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는 소박한 규모에 비해 제법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아스가르드에 있는 토르를 제외한 전 어벤져스 멤버가 타워로 이사온 걸 축하하며, 겸사겸사 우주에서 온 퀼(스타로드라는 호칭을 듣고 다들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말했으며, 스티브만이 애매한 표정으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과 인사를 나눴다. 파티 내내 퀼은 토니 옆에서 떠날줄을 몰랐고, 적당한 너스레와 유치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자정이 조금 못 되어 파티가 끝나자 다들 각자의 층으로 돌아갔다. 스티브는 퀼이 잠시 로켓의 연락을 받는 사이에 토니와 뭔가 대화를 나누고는 돌아갔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음? 아. 요새 하고 있다는 임무가 있대서."
"쉴드 기밀?"
"거긴 늘 그렇지."

 흐으음. 약간 불만스럽다는 듯 흥흥거리자 토니는 퀼의 콧잔둥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토니이. 코맹맹이 소리로 칭얼거리는 연하 애인은 요즘 들어 부쩍 질투도 심해지는 게 제법 귀여웠지만, 미리 컨트롤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귀찮은 일이 될 터였다. 

"쓸데없는 생각 자꾸 하면 난 잘거야."
"! 안 돼, 우리 일주일 만이잖아, 못 자요."
"그럼 빨리 와. 누구 때문에 술도 마음껏 안 마셨는데.."

 토니는 약간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퀼의 포옹을 풀고 침실로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른하면서도 섹시한 그 표정에 퀼은 등이 뜨끈하니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허둥지둥 쫓아가 다시 끌어안았다. 

"...밤 샐수 있어요?"
"언제는 안 새게 만든 것처럼 말한다, 너. ..흐응..아.."
"그럼 사정 안 봐줘도 되겠네."
"전처럼 온통 물어뜯진 마, 아프니까... 아, 사람 말 좀 들어! 이 바보가.. 윽, 흣..."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덥석 목덜미를 물어오는 이빨의 감촉에 토니가 타박하며 퀼의 등짝을 때렸다. 내 거야. 토니. 스티브에 대한 건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엉뚱하게 소유욕을 불태우는 모습에 토니는 픽 웃어버렸다. 내가 봐 주는 건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네. 

by 치우타 2015. 1. 16. 01:16

"속도 좀 더 내봐. 이것밖에 안 돼?"
"몇 번을 말했지만 이거 니 비행기야, 이 얼간아! 최고 속도로 가는 중이거든? 눈은 장식이냐?"

 로켓의 폭언을 듣고서도 퀼은 쉽사리 조종간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이 길어지는 바람에 사흘은 무슨, 거의 일주일 가량을 지구에서 떨어져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토니와 어떻게든 음성으로 연락을 주고받는건 가능했으나 묘하게 가슴 한 구석에서 기분 나쁜 예감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게다가 어젯밤 대화를 나눌 때 주위가 제법 시끄러웠기에 물어봤더니 '새 식구들이 올 것 같다' 고 토니가 말했던 점이 특히 신경 쓰였다. 새 식구라니? 타워에 누가 또 온다는 뜻인가? 설마 캡틴은 아니겠지. 

"도착 예정 시간은?"
"20분 남았어. 이제 그만 엉덩이 붙이고 내릴 준비 하던지, 아니면 꼴사납게 구르던가!"
"타워 위에 세워. 알아서 내려갈 테니까!"

 뭐라고 궁시렁거리며 욕을 주워섬기는 로켓에게 퀼은 활짝 웃어보였다. 저렇게 좋을까. 지구에 애인이 생겼다면서 우주보다 지구에 눌러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 퀼은 바람둥이 생활도 싹 청산해서, 동료들에게 놀라움과 경악을 선사했다. (설마 너 죽을때가 된 건 아니지? 가모라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게다가 상대는 무려 지구 최고의 셀렙- 그것도 남자라고 했다. 인간들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로켓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퀼이 내려간 걸 확인하자마자 쌩 하니 우주선을 돌려 날아가 버렸다.

"토니! 토니! 나 왔어요! 토니!"
"억, 퀼.. 으윽. 숨막혀, 네 덩치로 그렇게 달려와서 껴안으면 어떡해?"
"보고싶었어요, 정말 죽는 줄 알았어... 빨리 뽀뽀, 아니 키스. 아니 침대부터-"

