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경험이 없는 나한테 제대로 된 컨설팅을 하려면 실전이 최고인거 아닌가? 지금까지처럼."


패닉에 빠져 딱딱하게 굳어있는 찰스의 귓가에 들려온 에릭의 말은 너무 자연스럽고 태평한 어조여서, 도대체 무슨 말을 되돌려 주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연애를 안 해봤으니까 이론을 모른다는 말은 둘째치고 왜 그걸 나랑 하려는 거에요. 찰스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차마 입술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So, yes or no?"


지난주에 찰스가 에릭의 집에서 자고 가는 허락을 얻을 때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온 형국이었다. 에릭은 당황한 얼굴로 입술만 꾹 깨문 채 답이 없는 자신의 컨설턴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한테 저렇게 말했을 때는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약간 오만해서 귀여웠는데. 재차 답을 채근하기 위해 에릭이 말문을 여는 순간, 찰스의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내일..."
"음?"
"내일, 대답할게요. 하루 정도 시간을 줘요."
"OK, 그럼 내일 내 집에서 만나지."
"이렇게 됐으니까 오늘은 이만.. 갈게요."
"벌써?"


에릭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잠깐 우물쭈물하던 찰스가 톡 쏘듯이 말했다.


"누구 때문인데요."
"알았어. 기다리지."


내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보이는 제스쳐를 취하는 에릭을 슬 눈으로 흘기며 찰스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봐요. 짤막하게 인사를 던지고 최대한 빠르면서도 자연스럽게 카페를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한 다음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라타자마자 찰스는 탁 한숨을 내쉬었다. 백미러에 비춰진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아주 푹 익어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주여. 운전대를 두 손으로 꼭 쥐어잡고 머리를 쿵쿵 박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저 세 가지 단어만이 한데 뒤섞여 떠올랐다.

설마 에릭이 그런 제안을 해오다니....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애매한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었지만, 연애를 하자는 쪽으로 튀어오를 줄은 몰랐다. 찰스는 어떻게 운전해서 집에 돌아왔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등 뒤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일단.. 술을 마셔야겠어. 찰스는 찬장에 손을 뻗어 아껴두었던 브랜디 병을 꺼냈다. 생각해, 찰스. 어떻게 하면 될까. 

당연히 NO 해야지. 미쳤어? 확실하게 해.
아니, YES 라고 해야지. 넌 처음부터 그를 마음에 들어했잖아. 그런 끝내주는 섹시남을 그냥 포기하는 게 더 미친짓이야.

찰스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 계속 술을 들이켰다. 누가 보면 정말 딱 미쳤다고 하기 좋은 정신상태로군. 브랜디가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입 안에 털어넣은 찰스는 멍하니 천장의 무늬를 세면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건 미친 짓이라니까. 이성이 속삭였다.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겁부터 집어먹고 도망치는 건 싫어. 그걸로 잃은 게 더 많았으니까.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망설임이 섞여 있었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게 빛나고 있었다.


에릭은 널찍한 소파에 앉아 잘 보지도 않는 뉴스를 틀어둔 채 느긋하게 위스키로 입술을 축였다. 그렇게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뜰 줄은 몰랐는데. LET'S MAKE LOVE, 라고 반쯤 짖궂게 던졌을 때 찰스의 얼굴 표정은 그야말로 볼만했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간 것도 똑똑히 두 눈으로 봤다. 에릭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도 얼굴 표정이(정확히는 색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쩌면 찰스 외에 아무도 못할지도 모르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푸른 눈동자를 생각하자 다시 입가에 미소가 새었다. 

사실, 찰스가 yes 라고 하건 no 라고 하건간에 별로 상관은 없었다. 놀리듯이 겹쳐온 붉은 입술이 선사한 짜릿한 첫키스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섹스도 좋았기에 기왕 연애 컨설턴트라면 아예 그 연애까지 실전으로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반은 재미삼아 제안해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 이론을 설명하면서 계속 자신의 눈을 피한 찰스의 태도에 조금 심술이 난 것도 돌발 행동의 원인 중 하나였다.  내일이 정말 기다려지는군.

에릭은 잔을 비우자마자 곧장 침대로 향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긴 것은 그의 성미와는 그닥 어울리지 않았다.


다음날 찰스는 아침 11시쯤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초인종을 누르면 될 것을 왜 손을 쓰느냐는 에릭의 말에, 찰스는 벨을 누를 때 나는 그 특유의 전자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결정했어?"
"....Yes."
"내 제안을 받아들인거라고 생각해도 되나?"
"그래요. 그나저나 누구한테 고백을 할 때는 좀 더 로맨틱하게-"


찰스의 컨설팅은 채 끝나기도 전에 에릭의 입술에 가로막혔다. 문가에서 느긋하고 부드럽게 키스를 나누던 둘은 천천히 안으로 발을 옮겼고, 그 뒤로 문이 닫혔다. 

 
by 치우타 2011. 12. 2.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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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디 흔한 클리셰지만 늘 그렇듯이 클리셰는 그렇기 때문에 인기가 있는 거겠지!!!!! 하고 알아서 자기합리화 ㅇㅇ
뱀파이어 AU는 여기저기서 본 것 같은데, 아직 완벽하게 내 취향인 작품을 보지 못해서 애석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게 되는 것은 자급자족이요 생각나는 건 썰이로다.

