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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평소같았다면 파티에 대해서, 혹은 다른 것에 대해 즐거운 듯이 찰스가 이야기하면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조용히 웃거나 같이 대화를 나누곤 했지만 오늘은 서로 뭔가를 피하는 것처럼 아주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차가 주차장에 멈춰서고, 시동이 꺼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서야 찰스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차문을 열었다. 침묵은 에릭의 집에 들어와 술을 꺼내고 잔에 따라 둘이 마주하는 동안에도 계속 자리를 지켰다.


"....좀 옛날 이야기인데... 괜찮아?"
"나는 상관없어."
"....그래."


찰스는 브랜디가 담긴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흔들리는 액체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10살때.... 유괴를 당한 적이 있었어. 한 때 아동 연쇄납치 살해사건으로 들썩였었는데.. 기억해?"
"물론 기억하지. 생존자가 적었.... 잠깐, 찰스. 설마...."
"그래, 맞아."


내가 바로 그 생존자들 중 하나였어. 브랜디를 쭉 들이키며 대답하는 얼굴은 지나치게 담담해서, 오히려 당황한 것은 에릭 쪽이었다. 그도 어렸던 시절이었기에 상당 부분 흐릿했지만 거의 매일같이 TV에서는 유괴당한 아이의 부모들이 눈물로 호소하고, 경찰이 굳은 얼굴로 범인의 몽타주를 뿌리거나 수사협조를 요청하고, 영화처럼 FBI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기억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아이를 상대로 한 범죄 치고는 상당히 잔인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가 된것은 물론이고 사이코패스의 또 다른 유형으로 프로파일링 되기도 했었다. 에릭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동안, 찰스는 빈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내쉬었다.


"거긴 시골 오두막이었어. 정신이 들었을 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지. 정확히는 기억 안나지만.. 열댓명 정도였던 것 같아. 처음 이틀간은 아무 일도 없었지.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울었고.. 그러다 지쳐 잠들곤 했어. 나도 첫날에는 조금 울었는데 약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꾹 참았지만."


에릭은 말없이 찰스의 빈 잔에 이번엔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브랜디와는 전혀 다른 그 향기에 잠깐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던 찰스는, 이내 빙긋 웃으며 새로운 술로 입술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3일째 되는 날,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가 난 범인이 오두막에 들어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여자아이를 질질 끌고 나갔지.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고 아이들은 덜덜 떨면서 어쩔줄을 몰랐어. 열려있는 문을 통해 끔찍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비명이 멎었을 때, 짧은 정적이 지나간 다음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지. 범인이 그걸 듣고 신경질적으로 시끄럽다고 소리쳤어. 난 그때 본능적으로 이러단 누가 또 끌려갈 거라는 걸 알고 근처에 있던 아이들을 달랬는데... 그러다 범인하고 눈이 마주치고 말았어. 그리고....."


찰스가 말을 멈추고 아랫입술을 세게 꾹 깨물자 에릭은 가만히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가늘게 떨리던 몸이 조금씩 진정되는 걸 느끼고 에릭이 어색하지 않게 손을 떼었다. 순간 찰스의 몸이 움찔했지만, 이내 이야기를 계속 풀어나가는 찰스의 목소리에 에릭은 금방 그것을 잊어버렸다.


"다음날부터 범인은 하루에 한 명씩, 죽이기 시작했어. 그것도 내 눈 앞에서.... 움직일 수 없게 날 묶어두고 아이들이 범인의 손에 죽어가는 걸 지켜보게 했지. 살해 방법은... 언제나 넥타이로 목을 졸라 질식시키는 거였고..... 아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면 내게로 와서 그 넥타이로.. 내 목을 졸랐어. 죽기 일보 직전까지만 압박하고 다시 놓아주는 거였지. 그게... 나는, 당시엔 몰랐지만... 자료에 의하면 5일... 동안이었다고 해."


