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고 안에 들어와서도 이어지던 길고 끈적한 입맞춤은 찰스가 뒤로 몸을 슬쩍 빼면서 에릭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밀어내는 것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희미한 타액의 실이 자리했다가 금방 사라졌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에릭의 앞에서 찰스는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 잔소리와 닮은 컨설팅을 시작했다. 에릭은 '고백은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분위기를 잘 잡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 라며 조근조근 말을 늘어놓는 찰스의 입술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말 듣고 있어요?"
"그래, 알았어. 고백도 좀 로맨틱하게 하라는 거 아니야."


무신경한 어투로 대충 대답하며 에릭은 다시 눈 앞의 탐스러운 입술을 찾아들었고 그 당사자인 찰스는 겹쳐지는 입술에 기막혀했다. 이건 무슨 키스 귀신도 아니고 왜 이렇게 달려들어. 그야 물론 싫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떤 식의 전개가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에릭과 찰스는 연인사이가 된 상태였고 에릭의 키스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상당히 괜찮아지고 있었기에 찰스는 그의 시도를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뼈가 조금 도드라진 기다란 손가락이 슬슬 셔츠 안으로 들어오자 찰스는 그 손등을 찰싹 때렸다. 불시의 제지에 깜짝 놀란 에릭은 손을 멈췄고, 찰스는 에릭의 아랫입술을 슬 깨물었다가 놓으면서 그를 흘겨보았다.


"아프잖아."


조금 힘이 담겨있었는지 얼얼한 손등을 문지르며 에릭이 투덜거렸다. 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쌤통이라는 듯 새침한 어투로 대꾸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다짜고짜 덤비니까 그렇게 되는 거야."
"시간이 중요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그럼 뭐가 문제야."


장난감을 뺏긴 아이처럼 퉁명스러운 어조로 쏘아붙이는 에릭을 보며 찰스는 아주 잠깐 있는대로 인상을 구기다가 이마를 문지르며 최대한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에릭, 지금 우린 연애하기 시작했으니까 슬슬 정석 코스를 밟아야 하지 않겠어? darling?"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게 울리는 애정어린 목소리에 에릭은 멍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제서야 찰스의 뉘앙스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이번엔 넋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진화했고, 그 표정을 본 찰스는 장난꾸러기처럼 미소를 지었다.


"에릭? 괜찮아?"


찰스가 손을 뻗어 천천히 에릭의 뺨을 쓰다듬으며 눈을 마주하자 단정하면서도 섹시한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너무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해버린 거라는 걸 알았지만, 지난 주 부터 자신을 쥐락펴락하며 컨트롤러를 마음대로 움직이던 남자라고는 볼 수 없는 그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나왔다. 귀여운 구석도 있네. 마음 같아서는 키스세례를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오늘 첫 데이트고 뭐고 다 물건너가겠지. 찰스는 이성의 스위치로 본능을 꾹 눌러 억제하면서 자동차 열쇠를 쥐고 에릭의 눈 앞에서 흔들어보였다.


"나 배고파. 점심 먹을 겸해서 나가자."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에릭이 잠깐 흠칫하더니 눈을 몇 번 깜박이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먹고 싶은거 있어?"


당황의 기색을 다 지우지 못한, 약간 갈라진 목소리에 찰스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응, 이탈리안으로."
"OK."


운전은 내가 할 거야. 찰스는 오른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등을 돌려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뭔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지만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내내 에릭은 찰스의 바뀐 뉘앙스와 태도, 그리고 약간 오묘해진 눈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약간 허둥댔다(사실은 꽤 허둥거렸다). 간혹 헛기침을 하며 그러한 당혹감을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도리어 그런 제스쳐가 찰스로 하여금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찰스의 페이스로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에릭은 찰스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다가온 어떤 낯선 여자의 연락처를 얼결에 받아드는 실수를 범했고, 그걸 돌아오던 찰스가 목격하는 바람에 애정 어린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연애 첫날부터 이런 비매너는 난생 처음 당해보네."
"....비매너?"
"에릭.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은 다 일회성이라서 그런 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랑 연애하자고 했잖아. 첫날부터 연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왠 여자의 전화번호를 덥석 받는 행동이 매너있는 걸로 보이지는 않는데. 이어지는 목소리는 침착하고 나직했지만 에릭은 차라리 찰스가 인상을 쓰고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으면 거꾸로 생각해보는 것도 꽤 도움이 되지. 거꾸로 생각한다? 에릭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가 잘 안되는 것 같아."
"뭐 됐어. 연애 무경험자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면 안되지. 그래서, 그거 어떡할거야?"


찰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눈짓으로 연락처를 가리켰다. 휘갈겨 쓴 메모가 손가락 끝에 위태롭게 걸려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귀찮으니까 아무데나 던져 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 앞에는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막 연애를 시작한 괜찮은 연인이 있었다. 미련없이 종이가 구겨져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돌아가는 길에 마트 좀 들리자."
"살 거 있어?"
"저녁은 집에서 먹어야지. 왜, 밖에서 먹을래? 난 상관없는데."


똑바로 응시해오는 푸른 눈동자엔 다정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빛이 감돌고 있었고, 그 순간 에릭은 말과 눈동자에 담긴 뜻을 대번에 이해했다. 아니, 집이 좋아. 일어나지. 그의 대답에 찰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럼 점심은 자기가 내는 거다? 약간 과장된 애교를 담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였고 에릭은 픽 웃었다. 알았어. 
 
by 치우타 2011. 12. 7. 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