 돌아오자마자 바디 어택을 선사하는 것도 모자라 다짜고짜 침대 운운하는 퀼의 옆구리를 토니가 세게 꼬집었다. 아야! 토니! 엄살이 반쯤 섞인 비명을 한 귀로 흘리며 토니는 엄격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어제 말했잖아. 새 식구들이 들어오고 있단 말이지. 밤엔 몰라도, 지금은 절대로 안 돼."
"여긴 당신 전용층인데도요?"
"그건-"
"토니, 잠깐 이것 좀 봐 주겠나?"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려던 퀼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도저히 착각할 수 없는 목소리, 진중한 톤. 소리없는 발걸음. 설마. 기름칠 덜 된 기계마냥 끼기긱 소리를 내며 퀼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편안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스티브가 투명 패드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퀼과 눈이 마주치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데? 줘 봐. ....흠. 여긴 전용 트레이닝 룸이야. 아까 말한대로 침실은 여기고."
"아, 어쩐지 평수가 조금 다른 느낌이더군. 알려줘서 고맙네."
"별것도 아닌데 뭘. 다들 이사 끝나면 홀로 모이라고 해. 저녁에 파티나 하자고."
"좋아. 그때쯤이면 정리도 마칠 수 있을 것 같고."

 이게 무슨 상황이지? 퀼은 자신의 신체적 성능을 의심해 본 적이라곤 단 한번도 없지만, 지금만큼은 어디 한 군데가 이상해져있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사? 파티? 다들? 그리고 스티브 로저스? 퀼은 뭔가 말하고 싶은 사람처럼 입을 뻐끔거렸으나 토니는 나중에, 라고 속삭일 뿐이었다.

"이제부터 같이 살게 될 테니 다시 인사해야겠군. 잘 부탁하네."

 그리고 스티브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퀼은 직감적으로 그가 독점하고 있던 링 위에, 강력한 도전자가 발을 들이려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싸움은 안 하는게 좋다는 주의지만 거기에 사랑이 걸려 있다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고 만다. 퀼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씩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아주 세게.

"나야말로 잘 부탁해요, 캡틴."

by 치우타 2015. 1. 16. 01:15

 스티브는 십여분째 꽃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수줍게 피어난 핑크빛 장미꽃은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사가지고 갈까? 상대는 많은 걸 가진 남자였지만(게다가 이젠 애인도 있다) 의외로 소박하고 단순한 것들에 약했다. 뭐 이런걸 사왔느냐고 농을 던지면서도 살짝 미소지을 옆얼굴을 떠올리자, 마음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캡틴? 왠일이야? 오늘은 숙제도 없는데."
"지나가다 들렀네. 커피나 한 잔 얻어먹을까 하고.."
"그거.. 좀 의외인걸. 들어와. ....장미꽃은 왜 사왔어?"
"커피값, 이라고 하면 이상한가?"

 그 자신이 놀랄 정도로 말이 쉽게 미끄러져 나왔다. 토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번 깜박이더니, 곧 부드럽게 웃으며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스티브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흠, 당신이 점점 21세기 남자가 되어가는 건 알겠어. 여전히 클래식하지만 그게 매력이기도 하고. 땡큐."
"칭찬 고맙네."
"뭐 마실래? 캡틴 아메리카노?"
"새로 나온 커피인가? ...농담이야. 그걸로 주게."

 스티브는 토니가 피식 웃으며 커피 머신을 작동시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에 거슬리는 덩치가 없으니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토니는 제 것이라고 주장하는 양 시종일관 들러붙어서 노려보는 꼴이 우스웠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승부욕 또한 끓어오르고 있었다. 전에도, 이번에도 늦어버렸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동그란 뒤통수를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스티브의 시야에 토니의 목덜미가 들어왔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 커피... 헤이, 스티브? 캡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조금."

 토니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에 스티브는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래. 기회가 있건 없건 해보지 않고서는 결과도 알 수 없다.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토니에게 스티브는 그저 말없이 웃어보였다.

by 치우타 2015. 1. 1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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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는 요즘 약간의 스트레스와 흥미로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좋은 일이 안 좋은 일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시커먼 남자들사이에 끼어 있다는 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토니! 뭐 해요. 숙제? 연구?"
"잘 아네. 숙제 중이야. 오늘 캡틴이 가지러 올 거거든."

음흠? 캡틴이라는 말에 퀼의 고개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기울어졌다. 아,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 토니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캡틴- 스티브는 한 시간 이내로 도착할 것 같다는 연락을 준 상태라, 말을 안 하는 쪽이 나중에 더 괴로웠다. (내가 너같이 한창때인 줄 알아? 그만 좀, 아, 너 진짜... 흐응!) 

"요즘 너무 자주오는 거 아닌가? 거긴 뭐 할일도 없대요?"
"안 도와주면 쳐들어오겠다는데 어쩌겠어."
"흐음. 의외로 쉴드라는 집단이 무능한 모양이네."
"부정하긴 힘들군. 그런데.. 왜 이렇게 달라붙어?"
"좋아서 그래요. 뭐 이유가 있나."