납치 10일만에 구출. 살해당한 아이들은 6명. 생존자는 나를 포함해서 5명이었어. 약간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담담한 어조로 자신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을 마치 신문을 읽듯 읊어내는 찰스를 보며 에릭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입을 통해 들은 사실은 신문이나 뉴스, 혹은 가십용 잡지에서 읽었던 것보다 더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게다가 찰스는,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며칠동안 강제로 목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죽기 직전까지 목이 졸리는 경험을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예전에 정신을 놓아버리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러나 찰스는 이렇게 술을 마시며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다. 아니, 멀쩡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충분히 보통 사람과 다를바가 없어보였다. 진한 알코올을 목 너머로 넘기고 난 찰스가 다시 툭 던지듯 말했다. 


"....그 때 넥타이에 강한 트라우마가 남았던 모양이야. 보기만 해도 벌벌 떨면서 발작을 일으키던 시절이 있었고..... 치료 받으면서 나아졌지만 여전히 목에 맬 수는 없어. 아마 평생...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고... 사과하지 않아도 돼. 몰랐잖아. 따스한 손이 천천히 에릭의 뺨을 어루만졌다. 입가에 걸린 잔잔한 미소는 평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움이 있었다. 이럴 때에 어떤 행동을 하면 좋을지, 무슨 반응을 보여주면 좋을지 확실하게 판단하기에는 에릭이 가진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그는 알고 있는 답을 꺼내들었다. 입술이 겹쳐지던 순간, 에릭은 언뜻 찰스의 눈에 맺힌 물방울을 본 것 같았다.

 

by 치우타 2012. 2. 3. 00:52

자선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를 마친 둘은 나란히 아파트를 나섰다. 오늘의 찰스는 목이 살짝 드러날 정도로 오픈된 셔츠에 연미복풍의 수츠로 몸을 감싸고 있어서인지 금욕적인 느낌과 더불어 은근한 섹시함을 풍기고 있었다.


"넥타이는 안해?"


에릭의 순수한 물음에 찰스는 잠깐 움찔했지만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답답한 거 싫어서. 어차피 자선파티잖아."


맞는 말이기는 하군.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시동을 걸어 출발했다. 파티장은 호텔 중에서도 꽤나 유명한 장소였기에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입구에서 초대장을 보여주고 방명록을 적은 다음, 실내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인턴/레지던트 시절부터 자기 자랑을 입에 달고 다녔던 동기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에릭은 미간을 슬 찌푸리며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섯시. 두세시간만 있다 나가는 게 좋겠군. 옆에 서 있던 찰스가 그의 속셈을 파악했는지 장난스럽게 등을 팡 치면서 웃었다.


"벌써부터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거야? 이거 불량 참석자네."
"여기 있는 의사들의 자랑을 10분만 들어보면 너도 생각이 바뀔걸, 찰스."
"직업이 그런만큼 자부심도 강한 건 어쩔 수 없겠지."
"의사도 컨설팅한적이 있나?"


별다른 거부감 없이 긍정하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에릭이 되묻자, 찰스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당연하지. 누구인지는 비밀 유지의 원칙으로 밝힐 수 없지만 어쩌면 이 중에 있을지도 몰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재잘거리고는 파티장을 쭉 둘러보는 모습은 영락없는 밤비 한 마리였다. 이런 자리에서조차 스스로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건 그가 상당히 유능하거나 익숙해져있다는 뜻이겠지. 에릭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근처 테이블의 샴페인에 손을 가져갔다.


"에릭 렌셔?"


익숙한 목소리에 잔을 든 채로 돌아보자, 거기에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초로의 중년이 반가움의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우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본 에릭은 우연한 만남이 가져오는 기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얼른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자신의 계획이 깔끔하게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렉 교수님. 오랜만이군요."
"자네가 졸업하고 난 이후로 거의 처음이군. 잘 지냈나?"
"나쁘지 않았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나야 잘 지내고 있지. 이렇게 아는 사람 파티에 어슬렁거릴 정도로 말이야."


