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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스티브는 아무 일정이 없었기에 느긋하게 타워 내의 체력 단련실에서 운동을 즐겼다. 70년 만에 깨어나 많은 변화를 겪었고 또 새로운 친구와 적을 만나는 동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로가 쌓여 있었는지, 아무 생각없이 몸을 한참 움직이고 나자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친 스티브는 토니가 타워에 돌아왔다는 자비스의 알림을 듣고 인사나 할 요량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에 도착했다.


 "응? 캡틴? 왠일이야? 오늘 타워에 다 있고."

 "일정이 없어서 쉬고 있었지. 자네는.. 일하고 왔나?"

 "난 우리 회사의 간판이거든. 열심히 번쩍번쩍 빛을 뿌리고 왔지. 아이고, 힘들어."


 토니가 어깨를 두드리며 짐짓 엄살을 떨었다. 스티브는 좀처럼 보기 힘든 토니의 평범한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 때 어디선가 몹시 좋은 꽃향기 같은 것이 스티브의 코를 간지럽혔고 그는 무의식중에 숨을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 시선으로 무심코 꽃병이 있는지 둘러보았지만 비슷한 물건조차 없었다. 스티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나는 거지?


 "캡틴?"


 스티브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토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그는 짧게 덧붙이며 넥타이를 풀러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정리해 두라는 충고가 목 언저리까지 올라왔지만 스티브는 애써 눌러 참았다. 타워의 주인은 토니였고, 여긴 그의 프라이빗 플로어였기에 아무도 간섭할 권리 따윈 없었던 것이다. 대신 스티브는 인사나 하러 왔다는 말을 던지며 다시 한 번 공기 중의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아. 정말 좋은 냄새로군. 꽃이 아니면 향수인가? 스티브는 피곤한 얼굴로 조끼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는 토니를 응시했다.


 "스타크."

 "응? 왜, 무슨일이야?"

 "향수 쓰나?"

 "어... 뭐 쓰기도 하지. 오늘은 아니었지만."


 그런건 갑자기 왜? 라고 물으려던 토니는 흠칫 몸을 움츠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스티브가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되게 좋은 냄새가 나는데.. 꽃은 아닌 것 같고. 자네한테서..." 그는 약간 꿈꾸는 듯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내 바디로션이 좀 비싼거긴 한데..워! 잠깐, 캡..." 


 이제 스티브는 숫제 토니의 목에 코를 묻고 숨을 쉬고 있었다. 뜨거운 숨결이 간지러우면서도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헤이, 캡, 캡틴, 스티브! 이게 무슨...!" 토니는 황급히 그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스티브의 팔이 토니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바람에 헛된 시도로 돌아갔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토니는 덜컥 허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토니... 좋은 냄새......"

 "잠깐, 맙, 소사... 당신... 알파야....?"

 "알파..? 그게 뭐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좋아..."


 반쯤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스티브는 무척 섹시했다. 토니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이 알파의 그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젠장, 제기랄! 어떻게 몰랐을까, 수퍼 솔져 혈청을 맞은 남자는 그 형질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어딜 봐도 알파의 성향에 속한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언제나. 조금씩 스티브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들으며, 토니는 제 몸이 멋대로 알파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느껴야만 했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인 거야.


 "자비스, 플로어 잠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연락도 차단해, 내가 바쁘다고.. 흑, 해....."

 [보안 등급 변경. 플로어 락 설정되었습니다.]

 "스티브, 캡틴.. 당신이 먼저 들이댄 거니까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

 "토니.... 토니. 만지고 싶어."

 

 토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상기된 얼굴의 혈기왕성한 젊은 알파가 바로 앞에서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 까짓거 이왕 망했으니 제대로 즐겨 보자고. 천천히 다가오는 입술에 기꺼이 제 것을 겹치며 토니는 스티브의 목에 팔을 감았다.



by 치우타 2015. 4. 8. 23:24

 스티브 로저스 - 캡틴 아메리카는 평생을 옳지 않은 것들과 싸워온 남자였다. 허약한 몸으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동네 깡패들을 그냥 놔두지 못했고, 수퍼솔져 세럼으로 새로 태어난 다음에는 동료들을 이끌며 하이드라와 맞섰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몸을 아끼지 않았던 그를 사람들은 존경했고, 추앙했으며 진정한 영웅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삶을, 평범한 일상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그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스티브는 늘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더욱 바르고 올곧은 모습을 가지는 것이 영웅의 자격이라고 믿었다. 토니 스타크를 만나기 전까지는.


 토니는 여러모로 그의 기준에서 한참 모자란, 혹은 벗어난 인물이었다. 철조망 위에 눕느니 그걸 잘라버리는게 낫다고 말하는 그는 무척 가벼워 보였고, 겉으로 보여지는 이미지에만 신경쓰는 일종의 Big man 같았다. 쇼맨쉽을 보여주는 그런 작자들처럼. 스티브는 처음부터 그와 날카롭게 충돌했고 서로를 상처입히는 말을 내뱉었다. 뉴욕에 쏘아진 핵미사일을 짊어지고 우주로 날아가는 토니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토니 스타크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렸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재단한 것이었다. 스티브는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모르는 만큼 토니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헤이, 캡! 내가 매력적인건 알겠지만 뒤를 보는게 좋겠어!"