질투하는건 아니고? 토니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다. 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오늘은 스티브를 최대한 빨리 돌려보낸 다음 트레이닝 스케줄을 잡아서 퀼을 잠시 떨어뜨려 놓을 것이다. 안 그러면 그의 몸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Mr. Rogers의 방문입니다.] 자비스의 알림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바쁜데 미안하군, 토니.. ....그리고 스타로드."
"헤이 캡틴, 좋은 오후죠? 자주 보니 반갑네요."

퀼은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스티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손으로는 토니의 허리를 붙든 채로. 스티브는 잠시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었지만 곧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걸 깨닫고 애써 평온을 유지하며 손을 마주 잡았다. 두 남자의 손이 굳은 악수를 나눴다. 다 좋은데 난 빼고 해. 토니는 속으로 뻐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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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윗롱거로 쓴 단문입니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아저씨랑 프랫 포옹짤보고 퀼토니 뻐렁...

by 치우타 2015. 1. 12. 22:18

 스티브와 토니가 뉴욕사건 후 제법 길었던 신경전을 끝내고 마침내 사귀기 시작했을 때, 둘 사이엔 여러 가지 문제와 차이점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스킨쉽이었다. 특히 키스.


"..으읍... 응..! 읍! ...푸하, 잠깐, 잠깐만 스티브.. 스톱!"

"...후우... 토니..? 갑자기 왜 그래?"

"기분나빠하지 말고 들어. 당신 키스 몇 번 안해봤지?"


 토니는 최대한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스티브에게 질문을 던졌다. 듣자마자 스티브는 얼굴을 조금 구기더니 곧 살짝 붉혔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거 참 혼자서도 잘 하네. 토니는 팔짱을 끼고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그... 으음. 당시엔 전시였고, 알다시피 그럴만한 기회는 별로 없었어."

 "경험이 거의 없다는 거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스티브는 뭔가 떨떠름한 얼굴로 토니의 말에 수긍했다. 좋은 분위기에서 키스를 나누다 갑자기 스톱이라고 외치길래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는가 싶었더니... 무드가 호로록 저 멀리로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내가 물어본 건... 당신이 너무 키스를 못해서 그랬어.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

 "아니, 사과할 것까진.... 뭐? 내가 키스를 못한다고?" 

 "그래. 왠만하면 이런 이야긴 안 하는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못해. 스티브."


 스티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고, 입이 쩍 벌어졌다. 사실 자신은 토니에 비해 연애경험도 없는거나 마찬가지였고, 깨어난 다음엔 세상이 위험하다며 임무에 내몰려 뛰어다니기 바빴다. 뉴욕 사건이 정리되고 나서 한숨 돌리나 싶었더니 자잘한 일들 때문에 바빠서 누군가를 만날 여유도 없었으며 토니와 으르릉거리다가 이런 사이가 될 줄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키스를 못한다니! 그것도 직접 연인의 입으로 듣다니!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스티브. 당신 지금 뭔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이런 건 연습하면 좋아져."

 "연습...?"

 "그래. 솔직히 늘 현역으로 지냈던 나랑(이 시점에서 스티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군인으로 나라 지키다 얼어붙었는데 녹자마자 또 지구 방위대나 하고 있으니 누구랑 만나도 키스할 짬이나 있었겠어? 당신 천천히 진행하는 거 좋아하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뭐 그럴 수도 있지. 난 충분히 이해해. 연습을 해 보자고. 당신은 뛰어난 학생이라 금방 될거야."


 토니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스티브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키스는 분위기도 중요하지만 첫 스타트를 어떻게 하느냐가 정말 중요해. 잠이 확 깨느냐, 나른하게 침대로 가고싶어지느냐로 갈리거든." 토니가 느긋하게 스티브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스티브는 벌써부터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뛰는걸 느끼며 괜시리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잘 봐. ...이렇게... 천천히 입술을 붙이고..." 

 "으음..."


 배우는 데엔 실전이 최고지. 토니는 입술이 맞닿은채로 조그맣게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눈을 감으며 키스를 시도했다. 살살 부비면서 슬금슬금 허락을 구하듯 혀로 핥아오는 움직임에 스티브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침범해온 말캉하고 축축한 혀가 치열과 천장을 조심스럽게 건드리고, 스티브의 혀에 닿자 유혹하듯 몸을 뒤로 뺐다. 안달이 난 스티브가 쫓아가서 붙잡고 얽어올리자 콧소리가 새었다. 흐응, 응... 아까보다 훨씬 듣기 좋고 달콤한 울림이었다. 토니가 천천히 그를 잡아당겨 침대로 이끌었고, 스티브는 얌전히 그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겼다.


 "...후으.. 어때. 처음 치고는 잘 따라왔는데, 귀염둥이."

 "....맙소사.. 언제 침대로 온 건가?"

 "이런 게 키스라는 거야. 얼음덩이 초보씨. 그래도 금방 잘하겠어.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토니가 눈을 찡긋하며 야릇한 손길로 셔츠 위를 더듬었다. 스티브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토니를 그대로 밀어 눕혔다.


