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한복판에 그는 서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은 훨씬 더 빨리, 간단하게 정리되었다. 이렇게나 쉬운 일을 그동안 미루고 있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도덕적인 기준에 의한 망설임과 약간의 자비. 그것만이 결정의 걸림돌이었다. 권능과 힘에 의한 굴복. 무력행사.

평정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지옥은 영영 닫히고, 지구는 한차례 시련을 겪었다. 인류의 숫자가 좀 줄어들었고 자연의 파괴는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죽이고 전쟁을 치렀다.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으로 불러온 희생과 피는 그들을 비로소 눈뜨게 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정화'되었다. 모든 것이 운명의 나침반대로 흘러갔다. 이제 남은 건 딱 한 가지뿐이다.


"딘."


 그는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던 사랑스러운 존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깊은 심연이 자리하고 있던 녹색 눈동자에는 한 점의 티끌조차 보이지 않았다. 늘 희노애락을 강하게 표현하던 얼굴에는 어딘가 편안한 듯 무심한 듯, 희미한 미소만이 입가에 걸려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얌전히 자신의 손을 얹어온다.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품에 안는다.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이 고개를 부벼오는 행동에 그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달콤한 시간. 살짝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다 끝났다. 너를, 아니... 우리를 위협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천천히 뺨을 쓸어내린다. 손길에 가만히 기대오는 모습이 애처롭고, 사랑스럽다. 갈 곳을 잃은 새끼고양이처럼 가만히 응시해오는 그 눈동자에 왠지 모를 가학심이 고개를 든다. 쓰다듬던 손을 내려 목에 가져간다.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손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점점 죄어드는 손에 숨이 막혀옴에도 저항조차 하지 않는다. 호흡이 가빠지고, 신음이 갈라지고, 입술이 바싹 말라도 그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왠지 가엾어져서 그만두자, 몇 번 콜록대며 기침을 하더니 휘청거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재빨리 꽉 껴안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살아있다. 여기에, 내 옆에. 숨을 쉬고 있다.

갑자기 격한 안도감이 덮쳐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짧게 입맞춤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전에 네가 말하던 음악을 찾았다."


품에 끌어안다시피 해서 함께 걸었다. 부서지고 무너져서 형태를 찾기 힘든 집들 사이로, 축음기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입술에서 말이 흘러나온다.


"듣고 싶어."

"얼마든지, 딘."


품에서 잠시 놓아주었더니 축음기에 직접 판을 놓고 바늘을 맞춘다. 능숙한 손동작에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의 영상이 머리를 헤집고 지나간다. 총을 만지던 손가락. 칼을 던지던 그 손가락. 어떤 상황에서든지 아름답던 그 손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피 냄새에서 해방되었다. 그 사실이 기뻐서 가만히 등을 끌어안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딘. 사랑스러운 딘.

바늘이 자리를 찾더니 이윽고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Non, Rien de rien  아무것도 아니에요

Non, Je ne regrette rien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Ni le bien qu'on m'a fait   사람들이 내게 줬던 행복이건 불행이건 간에.

Ni le mal tout ca m'est bien egal  그건 모두 나완 상관없어요.

Non, Rien de rien  아무것도 아니에요

Non, Je ne regrette rien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Car ma vie, car mes joies   왜냐하면 나의 삶, 나의 기쁨이

Aujourd'hui, ca commence avec toi  오늘, 그대와 함께 시작되거든요.


딘은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카스티엘도 따라 미소지었다.

여기는 낙원.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by 치우타 2011. 7. 28. 0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