 전투 중에 폭탄 해체라는 위험한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토니는 여유롭게 스티브를 걱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폭탄은 빌런의 술수로 터지게 되었지만 공중에 높이 날아올라가서 처리하고 내려온 토니는 다치고 긁힌 아머 속에서도 개구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스티브는 그 순간, 토니에게 사랑에 빠졌다. 정말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당신이 날 왜 좋아하는지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어."

 "자네는 매력적이잖아. 귀엽고, 섹시하고.. 잘났지. 게다가 뻐기는 모습이 아주 사랑스러워."

 "오케이, 거기까지. 더 들으면 내가 닭이 되어버릴 것 같아."


 토니는 진저리를 치며 스티브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현대의 아이콘, 섬세하고 미래지향적인 남자. 토니 스타크는 이렇게 따뜻하고 또 누구보다도 영웅적인 사람이었다. 스티브는 팔 안의 기적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웃었다. 당신이 내 영웅이야, 토니. 속삭임에 귓가가 새빨개지는 토니를 보며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by 치우타 2015. 4. 4. 22:47

 스티브는 괜히 맞닿은 운동화의 코끝을 문질렀다. 지금이 몇 시더라. 조금 전 확인한 시계가 제대로 가고 있다면 이제 겨우 오후 네 시였다. 토니와 약속한 시간은 다섯 시였으나, 스티브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서두르다가 그만 한 시간 전에 공원에 도착하고 만 것이다. 가죽 자켓에 브이넥 티셔츠, 청바지에 운동화라는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으로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눈에 띄나? 스티브는 제 덩치와 외양을 생각하며 슬그머니 숲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평일 오후시간대여서 그런지 아이들이 제법 있었지만 대부분 잔디가 깔린 앞뜰에서 놀고 있었다.


 [스티브, 내일 오후 시간 있어? 다섯 시쯤.]

 "괜찮은데. 무슨 일인가?"

 [날씨도 좋으니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눈치없기는. 센트럴 파크에서 봐.]

 "센트럴 파크? 거긴 사람이 많을텐데.."

 [저녁엔 그렇지도 않아. 아무튼 내일 봐, 스위티.]


 보통은 스티브 쪽에서 비어있는 시간에 대해 물어보거나, 페퍼를 통해 토니의 스케줄을 듣고 미리 계획을 짜서 협의하는 정도였던 탓에 이런식으로 토니가 먼저 데이트를 요청해오는 것은 퍽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스티브는 전날 밤부터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뭘 입지, 꽃이라도 사가지고 갈까? 너무 시선을 끈다고 안 좋아하려나. 체크무늬 셔츠는 다 찢어버리겠다고 협박했었는데... 스티브는 거의 첫사랑과 데이트하는 소년 같았다. 그는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까지 했다. 벌써 진도는 다 뺀 연인 사이였지만 토니와 밖에서 만나는 건 언제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


 숲길로 들어서자 조금씩 꽃망울을 수줍게 내민 색색의 꽃들이 보였다. 이제 여기에도 봄이 거의 다 왔군. 뉴욕은 겨울이 혹독하고 긴 편이라 점점 봄이 짧아지고 있다는 뉴스를 얼마 전에 봤었기에, 더욱 반가운 광경이었다. 스티브는 천천히 걸음을 늦추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무와, 꽃과, 바람의 내음이 폐 깊숙히까지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스티브?"


 순간 그는 우뚝 발을 멈췄다. 아직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인데. 생각하는 머리와는 다르게 이미 고개는 돌아가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토니?" 놀라다 못해 거의 얼이 나간 스티브의 표정을 보고 토니가 씩 웃었다. 개구진 미소였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약속 시간은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그러는.. 자네야말로. 어떻게, 여기.."

 "일이 조금 일찍 끝났거든. 변장할 시간이 없어서 일단 여기쯤 온 다음 연락하려고 했는데 익숙한 금발 글래머가...."

 

 토니는 히죽거리며 다가오더니 스티브의 팔이며 허리며 엉덩이(토니! 스티브가 작게 타박하곤 지지 않겠다는 듯 토니의 엉덩이를 만졌다)쪽을 쓰다듬었다. "와우, 탄탄해. 그리고 섹시해. 오늘 복장 정말 최고야. 고민 좀 했나봐?"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에는 장난기와 더불어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져 있었다. 스티브는 그만 웃어버렸다.


 "자네가 체크무늬 셔츠를 찢겠다고 했잖아."

 "아주 좋아. 누가 쳐다보는 건 좀 질투나지만, 어쨌든 끝내줘."


 쪽 소리를 내며 부벼오는 입술에 응하며 스티브는 토니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내 얼굴이랑 몸만 목적인 모양인데.." 스티브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토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어 왔다.


"뭐? 내 목적은 당연히 스티브 로저스지, 노친네야. 빨리 키스나 마저 해." 

"밖에선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땐 언제고?"

"봄이잖아, 스티브. 나도 봄에는 설렌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둔 꽃띠 처녀처럼... 응? 빨리."


 칭얼거리는 몸을 더욱 세게 품에 가두면서, 스티브는 벅찬 마음으로 기쁘게 토니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두 사람의 호흡과 심장소리 너머로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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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토니 전력 60분, '봄' 주제 연성. 테마곡은 Beatles - Till there was you. 