 "그럼 오늘 밤에도 많이 가르쳐 주겠나? 배울 게 많을 것 같거든."

 "오, 물론이지. 난 아주 끝내주는 선생님이잖아? 얼른 덤벼, 허니."


 잘 생긴 스티브의 얼굴에 짙은 욕망이 떠오르는 걸 보며, 토니는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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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은 어벤 후~윈솔 이전입니다. 괜히 스티브한테 키스 가르치는 토니가 보고 싶어서...

by 치우타 2015. 1. 10. 22:57

 "날이 춥군."


 토니는 차 뒷좌석에 앉으며 어깨를 조금 떨었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곧 눈이 내릴 것이라고 보도했던 어젯밤의 뉴스가 그제야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동시에 그닥 좋지 않은 일도 함께 떠오르는 바람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나만 잘못한 것도 아니었지. 토니는 팔짱을 끼고 잔뜩 불편한 얼굴로 창 밖을 노려보았다. 가엾은 운전수는 오전에 태웠을 때보다 한층 기분이 나빠보이는 그의 얼굴을 백미러 너머로 몇 번 힐끔거리다 그만두고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게 내 잘못이야? 스케줄은 늘 자비스가 업데이트 하고 있잖아, 말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2,3분 정도 시간을 낼 수도 있잖나. 왜 그렇게만 생각하지?"

 "누군 그러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아...! 연말이라고! 당신은 모르겠지만, 일년 중 제일 바쁜 시기!!"

 "바쁘다, 바쁘다.. 늘 같은 핑계만 대는 것도 지겹지 않나? 토니."

 "....이 꽉막힌 얼음덩이가 정말!!"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한 말다툼이었다. 12월이 되자 토니는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 대신 각종 이사회와 주주총회, 기술세미나, 실적보고 및 기타 굵직한 회사 내외부적인 일정에 의무적으로 얼굴을 보여야 했다. 비록 최고 경영자의 자리는 페퍼에게 일임한 상태였으나 전 최고경영자 및 회사의 톱 엔지니어로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이사들과 주주들이 불안해 한다는 게 그 이유 중 한 가지였다. 


 그보다 더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시달려 본 적이 있는 토니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얼음에서 깨어난 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방황하다 늦게나마 제 짝을 찾은 스티브에겐 연인과 함께 하는 연말을 거의 통째로 빼앗기는 게 서운했던 것이다. 토니라고 그렇지 않았겠느냐만, 최근 일주일이 넘도록 밤에 잘 때 빼곤 대화할 시간도 없는 상황이 싫었던 스티브는 평소의 침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피로함을 뒤집어쓴 채 돌아온 토니를 몰아붙였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푸념과 비아냥을 듣던 토니도 결국엔 같이 폭발해서 아침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나온 상태였다.


 ".....나라고 바쁜 게 좋은 줄 알아? 멍청한 캡시클."


 운전수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토니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렸다. 문득 시선이 닿은 창 밖에는 도시의 빌딩과 사람들이 지나쳐 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쉴드(한 번 크게 박살났지만 어쨌거나 명칭은 그대로이므로) 측하고 잠깐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녁 전에는 돌아온다고 했었는데. 지금 가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 간만에 근사한 레스토랑에라도 가자고 할까. 아니면 오는 중일까. 


 어젯밤 그렇게 다투고도 결국 이런 꼴이다. 회의 중에도, 휴식 시간에도, 오찬 때도 토니의 머릿속엔 온통 스티브 생각 뿐이었다. 아침에 다녀오겠다는 말은 했어도 될 텐데. 모르는 척 하고 뺨에 뽀뽀나 하고 올걸 그랬지. 그랬다면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고서도 받아주지 않았을까. 스티브는 내 생각 하고 있을까. 한 번 의식하고 났더니 생각은 점점 걷잡을 수 없어져서 토니의 관심사는 이제 '스티브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로 바뀌어 있었다. 어떡하지. 


 "......아."


 바람이 차가워진다 했더니 하늘에서 가느다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진눈깨비 정도로 조그맣던 눈은 조금씩 크키가 커졌고, 종내엔 함박눈이 소복하니 내리고 있었다. 토니는 갑자기 차에서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추워진 날씨를 생각하면 겨울 코트임에도 쌀쌀할 터였으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눈을 맞으며 걷다 보면 이 작고 어지러운 생각의 미로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민은 짧고, 결단은 빨랐다.


 "내릴테니 세워요. 차는 주차장에 가져다 두고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이건 보너스고."