남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등뒤로 슬쩍 눈짓을 했다. 거기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는 자선 파티의 주최자이자 신경외과 협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맥도웰 부부가 있었다. 에릭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약하게 구겼다. 은사를 만난 것은 좋았지만 그가 주최자의 지인이라니. 속으로 혀를 차며 바싹 마른 입가로 샴페인을 가져가는 에릭의 손에 낯익은 손이 겹쳐졌다.


"그래도 파티에 왔는데  첫 잔은 같이 건배해야지."
"....깜짝이야. 뭐하다 왔어?"
"사람 구경. 그런데.... 저 분은?"
"아. 내 대학시절 은사님이야. 그렉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렉 교수님.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찰스 자비에입니다."
"반갑네. 자네는 에릭의 친구인가?"


그렉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찰스의 손을 맞잡아 악수하며 에릭을 쳐다보았고, 찰스가 입술을 열어 뭔가 말하려던 찰나 에릭이 먼저 빠르게 대답했다. 제 컨설턴트입니다. 자네 같은 사람이 컨설팅을 받는다니, 대체 어떤건지 궁금하군. 이번에야말로 그렉의 시선이 찰스를 향했고, 돌발 상황에 뻣뻣하게 굳은 에릭의 표정을 본 찰스는 일부러 큼직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세한 컨설팅 내용은 고객과의 비밀유지 원칙에 의해 밝힐 수가 없습니다."
"오... 그렇게 나올줄은 몰랐는걸."
"누구에게나  비밀 한두개쯤은 있는 법이죠."


찰스의 재치있는 답변에 그렉은 껄껄 웃으며 젊은 사람들끼리 재밌게 보내라며 어깨를 두드리고는 자리를 떠났고, 그의 등이 멀어지자 에릭이 십년감수했다는 얼굴로 샴페인을 쭉 들이켰다. 아, 건배하기로 해놓고! 찰스는 투덜거렸지만 손에 든 글라스는 이미 비어있었다.


"내가 말할 줄 알았어?"
"그게 아니라...."
"애매한 대답이네, 에릭 렌셔. 내가 그렇게 때와 장소 못 가리는 남자처럼 보여?"
".....아니." 


이쪽을 똑바로 응시해오는 푸른 눈동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진중함을 담고 있었다. 그 깊어진 빛깔에 할 말을 잃어버린 에릭이 침묵 속에 허둥거리는 동안, 언뜻 바다처럼 보였던 푸른 빛은 서서히 옅어지며 평소대로 돌아왔다. 농담이야. 찰스는 픽 웃으며 에릭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고는 샴페인을 더 가져오겠다고 말하고는 반대편 테이블로 천천히 걸어갔다. 등 뒤로 시선이 따라오다가 이내 흩어졌다.



컨설턴트.
찰스는 자신과 에릭의 사이를 정의하는 그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신은 여전히 그의 컨설턴트고, 그는 자신의 클라이언트였다. 지금이야 조금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걸 이런 자리에서 드러낼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여긴 자선 파티라고는 해도 의사협회가 주최한 모임이었고, 그건 여기 모인 사람들이 뉴욕에서 가장 보수적이며 무시 못할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아마도). 그런 곳에서 커밍아웃이라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거기다 에릭이, 자신과 완전히 같으리라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눈 앞의 늘씬한 유리잔에 채워져 있는 샴페인 속의 기포가 생각을 더욱 어지럽히는 기분이 들어 찰스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아. 천천히 하기로 했으니까. 


"샴페인을 만들어서 오는가 했는데."
"엄살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어."


벽에 나란히 기댄 채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둘은 홀 중앙을 바라보았다. 뭔가 슬슬 시작되려고 하는 모양인지 사람들이 전부 그쪽에 모이거나 혹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주최자인 맥도웰 부부가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오늘 여기 이렇게 모여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전 프라이스 맥도웰이라고 합니다. 이제 곧, 자선 경매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많은 참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물건은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입니다! 100달러부터 시작합니다."
"120!"
"120 나왔습니다. 더 있습니까?"
"130!"