노래에 맞는 연성을 하려고 했는데 너무 늘어지고 재미도 없길래 그냥 뽀뽀나 시켰습니다. 


by 치우타 2015. 3. 28. 21:47

 세상 일 참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야. 토니는 슬쩍 곁눈질로 옆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상대방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속을 알 수 없는 푸른 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아이 컨택에 토니는 내심 깜짝 놀랐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얼굴을 덮으며 입을 나불거릴 수 있었다. 스타크 가문의 놀라운 처세술에 건배.


 "흠. 그나저나 당신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런 곳에는 전혀..."

 "발도 안 디딜 것 같았어?"


 토니의 짖궂은 목소리에 남자, 스티브 로저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거의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는 사람 아닌가? 자네는." 이번에야말로 토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우와, 세상에. 캡틴 팝시클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놀랠 노 자네." 스티브의 얼굴에 떠오른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토니는 제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구 이놈의 입방정.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토니의 어린애 같은 행동에 스티브는 한숨을 쉬는 대신 작게 미소지었다. "내가 화석급이긴 하지만 죽진 않았어. 토니." 


 이어지는 달변에 막히는 것은 토니의 말문이었다. 어디 가서 말재주 없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는 천재로서(심지어 술 취한 채로 진행했던 연설에도 감동받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이건 정말 초유의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양반이 오늘따라 혀에 기름칠이라도 했나 봐. 토니는 괜히 입술을 쭉 내밀고 흥흥거리며 스티브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법 무례한 시선이었지만 오히려 스티브는 말 없이 그런 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토니는 백기를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정말이지, 왜 이러는 거야. 캡틴. 폐장시간을 훌쩍 넘긴 스미소니언 박물관 앞은 아주 조용했고, 지나는 행인들도 하나 둘 점점 다른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 토니와 스티브는 공교롭게도 박물관이 문을 닫고 난 지 10분 후에 도착해서 우연한 만남에 아주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이런 건 일부러 하려고 해도 못하겠다. 토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스티브와 시선을 마주했다. 말끔한 수트 차림인 그에 비해 스티브는 눈에 띄지 않는 가죽 자켓에 청바지,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당신 그거 완전히 너드 같아. 좀 귀엽기는 하지만." 


 아차. 오토코렉트 수준으로 나가버린 말에 당황할 틈도 없이 스티브가 씩 웃었다. 어? 


 "너드 같다는 말은 들어본 것 같은데, 귀엽다는 말은 처음이군."

 "어어.. 어... 응? 들어봤다고? 언제.. 아니 그보다, 당신, 웃었..."

 "그렇게 말하는 자네가 귀여워서." 


 헉. 토니는 완전히 입을 쩍 벌렸다. 신경써서 매만진 머리와 몸에 딱 맞는 최고급 수트, 세련된 이탈리아제 가죽구두가 놀랄 정도로 무방비한 행동이었다. 귀여워? 누가, 내가? 아니 캡틴, 스티브가? 귀엽다니. 대체 무슨 소리야? 토니의 옥타코어가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다가 연기를 내뿜으며 삑삑 경고음을 울려댔다. 미확인 정보를 수신할 수 없다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토니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눈 앞에는 여전히 스티브, 캡틴 아메리카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조금 전보다 거리가 가까워진 것만 같다. 토니는 다시 눈을 두 번 정도 깜박였다. 그래도 금발의 잘생긴 청년은 사라지지 않은 채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왔다. 등에 식은땀이 쭉 흘려내렸다. 토니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했다. 오, 젠장. 들켰구나.


 사실은 토니가 지난 2주일 동안 스티브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그의 행적을 추적한 것으로도 모자라(거의 스토킹 수준으로), 우연을 가장하며 헬리캐리어에 불쑥 나타난다던지 거리에서 토니 스타크를 봤다는 목격담을 만들어 낸다던지 하는 짓을 일삼고 있었다. 이는 그저 순수한 관찰이자 감시라고 토니가 자비스에게 우겨댔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기 감정에 대한 일종의 확인 작업이었다. 스티브 로저스 감시 1주일이 되던 날, 토니는 "내가 저런 꼰대한테 호감이 있을리가 없어! 외모만 취향일 뿐이야! 그래, 외모만!" 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랩실에서 홀로 외쳤었다. 같은 일을 1주일 더 시행한 후 토니는 드디어 반쯤 포기하고 직접 스티브의 뒤를 밟았으나 하필이면 본인과 딱 마주치고 만 것이었다.


 "토니."

 "어, 왜, 무, 뭐.. 왜?"

 "선글라스 좀 벗어 보게."

 "이거? 아니 이건 갑자기 왜? 그보다 잠깐, 우리 지금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토니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슬그머니 발을 뒤로 물렸다. 머리 위로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지척에 스티브가 서 있었다. 스티브는 손을 뻗어 토니의 선글라스를 신속하게,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벗겨버리고는 주머니에 쑥 집어넣었다. 그거 비싼 건데! 안경다리가 휘어지면 어떡해! 그는 속으로 외쳤다. 코 앞에 캡틴 아메리카가 다가와 있는 이 순간 비비안웨스트우드의 선글라스 따위 아무래도 좋았지만 토니는 스티브 외에 신경을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만큼 필사적이었고, 어떠한 예감이 그의 오래된 연애 레이더를 건드리는 것을 무시하고 싶었다.


