽 손을 아프도록 꽉 쥐었다. 하지만 이미 뺨으로 흘러내린 한 줄기의 눈물방울은 그도 어쩌지 못했다. 카스티엘은 그걸 못 본 척하며 그대로 딘을 끌어안았다. 캐스의 트렌치코트에서는 햇살과 바람의 내음이 났다.


딘은 두 눈을 꽉 감으며,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버린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다는 넓다. 바다는 고요하다. 바다는 잠잠하다. 바다는 잔혹하다. 바다는......다정하다.

하나의 사물에, 아니, 자연에 이토록 여러 가지의 수식이 붙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느끼며 카스티엘은 칠흑처럼 어두워진 밤바다를 응시했다.

아까 보았던 딘의 발자국이 떠오른다. 파도에 아슬아슬하게 지워지려던 그 발자국. 마치 위태로운 그 자신을 나타내는 것 같아서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안타까운 감정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딘. 너는 이 세상을 견디지 못하겠지. 그리고 세상은 그런 널 삼켜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 전에.

내가 세상을 손에 넣어 보이겠다.

by 치우타 2011. 7. 28. 00:53

 

"Damn it..... yes, Michael. yes."


딘의 목소리에는 체념과 분노, 실망,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불쌍하게도, 인간들 중에서는 그나마 봐줄만한 영혼을 가지고 있던 딘 윈체스터는 거의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기사 지옥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꽤나 오래 버티긴 했다. 종말을 시작한 자로서 얼마나 오랫동안 발버둥쳐 왔는지. 헛된 노력을 하고 거기에 절망했는지. 또한, 얼마나 자신들의 아버지에게 간절히 빌었는지.

미카엘은 아주 잠깐 동안 딘을 연민하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 초록색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라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Rest in peace, Dean. you did your level best to please your family."



딘의 몸은 편안했다. 그렇게 상처 입은 얼굴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딘은 쓸 만한 그릇이었다. 가만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살이 점점 더워지는 여름을 알리고 있다. 천국에서 봤던 것과는 어쩐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에 공원이 있는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시선을 돌리자 낡은 나무벤치가 보였다. 뭔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발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티 없이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들과, 동물, 그리고 자연.

이 모든 것은 아버지가 창조한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지상이 만들어지고, 동물과 자연이 완성되고, 인간이 탄생했다. 흙으로 빚어진 저 덧없고 비천한 생명체들을 아버지는 아낌없이 사랑했으며 그것은 그의 아들을 희생시켜 원죄를 대신 갚게 할 정도였다.


사람의 아들, 천주성부의 오른편에 앉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도둑과 나란히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었다. 인간의 파렴치함과 어리석음에는 진저리가 났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고 또한 그걸 이루는 것도 그리스도의 뜻이었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루시퍼는 반기를 들었고, 용서받지 못했고, 지옥으로 떨어졌다.


-어리석고 어리석구나. 동생아. 아버지의 뜻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것이다.

-누가 더 멍청한지는 나중에 보면 알게 될 거야. 형.


그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추락할 때 들었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미카엘은 그걸 털어내듯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난 걸까.

이런 감성적인 것은 천사에게 불필요한 것이다. 어떤 의심 없이 그분의 뜻에 따르는 것. 오직 그것만이 옳은 일이고 바른 일임을 자신은 안다. 감정은 항명에의 지름길이다. 그걸 천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문득 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총과 칼을 잡아온 손에는 자잘한 상흔이 있었다.

딘 윈체스터의 손. 딘 윈체스터의 몸. 딘 윈체스터의 눈으로 바라보는 풍경. 낯설지만 안락한 느낌. 아아, 그래. 이건 딘의 마음인건가. 그제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하나뿐인 동생을 누구보다도 아끼던 그 마음은 자신과 비슷했기에 더 감정이 잘 전달되었는지도 모른다.


딘이 샘을 키웠듯이 미카엘도 루시퍼를 키웠다. 그에게 천사로서의 모든 것을 가르친 것도, 누구보다도 빛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한 것도 자신이었다. 존이 샘을 아꼈던 것처럼 아버지도 루시퍼를 아꼈다. 지독할 정도로 닮은 인간과 천사 형제라니. 정해진 운명이라는 건 이토록 비참하고, 아름답고, 잔인하다.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공원으로 오던 길에 발견한 성당이 갑자기 눈에 밟힌다. 구경이나 하러 갈까.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사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따라 성령의 힘으로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이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로 모든 죄와 온갖 악에서 저를 구하소서."