1. 둘 다 처음부터 Vampire로, 렌셔 / 이그재비어(자비에) 두 가문이 주축을 이루고 있고 쇼우측이 헌터.
2. 렌셔와 이그재비어 가를 헌터로 놓고 쇼우가 혼자 뱀파이어


3. 혼혈인 렌셔가와 순혈 이그재비어, 쇼우 가.... 너로 정했다!!!! 뙇!!

- 에릭네는 혼혈 뱀파이어지만 피가 옅은 편이라 낮에 돌아다닐 수 있고, 신체 능력이 약간 인간보다 우위인 것을 제외하고는 그닥 다른 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피를 안 마셔도 되고 마셔도 되고, 본인의 선택이 가능하죠. 혼혈의 경우엔 어떤 피를 이어받았느냐에 따라 능력의 발현이 다른데, 에릭은 옅은 혼혈을 타고난 것 치고는 드물게 능력이 겉으로 드러나는 편이라 부모님이 잘 가르치며 조용히 지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걸 순혈 뱀파이어 가문들 중에서도 야심 많고 음험하기로 소문난 쇼우가 알아버려서, 가족을 다 납치한 다음 인질로 삼고 에릭을 훈련시키기 시작합니다.

순혈의 피를 마시면 능력이 높아지거나 하는 경우가 있어서 에릭은 가끔 억지로 쇼우의 피를 마셔야 했는데, 좀처럼 에릭의 능력은 상승세를 보이지 않았던 거죠. 영 재미없는 미약한 반응만 보이니까, 쇼우는 시간 낭비만 했다고 혀를 차면서 에릭을 제외한 가족들을 싸그리 몰살시켜 버리고 맙니다. 거기에 이성을 잃은 에릭이 능력을 발휘하고, 쇼우에게 은제 나이프를 던져서 치명상을 입힌 다음 그대로 도망쳐 나오게 되었지요. 그때 당시 에릭의 나이는 17세.

쇼우는 갑작스럽게 입은 부상이 은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에 무척 화가 났지만, 그보다는 감히 혼혈이 순혈을 공격하다니! 하는 생각으로 바로 에릭을 추격하여 죽이려고 했지만, 마침 뱀파이어 평의회 Vampire councle 에서 그의 죄(혼혈 및 인간 납치, 감금, 실험, 고문, 살해 등) 를 묻기 위해 들이닥쳤고 쇼우는 잽싸게 몸을 돌려 달아납니다. 

한편 홀로 도망친 에릭은 어느 마음씨 좋은 노부부의 도움으로 그들의 일을 도우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부모님의 원수인 쇼우를 죽이기 위해 훈련을 계속하죠. 분노에 휩싸였을 때가 능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된다는 걸 안 다음부터는 마음 속의 증오를 주저없이 폭발시키는 연습도 했습니다. 나이를 먹으며 키가 크고, 신체능력과 더불어 그의 특별한 능력도 예전보다는 조금씩 강해졌지만, 제대로 된 컨트롤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큰 맹점이었어요. 이건 가끔 억지로 마시던 쇼우의 피 때문인데, 순혈의 피는 혼혈의 능력을 강화시키지만 한 번 마시게 되면 몸에서 주기적으로 피를 원하게 됩니다. 마약처럼 금단증상이 심하지는 않지만, 능력의 향상과 컨트롤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므로 무의식적으로 그걸 떠올리게 되는거죠.  거기다 쇼우의 피는 에릭하고 상성이 영 안 맞아서, 부작용이 더 심각한 편이었어요.

* 순혈의 피라고 해도 상성이 안 맞으면 플러스적인 효과보다 마이너스적인 효과가 더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에릭의 경우에는 불면, 흡혈욕구, 악몽이 마이너스적인 부작용으로 나타났죠. 순혈의 피로 얻게 되는 플러스 효과로는 능력 상승, 컨트롤 가능, 노화속도 지연, 신체능력 상승 등이 있고 마이너스 효과는 너무 많아서 다 추려낼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 여기의 뱀파이어들은 30대 즈음까지는 인간처럼 나이를 먹지만, 그 이후로 거의 300년 이상을 늙지 않고 유지할 수 있습니다. 노화를 조절할 수가 있어요. 특히 순혈에 가까울 수록, 그 피의 혈통이 고귀할수록 그 기간은 더 길어질 수 있죠. 그들의 유일한 약점은 은입니다. 햇빛에도 어느 정도의 데미지를 입기는 하지만 재생 속도가 더 빨라서 전혀 티가 나질 않아요. 다만 쇼우의 경우에는 물리적 능력이 강한 탓에 햇빛에 의한 부상도가 높고, 정신계 공격에 취약하다는 약점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10년이 그렇게 흐르고, 에릭은 쇼우의 수하였던 자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뱀파이어 평의회의 감시 대상이기도 했던 그들이 죽어나가자 평의회는 대체 멋대로 그들을 죽이고 다니는 게 누구인지 조사하기 시작하죠. 그 중심에는 바로,
 현 뱀파이어 평의회 의장이자 뱀파이어 이그재비어 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찰스 프란시스 이그재비어가 있습니다.  으앙 드디어 찰스가 나왔네요 ㅠㅠㅠㅠㅠㅠ 신난다