 "플레이보이라면서, 무드 없기는." 

 "어... 뭐라고?"

 "이럴 땐 눈을 감아야지, 토니."


 놀리는 듯한 저음의 기분좋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가 싶더니, 도톰하고 약간 거칠한 입술이 와 닿았다. 토니는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었지만 말캉하고 축축한 혀가 아랫입술을 두드리는 걸 느끼며 몸에 힘을 풀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상대의 안쪽 깊숙한 곳까지 얽히고, 마주 안은 손이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로 열정적인 키스였다. 토니는 아주 잠깐 스티브의 적극성에 그가 제법 키스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서투른 움직임에 속으로 혀를 차며 능란하게 리드해 주었다. 잠시 후 입술이 떨어지고 발갛게 물든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보다가 피식 웃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만남이 두 사람을 여기에 데려다 주었다. 오늘 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by 치우타 2015. 3. 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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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에 한 번 정도 얼굴은 보는 걸로 할까. 딱 좋을것 같은데, 어때?


 토니의 제안은 퀼에게도 아주 반가운 것이었다. 둘 사이에 있는 거라곤 가벼운 농담과 성적인 대화, 그리고 섹스였다(가끔 우주와 지구 사이에 관계가 생기면 진지한 이야기도 필요했지만). 그들은 하루이틀 안 본다고 해서 안달이 나는 뜨거운 연인사이도 아니고, 주말엔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부부도 아니었다. 그냥 만나서 대화하고, 웃고, 섹스를 나누면 그만이었다.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는 쿨한 사이. 토니는 이걸 파트너쉽이라고 칭했으나 퀼은 그것보단 더 좋은 호칭이 있지 않겠냐면서 30분 정도 고민했다. 기다리다 지친 토니가 셔츠 단추를 풀지만 않았어도 아마 계속 고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나기로 한 시일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던 토니로부터 통신이 들어온 건 조금 전이었다.


 [미안한데 여기가 너무 바빠서 말이야. 손을 뗄 수가 없군. 한동안 못 볼것 같아.]

 "자기야, 그럼 연락이라도 했었어야지. 보고 싶어서 목 빠지는 줄 알았어."

 [어디까지 빠졌는지 보여주면 당장 날아갈게.]

  

 짐짓 심각한 얼굴로 엄살을 피우는 퀼에게 토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둘 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의 일이었다. 퀼이 바빠서 시간이 안 날때도 간혹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토니가 무척 바쁜 사람이다 보니 약속이 깨어지거나 미뤄지는 건 흔한 경우였다. 퀼은 그때마다 애처럼 칭얼대며 아쉬워했지만 뒤로는 다른 여자를 꼬셔내어 뒹굴었고, 토니는 그걸 눈치채고도 삐진 것마냥 말다리를 걸곤 했다. 섹스 한두번이면 잊어버릴 만한 것들로.


 "시간 될 때 연락해. 지구가 위급해도 연락하고."

 [오, 네 도움을 받을 정도면 이미 늦은 다음일걸. 그리고 콘돔은 꼭 쓰고 다녀.]

 "와우, 마미. 아들은 다 컸으니 걱정 마세요."

 [엄마는 늘 걱정이란다, 아들. 다음에 봐.]


 화면이 툭 꺼지자 퀼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얼마 전에 들렀던 행성의 바에서 아주 섹시한 여자 하나를 꼬셨었는데, 전화번호가 어디 있더라. 로켓이 정말 내 방을 날려버릴 기세였으니 우주선엔 데려오지 말아야지.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뒤적여 물에 번져 엉망이 된 종이조각 하나를 찾아냈다. 망할. 퀼은 미련없이 그것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또 찾지 뭐. 



 토니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은 지 세 달째가 되어서야, 퀼은 스스로가 이상하게 굴고 있다는 걸 드디어 인정하기로 했다. 이미 오래전에 우주선의 다른 멤버들은 그가 또라이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몇 번이나 지적했지만(가모라는 식사를 하다 말고 다리를 떨며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는 그를 보며 말했다. "너 정말 머저리 같아."), 정작 당사자는 난 멀쩡하다며 바락바락 우기고 있었던 것이다. 퀼이 인정하자 우주선에는 약간의 평화가 돌아왔다. 아주 약간이었지만.


 말했다시피, 퀼은 지금 무척 기분이 안 좋았다. 그게 언제부터였는가 생각해보면 빌어먹게도 토니 스타크와 연락이 끊긴 다음부터였다. 도대체 왜? 퀼은 방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침대위를 굴러다녔다. 그들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 것도! 그게 지금 퀼을 초조하고 화나게 하고 있었다. 이유라도 알면 해결이나 하지. 그는 아랫입술을 질겅거리며 천장을 노려보았다. 난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 그가 중얼거렸다. 