 토니는 차 문을 열며 운전수에게 지폐를 내밀었다. 눈도 오는데 가족들하고 저녁이나 먹으라는 소립니다. 갑작스러운 일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어쩔 줄을 모르던 운전수는 토니의 덧붙인 말을 듣자 그제야 활짝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문이 닫히고 차가 멀어지는 걸 보며 토니는 천천히 타워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알아볼 것 같아서 일부러 목도리(스티브가 짜 준 것이다. 콜슨이 알면 기절할듯이 놀라고 다음엔 갖고싶어서 눈이 번뜩이겠지)로 코와 입 부분을 칭칭 감았다. 단정한 정장과 코트에는 좀 눈에 띄는 와인색의 목도리였지만 무척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토니는 결국 메시지를 전송했다.


[뭐 해? 스티브.]

[나 지금 스타크 타워 근처에서 걸어가는 중이야.]

[함박눈이 오는데, 정말 경치가 끝내줘.]

[보고 싶어.]


 보내고 난 뒤에야 좀 더 다정하게 쓸 걸, 차라리 전화를 해서 식사하러 가자고 할까, 지금이라도.... 이미 늦은 후회를 하며 핸드폰을 뒤적거리던 토니에게 삐릭 하는 메시지 수신음이 들려왔다.


[토니, 어디쯤 오나?]

[이제 거의 타워에 도착할 것 같군. 버스에서 막 내렸어.]

[눈 오는 거리의 풍경이 멋져 보이는건 오랜만이야.]

[보고 싶어.]


 그저 문자의 나열일 뿐인데도, 자신과 거의 동시에 보낸 듯한 스티브의 메시지를 읽은 토니는 뭔가 뜨거운 감정이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당신도 내가 보고 싶었구나. 연인 사이가 됐으면서도, 평생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달라서 그것 때문에 종종 다투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만큼은... 


 그렇게 깨닫자마자 갑자기 스티브의 얼굴이 무척 보고싶었다. 토니는 비싼 구두가 눈에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타워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다고 했으니 금방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버스 정류장이 이 근처 어디에 있더라? 지금 타워까지 남은 거리는 얼마나 되지? 내 속도로 봤을 때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지? 천재의 뇌는 이럴 때조차 쿼드코어적인 사고로 온갖 복잡한 것들에 대해 떠올리고 전개시켜나가고 있었지만, 지금 토니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저 스티브를 만나는 것이었다. 


 "....토니? 토니!"

 "...! 스티브...."


 반가움에 크게 이름을 불렀다가 즉시 사람들을 의식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스티브의 모습이 귀여웠던 나머지 토니는 숨이 턱에 차서 힘들었던 것도 잊어버리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것을 확인한 스티브가 성큼성큼 걸어와 토니의 앞에 섰다. 


 "목도리... 했군."

 "당신이 만들어 준 거잖아. ....따뜻하더라고."

 "촌스럽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잘 어울려서 다행이네."

 "난 토니 스타크니까."


 둘은 어색한 듯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서 달려왔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어젯밤의 말다툼이 떠올라 버렸고, 혹시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건 아닐까 눈치를 보며 망설이고 있었다. 


 "그, 토니.."  

 "저기, 스티브.."

 "먼저 말하게."

 "아니, 당신이 먼저..."


 또 다시 침묵. 이러다간 날이 새도록 눈을 맞으며 서 있을 것만 같은 예감에 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스티브. 내가 당신에게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스티브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토니. 나야말로.. 자네 생각을 못 했어. 나랑 같이 있고 싶었을텐데, 그만 서운함이 튀어나와서.. 미안하네."


 "....하루 종일 보고 싶었네.. 토니."

 "..나도, 당신이 보고 싶었어... 스티브."


 둘은 그제야 시선을 맞추었다. 스티브도 토니도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를 띄운 채,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레 거리가 좁혀지고, 든든한 팔이 서로를 감싸안았다. 그것만으로도 추위는 이미 느껴지지 않았고, 내리는 눈 사이로 지난 밤의 잘못들도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스티브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토니는 살짝 발돋움을 했다. 추위에 약간 거칠해진 두 입술이 맞닿았다. 짧은 키스였지만 두 연인의 마음을 채우기엔 충분한 접촉이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는데... 갈래?"

 "그럼 난 자네가 좋아하는 와인을 고르지."

 

스티브는 토니의 목도리를 조금 더 보기 좋게 둘러 준 다음 차가워진 손을 잡았다. 장갑을 끼지 않았지만 스티브의 손은 제법 따뜻하게 토니의 손을 감싸왔고, 직접 전해지는 체온에 토니는 온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둘은 나란히 눈 내리는 거리를 걸어갔다. 크기가 다른 발자국들 위로 다시 소복히 흰 눈이 쌓였다.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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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일이 또 커진 거지.. 아침에 트위터에서 '갓 데운 스팀밀크에 진한 다크 초콜릿을 녹여서 만든 핫초콜릿처럼

달콤 쌉싸름한 스토니가 보고 싶다' 고 외쳤을 뿐인데 제가 그걸 연성하고 있다니..... 의사양반! (멱살

이게 다 눈 때문입니다. 사람 마음 괜히 설레게 하고 말이야. 으흑크흐흑. 아침부터 지금까지 루팡하며 근근히 쓰느라

제법 오래 걸렸네요.... 두 사람은 연애나 잔뜩 했음 좋겠습니다. 연말에 데이트도 하고 침대에서 나오지 않기도 하고.