찰스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자면, 그는 강력한 정신계 능력을 지닌 현 뱀파이어 평의회의 최연소 의장입니다. 이그재비어 가문은 뱀파이어 혈통 중에서도 정통 왕가의 피를 이었기 때문에 그 세력이 강대한 것은 물론이고 어떤 뱀파이어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적대시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의를 차리게 될 정도로 훌륭한 기품과 능력, 거기에 뛰어난 외모와 매력을 가졌기 때문이었죠. 찰스는 특히 가문 사상 처음으로 텔레파시, 마인드 리딩, 컨트롤, 기억조작, 완전한 구속 등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존경과 경의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왕가의 적통이라는 증거로 시리도록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에 흰 피부, 뱀파이어임에도 불구하고 혈색이 도는 붉은 입술의 소유자였기에 남몰래 흠모하는 이들도 많았죠. 대외적으로 그는 귀족 가문의 학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평의회는 조사 끝에 에릭 렌셔라는 혼혈 뱀파이어가 쇼우에게 가족을 잃고 복수를 위해 추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의장인 찰스는 그의 비극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죠. 아무리 쇼우가 죽일놈이라고는 해도 순혈 뱀파이어였고, 그가 저지른 죄목은 평의회에 의해 심판받아야 마땅한 것이지 일개 혼혈 뱀파이어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었거든요. 질서와 법은 어딜 가나 엄격하니까요. 그래서 찰스는 에릭의 행보를 추적하다가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되었고, 일단 그를 구속한 다음 평의회를 열어 그의 신병을 자신이 맡겠다고 상쾌하게 선언하면서 에릭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버립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에릭의 복수 자체는 말리지 않겠으나 거기엔 의장이자 순혈 뱀파이어인 찰스가 동행하는 걸 조건으로 해서 가결시키기까지 하죠. 사실 평의회 의원들도 쇼우에게는 넌덜머리가 나 있던 참이었거든요. 워낙 오래전부터 말썽을 부려온 터라 처리는 해야겠는데 마땅히 나설 사람도 없고 해서 수배 명령만 내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아주 잘 알고 있던 찰스가 의원들을 살살 설득했고 모두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어요.

에릭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신병이 찰스에게로 귀속된 것을 알고 어이없어했지만, 어쩌겠어요. 그렇지 않고서는 멋대로 행동한 죄를 물어 오랫동안 갇히거나 자칫하면 사형에 처해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거든요.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었죠. 그러나 우리의 에릭은 팍팍하고 거친 인생을 살아왔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마지못해 승낙하는 태도였지만.

그렇게 둘은 같이 지내게 되는데, 찰스는 에릭이 쇼우의 피 때문에 오랫동안 부작용으로 고통스러워 했다는 걸 알고 그걸 천천히 치료해 나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합니다. 에릭은 그 말을 듣자마자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필요 없다고 말해요. 워낙 쇼우가 부모님을 인질로 잡아다 놓고 억지로 잔에 든 피를 마시게 했던 기억이 약간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어서. 찰스는 순순히 에릭의 말을 들어줍니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말해. 라는 말만 남기고 업무를 보러 돌아가는 찰스의 등을 보며 에릭은 순간 멍해지죠. 뭔가 엄청 낯설어요. 자신한테 이렇게 대해준 사람은 지금까지 가족과 그 노부부 뿐이었거든요. 평의회를 설득해서 자길 데려온 것부터 좀 이상한 뱀파이어라고는 생각했는데... 뭐하는 녀석이지. 에릭은 조금씩 찰스에 대해 흥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달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그믐날 밤, 에릭은 갑자기 전에 없던 흡혈 욕구가 솟구치는 것을 느낍니다. 제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어요. 예전에는 정말 못 참을 땐 동물의 피를 마시거나 하는 걸로 어떻게든 넘겼는데 이번엔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타들어가는 갈증이 온 몸을 지배하고 있었던 거죠. 누구 좀, 도와줘. 에릭은 절박한 심정으로 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찰스의 방에 비틀거리며 들어섭니다. 이 순간 생각난 건 찰스밖에 없었거든요. 언제나 자신에게 부드럽게 웃어주고, 인사를 무시하거나 마주 하지 않아도 한결같은 태도로 대해 주는 사람. 순혈과 혼혈을 차별하지 않는 맑은 눈동자. 괴로운 상태여서 그런지 그런 것들만 머릿 속에 꽉 차 있는 에릭이었어요. 찰스는 찰스대로 갑자기 애가 비틀거리면서 문을 쾅 열고 들어오니까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다가오죠. 에릭? 무슨 일이야, 어디 다쳤어? 아니면 아픈거야? 평소와 달리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자 에릭은 그게 귀여워서 픽 웃으려다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맙니다. 코를 스치는, 지나치게 달콤한 향기.

그건 바로 찰스의 혈향이었어요. 피부 아래에 흐르는 최상의 비약이 본능에 내몰린 에릭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킬 만큼 끝내줬던 거죠. 순식간에 에릭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그는 어떠한 경고의 말도 찰스에게 던지지 못한 채 그대로 찰스에게 달려들고 맙니다. 갑작스러운 바디 어택에 찰스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질 뻔 했지만 그가 누군가요.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최연소 평의회 의장 아닙니까. 빠르게 몸을 움직여 푹신한 침대에 안착할 수 있었죠.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송곳니를 드러낸 채 무서운 기세로 덮쳐오는 에릭이었어요. 당연히 찰스가 힘, 능력은 물론이고 혈통에서도 우위였기에 그를 제압하는 건 쉬웠지만, 찰스는 지금 에릭이 심각할 정도의 흡혈욕구에(부작용) 온 정신을 지배당했다는 걸 금방 알아차리고 일단 손목을 내어줍니다. 에릭은 목덜미를 물고 싶어했지만 처음부터 거길 내어주면 앞으로도 목에만 달라붙을 게 뻔히 보였거든요. 

