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8일자 연성. 성당에서 성가연습 하다가 떠올랐기에 제목이 이렇습니다.

 

추락(墜落). 그것은 중죄를 범한 천사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무서운 형벌이었다. 주님께서 내리신 은총을 잃고 천사로서의 지위와 모든 권한, 능력을 박탈당한 다음 지상으로 떨어진 그들에겐 ‘평범한 인간’ 으로서의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천사였을 때의 기억은 다 잊게 된다. 설령 나중에 어떤 특별한 경험이나 사건으로 인해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오히려 고통과 절망의 감정을 깊게 새기게 될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모두에게 존경받고 사랑받았던 천사 루시퍼가 지옥에 떨어져 악마가 된 것은 천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도 추락한 천사들이 몇 있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했거나 인간의 감정에 동화되어 천사로서의 본분을 잊은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전사로서 당연히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규칙들을 위배한 그들은 결코 다른 천사들에게서 이해받을 수 없었다. 추락자, 타락한 천사 등 마치 파문당한 신부와도 같은 대접을 받아야 했고,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었다. 천사들은 인간들의 기록에 나오는 것처럼 그저 신의 뜻을 행하는 사자가 아니었다.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군대’였던 것이다. 자신도 그 군대의 군인이었고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천사였다. 응당 그렇게 해 왔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믿음이, 흔들리거나 바뀌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 지옥에서 딘 윈체스터를 구해오기 전까지는.



“젠장, 캐스! 사람 궁금해서 미치게 만들어 놓고 자꾸 도망치지 말란 말이야!!!”



그는 격한 감정의 소유자였다. 기쁨과 슬픔, 분노, 절망, 괴로움을 직접적으로 부딪혀오며 상대가 천사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피력할 줄 알았다. 내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도 종종 농담을 구사하거나 화가 나면 눈을 노려보며 험한 말을 내뱉기까지 했다. 그러다가도 기쁜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살갑게 굴고, 무언가 켕기는 일을 저지르고 난 다음에는 눈을 절대 마주치려 하지 않는 등의 모습은 보는 쪽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런 그와 많은 일을 함께 겪고 대화를 나누고, 지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굉장히 낯선, 그렇지만 굉장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 이제까지의 자신에게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본능이 날카롭게 경고의 벨을 울리고 있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그 느낌은 너무나도 포근해서 섣불리 없애버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키워나가고 싶었다. 이때의 나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지금 자신의 선택이 앞길에 어떠한 운명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 지조차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는 어느 날 밤 갑자기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서 내 세계를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딘 윈체스터.

신의 명령으로 지옥에서 자신이 구출해내고 또한 지켜보고 있는 존재. 인간 헌터. 종말을 시작한 자이며 종말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자.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 고통을 포기하지 않는 약하면서도 강한 자.


........나는 그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천사들의 추락을 보아왔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서, 감정을 느끼게 되어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의문을 품게 되어서, 천사에 합당하지 않아서 지상으로 추락한 자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고, 충실하게 명령에 따라 행동해왔다. 하지만 딘의 눈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읽어낸 그 다음부터 시계 바늘은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지금도 눈앞에서 잠들어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불빛이 밝혀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것이 ‘감정’ 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대체 어떠한 감정인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연민과도 닮아있었지만 어딘가 다른 느낌. 왠지 이 감정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선택하게 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부정하고 잘라버리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이 앞에 보이는 길은 과연 평화인가, 고통인가.


조용히 손을 뻗어서 딘의 얼굴을 어루만져 본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체온이 따스했다.

이 마음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인가를 자문하며 눈을 감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나직이 읊조렸다.



-Parce, Domine.

(주여, 용서하여 주소서)

by 치우타 2011. 7. 28. 0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