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은 어디 있습니까?"

사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시신부터 찾는 목소리가 들려와 레스트레이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껑충한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 검은 코트를 걸친 곱슬머리의 남자와 그에 확연히 대비되는 아담한 체구, 밀빛 머리카락에 캐주얼한 자켓이 편안한 인상을 주는 남자.
-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이 거기에 서 있었다.
이 '베이커가 221b 번지 콤비' 를 비공식적으로 수사에 참여시킨지도 벌써 세 달째.
런던은 예전보다는 조금 더 조용해졌고, 야드는 강력사건의 빈도가 줄어든 것에 대해 기뻐하는 분위기였다.

"어제는 늦게까지 일하지 않았던가?"

셜록이 시신을 살피며 정보를 수집하는 동안 레스트레이드는 자연스럽게 존 옆에 와서 말을 걸었다.
그러자 작은 돋보기로 시신을 관찰하는 셜록을 보던 존이 고개를 돌려 웃었다.

"아- 말도 마세요. 어제 갑자기 왠 환자 한명이 진료실에 난입해서는..."

존이 한숨을 푹 내쉬고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하자 레스트레이드는 가만히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셜록 외에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이 친해진 것은 사실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셜록은 존과 알게 된 이후로 늘 현장에 그를 동반했고, 처음엔 뜨악한 표정을 짓던 레스트레이드도 존의 블로그에 올려진 셜록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다음 간단하게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가까워지게 된 것이었다.
그들의 화제에는 주로 셜록이 있었지만 때론 일상 이야기나 날씨 이야기 등 평범한 지인 혹은 친구사이에 할 법한 내용으로 조금씩 화제가 옮겨가기도 했다.
본래 점잖은 성격이었던 존은 그와 비슷한 레스트레이드와의 대화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고 레스트레이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런 정상적이고 예의바르며 상식적인 사람이 천재이긴 하지만 도무지 인간관계 쪽으로는 최악일 셜록과 플랫메이트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신기할 따름이었다.

"....Impertinent!!!"

갑자기 방 안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존과 레스트레이드는 흠칫하며 대화를 중지하고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셜록은 불쾌하다는 얼굴을 하고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여긴 사건 현장이었다. 자신들이 대화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둘은 계면쩍어하며 헛기침을 하거나 시선을 괜히 천장으로 던졌다.

"난 두 번 말하는게 딱 질색이야. 레스트레이드."
"...미안하네."
"사건 현장에서 사담이나 할 여유가 있다니. 굉장하군. 정말 대단해."
"내 탓이야, 셜록.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해주겠어?"

연이은 사과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는지 셜록은 눈썹을 위로 치켜세웠다가 이내 등을 돌리고 창가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시신에서 추리해낸 것을 줄줄 읊으며 사건과 범인의 특징, 수사 방향에 대해 조언하는 그를 보고 존과 레스트레이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존. 커피 좀 줘."
"거기 내려뒀으니까 직접 마시면 되잖아, 셜록! 난 지금 피곤하다고!"
"난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움직이면 사고의 흐름이 끊어져서 효율이 떨어지게 돼."
"...Bloody."

낮게 욕을 뱉으면서도 존은 이미 머그에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설탕 두개까지 넣어서.
새삼 습관이라는 건 무섭다는 걸 실감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핸드폰에 진동이 왔다.

[오늘 저녁에 한잔 하겠나? -R]

존은 힐끗 소파에 누워있는 셜록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 상태라면 아마 머릿속이 정리될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을것이다. 물론 밥도 사양하겠지.
카페인은 머리 회전에 적절한 도움을 주기 때문에 마시는 것일테고. 존은 긍정의 답변을 보냈다.
여기 가만히 있다간 피로만 더 가중될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낮에 어정쩡하게 끊어진 대화를 잇고 싶은 생각도 조금 있었다.

"어디 가나?"
"바람 쐬러. 아마 늦을거야."
"흠... 안부 전해줘."