에릭은 찰스의 흰 손목에 송곳니를 박아넣고 급하게 피를 들이마시기 시작합니다. 그 기세가 워낙 맹렬해서 처음엔 에릭의 등을 느릿하게 토닥이면서 쓰다듬던 찰스도 이거 위험한데. 하고 생각해요. 분명 흡혈을 멈출 정도의 피를 마시게 해 줬는데도 에릭이 그의 손목에서 도통 이빨을 뺄 생각을 안 하고 있었던 거죠. 게다가 찰스는, 쇼우와 비교한다면 1급수와 3급수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찰스는 결국 에릭의 머릿속을 읽는데... 맛있어. 달콤해. 죽어버릴 것 같군. 이대로 먹어버리고 싶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맙소사. 이런 경험이 없었으니 본능의 제어가 안 되고 있었던 거에요. 어쩔 수 없이 찰스는 에릭을 못 움직이게 만든 다음 천천히 에릭의 이빨을 손목에서 빼내고 그를 잠재웁니다. 입가를 찰스의 피로 물들인 채 새근새근 자는 그 얼굴을 보며 찰스는 쓴웃음을 짓죠. 그리고 뒤이어 찾아온 미약한 현기증에, 그대로 침대에 누워 역시 잠이 들고 맙니다.


으아아아 왜 이렇게 길엌ㅋㅋㅋㅋ 끝나질 않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이거 결론은 에릭이랑 찰스가 영원의 계약으로 맺어져서 잘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 그리고 찰스의 피는 당연하지만 에릭과 끝장나게 상성이 잘 맞는 바람에 저 날 이후로 에릭은 피가 마시고 싶어지면 어느때고 찰스에게 찾아갑니다. 네 피가 마시고 싶어, 찰스. 하고 말하는 얼굴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누가 보면 원래 둘이 피를 나누던 사이인 줄 알 정도였죠 ㅋㅋㅋㅋ.... 그래서 주변에 미리 오해하는 사람도 많았고... 찰스는 나중에 그걸로 에릭의 등짝을 가볍게 때려줍니다.

참고로 찰스 피의 부작용은 성적 욕구가 끓어오르게 되는 거 ㅋㅋㅋㅋㅋㅋㅋ 덕분에 찰스는 에릭한테 피도 주고 몸도 주고... 하는 그런 관계가... 으? 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는 과정에서 에릭은 찰스에게 푹 빠지게 되는 거죠. 솔직히 처음 봤을 때부터 뭐야 이렇게 귀엽게 생긴 얼굴이 평의회 의장이라고? 하고 생각했으니까요 ㅋㅋㅋㅋㅋ

이거 제목 정해서 써야겠다........... 언제쓸지 모르겠지만 암튼 ㅇㅇ... 자기 썰에 자기가 발리는 흔한 자급자족러네요 하하
by 치우타 2011. 11. 28. 15:31

"그럼 네가 해봐."


에릭은 충동적으로 내뱉았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에도 물론 스크래치가 생겼지만, 그보다는 묘한 오기가 생겼다는 쪽이 더 맞았다. 환자건 가족이건, 가벼운 관계건간에 누군가를 상대할 때 감정적으로 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찰스를 앞에 두고 있을 때는 그런 것을 잊어버리곤 했다. 찰스는 잠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윽고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괜찮겠어요?"
"뭐가."
"나, 키스 끝내주게 잘 하는데."
"그래서?"
"키스하면 섹스 생각이 날 것 같아서요."


자신만만한 어투로 말하며 생글생글 웃는 찰스를 보고 에릭은 마음 속 어딘가의 스위치가 탁, 하고 소리를 내며 켜지는 것을 들었다.  그의 눈빛이 아주 잠깐동안 형형하게 빛났다.


"해봐. 할 수 있으면."
"난 분명 말했어요."
"잔말 말고 해, 컨설턴트 씨."


에릭이 픽 웃으며 도발하듯 던지자 찰스는 천천히 에릭의 뺨을 양 손으로 감쌌다.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 눈동자에 잠시 넋을 잃은 사이에 색이 선명한 입술이 겹쳐져 왔다. 말캉한 혀가 느릿하게 입술을 쓰다듬고, 달래듯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치열을 핥다가 윗잇몸을 쓱 쓸자 에릭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그 틈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찰스의 혀가 파고들어와 천정을 더듬고, 아래로 내려와 에릭의 혀를 슬슬 건드리더니 그대로 끌어당겨 깊게 빨아들였다. 순간 에릭은 등줄기에 찌릿한 감각이 내달리는 걸 느꼈다. 

이게 키스라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런 식의 키스를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이나 낯설고 생소했다. 그렇지만 얽었던 혀를 당겼다가 풀었다가 하며 입 안의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요망한 움직임에 이쪽이 애가 탈 지경이었다. 결국 에릭이 찰스를 쫓아가 확 빨아들이며 깊게 얽혔다. 어느새 둘은 바짝 밀착해서 끌어안은 상태였고, 에릭은 정신없이 찰스와 키스를 나누며 온 몸에 기분 좋은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특히 하반신 쪽이 슬슬 위험한 느낌으로 달아올라서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쳤군, 키스 하나로 이렇게 흥분하다니.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끈적하게 붙어있던 둘은 찰스가 먼저 입술을 뗌으로서 간신히 기나긴 키스를 끝냈다. 가볍게 숨을 헐떡이던 찰스의 눈썹이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거봐요, 내 말이.... 맞죠?"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둘 다 침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거기다 에릭은 찰스 위에 올라타서 당장이라도 뭔가를 시작할 기세였다.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에릭은 혼란에 빠졌다. 찰스는 멍한 얼굴로 패닉 상태가 된 에릭을 보며 픽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내 키스가 끝내준다는 걸 확인도 했으니까 이제 키스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면 좋겠네요."


