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경험이 없는 나한테 제대로 된 컨설팅을 하려면 실전이 최고인거 아닌가? 지금까지처럼."


패닉에 빠져 딱딱하게 굳어있는 찰스의 귓가에 들려온 에릭의 말은 너무 자연스럽고 태평한 어조여서, 도대체 무슨 말을 되돌려 주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연애를 안 해봤으니까 이론을 모른다는 말은 둘째치고 왜 그걸 나랑 하려는 거에요. 찰스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차마 입술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So, yes or no?"


지난주에 찰스가 에릭의 집에서 자고 가는 허락을 얻을 때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온 형국이었다. 에릭은 당황한 얼굴로 입술만 꾹 깨문 채 답이 없는 자신의 컨설턴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한테 저렇게 말했을 때는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약간 오만해서 귀여웠는데. 재차 답을 채근하기 위해 에릭이 말문을 여는 순간, 찰스의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내일..."
"음?"
"내일, 대답할게요. 하루 정도 시간을 줘요."
"OK, 그럼 내일 내 집에서 만나지."
"이렇게 됐으니까 오늘은 이만.. 갈게요."
"벌써?"


에릭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잠깐 우물쭈물하던 찰스가 톡 쏘듯이 말했다.


"누구 때문인데요."
"알았어. 기다리지."


내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보이는 제스쳐를 취하는 에릭을 슬 눈으로 흘기며 찰스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봐요. 짤막하게 인사를 던지고 최대한 빠르면서도 자연스럽게 카페를 빠져나오는 데에 성공한 다음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라타자마자 찰스는 탁 한숨을 내쉬었다. 백미러에 비춰진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아주 푹 익어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주여. 운전대를 두 손으로 꼭 쥐어잡고 머리를 쿵쿵 박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저 세 가지 단어만이 한데 뒤섞여 떠올랐다.

설마 에릭이 그런 제안을 해오다니....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애매한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었지만, 연애를 하자는 쪽으로 튀어오를 줄은 몰랐다. 찰스는 어떻게 운전해서 집에 돌아왔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등 뒤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일단.. 술을 마셔야겠어. 찰스는 찬장에 손을 뻗어 아껴두었던 브랜디 병을 꺼냈다. 생각해, 찰스. 어떻게 하면 될까. 

당연히 NO 해야지. 미쳤어? 확실하게 해.
아니, YES 라고 해야지. 넌 처음부터 그를 마음에 들어했잖아. 그런 끝내주는 섹시남을 그냥 포기하는 게 더 미친짓이야.

찰스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 계속 술을 들이켰다. 누가 보면 정말 딱 미쳤다고 하기 좋은 정신상태로군. 브랜디가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입 안에 털어넣은 찰스는 멍하니 천장의 무늬를 세면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건 미친 짓이라니까. 이성이 속삭였다. 그래, 나도 알아. 하지만.... 겁부터 집어먹고 도망치는 건 싫어. 그걸로 잃은 게 더 많았으니까.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망설임이 섞여 있었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게 빛나고 있었다.


에릭은 널찍한 소파에 앉아 잘 보지도 않는 뉴스를 틀어둔 채 느긋하게 위스키로 입술을 축였다. 그렇게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뜰 줄은 몰랐는데. LET'S MAKE LOVE, 라고 반쯤 짖궂게 던졌을 때 찰스의 얼굴 표정은 그야말로 볼만했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간 것도 똑똑히 두 눈으로 봤다. 에릭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도 얼굴 표정이(정확히는 색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쩌면 찰스 외에 아무도 못할지도 모르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푸른 눈동자를 생각하자 다시 입가에 미소가 새었다. 

사실, 찰스가 yes 라고 하건 no 라고 하건간에 별로 상관은 없었다. 놀리듯이 겹쳐온 붉은 입술이 선사한 짜릿한 첫키스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섹스도 좋았기에 기왕 연애 컨설턴트라면 아예 그 연애까지 실전으로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반은 재미삼아 제안해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 이론을 설명하면서 계속 자신의 눈을 피한 찰스의 태도에 조금 심술이 난 것도 돌발 행동의 원인 중 하나였다.  내일이 정말 기다려지는군.

에릭은 잔을 비우자마자 곧장 침대로 향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긴 것은 그의 성미와는 그닥 어울리지 않았다.


다음날 찰스는 아침 11시쯤에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초인종을 누르면 될 것을 왜 손을 쓰느냐는 에릭의 말에, 찰스는 벨을 누를 때 나는 그 특유의 전자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결정했어?"
"....Yes."
"내 제안을 받아들인거라고 생각해도 되나?"
"그래요. 그나저나 누구한테 고백을 할 때는 좀 더 로맨틱하게-"


찰스의 컨설팅은 채 끝나기도 전에 에릭의 입술에 가로막혔다. 문가에서 느긋하고 부드럽게 키스를 나누던 둘은 천천히 안으로 발을 옮겼고, 그 뒤로 문이 닫혔다. 

 
by 치우타 2011. 12. 2. 0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