"자선경매라니 괜찮은 방법이군."
"본 적 없어?"
"지금까지는. 매일 자기자랑에 적당한 모금만 하는 게 전부였지."
"다들 센스가 없는 모양이네. 원래 자선파티는 자선경매가 기본인데... 아무래도 의사들이라 그런가?"
"무슨 뜻이야 그거."
"별로 아무것도?"
"거짓말 마."


샴페인 몇 잔을 더 마신 둘은 경매품이 바뀌는 동안에도 가볍게 투닥거리며 장난스러운 말다툼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다섯 번째 상품이 경매에 부쳐진 순간,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끼는 제자에게 선물할 것이니 입찰하겠네. 100달러!"


마침 그렉은 중앙 홀로 시선을 옮긴 에릭과 눈이 마주쳤고, 그의 꿍꿍이속을 읽은 에릭이 급히 벽에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110달러! 115달러! 가격은 계속 올라갔고 입찰자는 그렉과 다른 한 의사였다. 흘낏 바라본 상품은 넥타이였고 당황한 에릭은 얼떨결에 경매에 참가했다. 120달러! 그의 은사는 짓궂은 미소를 짓더니 가격을 더 높였다. 125달러! 그렇게 공을 주고받듯이 올라가던 가격은 어느새 300달러를 넘어있었고, 입찰자는 에릭과 그렉 뿐이었다. 찰스는 팔짱을 끼고 그들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330달러! 에릭은 입술을 꾹 깨물고 모험을 시도했다. 350달러! 장내가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그렉은 더 이상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윙크와 미소가 돌아왔고, 에릭은 생각했다. 당했구나.


"아르마니 가을 한정 콜렉션 넥타이는 에릭 렌셔씨가 350달러에 낙찰받으셨군요. 감사합니다!"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그걸 맞추는 것도 자네가 할 일일세."
"변함없으시군요."
"그러는 자네도 마찬가지야."


경매 상품인 짙은 푸른 빛깔의 넥타이를 받아든 다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에릭은 찰스가 없는 것을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테이블을 치우고 있는 급사가 눈에 띄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자, 이 앞의 정원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릭은 감사의 표시로 살짝 목례하고는 발코니를 통해 정원으로 걸어갔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작은 브루넷의 뒤통수가 시야에 들어오자 묘한 안도감이 가슴을 채웠다. 


"뭐 하고 있어."
"아, 에릭. 어때, 승리하고 왔어?"
"훌륭하게 지고 왔지."
"딱 보기에도 그럴 것 같더라."


교수님 내공이 보통이 아니시더라고. 이건 컨설턴트로서의 감이야. 당연히 에릭의 패배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그 말투에 괜히 심통이 난 에릭은 손에 부드러운 넥타이를 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고, 혼자서 종알대고 있는 찰스의 흰 목에 넥타이를 휙 감아 끌어당겼다. 


"자꾸 그렇게 약올리면 꽁꽁 묶어버린다."


넥타이를 흔들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찰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에릭은 찰스가 자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것을 즐기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찰스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에서 이상함을 느낀 에릭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고,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떠는 찰스를 보고 이번엔 에릭이 놀랐다. 


"찰스? 찰스, 왜 그래? 괜찮아? 
".........타이...."
"잘 안 들려, 크게 말해봐."
"넥... 넥타이....풀어, 줘......"


찰스의 목소리는 마치 다 죽어가는 사람의 그것과도 같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절박함. 에릭이 넥타이? 하고 되묻자 한층 더 쥐어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빨리... 빨리.... 제발.... 애절하다못해 거의 처절하게 들리는 속삭임을 듣고 에릭은 재빨리 넥타이를 찰스의 목에서 풀러내어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찰스는 그제서야 숨을 탁 토해내면서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에 에릭은 무척 당황했지만 주저앉은 찰스의 등이 너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기에 가만히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찰스가 와락 안겨들었고, 에릭은 등을 마주 안고 느릿하게 토닥였다. 떨리던 몸과 가쁘게 몰아쉬던 호흡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에릭은 찰스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일단.. 돌아가자."
"그래. ....걸을 수 있겠어?"
"괜찮아.. 그 정도는."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잔디를 툭툭 털고 찰스가 힘없이 웃어보였다. 마침 정원은 주차장과 이어져있었고, 둘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파티장을 뒤로 했다.