그대로 침대에서 빠져나가려는 찰스의 어깨를 갑자기 에릭이 꾹 잡아 눌렀다. 찰스는 돌발상황에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여전히 태평한 말투로 툭 내뱉았다.


"음, 에릭. 지금 뭐하는 거죠?"
"뭘 하는 것 같아?"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반칙인데."
"답을 뻔히 알면서 물어보는 것도 마찬가지지."


에릭의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올려다본 옅은 회청색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찰스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그 시선에 허리 부근이 찌르르하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기 때문에 흐트러지거나 흥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 기분이 좋았지만, 스트레이트에 가까운 에릭이(정보에 의하면)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욕정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던 탓이었다.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모양이야. 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의 힘을 뺐다. 말없이 긍정의 사인을 보낸 찰스의 행동을 보고 에릭은 이를 드러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키스가 시작되었다.



by 치우타 2011. 11. 28.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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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스릴러물이었다. 심리적인 긴장감과, 추리, 범인의 역습과 주연 인물들의 아슬아슬한 대처 등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다. 이건 꽤 괜찮네. 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가 끝난 후 저녁식사는 분위기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고 둘은 와인을 곁들여서 적당히 기분 좋게 마셨다. 에릭은 와인을 마시며 뺨이 발갛게 상기되는 찰스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내려와 밤이 찾아온 다음부터, 에릭의 눈에는 찰스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첫 만남이 원나잇이었던 만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거기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술기운을 즐기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지 찰스는 꽤 조용했고, 그 덕분에 에릭은 운전하면서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그의 흰 피부나 붉은 입술을 힐끔거렸다. 에릭의 아파트에 도착해서 카드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찰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와, 의사라 그런지 남자가 혼자 사는 집 치고는 무척 깨ㄲ...히익!"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찰스가 깜짝 놀라 신음을 울렸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에, 에릭?"


찰스는 꽤 당황하고 말았다. 이걸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설마 아침에 보자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에릭의 손이 셔츠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맙소사, 그런 모양이군. 그를 말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찰스는 금세 목 부근을 헤치고 이를 세우는 에릭의 팔을 일단 꾹 붙잡았다.


"잠깐요, 에릭. 일단 나 할 말이 있어요."
"....무슨 말."
"오늘의 컨설팅은 아까 저녁식사까지로 하죠."


약간 모호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에릭은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낮게 속삭였다.


"철저하군." 
"난 공과 사는 제대로 구분하자는 주의라서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득거린 두 사람은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내일은 일요일이었고, 거기다 찰스는 자고 가는 게 확정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에릭은 거의 작정한 사람처럼 찰스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첫 만남 때 혼자 아침에 눈떴던 경험은,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별로였던 데다가 낮의 자신만만하고 활달하던 컨설턴트가 침대 위에서는 이렇게 자신에게 매달려서 울고 애원하고 있다는 갭에 묘한 쾌감도 느끼고 있었다. 대신 오늘 에릭은 착실하게 콘돔을 사용했다(찰스는 집에 대체 몇 개를 놓아두고 있느냐며 혀를 내둘렀다). 새벽까지 이어지던 섹스는 여섯번째인가 일곱번째에 찰스가 절정을 맞고 그대로 기절함으로써 겨우 끝이 났다. 에릭은 다 쓴 콘돔을 쓰레기통 쪽으로 휙 내던지고는 정신을 잃은 찰스를 품에 끌어당겨 안고 자신도 잠을 청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이렇게 안고 자는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애매하게 깜박이는 정신 속에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가 금방 가라앉았다.


다음날 먼저 눈을 뜬 건 찰스 쪽이었다. 온 몸이 뻐근한 감각과 함께 햇살이 피부로 닿아오는 걸 느끼며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자, 눈 앞에는 마른 근육으로 탄탄하게 짜여진 에릭의 가슴이 있었다. 그걸 보며 찰스는 멍하니 지난밤을 회상했다. 기억이 끊어진 것 같은데. 지난 수요일에 했던 섹스보다 더 끝내주는 몸 상태가 됐겠군. 살짝 다리를 움직이자 허벅지에서 허리까지 묵직한 통증이 내달렸고 찰스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딱 죽을 맛이네. 컨설팅은 정신력으로 버텨야겠는걸. 일단 씻어야 될 것 같아서 에릭의 팔을 풀기 위해 꿈지럭거리는데, 더 꽉 끌어당겨지는 걸 느끼며 찰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가."
"샤워하러요."
"가는 게 아니고?"
"에릭. 난 여기 컨설팅을 위해 남은 거에요. 어제 섹스랑은 상관없이."