누구한테? 하고 되물으려던 존은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자켓을 걸쳤다. 
알아서 유도심문에 걸려들 정도로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셜록은, 사건이 없으면..... 순식간에 망가진다 이말입니다."
"허..... 그것 참 고생이 많겠군."
"벽에다 막 구멍을 내는 건 예사고, 지루하다고 실험 집기를 어질러놓고, 냉장고에는 글쎄...."

레스트레이드는 약간 멍한 얼굴로 옆에 앉아서 잔뜩 취한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존을 응시했다.
언제나 단정한 자세는 조금 무너져서 의자에 거의 기댄데다가, 뺨이 살짝 붉게 물들어있었다.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던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이 꼴이 된 것이다.
레스트레이드와 존이 저녁을 같이 먹는 일은 최근에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존이 흐트러지는 건 처음이었다.
늘 술을 마시는 건 레스트레이드 쪽이었고 존은 옆에서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익숙하지 않은 존의 모습은 놀라웠지만 조금 신선하고, 또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그냥 확 패버리고 싶을 때가....딸꾹."
"그래그래. 자네 마음 이해하네."
"그렇죠오! 분명 그럴거라고, 생각, 딸꾹."

존은 약간 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새 비어버린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거품이 조금 남아있는 잔을 멍한 눈으로 보던 그는 무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 거품도 명백하게 그걸 알고 있을 거라구요....히끅."

밀빛 머리카락이 순간 레스트레이드의 시야에 가득 찼다. 포근한 태양빛의 냄새와 술 내음이 훅 끼쳐왔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몽롱한 표정을 짓는 존의 얼굴을 본 순간 이성과는 상관 없이, 몸이 먼저 움직이고 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의 촉감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했는지 완전히 인식하는 것보다 더, 존에게 다가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잠깐 멈추시지. 레스트레이드."
"...?!?! 셜록?!"

절대로 들릴 리가 없는, 아니 들을 수가 없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을 때 레스트레이드는 하마터면 자리에서 미끄러질 뻔 했다.

"대체 여기는 어떻게 왔나?"
"내 행동을 일일이 추리로 설명할 시간이 지금은 없으니 패스하지. 존을 건드리지 마."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존을 확 끌어당기는 셜록을 보고 레스트레이드는 무의식적으로 존의 다른 쪽 팔을 붙잡았다.

"추리고 뭐고..... 방금 뭐라고 했나 자네?"
"두 번 말하는 게 싫다고 했을텐데. 레스트레이드."
"아니, 잠깐."
"모든 경찰의 귀감이 되어야 할 야드의 책임자가 이런 펍에서 그런 충동적인 행동을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충고하겠어."
"기다려 봐. 셜록."
"애초에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상대를 이렇게 취하게 만들다니, 상식은 어디에 놔두고 왔지? 집인가? 야드인가?"
"이봐, 자네!"
"완벽히 무방비한 상태라는 걸 알면서 한 건가? 그렇다면 대단히 용의주도하군. 놀라워. 자네에게 그런 배짱이 있었다니."
"셜록 자네, 존과 사귀나?"

쉴새없이 말을 잇던 셜록이 순간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레스트레이드는 말없이 셜록에게 시선을 던지며 한번 더 확언을 구했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귀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참견을 하는건가? 어이가 없군."
"그건, 플랫메이트로서...."
"플랫메이트가 뭐? 벼슬이라도 되나?"
"난 그렇다고 말한 적 없는데."
"인간 대 인간으로서 플랫메이트라면 존의 사생활을 존중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난 충분히 존중하고 있어! 침범한 적 따위는 한번도...!"
"지금 이게 침범이 아니면 뭔가?"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레스트레이드가 논리적으로 하나씩 반박해나가고 셜록은 거기에 이성적인 대답을 돌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젠 누가 봐도, 셜록이 밀리는 싸움이었다.

"유치하게 이러지 말게."
"그야 상대가 애니까!"
"......"

자신을 두고 두 남자가 말다툼을 벌이는 줄도 모르는 채, 존은 거의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by 치우타 2011. 7. 28.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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