 토니와 연락이 되지 않는 동안에도 여자들을 만나러 몇 번이나 나갔지만 거의 다 꼬실 즈음이 되면 일이 터지거나 퀼 자신이 흥이 식어버려서 분위기를 망치곤 했다. 이게 욕구불만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섹스를 한 번도 안한건 아니었다. 재미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쾌함, 초조함이 잔뜩 쌓여서 배 안에 꼬인 듯한 느낌이었다. 평소에 원만한 성격으로 멤버들의 트러블을 조정할 만큼 여유로운 퀼이었지만, 지금 그는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라 작은 것에도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이상한 노래를 틀어댔다. 이 미친 또라이자식아, 그만 좀 해! 참다못한 로켓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직접 개량한 레이저 건을 꺼내들자, 퀼은 흉흉한 얼굴로 헬멧을 뒤집어썼다. 일촉즉발의 사태를 말린 건 그루트였고, 이 일을 계기로 멤버들은 퀼이 정말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에겐 해결책이 필요했다.


 바로, 토니 스타크가.



 토니는 마지막 서류철을 꼼꼼히 읽어보고 사인을 마친 다음, 의자에 푹 기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어벤져스 일부터 시작해서 회사 일에, 도무지 손을 뗄 수 없는 것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바람에 그는 오늘 하루종일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나마 토니의 안 좋은 습관을 알고 있는 페퍼나 스티브가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반강제로 뭔가를 먹인 덕분에 잠도 자지 않고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푸르며 토니는 불현듯 우주에 떠 있을 금발의 철 없는 양아치 파트너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벌써 세 달째 목소리도 못 들었군. 여자들하고 잘 놀고 있겠지. 마지막으로 봤던 진지한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부터 나왔다. 순간, 여러 개의 발소리가 문 근처에 다가왔다. 토니는 반사적으로 몸을 긴장시키며 수트를 부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콰앙! 문이 거칠게 열리고 나타난 얼굴들은... 맙소사. 우주의 친구들이었다.


 "로켓? 그루트에, 드랙스까지? 뭐야, 왜 갑자기..."

 "설명할 시간 없어, 스타크. 우린 아주 급하거든. 잠이나 자둬."

 "무슨.... 윽."


 로켓은 토니에게 마취총을 쏘았고 허를 찔린 그는 그대로 책상에 무너졌다. 이게 다 공공선을 위해서야, 스타크. 너도 휴가가는 셈 쳐. 의식을 잃어가던 토니에게 뭔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꿈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토니는 그대로 짐짝처럼 그루트에게 들려져서 우주로 향했다. 



 ".....으으..."

 

 토니는 묘하게 불편한 자세라고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뭔가 단단한 것이 그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몸을 조금씩 뒤척이듯 움직이려고 해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몇 번 눈을 깜박이며 수마를 쫓아내고 나서야, 그를 안고 있는 건 금발머리의 무언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퀼?" 가라앉은 목소리로 토니가 말했다. 미동도 않던 몸이 움찔 떨렸다.


 "토니."

 "이게 뭐야... 여기 우주야? 무슨 일이라도 났어?"

 "난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어디 행성이 멸망하기라도 한대? 왜 갑자기 납치같은 걸..."

 "나한테 절대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아무리 상대가 우주 최고의 섹시미녀라고 해도."


 토니는 눈썹을 찡그리며 퀼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얘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내가 잠이 덜 깼나? 아니면 이게 꿈 속인가? 토니는 살짝 입술을 씹어보았다. 치아의 감촉이 생생했다. 꿈이 아닌 것 같은데. 토니는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기로 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봐, 피터 제이슨 퀼. 잠꼬대 그만 하고." 퀼이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어 토니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에는 원망과 애정, 혼란스러움이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덩달아 토니도 혼란스러워졌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때문이라니?"

 "지금 말하면 제대로 안 나올 것 같아서 싫어."

 

 기실 토니의 인내심이란 아주 얇은 종이조각에 비유되곤 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잖아, 피터. 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지금도-" "보고 싶었어." 말 끝을 잘라먹고 튀어나온 대답에 토니의 입이 경악으로 쩍 벌어졌다.


 "....뭐라고?"

 "보고 싶었어, 토니 스타크. 빌어먹을. 당신이 보고 싶었단 말이야. 나도 이해가 안 되지만, 그랬다고. 이제 시원해?"

 

  퀼은 말을 마치고 숫제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잔뜩 억울하고 분한 얼굴로 토니를 바라보았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에 토니는 비틀거리고 싶었으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퀼의 팔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늘상 둘이 주고받는 그런 보고싶었다는 단어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언론에 노출되어온 천재는 사람의 말 속에 숨겨진 거짓을 파악하는 기술에 능통한 만큼, 감정이나 어떠한 변화에도 무척 민감했다. 언제나 온 우주를 돌며 하반신을 휘두르고 다니던 이 나이 어린 난봉꾼이 진심을 던진 것이었다. 토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당장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금발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퀼이 한숨을 내쉬었다.


 "....할래?"

 

 평소의 토니라면 절대 내뱉지 않을 지리멸렬한 대사였지만 지금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지치고, 피곤하고, 또 반쯤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특히나 퀼은 토니의 온도와 체향에 잔뜩 파묻혀서 이제야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있었다. 대답 대신 입술이 찾아들어오는 걸 느끼며 토니는 푸스스 웃었다. 이 강아지를 어떻게 할 지는 좀 나중에 생각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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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Lady Gaga - Bad Romance 에서 따왔습니다. 이 노래 토니가 부르면 어울리지 않나요? 딱인듯

그리고 소재는 탱고님으로부터. 원고하느라 바쁘신 탱고님께 바칩니다. 흐흑 넘 모자란 연성이라 죄송할따름..

