퀼은 원래 이 파티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이름 앞으로 도착한 수많은 초청장(이라고 쓰고 추파라고 읽는다)에는 하나같이 아닌 척 속내를 감추면서도 어떻게든 퀼과 하룻밤을 지새우고자 하는 천박한 욕망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인기가 많은 것도 가끔은 죄라고 생각하는데. 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것들을 쓸어다 쓰레기통에 골인시켰다가, 왠 변덕이 발동했는지 그 중 아무거나 주워들고 눈에 띄지 않게 파티의 구석자리를 차지했다.


 페로몬을 갈무리하고 있어도 준수한 용모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나 그에게 먼저 접근해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애석하게도 파티장의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퀼은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여러 명의 무리에 둘러싸인 채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그보다 체구가 작은 브루넷의 매력적인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퀼은 수많은 시선들 사이에 제 시선도 함께 섞어 주목받고 있는 남자를 관찰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에 반짝이는 눈동자, 몸에 딱 맞는 최고급 수제 정장(와우, 저거 진짜 비싼 브랜드인데!). 적당히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한 몸짓. 퀼은 샴페인을 단숨에 비우고 새 잔을 집어들었다. 저거 괜찮네. 말 한번 걸어보고 싶어. 


 하지만 그 남자는 아무래도 파티의 주빈이었던 모양인지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사람들에게서 좀처럼 놓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남자 쪽에서 자리를 떠나 화장실로 향하는 시점에서야, 팽팽한 그물 같던 인파가 느슨하게 풀렸고 퀼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날랜 몸놀림으로 남자의 뒤를 따라간 그는 슬그머니 여기 저기에 페로몬을 흘려 두었다. 어지간한 애송이는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할 걸. 


 그리고, 마주한 남자는 생각보다.... 귀여웠고, 잘생겼으며, 섹시했다.


 토니 스타크. 그게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는 퀼이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반응을 보이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해 보였지만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는데, 그 미소마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내가 미쳤나? 너무 오랜만에 지구에 왔더니 그런가? 퀼은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억누르며 토니의 손을 잡아 품에 가두었다. 


 아까 나던 냄새가 취향이었지... 손에 잡히는 적당히 살집과 근육이 짜여진 몸매도 감촉이 좋았다. 퀼은 속으로 점수를 매겼다. 좋아, 합격. 남자랑은 거의 안 하는데 이건 놀랍군. 토니는 놓으라며 퍼덕거렸지만 퀼에게는 저항은 커녕 귀여운 몸짓으로 보일 정도였다. 토니의 머리카락, 목덜미에서 나는 향은 처음에 퀼을 동하게 하던 것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좋았다. 이게 무슨 향이지. 맡을 수록 알쏭달쏭했지만 그에 비례해서 기분은 점점 좋아졌다. 히트사이클을 맞이한 오메가와는 다르지만 오히려 이쪽이 더 자극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토니가 내내 고소니 뭐니 화를 내며 벗어나기 위해 끙끙거리는 동안, 퀼은 토니의 향기에 한껏 취해있다가 문득 제 신체에 변화가 왔음을 알아차렸다.


 아. 예상밖의 전개잖아. 


 "저리 좀, 가... 네가 러트거나.. 말거나.. 힉!"

 "당신도 반응하는 것 같은데.. 토니. 나 잘해요. 응?"

 "이런, 미친.. 아...."


 토니는 남아있는 힘을 최대한 쥐어짜서 퀼에게 주먹을 휘두르려고 시도했지만, 다리가 풀려 있는 상태에서는 그저 허공에 헛손질만 할 뿐이었다. 기가 센 것도 귀여워. 퀼은 낮게 웃으며 토니를 번쩍 안아들었다. 이거 안 놔? 숨을 반쯤 헐떡이면서도 토니는 죽일 듯이 퀼을 노려보았다. 아, 안 되는데. 그는 지금 알파의 가장 민감한 본능을 건드리고 있었다. 지배욕. 정복욕. 역시 오메가도 알파도 아니로군. 둘 중 하나라면 절대로 이렇게 할 수가 없지.


