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를 마친 둘은 나란히 아파트를 나섰다. 오늘의 찰스는 목이 살짝 드러날 정도로 오픈된 셔츠에 연미복풍의 수츠로 몸을 감싸고 있어서인지 금욕적인 느낌과 더불어 은근한 섹시함을 풍기고 있었다.


"넥타이는 안해?"


에릭의 순수한 물음에 찰스는 잠깐 움찔했지만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답답한 거 싫어서. 어차피 자선파티잖아."


맞는 말이기는 하군.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시동을 걸어 출발했다. 파티장은 호텔 중에서도 꽤나 유명한 장소였기에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입구에서 초대장을 보여주고 방명록을 적은 다음, 실내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인턴/레지던트 시절부터 자기 자랑을 입에 달고 다녔던 동기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에릭은 미간을 슬 찌푸리며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섯시. 두세시간만 있다 나가는 게 좋겠군. 옆에 서 있던 찰스가 그의 속셈을 파악했는지 장난스럽게 등을 팡 치면서 웃었다.


"벌써부터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거야? 이거 불량 참석자네."
"여기 있는 의사들의 자랑을 10분만 들어보면 너도 생각이 바뀔걸, 찰스."
"직업이 그런만큼 자부심도 강한 건 어쩔 수 없겠지."
"의사도 컨설팅한적이 있나?"


별다른 거부감 없이 긍정하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에릭이 되묻자, 찰스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당연하지. 누구인지는 비밀 유지의 원칙으로 밝힐 수 없지만 어쩌면 이 중에 있을지도 몰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재잘거리고는 파티장을 쭉 둘러보는 모습은 영락없는 밤비 한 마리였다. 이런 자리에서조차 스스로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건 그가 상당히 유능하거나 익숙해져있다는 뜻이겠지. 에릭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근처 테이블의 샴페인에 손을 가져갔다.


"에릭 렌셔?"


익숙한 목소리에 잔을 든 채로 돌아보자, 거기에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초로의 중년이 반가움의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우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본 에릭은 우연한 만남이 가져오는 기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얼른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자신의 계획이 깔끔하게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렉 교수님. 오랜만이군요."
"자네가 졸업하고 난 이후로 거의 처음이군. 잘 지냈나?"
"나쁘지 않았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나야 잘 지내고 있지. 이렇게 아는 사람 파티에 어슬렁거릴 정도로 말이야."


남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등뒤로 슬쩍 눈짓을 했다. 거기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는 자선 파티의 주최자이자 신경외과 협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맥도웰 부부가 있었다. 에릭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약하게 구겼다. 은사를 만난 것은 좋았지만 그가 주최자의 지인이라니. 속으로 혀를 차며 바싹 마른 입가로 샴페인을 가져가는 에릭의 손에 낯익은 손이 겹쳐졌다.


"그래도 파티에 왔는데  첫 잔은 같이 건배해야지."
"....깜짝이야. 뭐하다 왔어?"
"사람 구경. 그런데.... 저 분은?"
"아. 내 대학시절 은사님이야. 그렉 교수님."
"안녕하세요, 그렉 교수님.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찰스 자비에입니다."
"반갑네. 자네는 에릭의 친구인가?"


그렉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찰스의 손을 맞잡아 악수하며 에릭을 쳐다보았고, 찰스가 입술을 열어 뭔가 말하려던 찰나 에릭이 먼저 빠르게 대답했다. 제 컨설턴트입니다. 자네 같은 사람이 컨설팅을 받는다니, 대체 어떤건지 궁금하군. 이번에야말로 그렉의 시선이 찰스를 향했고, 돌발 상황에 뻣뻣하게 굳은 에릭의 표정을 본 찰스는 일부러 큼직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세한 컨설팅 내용은 고객과의 비밀유지 원칙에 의해 밝힐 수가 없습니다."
"오... 그렇게 나올줄은 몰랐는걸."
"누구에게나  비밀 한두개쯤은 있는 법이죠."


찰스의 재치있는 답변에 그렉은 껄껄 웃으며 젊은 사람들끼리 재밌게 보내라며 어깨를 두드리고는 자리를 떠났고, 그의 등이 멀어지자 에릭이 십년감수했다는 얼굴로 샴페인을 쭉 들이켰다. 아, 건배하기로 해놓고! 찰스는 투덜거렸지만 손에 든 글라스는 이미 비어있었다.


"내가 말할 줄 알았어?"
"그게 아니라...."
"애매한 대답이네, 에릭 렌셔. 내가 그렇게 때와 장소 못 가리는 남자처럼 보여?"
".....아니." 


이쪽을 똑바로 응시해오는 푸른 눈동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진중함을 담고 있었다. 그 깊어진 빛깔에 할 말을 잃어버린 에릭이 침묵 속에 허둥거리는 동안, 언뜻 바다처럼 보였던 푸른 빛은 서서히 옅어지며 평소대로 돌아왔다. 농담이야. 찰스는 픽 웃으며 에릭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고는 샴페인을 더 가져오겠다고 말하고는 반대편 테이블로 천천히 걸어갔다. 등 뒤로 시선이 따라오다가 이내 흩어졌다.