스토니는 정말 최고에요!!!!!!

by 치우타 2014. 12. 3. 15:21

이 연성은 놜(noir)님에게 바칩니다.


616 


 "미치겠군..."


 토니는 망설임없이 눈 앞의 편지지를 소리나게 구겨버린 다음 쓰레기통에 던졌다.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최상급의 종이가 순식간에 폐기되는 모습은 일견 처량하기까지 했으나, 상대는 토니 스타크였다. 사치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자린고비처럼 아끼지도 않는 남자. 뭐든지 그 필요와 효용성을 알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그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편지지가 아니라 그 알맹이였다. 


 책상 한 켠에 작업이 완료된 서류를 쌓아둔 채로 장장 세 시간 동안 그의 휴지통에는 같지만 다른 종이 폐기물이 수북히 쌓여가고 있었다. 점 하나 없이 깨끗한 새 편지지를 내려다보던 토니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토니는 만년필로 책상을 가볍게 톡, 톡 두드리며 원인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 그래. 스티브에게 손으로 쓴 편지를..


 방황하던 손이 다시 종이 위로 내려앉았다. 거침없고 유려한 필기체는 금방 편지지의 줄을 채워나갔고, 토니의 눈빛은 아머를 수리하거나 다른 작업을 할 때보다 더 신중하게 반짝였다. 잠시 후, 수많은 시도를 거쳐 탄생한 몇 장의 편지지가 곱게 접혀 심플한 편지봉투 안으로 쏙 들어갔고 토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보스? 뭐 해요?"

 "...만일 내가 심장 마비로 쓰러진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너야, 피터."

"말도 안 돼요! 노크했다고요, 세 번이나! 도통 답이 없길래 열었을 뿐인데!"

"난 두드리는 소리 못 들었어."

"토니, 피터는 확실히 노크했네. 소리가 작긴 했지만."


 억울하다며 항변하는 피터 뒤로,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티브." 그의 금발이 시야에 들어오기 전에 토니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편지봉투를 서랍 안에 밀어넣었다. "당신이 같이 왔을줄은 몰랐군." 태연한 어투로 말하면서도 토니의 눈은 책상 위와 쓰레기통을 빠르게 스캔하고 있었다. 만년필은 늘 쓰던 제품이고 남은 편지지는 서류 사이에 끼웠으니 사후처리는 거의 완벽하다고 봐도 좋았다. 모든 것을 확인한 토니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잖나. 오늘은 내가 에스코트 하고 싶었거든."

 "오, 캡틴의 에스코트라니 영광인데? 피터, 마미랑 대디는 데이트 하고 올테니 집 잘 보고 있어."

 "잘 다녀 오세요~ 보스의 최고 기록 갱신해 놓을게요."

 "어림도 없을걸. 갔다 와서 보자고."


 너무 괴롭히진 말게. 스티브가 기분 좋게 웃으며 토니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뜨끈하고 단단한 손이 천 너머로 전해지는 감각은 제법 자극적이었고, 토니는 나지막히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목구멍 안으로 눌러 삼켰다. 아주 미세한 동요였지만 수퍼 솔져가 알아차리기엔 충분할 정도로 눈에 띄었다. 스티브가 뭐라고 토니에게 속삭이자, 토니는 도발적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서서히 두 사람의 그림자가 멀어져 갔다.  


 -후일담 1. 토니의 편지가 전해진 건 그 다음날 느즈막한 오후였다. 스티브는 도망치듯 걸어가는 토니의 뒷모습을 잡지 못했으나 20분 후 온 어벤져스 멘션을 뒤집은 끝에 용케 차 속에 숨은 그를 찾아내어 키스 세례와 뜨거운 밤을 선사했다. 


 -후일담 2. 편지 봉투에는 짤막한 단어들만이 있었으나 스티브는 이미 그것만으로 미소가 귀에 걸렸다.

                 Your Tony (얼마나 긴장했는지 필기체가 떨고 있었다)      To. Steve (반듯한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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놜님의 '사랑에 빠져서 평소에 안할 것 같은 일을 하는 게 좋다' 는 의견에 격하게 공감하며.. 

이렇게 연성하고 말았습니다. 616 토니의 경우 스티브에게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주는 거죠. 