by 치우타 2012. 1. 20. 15:57

에릭은 길었던 수술을 끝내고 사무실에 들어왔다가 책상 위에 놓인 우편물을 발견했다. 잊어버릴만 하면 생각나게 만드는 그 특징적인 문양에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신경 외과의 협회. 답지 않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 열어본 내용에는, 이번 주말에 자선을 위한 파티 겸 간단한 경매가 진행될 예정이니 참석해 달라고 적혀 있었다. 보나마나 아주 따분한 모임이 되겠군. 미련 없이 초대장을 접으려던 에릭의 눈에 특별히 굵고 진한 글씨체로 쓰인 문장이 들어왔다.

파트너를 꼭 데리고 올 것. Dress code : Black 


이번엔 새로운 룰도 추가된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니 다음달이 벌써 크리스마스였다. 시간이 참 빨리도 간다고 생각하며 에릭은 파트너로 찰스를 데려가야 겠다고 결정하고 있었다. 드레스 코드는 무척 심플했고, 어차피 자선 파티라는 이름만 번지르르하게 걸어놓고 서로 잘난 척이나 하는 시간이 될 것이 뻔했다. 의사들이란 대부분, 환자들이 경이와 존경을 담아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뛰어난 자신의 위치를 뽐내고 거만하게 굴며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그 엄청난 권력에 홀려 때로는 주객전도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하는 지극히 한심하고 치졸한,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물론 에릭 자신은 그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물론 훌륭한 의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대부분 권력 다툼에는 관심이 없어 높은 곳에 올라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이 초대장을 보내온 에릭의 은사는 인품과 권위, 양쪽을 다 가진 특이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생각들을 흘려 보내며 에릭은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주말에 바빠?]


짤막하지만 필요한 요건은 다 들어있는 문장이 전송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리나케 답장이 돌아왔다.


[널 만나느라 바쁘지, 달링.]


하여튼 잘도 이런 소리를 시도때도없이 하는군. 이제는 그 스타일에 완전히 익숙해졌는지 에릭은 가볍게 코웃음치며 조금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금요일 저녁에 와. 여벌 수트 가지고.]
[여벌은 왜?]
[자선파티. 토요일에.]
[드레스 코드는?]


과연 컨설턴트. 자선파티라는 단어만 보고서도 가장 필요한 사항을 물어보다니. 에릭은 새삼 찰스의 직업정신에 감탄하며 답을 보냈다.


[Black.]
[Got it. See u in friday night, h.s]


오늘도 여전히 같은 호칭으로 문자를 끝맺는군. 사실 처음에 찰스가 h.s 라고 보냈을 때에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반나절 정도는 그에 대한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바로 물어봤더라면 그럴 것도 없이 알 수 있었겠지만 공교롭게도 회진과 수술이 연달아 잡혀 있었기 때문에 에릭은 h.s 가 어떤 단어의 줄임말인가 혹은 어떤 암호같은 것인가에 대해 틈틈이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퇴근시간까지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 없었던 그는 참지 못하고 찰스에게 전화해서 다이렉트로 물어보았고, 부드러운 어투로 전화를 받아 인사를 건네던 목소리가 유쾌한 웃음소리로 변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에릭, 그건 handsome shark의 줄임말이야. 섹시한 마이 허니를 위한 특별한 호칭이지.'
'.....상어가 섹시해?'


처음 만났을 때도 쪽지에 그런 말을 썼던 걸 기억해낸 에릭이 의아함을 가득 담아 물음을 던지자 찰스는 다시 즐거운 듯 웃더니 짐짓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속삭여왔다.


'오, 물론. 그 유려한 자태는 생물학자들도 추앙해 마지않는 바인걸. 바다생물 중 섹시킹일거야.'
'기준을 알 수가 없군.'
'괜찮아. 원래 미학이란 이해받기 어려운 거니까.'
'퍽이나.'


