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이 그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그건 단지 허울 좋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종말이 시작되던 그 순간부터 자신에게 선택권이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재커라이어의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분명 이걸 달가워할 사람은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딘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나뿐인 동생 샘과, 바비.

그리고.. 카스티엘.


- 난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어. 전부 널 위해서였다. 그런데 넌 고작 이런 걸 나한테 주는거냐, 딘?


그의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용서 없이 휘둘러오던 주먹과, 발길질과, 그 와중에도 피할 수 없었던 푸른 눈동자. 차라리 그대로 그 손에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딘은 피하지도 않았고 저항하지도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무기력했고 허무에 젖어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남아있는 것도 없고, 지키고 싶은 것도, 원하는 것도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의 용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서 하루하루를 기계적으로 보냈다. 더 이상은 숨을 쉬는 행위도 힘에 겨워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뭐, 솔직히 말해서 천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종말이 그렇게 간단히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이 그렇다는 거겠지. 천사와 악마가 서로 치고 박느라 지구는 꽤 망가질 게 틀림없었고, 자신이 승낙해버리면 샘이 루시퍼에게 어떤 대답을 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바라던 그대로, 천사들의 그것처럼 형제의 대결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아.

미안하다, 샘. 죄송하게 생각해요, 바비 아저씨. 지금까지 정말 감사했어요.



"그래서, 딘. 대답은?"

"...그 전에 조건이 있어."

"전에 이야기한 것 말고도 다른 게 있나? 말해봐. 들어주지."

"샘과 바비가 전쟁에 휩쓸리지 않는 것, 그리고 캐스..아니, 카스티엘의 안전을 보장해줘."


잠시 다른 그릇을 빌려 나타난 미카엘이 그 말에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찮은 인간인 내가 천사를 걱정하는 게 그렇게 우스운가? 딘은 무의식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이유를 물어보고 싶은 얼굴이니 분명...


"카스티엘을? 어째서지?"

"그런 건 상관없잖아."

"흠.... 어차피 그는 우리의 형제. 해를 가할 생각은 없다. 좋아, 전부 들어주지."


정말 약속을 지켜줄지 어떨지는 의문이었지만 지금의 딘으로서는 그저 믿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엎으려고 하면 반항할 수 있을까? 터무니없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던 그에게 미카엘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자, 딘. 이번엔 네 차례야."


딘은 잠시 눈앞의 천사와 시선을 마주하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되기 전에 실은 한 번 더, 캐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또 길길이 날뛰면서 얻어맞고 갇히기나 하겠지. 이상하게도 그를 속이는 건 너무 힘들었다. 오히려 샘하고 바비는 쉬웠는데.

깊고 푸른 눈과 트렌치코트가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딘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Yes."


미안해, 캐스.

.....I loved you.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순간, 눈부신 빛이 딘을 삼켰다.



***

카스티엘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는 쪽이 더 정확할까. 식당 안은 얼핏 보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단정하게 놓인 테이블과 식탁, 맛있는 음식 냄새,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거기에서 딱 한 가지 괴이한 것이 있다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악마들을 밟고 서 있는 한 청년이었다.


".....딘..?"


목소리가 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마음속으로 강하게 부정해본다. 카스티엘은 절박한 심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릴 때보다 더 절박하고, 더욱 간절한 마음이었다. 부디 온전히 그이기를. 나의 주님이시여. 제발.

청년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안녕, 카스티엘."


그리고 카스티엘은 절망했다.




딘 윈체스터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정장을 차려입고 흰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조용히 웃는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수많은 감정이 섞여서 때론 흔들리고, 눈물에 젖기도 하고, 장난꾸러기처럼 빛났던 초록색 눈동자는 그저 무감각하게 가라앉아 있다. 약간 과장된- 가끔은 격정적이고 강한 어조로 말을 자아내던 목소리는 차분하고 고요하다.

여기에 있는 것은 오직, 천상의 군대를 이끄는 대천사장 미카엘.


카스티엘은 도무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느 때고 냉철하던 그 이성조차 온데간데없이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시도했다. 미카엘에게서 딘을 이끌어내는 것을.

임팔라를 가져오거나, 그의 눈동자를 보며 호소하고, 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지나간 일들에 대해 추억해보기도 했다. 함께 나누었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도 전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무엇을 하건, 딘의 모습을 한 미카엘은 이렇다 할 반응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카스티엘은 최후의 수단으로 그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발 딘을 돌려달라고, 그를 돌아오게 해 달라고. 처절하게 빌었다. 존경하는 그의 형제이자 군대의 수장에게 애원했다.


"Oh, Cas..."


이윽고 미카엘의 입술이 열렸다. 그는 애처롭다는 시선으로 자신의 형제인 카스티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연민이 가득했다.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딘의 음색에 카스티엘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Just give up, and forget about Dean. He...is already within me. Now, this is the only 'vessel'."

"No...."

"Yes, Cas. and you must have to face up to the fact that he would never come back again." (너는 그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인정해야만 해.)


딘의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인정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무너져 내리는 카스티엘을 초록색 눈동자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카엘."

"아, 라파엘. 그쪽 상황은?"

"거의 다 정리되었습니다. 아스타로트와 베알제붑이 남아있긴 합니다만."

"루시는 어때? 아직도 거기에 있나?"

"그런 것 같습니다."

"흠. 샘 윈체스터... 생각보다 끈질기군. 그럼 갈까."


카스티엘은 멍하니 자리에 홀로 남겨진 채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딘- 아니, 미카엘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제발. 지금까지의 제 기도를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딘 윈체스터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걸 위해서라면 제 영혼도 능력도 아깝지 않습니다. 제발, 제발. 이렇게 애원합니다. 당신 앞에 엎드려 빕니다.

그를 돌려주십시오.


"딘, 딘, 딘....."


흐느낌이 섞인 낮은 목소리는 언제까지고 하나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by 치우타 2011. 7. 28. 0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