성당 안에서는 한창 영성체 예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평일 저녁미사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좌석을 메우고 있는 것에 솔직히 말해서 좀 놀라고 말았다. 종말이 가까워졌음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원래 하느님의 어린 양인 그들은 늘 신실하게 이 자리를 지켜왔던 걸까. 어느 쪽이건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겠지만.

게다가 의외로 딘의 몸은 성당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평소에 해온 언행으로 보아 절대 선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것 또한 의외였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영성체송이 이어지고 사제가 제단에서 내려와 손에 성체를 들었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나와 성체를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하는 곡은, 이것 또한 재미있게도 미카엘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그는 가만히 맨 뒷좌석의 끝부분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Panis angelicus fit panis hominum

천사의 양식이 인간의 양식이 되며

Dat panis caeltcus figuris terminum

천상 양식은 상징에 종지부를 긋는도다

O res mirabilis manducat Dominum

오 기묘한 일이여,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주님을 먹는도다

 

by 치우타 2011. 7. 28. 00:52

 

딘이 그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그건 단지 허울 좋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종말이 시작되던 그 순간부터 자신에게 선택권이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재커라이어의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분명 이걸 달가워할 사람은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딘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나뿐인 동생 샘과, 바비.

그리고.. 카스티엘.


- 난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어. 전부 널 위해서였다. 그런데 넌 고작 이런 걸 나한테 주는거냐, 딘?


그의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용서 없이 휘둘러오던 주먹과, 발길질과, 그 와중에도 피할 수 없었던 푸른 눈동자. 차라리 그대로 그 손에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딘은 피하지도 않았고 저항하지도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무기력했고 허무에 젖어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남아있는 것도 없고, 지키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의 용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서 하루하루를 기계적으로 보냈다. 더 이상은 숨을 쉬는 행위도 힘에 겨워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뭐, 솔직히 말해서 천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종말이 그렇게 간단히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이 그렇다는 거겠지. 천사와 악마가 서로 치고 박느라 지구는 꽤 망가질 게 틀림없었고, 자신이 승낙해버리면 샘이 루시퍼에게 어떤 대답을 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바라던 그대로, 천사들의 그것처럼 형제의 대결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아.

미안하다, 샘. 죄송하게 생각해요, 바비 아저씨. 지금까지 정말 감사했어요.



"그래서, 딘. 대답은?"

"...그 전에 조건이 있어."

"전에 이야기한 것 말고도 다른 게 있나? 말해봐. 들어주지."

"샘과 바비가 전쟁에 휩쓸리지 않는 것, 그리고 캐스..아니, 카스티엘의 안전을 보장해줘."


잠시 다른 그릇을 빌려 나타난 미카엘이 그 말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찮은 인간인 내가 천사를 걱정하는 게 그렇게 우스운가? 딘은 무의식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 얼굴이니 분명...


"카스티엘을? 어째서지?"

"그런 건 상관없잖아."

"흠.... 어차피 그는 우리의 형제. 해를 가할 생각은 없다. 좋아, 전부 들어주지."


정말 약속을 지켜줄지 어떨지는 의문이었지만 지금의 딘으로서는 그저 믿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엎으려고 하면 반항할 수 있을까? 터무니없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던 그에게 미카엘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자, 딘. 이번엔 네 차례야."


딘은 잠시 눈앞의 천사와 시선을 마주하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되기 전에 실은 한 번 더, 캐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또 길길이 날뛰면서 얻어맞고 갇히기나 하겠지. 이상하게도 그를 속이는 건 너무 힘들었다. 오히려 샘하고 바비는 쉬웠는데.

깊고 푸른 눈과 트렌치코트가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딘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Yes."


미안해, 캐스.

.....I loved you.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순간, 눈부신 빛이 딘을 삼켰다.



***

카스티엘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는 쪽이 더 정확할까. 식당 안은 얼핏 보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단정하게 놓인 테이블과 식탁, 맛있는 음식 냄새,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거기에서 딱 한 가지 괴이한 것이 있다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악마들을 밟고 서 있는 한 청년이었다.