그것도 몇 장이나 쓰레기통에 버려가면서. 제목에 예고한 바와 같이 전기반입니다. 하하 무덤파는게 즐겁다

by 치우타 2014. 11. 2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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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렴풋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문득 스티브는 눈을 떴다. 파도 소리? 그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토니와 폭탄을 든 채 접근해오던 빌런.. 그리고 번쩍이던 섬광, 폭발음이었다. 토니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스티브는 바로 근처에 앉아있던 토니와 눈이 마주쳤다. 무사했구나. 그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어났군. 다친 데는? 내가 보기엔 찰과상 몇 군데 말곤 없는것 같았는데..."

"아... 없네. 방패가 훌륭히 역할을 수행해 준 덕분에."

"다행이야. 깨울까 하다가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몰라서 일단 이쪽으로 옮기기만 했어."

"여긴...."


스티브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도 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온통 바다였다. 약간의 숲과 모래사장이 있었지만 당장 보이는 건 끝없는 수평선 뿐, 어디의 어떤 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스티브에게 토니는 별 일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가볍게 설명을 시작했다.


"걱정 마, 완전히 연결이 끊어지기 전에 조난 신호를 보내뒀거든. 자비스는 확실히 수신했고, 행크 쪽에도 정보가 갔으니까 지금쯤은 수색대를 꾸리고 있겠지. 빠르면 이틀, 늦어도 사흘 안에는 구조될거야."

"........"

"일단 날씨는 안정적인 편이지만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임시로 구조물을 짓는 것도.... 스티브? 괜찮아?"

"....아? 으음... 괜찮네."

"거의 넋을 놓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어디 다친건 아니고?"


토니는 약간 파손된 수트를 걸친 채 스티브를 유심히 살폈다. 제법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하는 토니의 옆얼굴은 낯설면서도 무척 섹시하게 보였다. 스티브는 저도 모르게 말하는 것도 잊은 사람마냥 멍한 얼굴로 토니를 응시하기 바빴다. 걱정어린 눈길로 샅샅이 제 상태를 살피는 것이나, 이미 제 기능을 거의 멈춰버린 수트가 상당히 무거울 텐데도 난처해하는 기색 없이 동료(이자 연인)인 스티브를 생각하는 토니의 모습에 스티브는 또 다시 그를 갈망하는 욕구가 저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아, 그 표정은 안 되는데. 특히 여기선 안 돼, 스티브."


거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를 보고 금세 눈치챈 토니가 고개를 저으며 뒤로 두 발짝 정도 물러섰다. 분명한 거절의 몸짓에 스티브는 어쩐지 억울해지는 기분이었다. 둘 뿐이고, 섬이고, 큰 부상도 입지 않은 상태인데 안 된다니.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생각만 한다는게 입으로 튀어나갔는지 토니의 잘생긴 눈썹이 팍 찌푸려졌다. 스티브가 뭔가 말하려던 순간 토니의 입술이 먼저 열렸다.


"뭐가 문제라니, 아주 많지. 첫째, 여기 무인도야. 아무도 없지만 동물은 살고 있을 거라고. 둘째, 우리 지금 조난당했어. 벌써 잊었다고 하진 마. 이 상황에서 아무 준비도 안 하고 그거부터 할 생각이야? 셋째, 오늘 새벽까지 날 놔주지 않은 사람이 누구였더라? 덕분에 난 하루 종일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침대에 눕기만을 기다렸다고. 그런데 빌런이 나타나서 출동하게 만들더니, 이젠 모든 전자기기가 먹통이 된 상태로 여기 뚝 떨어졌고 말이야. 내 상태가 어떨 것 같아?"

"그, 토니..."

"최악이야! 정말 최악이라고! 내가 그래서 그만하자고 했잖아, 하지만 당신은 들은 척도 안하고 비장의 무기로 애원하질 않나... 내가 거기 약하다는 거 다 알고 그러는 거지? 응? 스티브 로저스!"

"그렇다기보다는, 정말 자네를 놔주고 싶지 않아서..."


스티브는 황급히 토니의 팔(이라기보다는 수트의 손)을 붙잡고 변명하듯 늘어놓았다. 알고 그러는 건 사실이었지만, 토니를 놔주기 싫은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토니가 이렇게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풀네임까지 불러가며 속사포마냥 불만을 터트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스티브는 더욱 필사적인 얼굴이 되었다. 차마 잡힌 손을 뿌리치지는 못한 채 토니가 낮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회사 일정을 말할 때는 왜 그런다고 생각해?"

"그건...."

"정말, 진짜로 바쁘기 때문이야. 당신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바쁘니까 미리 알려주는 거라고."

"....그렇...겠지. 알고 있네."