통화는 결국 찰스가 에릭을 만나러 오기 전까지 계속되었고, 몇 가지 단계를 거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을 보자마자 덥석 붙잡아 목덜미를 콱 깨물어 흰 피부에 훌륭한 잇자국을 선사하는 것으로 에릭은 자신을 꽤나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든 원흉에게 약간의 심술어린 복수를 돌려주었다(후에 찰스에게서 정말 먹히는 줄 알았다는 불평을 들어야 했지만).


금요일 저녁, 찰스는 바디라인이 잘 드러나는 연미복풍의 고급스럽고 심플한 블랙 수트를 가지고 왔다. 에릭은 지금 당장이라도 입어보라는 말을 할 뻔했지만 간신히 목 깊은 곳으로 삼켰고, 그런 의중을 읽기라도 했는지 찰스가 즐거움은 남겨둬야지, 달링. 하고 뺨에 쪽 뽀뽀해왔다. 혹시 생각을 읽는 초능력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에릭이 건네자 개구진 웃음이 보상으로 돌아왔다. 오 에릭, 그럴리가 없잖아. 의사선생님 치고는 비과학적인 생각을 하는군. 다시 입술이 닿아왔고 이번엔 고개를 돌려 깊게 혀를 얽었다. 뜨거운 숨이 뒤엉키고 이내 찰스의 손에서 양복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키스 사이로 구겨져.. 하는 작은 속삭임이 흘러나왔고 모양 좋은 손이 아래로 내려와 몇 번 바닥을 더듬더니 옷걸이를 잡아채 그대로 의자에 솜씨 좋게 걸어두었다.


"이제 됐지?"
"맙소사. 내 달링은 뒤에도 눈이 달린거야? 이건 또 새로운 발견인데..."
"그만. 입 좀 다물어봐."


넌 가끔 말이 너무 많아. 부끄럼 타는 소녀도 아니면서.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잠시 크게 흔들렸지만 에릭은 눈치채지 못했다. 영화 보면서 눈물 흘리는 남자가 할 말은 아니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놀리듯 던져온 말에 항의하려고 입을 열자 냉큼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덮쳐왔다.


"항의할 시간에 키스나 더 하지? 잘생긴 상어씨."
"...내일 아침에 후회하지나 마."
"워우 무서운걸. 살살해줘, 자기."
"상어가 왜 포식자인지 보여줄테니 기대해."


말이 끝나자마자 둘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급하게 입술을 맞대며 침실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by 치우타 2011. 12. 2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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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고 안에 들어와서도 이어지던 길고 끈적한 입맞춤은 찰스가 뒤로 몸을 슬쩍 빼면서 에릭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밀어내는 것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희미한 타액의 실이 자리했다가 금방 사라졌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에릭의 앞에서 찰스는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잔소리와 닮은 컨설팅을 시작했다. 에릭은 '고백은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분위기를 잘 잡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 라며 조근조근 말을 늘어놓는 찰스의 입술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말 듣고 있어요?"
"그래, 알았어. 고백도 좀 로맨틱하게 하라는 거 아니야."


무신경한 어투로 대충 대답하며 에릭은 다시 눈 앞의 탐스러운 입술을 찾아들었고 그 당사자인 찰스는 겹쳐지는 입술에 기막혀했다. 이건 무슨 키스 귀신도 아니고 왜 이렇게 달려들어. 그야 물론 싫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떤 식의 전개가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에릭과 찰스는 연인사이가 된 상태였고 에릭의 키스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상당히 괜찮아지고 있었기에 찰스는 그의 시도를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뼈가 조금 도드라진 기다란 손가락이 슬슬 셔츠 안으로 들어오자 찰스는 그 손등을 찰싹 때렸다. 불시의 제지에 깜짝 놀란 에릭은 손을 멈췄고, 찰스는 에릭의 아랫입술을 슬 깨물었다가 놓으면서 그를 흘겨보았다.