".....딘..?"


목소리가 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마음속으로 강하게 부정해본다. 카스티엘은 절박한 심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릴 때보다 더 절박하고, 더욱 간절한 마음이었다. 부디 온전히 그이기를. 나의 주님이시여. 제발.

청년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안녕, 카스티엘."


그리고 카스티엘은 절망했다.




딘 윈체스터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정장을 차려입고 흰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조용히 웃는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수많은 감정이 섞여서 때론 흔들리고, 눈물에 젖기도 하고, 장난꾸러기처럼 빛났던 초록색 눈동자는 그저 무감각하게 가라앉아 있다. 약간 과장된- 가끔은 격정적이고 강한 어조로 말을 자아내던 목소리는 차분하고 고요하다.

여기에 있는 것은 오직, 천상의 군대를 이끄는 대천사장 미카엘.


카스티엘은 도무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느 때고 냉철하던 그 이성조차 온데간데없이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시도했다. 미카엘에게서 딘을 이끌어내는 것을.

임팔라를 가져오거나, 그의 눈동자를 보며 호소하고, 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나간 일들에 대해 추억해보기도 했다. 함께 나누었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도 전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무엇을 하건, 딘의 모습을 한 미카엘은 이렇다 할 반응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카스티엘은 최후의 수단으로 그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딘을 돌려달라고, 그를 돌아오게 해 달라고. 처절하게 빌었다. 존경하는 그의 형제이자 군대의 수장에게 애원했다.


"Oh, Cas..."


이윽고 미카엘의 입술이 열렸다. 그는 애처롭다는 시선으로 자신의 형제인 카스티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연민이 가득했다.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딘의 음색에 카스티엘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Just give up, and forget about Dean. He...is already within me. Now, this is the only 'vessel'."

"No...."

"Yes, Cas. and you must have to face up to the fact that he would never come back again." (너는 그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인정해야만 해.)


딘의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인정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무너져 내리는 카스티엘을 초록색 눈동자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카엘."

"아, 라파엘. 그쪽 상황은?"

"거의 다 정리되었습니다. 아스타로트와 베알제붑이 남아있긴 합니다만."

"루시는 어때? 아직도 거기에 있나?"

"그런 것 같습니다."

"흠. 샘 윈체스터... 생각보다 끈질기군. 그럼 갈까."


카스티엘은 멍하니 자리에 홀로 남겨진 채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딘- 아니, 미카엘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제발. 지금까지의 제 기도를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딘 윈체스터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걸 위해서라면 제 영혼도 능력도 아깝지 않습니다. 제발, 제발. 이렇게 애원합니다. 당신 앞에 엎드려 빕니다.

그를 돌려주십시오.


"딘, 딘, 딘....."


흐느낌이 섞인 낮은 목소리는 언제까지고 하나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by 치우타 2011. 7. 28. 00:48

 

Monday. 한 주의 시작이자 평범한 직장인들이 힘겨워하는 날.

일찍 일어나는 것은 언제든지 힘들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침대에서 한 번 더 뒤척였다.

막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도 아니고 왜 그렇게 아침형(아무리 생각해도 침대형 인간) 이냐는 샘의 놀림에 매일같이 으르렁대는 건 이미 일상.

아직도 졸음이 가시지 않는 눈을 부비며 한 차례 하품을 크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아침이 시작된다.


Tuesday. 사랑스러운 임팔라의 운전석에 앉아 느긋하게 풍경을 내다보는 걸 정말 좋아하지만, 세상은 그런 휴식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사건을 일으킨다.

헌터로서 살아온 삶이니 평범한 사람들처럼 사는 건 이제 무리라고는 해도 자유 시간 정도는 갖고 싶었다.

옆에 앉은 샘은 말없이 사건의 자료들을 훑어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어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눈치는 더럽게 없는 녀석 같으니.


Wednesday. 이번 일은 캐스의 도움을 받는 게 어떠냐는 샘의 제안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처리했다가 조금 다쳤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샘과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 바비.

젠장, 내가 어린애냐고?! 이 정도는 혼자서 거뜬한데! 좀 긁힌 거 가지고 애취급이나 받다니....!!

문명의 이기를 배운 캐스는 이제 핸드폰으로 통화도 할 수 있다. 에노키안 술법으로 예전만큼 쉽게 탐지할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하고, 좀 쓸모가 있어서 샀다나.