 "쉿.. 토니. 여기서 뒷문이 가까운데, 당신 차는 어디에 있어요?"

 "....빌어먹을. 정원 근처에, 붉은 색.. 제일 비싸보이는 거."

 "아, 저기 보이는 차에요? 끝내주네. 조금만 참아요."


 사실 내가 죽을 것 같지만, 러트를 차 안에서 보내는 건 당신한테 못할 짓이라서. 퀼은 이제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의 품 안에 늘어져 있는 토니를 보며 장난꾸처기처럼 씩 웃어보였다.



by 치우타 2015. 7. 1. 02:19

 "토니. 오늘은 아침에 일정 없나? 일어나야지."

 

 스티브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불을 살짝 들어올리며 곤히 잠든 토니의 둥그런 이마에 입술을 부볐다. 으응, 오늘 나 쉴 거야.. 잔뜩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토니가 몸을 뒤척거렸다. 그런 움직임조차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스티브는 못 견디겠다는 듯 토니를 팔 안에 가둔 채 콧잔등을 부비고, 온 얼굴에 키스를 쪽쪽 해댔다.

 

 "아, 진짜... 어제 그렇게 괴롭혀 놓고.."

 

 결국 토니는 불만을 터트리며 팔을 버둥거렸다. 스티브의 단단한 근육은 꼼짝도 하지 않아서 해 봤자 무의미한 저항이었지만 몸에 걸쳐져 있던 이불이 벗겨지고 나신이 드러나자 이번엔 맑은 푸른 눈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나 저거 알아. 하지 말라고 해도 정줄 놓고 달려들 때 몇 번 봤었어. 토니는 애써 웃으며 스티브의 팔을 어깨로부터 치웠다.

 

"허니, 달링, 스티비. 우리 정말 늦게까지 했던 거 알지? 더는 안 돼. 나 죽어. 그러니까.. 으악!"

"당신은 메카닉이잖아. 뭐든 고칠 수 있는. 그러니까 날 좀 고쳐 줘, 토니."

"아니, 아니 이거 안 고쳐지던데...."

"그럼 이대로 사랑해 줄래?"

 

 이젠 거의 능글맞아보이는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스티브는 토니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고, 숨결이 섞이고, 방 안의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누가 젊은 애인이 좋댔어? 토니는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아침의 키스와 포옹 그리고 더 뜨거운 섹스는 최근의 토니를 달콤한 꿀단지에 퐁당 빠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 또한 기꺼이 꿀단지 속으로 뛰어들어 토니를 안고 깊게 잠수했다. 내 사랑. 내 귀염둥이. 눈부신 햇살만이 어쩔 줄 모르며 창가를 배회했다.

 

by 치우타 2015. 6. 27. 22:30

 토니는 소코비아 사태 이후 조금 쉬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꽤나 자주- 1주일에 한 번은 꼭 어벤져스의 새로운 뉴욕 지부에 들렀다. 그렇다고 해서 닉 퓨리나 스티브를 만났다는 건 아니었다. 그의 친우인 제임스 로드 중령을 만난 것도 아니고, 토니가 만나러 온 상대는 바로 비전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건 비전과 토니를 포함한 아주 소수의 인원들 뿐이었다. 방문 이유도 목적도 밝히지 않은 채 토니는 불규칙적인 일정으로 비전을 찾아와 잠시 머물다 가곤 했다.


 비전은 스티브가 훈련시키고 있는 어벤져스의 새로운 멤버 중 한 명이었으므로, 토니는 늘 훈련 스케줄을 어떻게든 알아내서 비전이 혼자 있을 때를 노려 찾아왔다. 토니는 처음엔 비전에게 겉치레뿐인 인사나 그 특유의 호기심 넘치는 화법을 사용했지만 당사자인 비전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반응 자체가 무척 재미없다는) 걸 알아챈 다음부터는 그냥 혼자서 뭐라고 떠들다가 가곤 했다. 돌아가기 전에, 토니는 꼭 비전의 눈을 한참동안 들여다보고 갔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약간은 절박한 얼굴로. 때로는 서글픈 얼굴로. 또 언젠가는 체념한 얼굴로.


