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판자가 발걸음에 따라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스티브는 문득 마법 같은걸로 발소리를 죽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부질없는 소망이라는 것을 알고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차피 눈치챌 거라면 입구에서부터 그 낌새를 느꼈을 터. 스티브는 허리에 찬 무기와 집 안의 구조를 차분하게 되새기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다. 풋내기 헌터로 시작했던 스티브가 5년이 넘도록 쫓아왔던 뱀파이어 일족의 수장- 군주의 자리에 있는 자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헌터 협회에 이 사실을 알리고 추가적인 지원을 받아야 했지만 스티브는 누구에게도 이 정보를 흘리지 않고 혼자 움직였다. 닉이 알면 인상을 쓰면서 규칙에 대해 하루 종일 읊어대겠지. 콜슨도 곤란한 얼굴로 그에게 주어질 벌칙에 대해 설명할 거고. 스티브는 특별히 제작된 총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잠깐이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가는 언제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곳에 와 있건만, 뇌는 제멋대로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슬슬 집 안쪽에 다 들어왔는데. 


 "늦었네, 스티비. 나 오래 기다렸어."


 귓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스티브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우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지는 그를 보며 갑자기 나타난 인영이 짧게 혀를 찼다.


 "조심해. 이 집은 낡아서 언제 부서질 지 모른다고.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네 피에서는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난단 말이야. 어둠 속에서 남자가 낮게 웃었다. 스티브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총을 겨누었다. 방심했다. 언제든 원하는 곳에서 나타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잊어버린 것도 아니건만, 평소보다 더 헐렁한 마음가짐으로 와 버리다니. 전부 저 남자 때문이었다. 스티브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나타나는 게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하나?"

 "오, 뱀파이어에게 지금 도리를 논하는 거야? 스티비. 귀엽기는."

 "귀엽다고 하지 마."

 "그럼 섹시하다는 건 어때?"

 "토니!"


 아, 드디어 이름을 불러 주는군. 토니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스티브의 총이 정확하게 심장을 겨누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태도에 오히려 스티브가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스티비, 난 너를 해치지 않아. 알고 있잖아."

 "내가 널 죽일 거라고 해도?"


 토니가 다시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그는 일부러 달빛이 비추는 곳으로 움직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금방이라도 어둠 속에 녹아들 것만 같은 검은색의 연미복, 갈색의 머리칼과 반짝이는 그린 헤이즐넛 눈동자. 창백한 피부는 달빛에 반사되어 오히려 생기가 있어 보였다. 스티브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금방이라도 쏠 것처럼 총에 손가락을 걸었다. 토니의 눈이 아주 잠깐이지만 금빛으로 번쩍거렸다.


 "영생을 살아본 적이 있어?"

 ".........."

 "스티브, 5백년 정도를 살다 보면... 누군가 내 목숨을 끝장내는 상상을 하게 되거든. 물론 당시엔 우리 일족이 워낙 개판이라서 그런 생각은 꿈도 못 꿨지만, 어쨌거나. 지저분한 일도 처리했고 인간을 죽이는 놈들도 다 잡아다 처형한 지금은.. 난 당장에라도 죽고 싶어."


 특히 너처럼 섹시하고 잘 생긴 헌터가 그렇게 해준다면 금상첨화겠지. 토니가 다시 웃었다. 


 "오늘은 사냥의 밤, 만월이지. 십년 전부터 내 후계자도 정해 뒀고, 걔도 나처럼 사람 죽여가며 피 마시는거 싫어하는 애라 괜찮을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사정없이 은 탄환을 쏴도 좋아. 스티브. 속삭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달콤해서,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더 확실하려면 나무로 심장에 말뚝을 박아야 하겠지만.. 너무 끔찍하겠지? 토니는 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 물건의 실체에 놀란 것은 스티브 쪽이었다.


 "넌 착하니까, 이건 내가 직접 할게.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돼."


 바로 여기에. 토니는 총구를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스티브는 흠칫하며 고리에서 손가락을 뺐지만 총을 완전히 치우지는 않았다. 상대는 뱀파이어 군주였다. 가장 오래되고, 순혈 중에서도 당해낼 자가 없으며, 사람을 죽이지 않는- 별종 뱀파이어. 스티브는 가만히 토니를 내려다보았다. 토니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생의 끝을 말하며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감히 내 앞에서. 나에게. 스티브는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싫어."

 "스티브?"

 "당신이, 날 살려냈잖아. 당신이 나를 키웠잖아. 날 헌터로 만들었잖아! 그래놓고 이젠 죽이라고? 아무런 설명도, 말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으면서! 사랑한다고 했잖아. 내 옆에 있을 거라고 했잖아!"

 ".....스티브..."


 총을 아무렇게나 구석에 집어던진 스티브는 눈 앞의 토니를 품에 억지로 잡아당겨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어차피 이 정도로는 아픔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정작 토니는 미약하게 신음소리를 냈지만 스티브의 팔에 더 힘이 들어가게 했을 뿐이었다. 


 내가 당신을 사냥했으니까, 이제 나한테 줘. 죽을 거라면 그 목숨은 내 거야. 


 토니의 목줄기에 자신의 피가 든 주사기를 꽂아 넣으며 스티브가 속삭였다. 송곳니를 통해 마시는 피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혈관에 파고 들어오는 피냄새에 토니가 짧게 고통어린 목소리를 냈다. 스티브, 스티브. 애처로운 부름이 몇 번 이어지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스티브는 품 안에 늘어진 몸을 고쳐 안았다. 그들에게 남겨진 밤은 아주 길었다.


by 치우타 2015. 7. 18. 2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