괜시리 번호를 눌렀다가 지우고, 눌렀다가 지우고를 반복하다가 침대에 폰을 던져버렸다.

사실은, 아주 조금 그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듣고 싶다. 아주 조금.


Thursday. 라디오를 틀어놓았는데 모든 방송이 끝나고 지직거리는 음이 들릴 때까지 멍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처음엔 시간도 늦었으니까 잠 잘 오는 클래식이라도 들을까 하는 생각에 켰지만 그럴수록 머리는 더 맑아질 뿐, 효과는 제로였다.

삐이- 하는 기계음을 듣고 있으려니 문득 재커라이어한테 끌려가서 천국에 올라갔던 때가 생각났다.

임팔라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캐스의 목소리. 그러고 보니 지옥에서 올라왔을 때엔 째지는 고주파로 말을 걸었더랬지....

괜히 웃음이 나왔다. 높은 목소리의 캐스라니, 상상만 해도 웃기다.


Friday. 이 망할 놈의 일기예보는 도대체 맞추는 것보다 빗나갈 확률이 더 높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비가 온다는 소리에 푹 자고 일어났더니 이게 왠걸.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다 아주.

덕분에 샘하고 바비한테서 잔소리만 실컷 들었다. 바비는 그렇다 치고 어이 샘. 나 이틀 동안 운전했거든? 헌팅했거든?? 이걸 콱 그냥.

이미 중천에 뜬 햇살 아래에서 멍하니 하늘을 보니 시원한 푸른색이 반긴다. 에라 오늘은 조사 땡땡이쳐야지.

왜냐면, 날씨가 너무 좋으니까.


Saturday. 캐스가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만나러 왔다. 소란스러웠던 천국도 이제 좀 가라앉은 모양이다.

여전히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깊은 푸른색의 눈이 평소보다 조금 더 반짝이는 걸 보니 상황이 나아지긴 한 것 같다.

공적인 말을 다 끝내고는 뭔가 말하고 싶은 얼굴로 계속 이쪽을 바라보길래,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렇게 뜸들이지 말고 해버리라고, 캐스.]

나도 모르게 가시 돋친 말을 던지고 만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날아가 버렸다. Stupid jerk! 그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사라지기 전에 보았던, 조금 쓸쓸해 보이는 표정이 자꾸만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실은 난 요즘 네가 할 일 없이도 불쑥불쑥 나타나던 그때가 그리워. 캐스.


Sunday. 가만히 공원 벤치에 앉아 석양을 바라본다.

해는 매일같이 뜨고 지건만 이상하게도, 이렇게 붉은 빛이 저 너머로 스러지는 광경은 볼 때마다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사내자식이 다 커서 계집애처럼 감상적인 생각이나 한다고 다들 비난하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운 듯하면서도, 안타까운 느낌. 그것은 한 때 누렸던 어린 시절의 눈부셨던 기억과 그 위에 덧입혀진 상처들이 한 데 뒤엉키는 기분과도 닮아있었다.


"딘."

"...우와악!!! 아, 쫌! 그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 캐스!"

"아. 미안하다. 그만 습관적으로.."


기척도 없이 어느새 옆에 날아와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그만 벤치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제발. 이런 식으로 가다간 안 그래도 길지 않을 것 같은 내 명줄이 더 짧아질 거라고...

작게 투덜거리면서 노려보자 캐스는 슬쩍 웃으며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어왔다. 이거 봐라. 또 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지.

평소 같으면 톡 쏘아주었겠지만 이런 시간은 오랜만이니까. 너그럽고 관대한 내가 봐준다.


"뭐 하고 있었나?"

"그냥. 석양 보고 있었어."

"거의 다 넘어갔군... 곧 어두워진다."

"알아."

"저녁은?"

"배고프다 못해 굶주린 상태지."


어린애마냥 투정부리는 말투가 되어버려서인지, 캐스가 기분 좋은 듯이 웃었다. 순간 얼굴이 끌어당겨지는가 싶었더니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내려왔다.

오늘은 둘이서 같이 저녁이라도 먹을까, 딘. 의외의 제안에 그만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말았다. 캐스가 다시 웃었다. shit.