"아프잖아."


조금 힘이 담겨있었는지 얼얼한 손등을 문지르며 에릭이 투덜거렸다. 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쌤통이라는 듯 새침한 어투로 대꾸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다짜고짜 덤비니까 그렇게 되는 거야."
"시간이 중요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그럼 뭐가 문제야."


장난감을 뺏긴 아이처럼 퉁명스러운 어조로 쏘아붙이는 에릭을 보며 찰스는 아주 잠깐 있는대로 인상을 구기다가 이마를 문지르며 최대한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에릭, 지금 우린 연애하기 시작했으니까 슬슬 정석 코스를 밟아야 하지 않겠어? darling?"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게 울리는 애정어린 목소리에 에릭은 멍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제서야 찰스의 뉘앙스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이번엔 넋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진화했고, 그 표정을 본 찰스는 장난꾸러기처럼 미소를 지었다.


"에릭? 괜찮아?"


찰스가 손을 뻗어 천천히 에릭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을 마주하자 단정하면서도 섹시한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너무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해버린 거라는 걸 알았지만, 지난 주 부터 자신을 쥐락펴락하며 컨트롤러를 마음대로 움직이던 남자라고는 볼 수 없는 그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나왔다. 귀여운 구석도 있네. 마음 같아서는 키스세례를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오늘 첫 데이트고 뭐고 다 물건너가겠지. 찰스는 이성의 스위치로 본능을 꾹 눌러 억제하면서 자동차 열쇠를 쥐고 에릭의 눈 앞에서 흔들어보였다.


"나 배고파. 점심 먹을 겸해서 나가자."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에릭이 잠깐 흠칫하더니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먹고 싶은거 있어?"


당황의 기색을 다 지우지 못한, 약간 갈라진 목소리에 찰스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응, 이탈리안으로."
"OK."


운전은 내가 할 거야. 찰스는 오른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등을 돌려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뭔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내내 에릭은 찰스의 바뀐 뉘앙스와 태도, 그리고 약간 오묘해진 눈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약간 허둥댔다(사실은 꽤 허둥거렸다). 간혹 헛기침을 하며 그러한 당혹감을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도리어 그런 제스쳐가 찰스로 하여금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찰스의 페이스로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에릭은 찰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다가온 어떤 낯선 여자의 연락처를 얼결에 받아드는 실수를 범했고, 그걸 돌아오던 찰스가 목격하는 바람에 애정 어린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연애 첫날부터 이런 비매너는 난생 처음 당해보네."
"....비매너?"
"에릭.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은 다 일회성이라서 그런 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랑 연애하자고 했잖아. 첫날부터 연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왠 여자의 전화번호를 덥석 받는 행동이 매너있는 걸로 보이지는 않는데. 이어지는 목소리는 침착하고 나직했지만 에릭은 차라리 찰스가 인상을 쓰고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으면 거꾸로 생각해보는 것도 꽤 도움이 되지. 거꾸로 생각한다? 에릭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가 잘 안되는 것 같아."
"뭐 됐어. 연애 무경험자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안되지. 그래서, 그거 어떡할거야?"


찰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눈짓으로 연락처를 가리켰다. 휘갈겨 쓴 메모가 손가락 끝에 위태롭게 걸려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귀찮으니까 아무데나 던져 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 앞에는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막 연애를 시작한 괜찮은 연인이 있었다. 미련없이 종이가 구겨져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돌아가는 길에 마트 좀 들리자."
"살 거 있어?"
"저녁은 집에서 먹어야지. 왜, 밖에서 먹을래? 난 상관없는데."


똑바로 응시해오는 푸른 눈동자엔 다정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빛이 감돌고 있었고, 그 순간 에릭은 말과 눈동자에 담긴 뜻을 대번에 이해했다. 아니, 집이 좋아. 일어나지. 그의 대답에 찰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럼 점심은 자기가 내는 거다? 약간 과장된 애교를 담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였고 에릭은 픽 웃었다. 알았어. 
 
by 치우타 2011. 12. 7.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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