찰스가 달래듯이 말하자 에릭은 그제서야 순순히 팔을 풀어주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통증을 호소하는 허리 때문에 몇번이고 미끄러질 뻔 했지만, 어떻게든 욕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따뜻한 물을 맞으며 찰스는 에릭의 방금 전 행동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런 건 애인한테나 하는 행동인데 왜 나한테 한 걸까. 그냥 그러고 싶었나? 아니면 전에 먼저 갔다고 삐졌다던가. 찰스는 불퉁한 표정을 짓는 에릭의 얼굴을 상상하며 큭큭거리고 웃었다. 그런데 팔 힘은 진짜 세긴 하더라. 괜히 가슴이 설렐 정도였... 미쳤어 찰스 자비에. 정신차리시지. 찰스는 붉어진 뺨을 때려가며 물을 차가운 걸로 바꿨다. 앗 차거! 샤워실 내에 그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얼굴이 왜 그래?"
"....그냥 좀 부딪쳐서 그래요."
"어디 봐봐."
"됐으니까 샤워하고 나와요. 부엌 좀 써도 되죠?"
"어지르지 말고."
"누가 애인줄 아나 참..."


에릭이 샤워하는 동안 찰스는 베이컨을 굽고, 따끈한 오믈렛을 만든 다음 바삭한 토스트를 구워냈다. 늘 바쁘고 귀찮다는 핑계로 대충 먹거나 레토르트 식품을 애용하던 에릭으로서는 무척이나 감동적인 아침 식사였다(그런 사람 집에 식료품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네요, 라고 찰스가 중얼거렸다). 밥을 다 먹고 난 다음 찰스는 에릭에게 양해를 구하고 옷장을 활짝 열어서 체크했다.


"오.... 에릭.........."
"왜?"
"이건, 정말... 그러니까...... 이게..."
"말을 해."
"정말 당신 옷장.... 맞죠? 아버지 거라던가 할아버지 거라던가.....?"
"여긴 내 집이야."
"...........For god's sake..."


어정쩡한 중년 아저씨의 옷장도 이것보다는 나을지도 몰라. 찰스는 머리를 감싸쥐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양복이 제일 봐줄만한 거였다니, 맙소사. 신이시여.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연극을 하듯이 과장된 어투로 마음 속으로만 그런 말을 외치던 찰스는 비장한 얼굴을 하고 돌아서서 에릭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거야. 무섭게."
"에릭. 나랑 당장 나가요."
"뭐?"
"나가자구요. 안 되겠어, 이건 너무 심각해요. 그리고 이 옷들.. 아니다. 일단 쇼핑부터. 옷 입어요, 지금 당장. 차키도 들고."
by 치우타 2011. 11. 2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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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의 차에 올라탄 두 사람은, 아니 정확히 에릭은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어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전에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디로 가지?" 찰스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데이트의 주도권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거에요, 에릭."  "...좋아."  별로 생각해둔 곳은 없었지만 인스턴트적인 관계를 가지던 이들과 가던 장소들 중 몇 군데는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에릭은 운전을 하면서 조수석에 앉은 찰스를 조금씩 힐끔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밤에 봤을 때와 밝은 낮에 보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옷차림도 그렇지만 눈빛이나 말투가 확연히 차이가 나고 있었다. 바에서 만났을 당시에는 좀 더 유혹적이면서도 대담하고, 상대를 끌어당기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차분하면서도 쾌활하고, 예의바른 분위기였다. 잘 배우고 자란 도련님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슨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 같군. 낮에는 젠틀, 밤엔 섹시라니.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피식 웃고 있는 동안, 그걸 보던 찰스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좀 실례해도 되죠?"
".....밑도끝도없이 무슨 소리야."
"셔츠가 답답해서요."


에릭은 그제서야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찰스의 드레스 셔츠를 힐끗 바라보았다. 전에는 오픈형이었지. 그와 동시에 희고 유려한 선을 가진 목덜미가 떠올라 에릭은 재빨리 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좋을대로."


에릭의 허락(?) 이 떨어지자 찰스는 반색을 하더니 단추를 하나만 풀러내리고 큰 숨을 탁 토해냈다. "아, 이제야 살겠네..." 그 말을 듣고 에릭은 다시 찰스를 바라보았다. 겨우 그 정도로 저렇게 해방된 표정이라니. 답답한 걸 싫어하는 건가. 그러면 왜 저렇게 입고 온 거지? 갑자기 물음이 고개를 들었다.


"굳이 그렇게 입고 올 필요가 있었나?"
"클라이언트와의 만남이니까요. 카페 자체 성격도 있고. 거기다...."


말끝을 흐리는 찰스를 보고 에릭은 한 쪽 눈썹을 위로 쓱 치켜올렸다. 뭔가 켕기는 듯한 말투였다. "거기다?" 답을 재촉하기 위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되묻자, 돌아온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이런 걸 백주대낮에 자랑하고 다닐 순 없잖아요?"


마침 신호는 빨간불이었고 에릭은 '이런 게' 뭔가 싶어서 찰스를 쳐다봤다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 했다. 흰 목줄기를 중심으로 쇄골 근처까지, 몇 개의 붉은 울혈들이 자신의 존재를 과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희미하지만 이빨 자국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에릭은 순간 어이가 없고 황당한 가운데서, 이유모를 분노가 쾅쾅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연 그를 찰스가 먼저 가로챘다.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이거 범인 당신이에요."


에릭이 얼빠진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찰스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섹스한 건 수요일 밤이었어요. 덧붙여서 에릭, 진짜 집요하게 물어뜯었던 거 알죠? 난 상어한테 먹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세상에."  ..... 그러고 보니 흰 피부에 남는 자국이 마음에 들어서 집착하듯 두 번씩 깨물고 핥았던 게 기억났다. 에릭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고, 찰스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알았어요?"
".......음."