 비전은 토니의 방문에 익숙해지면서 그가 짓는 표정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토니 스타크,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만든 사람. 과연 그는 비전에게서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인피니티 젬에 관심이 있을 거라는 게 가장 현실적이고 가까운 이론이었지만 정작 토니는 비전의 이마 정중앙에 박혀 있는 보석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망토를 만지작대거나, 조잘거리거나, 말 없이 비전의 눈을 바라보는 것 외엔 특별한 게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토니가 예의 그 아이 컨택 타임을 가졌을 때 그의 눈은 갑작스러운 슬픔으로 크게 흔들렸다. 비전이 거기에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짙은 선글라스가 그린 헤이즐넛의 눈동자를 가린 탓에 그는 한동안 토니의 표정에 대해 생각했다.



 "제게서, 무얼 찾고 있는 겁니까?"


 하루는 비전이 드디어 질문을 던졌다. 토니는 허를 찔린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더니, 이내 씩 웃었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


 나 갈게. 나오지 마. 토니는 선글라스를 빙글빙글 돌리며 빠르게 등을 보이고 걸어가 버렸다. 차가 출발하는 소리에 비전은 문 앞으로 날아가 보았지만 이미 그 자리엔 흙먼지가 일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후 토니의 방문은 거짓말처럼 끊어졌다. 비전은 일주일을 변함없이 보내면서 규칙적인 일과 하나가 빠졌다고 생각했고 그게 바로 토니의 장난스러운 얼굴과 매력적인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왜 오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1주일, 2주일이 흘러갔다. 비전은 토니가 여전히 타워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스티브에게 간략히 외출을 보고하고 (장소가 어벤져스 타워라는 것에 스티브는 눈썹을 찡그리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직접 토니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토니는 글래스를 들고 미니바에 기대서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대뜸 정면에서 날아들어온 비전을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잔을 떨어뜨릴 뻔 했다.


 "맙소사,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여긴 어떻게 왔어? 왜 왔어?"

 "무언가를 찾으러 왔습니다."

 "......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뭐야, 토니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2주만에 보는 미소였다. 비전은 이제야 제 일상이 제대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 없이 토니의 반짝이는 그린 헤이즐넛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가 그랬듯이,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by 치우타 2015. 6. 25. 00:12

 스티브와 토니는 실로 오랜만에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거의 2주 만의 일이었다. 스티브는 새로운 어벤져스를 훈련시키느라, 토니는 소코비아 사태가 끝난 뒤 남은 일거리를 수습하고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또한 해명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본의 아니게 떨어져 있어야 했던 연인들은 문자와 화상 통화로 아쉬움을 달래며 서로를 그리워해야 했다. 


스티브, 일 끝났어? 나도 이제 퇴근이야. 

얼굴이 많이 상했군. 

괜찮아, 그래도 밥은 잘 먹어. 당신이야말로 눈 밑이 시커매.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고등학생마냥 키득거리면서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었다. 누가 보면 스타크가 어디 외국에라도 나가 있는 줄 알겠네. 헤죽거리는 스티브 옆을 지나가며 나타샤가 조금 가시돋힌 말을 던졌다. 스티브는 그녀의 심술에 놀라지도 않고 도리어 엽서 하나를 내밀었다. "토니가 전해주라더군. 배너가 쉴드 주소는 못 외웠대." 누가 봐도 관광지에서 팔고 있다는 게 엄청 티 나는 디자인이었지만 나타샤는 눈썹을 움찔거리며 받아들고 쌩하니 사라졌다. (이후 그녀는 스티브의 눈꼴신 연애에 대해 그닥 말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 겨우 맞이한, 그것도 희귀한 바깥 데이트였건만.


 "이렇게 비가 올 줄 누가 알았겠어."