거의 억양이 없어지다시피 한 토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티브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훌쩍 지나가버린 70년. 자신이 돌아갈 곳이 사라진 21세기.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허울 좋은 미사여구에 매달려 간신히 허덕이며 매일을 살아왔던 그 시간들. 꽉 쥐고 있는 수트의 서늘함이 피부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스티브는 자기도 모르게 추위를 느끼는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아직도 당신은 거기 갇혀 있구나. 내가 이렇게 옆에 있는데. 토니는 마음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을 구한 댓가로 삶의 대부분을 잃어버려야 했던 남자는 어지간히도 둔해서 말로 직접 해주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뻘의 연상이랑 사귀기로 한 건 내 결정이었으니 이 정도는 봐줘야겠지. 


"스티브."

"....."

"스티브 로저스, 캡틴 아메리카. 나 좀 봐줘."


토니는 최대한 부드럽고 상냥하게 부탁했다. 큰 어깨를 움츠린 채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있던 스티브는 그제야 망설이는 몸짓으로 얼굴을 들어 토니와 시선을 마주했다. 푸른 눈동자 속에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끝이 보이지 않는 외로움이 넘실대고 있었다. 눈 앞의 남자는 이 순간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라, 그저 지독히 외로움을 타는 스티브 로저스였다. 


"당신이 여기 21세기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어."

"......!"

"처음에 우리가.. 그저 친한 동료이자 친구 사이일 때는 당신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잘 몰랐어. 하지만 이렇게 매일같이 살을 맞대고, 눈을 마주치고, 포옹을 나누고 보니 알겠더군. 당신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여기에 있으려고 하는지를.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어. 그래서...."


잠시 말을 끊은 토니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 이걸 내가 말해야 하나, 아니 그래도 결심을 했으니 해야지. 굳이 말로 해야 돼? 혼자 알아듣기도 어려운 말을 중얼중얼거리던 토니는 결국 단단히 마음먹은 듯 입술을 꾹 물었다. 어쩐지 결연한 의지가 보이는 그 모습에 스티브는 공연히 목이 타는 걸 느꼈다. 


"...그래서.. 당신에게 만들어 주고 싶었어. 여기 있어도 된다고, 내가 옆에 있어주겠다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장소를, 땅에 발을 붙이고 마침내 마음도 의지할 수 있는 곳을. 당신이 그리던 40년대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저녁에 불이 켜지면 함께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햇살이 떠오르면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할 수 있는.. 집과 같은 곳을 말야."

".......토니..."

"난 이런 말 진짜 못한다고. 해본 적도 없거니와... 솔직히 지금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완전 패닉 상태거든. 하지만 내 구식 연인을 위해서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지. ..이 이상 말하면 얼굴이 아주 빨갛게 익다 못해 폭발할지도 몰라."


토니는 천천히 팔 부근의 수트를 해제했다. 스티브의 손 안에 있던 부분마저 모래사장 위로 툭 떨어지고 나자, 차가운 금속 대신 얇은 이너수트 너머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순간 스티브의 마음 안쪽에서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토니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있을 장소를 어떻게든 찾고 싶었다. 누군가가 붙들어 매 주기를 원했다. 또 다시 전혀 모르는 세상에 홀로 뚝 떨어져서 외톨이로 남겨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계를 시험하듯 토니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그때마다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초조해하며 기다렸었다. 약한 속내를 드러내기 싫어서 비열한 방법으로 연인을 몰아세우고 있었으면서도, 버려질까봐 무서워하고 있었던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토니는 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스티브가 말해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넓은 자리를 내어주며 감싸 안기까지 했다. 대체 어디까지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스티브는 눈 앞이 흐려질 것만 같아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토니."

"응? 스티브."

"....사랑해.. 사랑하네."


하고 싶었던 수많은 말을 뒤로 한 채, 스티브는 그 말만을 되풀이하며 토니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든든하게 안아오는 팔과 어깨는 더 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토니는 나머지 수트도 전부 해제시키며 스티브의 등에 팔을 둘렀다. 뜨거운 포옹 사이로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스티브는 오롯이 토니의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Here, is my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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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H 스토니로 조난당한 두 사람, 늠름한 토니, 짜증내는 토니, 그리고 약간 에로한 장면까지... 라는 리퀘를 다키님으로부터 받고 쓴 글입니다. 하하 무려 한달이나 됐네요 이런 죄인가트니... orz 구상하느라 늦었다는 변명을 드립니다 (넘

전기반의 스티브 중에서도 유독 위태로워 보이는 게 EMH 스티브라고 생각되서 이렇게 주제를 잡아봤습니다만 어떠셨을지 모르겠네요. 모든 스티브가 홀로 뚝 떨어지긴 했는데 그래도 원작이 제일 탄탄하고 무비는 살짝 휘청하긴 해도 그럭저럭 괜찮고.. EMH는 The man out of the time 을 보면서도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토니가 옆에서 든든하게 있을 곳을 만들어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다가... 다키님이 좋아해 주신다면 전 그걸로 무척 기쁠거에요.

그럼 전 이만 밤이슬을 맞으며 총총.....


by 치우타 2014. 10. 23.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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