결국 찰스의 셔츠는 그 상태로 놔두는 데에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점심 식사를 위해 도착한 곳은 전형적인 아메리칸 키친이었다. 뷔페식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자유로운 식사 분위기였지만 사람의 습관이란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것이기에 찰스는 에릭의 테이블 매너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우아하게 의자에 앉은 자세부터, 손놀림, 식사 예절, 상대방에 대한 매너까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다. 교육받은 자제의 느낌이라고 하기엔 약간 딱딱했지만 오히려 그것때문에 절제된 동작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신경외과는 뭐 하는 데에요?"
"사람의 신경계를 다루지."
"어려울 것 같은데...."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야. 장단점이 있어."


에릭은 그닥 말이 없는 타입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어야 그에 대해서 더 파악하기가 쉽기 때문에 찰스는 종종 질문을 던지거나 화제를 꺼내 대화를 이끌어냈다. 에릭은 찰스가 툭 던져오는 질문이나 화제에 그럭저럭 잘 응해주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침묵이 찾아오면, 둘 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신기하군. 에릭은 지금까지 데이트(라고 할 수 있다면)를 하며 대화가 단절되는 순간이 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무기질적인 관계에 어색함까지 더해져서 참기가 힘들었는데, 찰스와는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무척이나 편안했다. 오래된 연인이라는 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군, 하고 잠깐 생각하던 에릭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 문장을 마음 속 저 밑으로 재빨리 구겨넣었다.

식사 후에는 찰스의 제안으로 백화점에 들렀다. 에릭이 평소 어떤 스타일을 입는지 궁금하다면서 그의 손을 거의 잡아끌던 찰스는 그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보라고 옷들을 향해 손을 쓱 펼쳐보였다. 에릭은 별 희안한 걸 다 시킨다며 황당해 했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옷을 골랐다. 눈을 반짝이며 그걸 지켜보던 찰스는 점점 표정이 굳어지더니 결국에는 경악한 얼굴을 하고 에릭을 바라보았다.


"...what?"
"그거, 진심이에요?"
"골라보라며."


찰스는 마음 깊은 곳에서 끄집어 낸 듯한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는 옷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영화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찰스는 내내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건 정말 강수가 필요하겠어. 어림짐작이 맞아떨어졌고, 80%정도 확신이 섰으니 남은 건 직접 가서 확인하는 일만 남았군. 마침 주말이고 하니까 기회도 좋고. 한편 에릭은 그렇게 찰스의 생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 표정을 보며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뭐야, 신경쓰이잖아. 그리고 그때 찰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에릭. 내일 약속 있어요?"


에릭은 머릿속에서 자신의 스케줄 수첩을 좌라락 펼치며 확인해보고 대답했다.


"아니, 없어."
"그럼 오늘 나 좀 재워줘요."


찰스의 폭탄발언에 에릭은 액셀 대신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 했지만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그 상황을 속도를 줄이는 것으로 해서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입을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동요가 실려 있었다.


"....왜."
"컨설팅의 일환이에요. 당신 평일엔 바쁘잖아요? 나도 들쑥날쑥하거든요. 제일 중요한 것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그게 뭔데?"
"내일 아침에 말해줄게요."


그래서 yes or no?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찰스를 보며 에릭은 아주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대체 뭘 하자는 건지도 궁금했지만, 재워달라는 뉘앙스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걸 어떡할지 고민하는 것 보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좋아. 재워주지."
"oh, how nice of you, Erik."


긍정의 대답에 찰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동작으로 감사를 표했고, 에릭은 전혀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며 마주 씩 웃어보였다. 천만에. 오히려 그 말은 내가 해야될 것 같은데, 찰스. 말이 되지 못한 생각의 꼬리표는 한 바퀴 그의 머리를 돌고 자취를 감추었다.


by 치우타 2011. 11. 21. 07:26


찰스의 꿀잠을 깨운 것은 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예전 고객이자 이제 절친한 친구가 된 행크 맥코이였다(그의 연애와 결혼은 전적으로 찰스의 덕분이었다). 그의 아내인 레이븐의 부탁으로 의뢰를 해야 할 것 같다면서, 잘 부탁한다는 인사와 함께 받은 클라이언트의 이름은 바로 어젯밤에 뜨거운 섹스를 나눈 바로 그 '에릭 렌셔' 였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찰스는 사적으로 감탄한 다음 일 모드의 스위치를 켜고 보내온 정보를 확인했다. 에릭 렌셔, 직업은 신경외과 전문의. 어쩐지 느끼는 곳만 골라서 사람을 괴롭히더니만... 3일 이상 지속된 관계 없음. 3일? 애매한 기간인걸. 저도 모르게 눈썹이 찡긋 올라간다. 그야 물론 하루만에 끝장나는 커플을 본 적도 있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아예 하루면 모를까 애매하게 3일이라니. 이건 개인 성격문제 같은데. 찰스는 종이를 펄럭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관심이 없는걸까. 아니면 그냥 단순히 연애 회의주의자일까. 일단 에릭을 직접 만나서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하며 찰스는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섹스는 끝내줬고, 그렇게 잘 생긴 얼굴에, 듣기 좋은 목소리에 잘 나가는 직업을 가진 남자가 인스턴드적 관계만 해왔다니.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잖아. 설마 패션센스 때문은 아니겠지? 평소 옷차림도 체크해봐야겠어. 