여러분 퀼토니 파세요 (찡긋찡긋

by 치우타 2015. 2. 19. 23:29

 사실 퀼은 우주로 납치된 이후로 자기 생일을 제대로 챙겨본 적이 없었다. 라바저들이 그런걸 신경써줄 리가 만무했고 (게다가 퀼은 잡아먹느니 어쩌니 하던 그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렸던 퀼이 생존과 적응을 목표로 잡은 다음부터는 생일이란 그저 추억 속의 따스한 기억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퀼은 자신이 서운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토니의 프라이빗 룸 소파에 앉아 있었다. 토니는 바쁜 사람이었고 가능하면 늘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 고개를 드는 섭섭한 감정마저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순 없었다. 


 "미안해, 대신 내일은 하루종일 비울게."


 거기다 토니는 보기 드물게도 진심으로 눈썹을 늘어뜨리며 사과해왔다. 먼저 데이트 약속을 정해놓고도, 제 쪽에서 바람을 맞히게 된 상황에 토니는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토니 스타크가! 처음 사귈때만 해도 퀼이 먼저 적극적으로 들이대며 우주 무법자(그것도 연하)를 사귀는 것에 회의적이고 시큰둥했던 토니에게 정말, 열정적으로 어필한 덕분에 축 연인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퀼은 아주 조금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내 층에서 조금만 기다려. 저녁엔 갈게. 아니, 자정 전까진 꼭 들어가 볼테니까."

 "알았어요, 토니. 나도 한동안 우주에 일정은 없으니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윽, 정말 가봐야겠군. 키스나 해."


 타박하는 듯한 명령조에 퀼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토니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했다. "얌전히 있어야 돼, 자비스 말 잘 듣고." 무슨 어린애라도 하나 두고간다는 듯이 잔소리를 덧붙이던 토니가 금세 멀어졌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퀼은 축 처진 강아지마냥 풀이 죽은 얼굴로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니 자비스가 틀어주는 영상을 바라보았다. 생일 같은 건 역시 별 의미 없는 날이지. 그는 천천히 눈이 감기거나 말거나 내버려두었다.



 "맙소사, 얘 지금 자고 있는 거야?"

 [중력 적응이 잘 안된다는 식으로 중얼거리신 것 같긴 합니다만.]

 "누군 기다리게 한 것도 미안해서 수트 입고 날아왔더니... 일어나, 퀼."

 "....으으음..."


 몸을 뒤척이며 눈살을 찌푸릴 뿐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퀼을 내려다보며 토니가 한숨을 쉬곤 넥타이를 헐겁게 풀었다. 자정이 되기 1분 전인데, 이 태평한 연하 꼬맹이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군. 지구 플레이보이의 기술이라도 보여 줄까? 토니는 잠깐 목을 다듬더니 이젠 엎드린 퀼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일어나, 피터."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퀼은 잠이 남아있던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완전히 정신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그는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자신이 깨어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토니..?"


 "그래, 잠꾸러기씨.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일어나. 자정 넘어버렸다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잠깐, 내가 계속 잤어요?"

 "자비스 말로는 그랬다던데.. 영상 보다가 잠들고는 몇 번 뒤척이기만 했다고."

 "와.... 세상에. 어쩐지 배가 너무 고프더라."


 토니는 질렸다는 듯 피식 웃으며 퀼의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무슨 겨울잠 자는 곰도 아니고, 사람이 시간 맞춰서 왔더니 말이야. 뭐 어쨌든 시간이 넘었어도 할 건 해야지." "침대로 가자고요?" 천진한 물음과 함께 자연스레 허리를 감싸오는 손을 토니가 찰싹 때렸다. "넌 그거 생각밖에 없어? 그 전에 다른 게 있잖아." 다른 거라니, 자신을 만나기 위해 헐레벌떡 귀가한 연인과 할 일이 섹스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퀼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있군. 아직 신선하네, 주문 제작한 보람이 있어. 자.. 불을 켜고."

 "어? 케이크?"

 "바보 같긴, 네 생일이잖아? 고마운 줄 알라고. 이런거 챙겨준 적 없었어. 난 내 생일도 가끔 잊어버리거든."


 토니는 허리에 단단히 감긴 퀼의 팔을 풀기 위해 무던히 애썼으나, 곧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나란히 옆에 앉아 생일 축하곡을 불러 주었다.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dear.. Peter. Happy birthday to you!"

 

 퀼은 토니의 약간 덤덤한 노랫말 속에 숨겨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피터. 한 번도, 심지어 침대에서 몸을 섞을 때도 불러준 적 없던 제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토니의 입을 통해 듣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간지럽고, 몸이 배배 꼬이고, 낯설지만 익숙한.. 그리고 따뜻한 느낌. 이제껏 다른 사람이 불렀을 때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이게 뭐지. 퀼은 초가 녹아가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토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케이크 망치겠다, 빨리 꺼! 내가 불면....읍."