분명 음식을 집어넣는 것은 나 혼자겠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일요일이다.

by 치우타 2011. 7. 28. 00:46

 

“끄으아악!”

“크악!”


소름끼치는 단말마가 공기를 찢으며 흩어진다. 어둡게 가라앉은 밤의 정적을 깨는 것은 인간이 아닌 생물체의 비명과, 피와 살점덩어리였다. 이정도의 소란이면 누군가가 잠에서 깨어 뛰어나올 법하지만 여기는 도로에서도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숲이다. 메아리가 더 넓은 곳까지 퍼질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딘은 산탄총을 재장전하며 바닥에 빈 탄피를 떨어뜨렸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잔뜩 날카로워진 맹수의 살기를 피부로 느끼고 총을 손에 든다. 어디에서 공격해올지는 뻔하다. 정면.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캬악!!”


오늘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다’. 옆에는 샘도 캐스도 없고, 세상은 여전히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라고는 빌어먹을 천사들의 제의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양자택일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뭔가 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온 힘을 다해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걸. 매일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사냥을 다니고 사건을 해결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시간은 흘러갈 뿐이다. 그런 그의 속을 유일하게 간파해 낸 것은 ‘기근’의 기수. 드러낸 적 없는 저 밑바닥의 생각까지 끌어올려지는 기분이란 썩 유쾌하지 않다는 걸 그때에 처음 알았다. 나에겐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심지어 허무조차도.


“하하.. 하하하.”


헛웃음이 입술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걸 눈치 챘는지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엄청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래, 와라. 아직도 탄창은 잔뜩 있으니까. 너희들을 찢어발겨줄 은구슬은 차고 넘칠 만큼 있다고. 그러고 보니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다시 생각해본다. 짐승의 냄새를 맡았고, 마침 달도 흐릿하니 떠 있었고,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 약은 취미가 아니다. 하지만 기분은 좋다. 무언가에 취한 사람마냥 몽롱하고, 유쾌하고, 즐거웠다.


딘은 웃으며 총구를 들어 겨누었다.

by 치우타 2011. 7. 28. 00:44
2009년 6월 28일자 연성. 성당에서 성가연습 하다가 떠올랐기에 제목이 이렇습니다.

 

추락(墜落). 그것은 중죄를 범한 천사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무서운 형벌이었다. 주님께서 내리신 은총을 잃고 천사로서의 지위와 모든 권한, 능력을 박탈당한 다음 지상으로 떨어진 그들에겐 ‘평범한 인간’ 으로서의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천사였을 때의 기억은 다 잊게 된다. 설령 나중에 어떤 특별한 경험이나 사건으로 인해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오히려 고통과 절망의 감정을 깊게 새기게 될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모두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았던 천사 루시퍼가 지옥에 떨어져 악마가 된 것은 천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도 추락한 천사들이 몇 있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했거나 인간의 감정에 동화되어 천사로서의 본분을 잊은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전사로서 당연히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규칙들을 위배한 그들은 결코 다른 천사들에게서 이해받을 수 없었다. 추락자, 타락한 천사 등 마치 파문당한 신부와도 같은 대접을 받아야 했고,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었다. 천사들은 인간들의 기록에 나오는 것처럼 그저 신의 뜻을 행하는 사자가 아니었다.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군대’였던 것이다. 자신도 그 군대의 군인이었고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천사였다. 응당 그렇게 해 왔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믿음이, 흔들리거나 바뀌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 지옥에서 딘 윈체스터를 구해오기 전까지는.



“젠장, 캐스! 사람 궁금해서 미치게 만들어 놓고 자꾸 도망치지 말란 말이야!!!”



그는 격한 감정의 소유자였다. 기쁨과 슬픔, 분노, 절망, 괴로움을 직접적으로 부딪혀오며 상대가 천사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피력할 줄 알았다. 내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도 종종 농담을 구사하거나 화가 나면 눈을 노려보며 험한 말을 내뱉기까지 했다. 그러다가도 기쁜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살갑게 굴고, 무언가 켕기는 일을 저지르고 난 다음에는 눈을 절대 마주치려 하지 않는 등의 모습은 보는 쪽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런 그와 많은 일을 함께 겪고 대화를 나누고, 지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굉장히 낯선, 그렇지만 굉장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 이제까지의 자신에게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본능이 날카롭게 경고의 벨을 울리고 있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그 느낌은 너무나도 포근해서 섣불리 없애버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키워나가고 싶었다. 이때의 나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지금 자신의 선택이 앞길에 어떠한 운명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 지조차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는 어느 날 밤 갑자기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서 내 세계를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딘 윈체스터.