컨설턴트.
찰스는 자신과 에릭의 사이를 정의하는 그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신은 여전히 그의 컨설턴트고, 그는 자신의 클라이언트였다. 지금이야 조금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그걸 이런 자리에서 드러낼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또한 여긴 자선 파티라고는 해도 의사협회가 주최한 모임이었고, 그건 여기 모인 사람들이 뉴욕에서 가장 보수적이며 무시 못할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아마도). 그런 곳에서 커밍아웃이라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거기다 에릭이, 자신과 완전히 같으리라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더더욱. 눈 앞의 늘씬한 유리잔에 채워져 있는 샴페인 속의 기포가 생각을 더욱 어지럽히는 기분이 들어 찰스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아. 천천히 하기로 했으니까. 


"샴페인을 만들어서 오는가 했는데."
"엄살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어."


벽에 나란히 기댄 채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둘은 홀 중앙을 바라보았다. 뭔가 슬슬 시작되려고 하는 모양인지 사람들이 전부 그쪽에 모이거나 혹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주최자인 맥도웰 부부가 마이크를 손에 들었다.


"오늘 여기 이렇게 모여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전 프라이스 맥도웰이라고 합니다. 이제 곧, 자선 경매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많은 참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물건은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입니다! 100달러부터 시작합니다."
"120!"
"120 나왔습니다. 더 있습니까?"
"130!"


"자선경매라니 괜찮은 방법이군."
"본 적 없어?"
"지금까지는. 매일 자기자랑에 적당한 모금만 하는 게 전부였지."
"다들 센스가 없는 모양이네. 원래 자선파티는 자선경매가 기본인데... 아무래도 의사들이라 그런가?"
"무슨 뜻이야 그거."
"별로 아무것도?"
"거짓말 마."


샴페인 몇 잔을 더 마신 둘은 경매품이 바뀌는 동안에도 가볍게 투닥거리며 장난스러운 말다툼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다섯 번째 상품이 경매에 부쳐진 순간,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끼는 제자에게 선물할 것이니 입찰하겠네. 100달러!"


마침 그렉은 중앙 홀로 시선을 옮긴 에릭과 눈이 마주쳤고, 그의 꿍꿍이속을 읽은 에릭이 급히 벽에서 몸을 일으켜세웠다. 110달러! 115달러! 가격은 계속 올라갔고 입찰자는 그렉과 다른 한 의사였다. 흘낏 바라본 상품은 넥타이였고 당황한 에릭은 얼떨결에 경매에 참가했다. 120달러! 그의 은사는 짓궂은 미소를 짓더니 가격을 더 높였다. 125달러! 그렇게 공을 주고받듯이 올라가던 가격은 어느새 300달러를 넘어있었고, 입찰자는 에릭과 그렉 뿐이었다. 찰스는 팔짱을 끼고 그들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330달러! 에릭은 입술을 꾹 깨물고 모험을 시도했다. 350달러! 장내가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그렉은 더 이상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윙크와 미소가 돌아왔고, 에릭은 생각했다. 당했구나.


"아르마니 가을 한정 콜렉션 넥타이는 에릭 렌셔씨가 350달러에 낙찰받으셨군요. 감사합니다!"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그걸 맞추는 것도 자네가 할 일일세."
"변함없으시군요."
"그러는 자네도 마찬가지야."


경매 상품인 짙은 푸른 빛깔의 넥타이를 받아든 다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에릭은 찰스가 없는 것을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테이블을 치우고 있는 급사가 눈에 띄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자, 이 앞의 정원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릭은 감사의 표시로 살짝 목례하고는 발코니를 통해 정원으로 걸어갔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작은 브루넷의 뒤통수가 시야에 들어오자 묘한 안도감이 가슴을 채웠다. 


"뭐 하고 있어."
"아, 에릭. 어때, 승리하고 왔어?"
"훌륭하게 지고 왔지."
"딱 보기에도 그럴 것 같더라."


교수님 내공이 보통이 아니시더라고. 이건 컨설턴트로서의 감이야. 당연히 에릭의 패배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그 말투에 괜히 심통이 난 에릭은 손에 부드러운 넥타이를 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고, 혼자서 종알대고 있는 찰스의 흰 목에 넥타이를 휙 감아 끌어당겼다. 


"자꾸 그렇게 약올리면 꽁꽁 묶어버린다."


넥타이를 흔들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찰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에릭은 찰스가 자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것을 즐기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찰스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에서 이상함을 느낀 에릭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고,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떠는 찰스를 보고 이번엔 에릭이 놀랐다. 


"찰스? 찰스, 왜 그래? 괜찮아? 
".........타이...."
"잘 안 들려, 크게 말해봐."
"넥... 넥타이....풀어, 줘......"


찰스의 목소리는 마치 다 죽어가는 사람의 그것과도 같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절박함. 에릭이 넥타이? 하고 되묻자 한층 더 쥐어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빨리... 빨리.... 제발.... 애절하다못해 거의 처절하게 들리는 속삭임을 듣고 에릭은 재빨리 넥타이를 찰스의 목에서 풀러내어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찰스는 그제서야 숨을 탁 토해내면서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에 에릭은 무척 당황했지만 주저앉은 찰스의 등이 너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기에 가만히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찰스가 와락 안겨들었고, 에릭은 등을 마주 안고 느릿하게 토닥였다. 떨리던 몸과 가쁘게 몰아쉬던 호흡이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에릭은 찰스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일단.. 돌아가자."
"그래. ....걸을 수 있겠어?"
"괜찮아.. 그 정도는."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잔디를 툭툭 털고 찰스가 힘없이 웃어보였다. 마침 정원은 주차장과 이어져있었고, 둘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파티장을 뒤로 했다.

by 치우타 2012. 1. 20. 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