약속은 바로 이번 주 주말이었다. 아마 날 보면 눈 튀어나게 놀라지 않을까. 찰스는 괜히 피식 웃으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쳤다. 

대망의 토요일 아침, 찰스는 샤워를 깔끔하게 마친 다음 가운을 걸치고 나와 옷장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평소에 앞이 트인 오픈형 칼라의 셔츠를 즐겨 입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기가 무척 난감했다. 아닌게 아니라 에릭, 그 상어같은 남자가 물어뜯은 자국이 아직도 목과 쇄골에 보란 듯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틀이나 삼일이면 가라앉아서 잘 안 보이기 마련인데, 이건 무슨 이빨 자국도 아직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단 둘이 만나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약속 장소는 조용한 고급 주택가의 카페였던 관계로 옷차림에 더 신경을 써야만 했다. 답답하지만 할 수 없지. 찰스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우아한 디자인의 드레스 셔츠를 꺼내들었다.

카페에는 에릭이 먼저 와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올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그는 오늘도 그 나이먹은 중년풍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조만간 집을 습격해서 스타일 체크를 처음부터 해야될 것 같은데? 찰스는 그렇게 마음먹으며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고, 에릭은 청회색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가늘게 좁혔다. 내 옷차림을 보고 있는 모양이군. 행동심리학을 전공했던 찰스에게는 다 눈에 보이는 행동이었다. 


"연애 컨설턴트라고?"
"아마도요."
"아마도?"
"정확히는 라이프 컨설턴트라고 하죠. 난 고객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조금 도움을 주는 것 뿐이에요."
"예를 들면?"


범인을 심문하는 형사를 닮은 말투에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에릭의 눈썹이 냉큼 위로 치켜올라가는 것을 보고 일부러 더욱 쾌활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이런, 이거 신뢰도 테스트라던가 그런 건가요?"
"대충은."
"좋아요. 예를 들면, 섹스앤더시티의 주인공처럼 되고 싶다는 고객이 있었죠."
"뭐?"
"섹시하고 스타일리시한 뉴요커가 되게 해 달라는 뜻이에요."
".....아."


드라마 같은 걸 볼 리 없는 에릭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남자들은 드라마를 챙겨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는 하다. 그래도 섹스앤더시티는 엄청 팔린 드라마라서 이름 정도는 알 텐데. 아무래도 의대 다니면서 공부만 한 모양이군. 찰스의 머릿속에서 에릭의 정보가 또 하나 갱신되었다.


"그래서 스타일을 찾아주고, 그녀 자신이 모르던 장점들을 발견하도록 도와줬죠."
"어떤 식으로?"
"그 이상은 비밀. 클라이언트의 프라이버시라서요."
".....흠."

손가락으로 살짝 입술을 누르며 찰스가 윙크를 해 보이자, 에릭은 묘하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덥잖은 대화가 끝나고, 둘의 찻잔이 다 비워질 무렵 찰스는 컨설팅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에릭."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해."


던지듯이 말해오는 에릭의 말투에는 여전히 별로 관심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찰스는 머릿속으로 컨설팅 지도의 콘티를 한번 더 점검해 보았다. 컨설팅의 기본은 상대에 대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파악한 다음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 만남이지만 에릭의 패션센스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깝다는 결론을 내린 것처럼, 가까이에서 습관, 매너, 버릇, 말투 등등을 체크할 거고 대화 주제나 기본상식, 억양, 시선도 제대로 봐야만 했다. 좋았어. 모험을 시작하는 소년과도 같은 표정이 찰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우선 오늘 하루동안 저랑 데이트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찰스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는 '오늘 날이 참 좋군요 놀러가고 싶은 날씨네요' 처럼 아주 평이하면서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에릭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되물었다. (정말로, '멍청한' 어조로!) 


"......뭐라고?"
"이제부터 데이트 타임이라구요."
"누구랑?"
"Of course, me."


정말로 즐거운 듯 활짝 웃는 찰스를 보고 에릭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끝내줬던 원나잇 상대가 컨설턴트, 그것도 연애에 대해 가르치겠다며 눈 앞에 앉아있는 것도 그렇지만, 대체 이 남자는 뭘 믿고 이렇게 자신감에 넘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헌데 이상한 건 그게 싫지가 않다는 거였다. 선을 넘을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황급히 제지하러 달려와보니 선 바로 앞에 서서 예의를 차리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섹스하던 순간에는 완전히 주도권이 나한테 있었는데. 에릭은 괜히 심술이 났다.


"이유를 들어볼까."
"음, 그야 당신을 컨설팅하려면 우선 알아야 하니까요."
"....볼 거 다 봐놓고도 정식 절차를 밟자는 건가?"
"오, 에릭.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관계였잖아요. 우린 당분간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니까 당연히 정석대로 해야죠."


이쪽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는 장난기와 약간의 애정이 한 데 섞여서 반짝이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둘이 사귀는 줄 알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실제로도, 여기저기에서 둘을 힐끗거리거나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시선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일단 나가지."
"그러는 게 좋겠어요. 여긴 쓸데없는 소문이 잘 나는 카페라서."   


찰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고, 에릭도 그 뒤를 따랐다. 노래하는 듯한 가벼운 걸음걸이와, 무뚝뚝한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더니 이내 카페 문을 나섰다.

  
by 치우타 2011. 11. 13.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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