신의 명령으로 지옥에서 자신이 구출해내고 또한 지켜보고 있는 존재. 인간 헌터. 종말을 시작한 자이며 종말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자.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 고통을 포기하지 않는 약하면서도 강한 자.


........나는 그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천사들의 추락을 보아왔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서, 감정을 느끼게 되어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의문을 품게 되어서, 천사에 합당하지 않아서 지상으로 추락한 자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고, 충실하게 명령에 따라 행동해왔다. 하지만 딘의 눈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읽어낸 그 다음부터 시계 바늘은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지금도 눈앞에서 잠들어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불빛이 밝혀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것이 ‘감정’ 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대체 어떠한 감정인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연민과도 닮아있었지만 어딘가 다른 느낌. 왠지 이 감정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선택하게 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부정하고 잘라버리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이 앞에 보이는 길은 과연 평화인가, 고통인가.


조용히 손을 뻗어서 딘의 얼굴을 어루만져 본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체온이 따스했다.

이 마음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인가를 자문하며 눈을 감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나직이 읊조렸다.



-Parce, Domine.

(주여, 용서하여 주소서)

by 치우타 2011. 7. 28. 00:44
하하하 2009년 6월 29일자 연성이에요 하하하하하하 부끄럽습니다......... 한창 4시즌때에 쓴 거네요.


 

딘이 악몽을 꾸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옥에서 그를 데리고 나온 이후부터 쭉,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밤마다 그는 지옥에서의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겪고 있었다. 알라스테어가 매일 그를 고문하던 것부터 시작해서 딘 스스로가 다른 영혼들을 고문하게 되기까지의 일들.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제정신을 놓아버릴 정도의 끔찍하고 잔혹한 그 악몽을 그는 참고 견디어내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속죄인 양 온 몸을 난도질당하고 찢겨져서 피투성이가 되어도 비명 하나 올리지 않고 스스로와 마주하는 그 모습에는, 예전에 야훼의 아들로서 이 땅에 내려와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희생하신 그분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섞여 있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힘으로는 그의 모든 절망과 고통을 완전히 없애 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매일 밤 그의 잠든 얼굴을 보러 가는 것이 일종의 습관처럼 되고 말았다.



“.........z...”



언제나처럼 딘은 피곤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조금 떨어진 옆 침대에서 당연하게 자고 있어야 할 샘은 외출이라도 했는지 자리에 없었고, 어디에 무얼 하러 갔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실에 대해 딘에게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이 사실을 딘이 알면 그저 화를 내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알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샘은 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며 오히려 떨어뜨려 놓아야 할 위험한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메리가 아자젤과 계약을 하고, 샘이 루비의 피를 마시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는 딘의 하나뿐인 혈육 샘 윈체스터가 아닌, 가장 위협적인 적이 될지도 모르는 미지의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음......”



복잡한 심경으로 샘의 침대를 바라보고 있는데 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자, 몸을 뒤척였는지 자세가 약간 바뀌어 있었다. 오늘도 지옥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가만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평소의 그라면 조금 괴로운 표정으로 땀을 흘리며 잠들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오늘은 어딘가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딘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는 순간, 몸이 확 앞으로 당겨지더니 침대의 스프링이 조금 크게 출렁였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이성이 어떤 명령을 수행하려고 하기도 전에, ‘감각’이 상황을 인식했다. 지금 자신은 침대 위에 쓰러져 있고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잠들어 있던 딘이라는 것. 거기다가 단순히 딘의 몸 위로 쓰러졌다면 별상관이 없었지만, 아주 당황스럽게도 딘의 팔이 자신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떻게 하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였기에, 일단은 그의 팔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을 하고 날개를 펼치기 위해 살짝 몸을 움직였다.