 토니의 뒷 말은 이어지지 못한 채 그대로 퀼의 입 안으로 먹혀 들어갔다. 평소보다 더 뜨겁고, 열렬한 입맞춤이었다. 이 꼬맹이가 갑자기 왜 이러지? 토니는 널찍한 등을 슬슬 쓰다듬으며 급한 키스에 얌전히 응해 주었다. 그게 더 불을 붙였는지, 퀼은 아예 토니를 소파에 눕히고 한동안 입술을 떼지 않았다. (결국 숨이 막힌 토니가 등을 후려칠 때까지 말이다)


 "후아, 하아... 하아.. 맙소사, 초가 거의 다 녹았잖아! 너 갑자기 왜..."

 "사랑해요."

 "....허어?"


 토니는 이번에야말로 이게 미쳤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퀼을 올려다 보았다. 촛불의 빛이 일렁이는 얼굴에는 평소에 찾아보기 힘든 진중함이 어려 있었다. 아, 이거 위험하군. 토니는 이런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청년의 얼굴이었다. 그것도 제법 진지하게. 여러 가지 이유로 속내를 감추는 것에 능했던 토니가 결코 퀼에게 들킨 적 없는 또 다른 얼굴이기도 했다. 너까지 이러면 우리는 이제 정말 큰일나는 건데. 토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서히 차오르는 기쁨에 미소를 지었다. 퀼이 다시 한 번, 입술을 가볍게 부딪치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생일 축하해, 피터 제이슨 퀼. ...나도 그래."


 퀼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토니를 와락 끌어안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던 토니가 불안한 예감을 느끼며 말했다. "잠깐, 너 촛불도 안 끄고.. 설마 아니겠지?" "난 그것보다 당신이 더 급해요. 지금 당장." 그러고는 바로 등을 돌려 침실로 척척 걸어가버리는 것이다. 토니는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야, 너 저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이 날을 위해서 특별히...!"

 "케이크가 그렇게 먹고 싶으면 이따가 먹여줄게요. 물론 나도 먹을 거지만."

 "너 지금 야한 생각 했지? 아, 타임! 나 피곤하단 말이야!"

 "걱정 마요. 아침에 실컷 재워줄게요."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


 토니가 몸을 버둥거리며 외치거나 말거나, 퀼은 멈추는 일 없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침실의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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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그러니까 2월 4일이 코믹스 기준이긴 해도 퀼 생일이라기에 원래는 어제 쓰려고 했지만

제 최애가수 마이클 부블레 공연에 다녀오느라 ㅋㅋㅋㅋ 끝나고 집에오니 시간도 넘고 졸리고 해서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만 어쨌든 썼으니 된거겠죠!!!! 하하 생일 축하해 피터~~


by 치우타 2015. 2. 5. 14:24

 퀼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스타크 타워 옥상에 서 있었다. 방해꾼들(이라고 쓰고 어벤져스 멤버들이라고 읽는다)이 뜸해져서 한창 토니와 깨소금을 뿌리고 있었는데, 가모라로부터 급하게 연락이 들어온 것이다. 타노스의 부하들이 또 뭔가 벌이고 있다는 증거를 잡았으니 가능한한 빨리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노련한 연상 애인과 즐기는 시간은 무척 중요했지만, 그가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의 부름도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그러면-"
"무슨 일 없어도 연락하고, 물론. 당연한 거 아니야?"
"이래서 당신이 좋아요. 토니."

 바보처럼 헤실거리며 다시 꽉 끌어안아오는 퀼의 등을 토니가 부드럽게 토닥였다. 토니도 이런 식의 짤막한 이별에 익숙한 타입은 아니었으나 이 연하 애인은 더 그랬다. 처음엔 쿨이니 뭐니 센 척도 하고 온동네 휘젓고 다니는 어설픈 플레이보이였지만, 막상 사귀기 시작하자 넘치는 애교에 스킨쉽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특히 퀼은 이런 식으로 잠깐 우주에 돌아가야 할 때, 탑승 직전까지 토니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애정을 갈구하고 사람의 체온을 좋아하는 모습이 어쩐지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씁쓸함 반 사랑스러움 반으로 가만히 안아 달래면 도리어 더 품에 파고들어오는데 도무지 당할 도리가 없었다. 넌 나보다 훨씬 솔직해. 그래서 귀여워. 토니는 퀼의 뺨에 키스했다.

"저기 왔네. 이제 가야지, ."
"가끔 이럴땐 매정한 것 같기도 하고..."
"매정하다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가 알고 싶다면 돌아왔을 때를 기대해 봐."
"아니, 아니, 잘못했어요. 취소. 다녀올게요, 토니."

 바람 피우지 마요.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윙크를 날린 퀼이 우주선에 올라탔다. 저게 진짜 귀엽게 노네. 토니는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우주선이 빠르게 멀어졌다. 


 이틀 후, 토니는 갑작스럽게 스티브의 방문을 받았다. 마침 그는 회사 일정도 없어서 오래된 연구 자료를 정리하거나 새로운 방화벽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었다. 랩실의 문이 열리고 가죽 자켓에 면 티셔츠, 청바지를 걸친 스티브가 들어오는 걸 보며 토니는 휘파람을 불었다.