“..........가지 마.....!!”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무심코 몸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딘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지금 방 안에는 자신과 딘 둘뿐이었기에 잘못 들을 것도 없지만- 잠에 빠진 채로 말을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몸은 잠에 빠져있는데 뇌의 언어중추만이 움직여서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과정은 단순해 보여도 상당한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잠꼬대라는 것은 정말 피곤하거나 혹은 꿈에 상당히 시달릴 때 이외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의 딘은 어느 쪽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만 두고...가지 마......!!”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움직였다. 바라본 딘의 얼굴에는 괴로움과 슬픔, 두려움의 감정이 강하게 떠올라 있었다. 언제나 그의 녹색 눈동자 속에서 볼 수 있었던 그 감정의 소용돌이는 하나가 되어 그를 깊게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한 손을 올려 딘의 이마에 대자, 그가 꾸고 있는 꿈의 영상이 흘러들어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어떤 이는 경멸의 표정으로, 어떤 이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가득한 표정으로, 갑작스러운 이별에 놀라 당황하는 딘을 돌아보지도 않고 제각각의 방향으로 모래가 흩어지듯 사라져갔다. 그 속에는 지금까지 만나왔던 이들은 물론이고, 딘에게 살아갈 원동력을 주었던 가족들도 있었다. 딘의 아버지 존 윈체스터와 메리 윈체스터.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들은 순식간에 어딘가로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샘마저 딘에게 등을 보이고 다른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딘은 절규하고 또 절규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런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사랑하는 이들이 눈앞에서 떠나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지옥의 고통이 그에게는 더 견디기 쉬우리라.


손을 떼어 꿈에서 벗어나자, 금세 눈앞에 딘의 얼굴이 있었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묵직한 기분으로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은 조금 앳되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더욱 처연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가족도 아니고 사랑하는 이도 아닌- 그리스도의 전사인 자신이,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거기에 대한 해답을 당장 찾아내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면 최소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It's alright, Dean.”



머뭇거리며 손을 뻗어 딘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는 조금 흠칫했지만, 이윽고 이쪽에 몸을 기대왔다.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며 귓가에 주문처럼 괜찮다는 말을 속삭이자 조금씩 딘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딘의 약한 모습에 미묘한 기분이 들어서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아까의 고통스러운 표정 대신 안도감과 편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등을 꽉 붙잡고 있던 딘의 손이 스르륵 침대 위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이마를 맞댄 다음 작게 속삭여 주었다.



“You're not alone.”




다음 날 아침, 샘의 독촉에 눈을 뜬 딘은 침대에 앉아서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어젯밤에 악몽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시점인가부터 기억이 뚝 끊기고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던 것이다. 희미하긴 하지만 자신은 굉장한 패닉상태였고 정신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누군가의 속삭임을 듣고 구원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누구였을까. 그 전에 자신의 기억은 확실한 것일까. 딘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어낸 다음, 막 욕실에서 나오는 샘에게 말을 던졌다.



“샘.”

“응? 왜, 형.”

“어젯밤에 나....뭔가 했냐?”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오히려 샘 쪽에서 뜨악한 얼굴을 하고 질문해오는 것을 보며, 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녀석한테 뭔가를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하지만 ‘무언가’ 혹은 ‘누군가’ 가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기억도 애매한 주제에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감각이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빠지는 딘을 보던 샘은 새 수건을 한 장 딘에게 던지며 말했다.



“요즘 피곤해서 그런 것 같은데, 빨리 샤워나 하셔. 오늘도 바쁘다구.”

“Okay, Sammy boy. 니 짐이나 잘 챙겨 놓으시지.”



딘은 수건을 받아 들고 휘적거리며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어젯밤에 대한 일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오늘은 또 바비 아저씨와 셋이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있었던 것이다.

습관처럼 휘파람을 부르며 티셔츠를 벗던 딘은, 코에 와 닿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에 손을 멈추었다. 청량한 바람을 연상시키는 깔끔하고 시원한 느낌의 향기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따스한 무언가가 퍼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신은 분명 이 향기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늘 가까이에 있고, 바람처럼 왔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푸른 눈의 천사, 카스티엘.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머릿속의 안개가 확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들어맞는다. 흔적도 없이 왔다가 사라질 수 있고,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아도 말없이 받아들여주고 이해해 주는 유일한 존재.

조금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이라면 용기를 내어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향기가 남아있는 부분에 살짝 얼굴을 묻고 작게 중얼거렸다.



“......Thanks, my angel.”

by 치우타 2011. 7. 28.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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