"와우, 캡틴. 복장이 제법 괜찮아졌네. 이제 적응 좀 됐나봐."
".. 어울리나? 잠복근무를 몇 번 하다보니 편안하고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게 됐거든."
"그 가죽자켓이 정말 좋군. 색도 그렇고, 딱이야. 그런데 무슨 일로?"

 토니는 띄워두었던 창을 옆으로 치우며 스티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쩐지 묘한 기분에 시선을 스윽 위로 굴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스티브는 희미하게 미소짓더니 뭔가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 노친네가 왜 이러지?

", .. 혹시 오늘 자네 시간이 있나?"
"시간? 무슨 시간?"
"사실은... 나타샤에게서 이런 걸 받았는데. 적응 훈련의 일환이라고."
"....미술관 티켓?"
"고리타분한 박물관 말고, 현대 미술도 좀 보고 오라더군. 칙칙하게 혼자 가진 말라면서 두 장을 받았네만.. 같이 갈 만한 사람이 없어서."

 스티브는 멋쩍은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고개를 들었다. 자네는 아주 바쁜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혹시 괜찮다면.. 덧붙이는 말은 캡틴 아메리카 답지 않게 작은 목소리라서 하마터면 내용을 놓칠 뻔했다. 토니는 습관적으로 팔짱을 끼며 스티브의 손에 들린 티켓과 어쩔줄 모르고 서 있는 스티브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 괜찮겠지. 미술관 정도야.


by 치우타 2015. 1. 19. 21:57

 스티브를 포함한 어벤져스 멤버들이 타워로 입주한 이후, 퀼은 어쩐지 알게모르게 토니와의 시간을 방해받는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의외로 첫 스타트는 배너 박사였는데 토니와 연구니 뭐니 대화를 나누더니만 둘이 랩실에 콕 틀어박혀서 도무지 나올 줄을 몰랐다. 

 직접 찾아가서 은근히 나 외롭다는 뉘앙스의 말을 던져도 보았지만(배너는 다행히도 남 일에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토니는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퀼. 오래 안 걸릴 거야." 라는 말과 함께 그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고는 다시 홀로그램 화면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대실패였다! 

 보통 퀼은 여유를 가질 줄 아는 쾌남이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대하는 상대로부터 이틀 이상 떨어져 있는 건 제법 괴로운 경험이었다. 그것도 같은 집에 있으면서. 사흘째 되는 저녁에 맛있는 샴페인과 음식을 가지고 마침내 토니가 그에게 돌아왔을 때, 퀼은 반쯤 풀죽은 얼굴을 한 채 시무룩한 상태로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헤이, 스위티. 왜 그렇게 널부러져 있어?"
"버림받은 강아지의 기분을 느껴보는 중이에요."
"음, 그래서 어떤데?"
"쓸쓸하고 외롭고.... 혼자인 기분이 드네요."
"그 동안 일을 다 미루고 있어서 그랬어. 이틀 반만에 끝낸 것도 너 때문이고."
".....진짜로?"
"정말로."

 토니가 웃으며 퀼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눈가엔 애정이 담겨 있어서, 퀼은 며칠간의 서운함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오늘밤은 안 놔줄건데." 팔을 잡아 끌어당기며 속삭이자 토니는 푸스스 웃었다. "언제는 놔 줬었나 뭐. 살살해. 내 나이를 생각하라고."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맞딯았다.

 그렇게 다시 달콤한 시간을 보내나 했더니 이번엔 나타샤가 토니를 찾아왔다. 정보를 우회해서 빼낼 때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달라는 거였는데, 토니는몇 가지 쓸모있는 기술을 그녀에게 가르쳤다. 예전같았다면 붉은 머리에 섹시한 스파이인 그녀가 퀼의 취향에 스트라이크 존이었겠지만, 지금은 토니 말곤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거와 별개로 눈은 즐거웠지만. (헤실대는 퀼을 토니가 매섭게 째려보았다)

"고마워요, 스타크. 이건 정말 유용하겠어."
"내 뒤통수 치는데엔 쓰지 마. 당신은 너무 똑똑해서 더 이상 안 가르쳐 줄 거야."

 토니가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유쾌하게 던지자, 나타샤는 의미심장하게 씩 웃어보였다.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퀼은 토니 근처를 맴돌며 대화를 엿들었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음 날에는 호크아이, 바튼 요원이 무기 제작에 관한 요청을 하러 찾아왔다. 매서운 눈매를 가진 그가 처음 홀에 들어섰을 때 퀼은 무척 긴장했지만(이사할 당시 그는 임무 중이라 자리에 없었다), 토니를 보자마자 반갑게 풀어지는 걸 보며 안도함과 동시에 새로운 도전자의 등장인지를 바쁘게 계산해 보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로마노프 요원이랑 둘이 사귀는 사이일걸."
"어? 그래요?"
"둘 다 아닌 척 하지만 말이야."

 퀼은 어깨에 힘을 빼며 토니의 허리에 매달렸다. "난 또 뭔가 했어요. 그 사람이 당신한테 너무 호의적이라.." 토니가 즐거운 듯이 낄낄 웃었다. "매 요원은 내 오랜 팬이거든." 

 희안하게도 퀼이 가장 경계하며 걱정하던 도전자이자 방해자인 스티브는 일주일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 기우였나? 그는 간지럽다며 밀어내는 토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by 치우타 2015. 1. 16.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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