 토니가 투덜거리며 차양 안쪽으로 몸을 붙였다. 스티브는 토니가 젖을세라 조금 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삼십 분쯤 전에 두 사람은 스티브가 좋아하는 작은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근처를 산책하던 참이었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면서 손을 잡고, 누가 볼세라 후드며 선글라스를 잔뜩 뒤집어쓴 채 스티브와 토니는 설레는 마음으로 보통의 연인들처럼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걸었다. 새로운 감각이었다. 언제고 한 번은 이러고 싶었어. 낮게 중얼거리는 스티브의 목소리에 토니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 영감 귀여운 데가 있는 줄은 진작에 알았지. 장난기 섞인 말투였지만 거기에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음을 스티브는 알았다. 재빨리 토니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가 뗀 스티브 덕분에 토니는 바보처럼 입을 쩍 벌렸다가 황급히 닫았다. 그러던 그들의 머리 위에 툭, 투둑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채 오 분도 되기 전에 세찬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기서 타워까지.. 얼마나 걸리나?"

 "음, 우린 지금 걷고 있으니까. 한 25분 정도? 뛰면.. 당신 기준으로 10분. 나는 17분쯤일지도."

 "내가 안고 뛰면?"

 "워, 난 대답 안 할거야. 비 오는 거리를 그 스피드로 날 안고 뛰면 어떻게 되겠어? 누군가한테 찍힐걸. 타워랑 같이."

 ".....아. 그래도 지금은 어두워서-"

 "요즘엔 별 게 다 보정되는 시대야. 천천히 걸어가면 모를까, 아니면 같이 뛰던지."


 어차피 뛴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맞는 비의 양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 생쥐꼴이 되겠지만. 토니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잠시 둘러본 주위엔 비 때문인지 사람들이 적어진 느낌이었다. 스티브는 토니에게 후드를 더 단단히 씌웠다. 왜 그래? 비장한 얼굴인데. 토니가 스티브를 올려다 보았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같이 타워까지 뛰어가지."

 "뭐? 이 빗속을 뚫고?"

 "기다리는 것 보다 빠를 것 같거든. 그리고.."


 돌아가서 같이 샤워하고 싶군. 스티브는 일부러 입술을 토니의 귀에 바짝 붙이고 나지막히 속삭였다. 토니가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씩 웃었다. 섹시한 제안은 언제고 대환영이야.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대로 손을 잡고 비가 쏟아지는 거리에 나섰다. 토니는 이게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고, 스티브는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타워에 돌아가면 샤워를 하고 토니와 함께 그 영화를 봐야지. 


 비 오는 뉴욕의 밤거리 사이로, 두 남자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한 데 섞이어 공기를 가로질렀다.




*스티브가 생각한 영화는 Singing in the rain. 진 켈리가 집으로 돌아가며 부르는 노래를 떠올렸음.


by 치우타 2015. 6. 21. 02:05

 토니는 언제나 선글라스를 가지고 다녔다. 그걸 얼굴에 쓰거나, 가슴의 주머니에 꽂거나, 셔츠에 걸어놓거나 하는 등 위치는 제멋대로였지만 어쨌든 일종의 소품과도 같은 것이었다. 스티브는 처음에 그걸 건방지고 오만하다고 생각했지만 토니와 사귀게 된 다음부터는, 귀여운 허세 혹은 섹시한 매력 포인트로 느끼게 되었다. 그래, 특히 지금 같은 때에 말이다.


 "실내에서도 쓰고 있는 거야?"

 "오늘은 얼굴이 좀 초췌하거든. 아무리 애인 앞이라지만 팬더마냥 시꺼먼 눈을 보여주긴 싫어서."


 토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슬쩍 늘어뜨렸다. 그 귀엽고 솔직한 동작에 거의 넘어가고 있었던 스티브였으나, 전에 토니가 뭔가를 개발한답시고 랩에 틀어박혀서 일주일간 자는둥 마는둥하더니 하루는 샤워실에서 나오던 스티브에게 달려들어 아로마 테라피를 하겠다며 퀭한 얼굴로 킁킁거리던 것을 기억해 냈다. 정말 깜찍하군. 스티브는 짐짓 토니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척 하면서 잽싸게 선글라스를 벗겨 들었다. 불의의 습격에 토니가 소리를 꽥 질렀다


 "맙소사, 스티브 로저스! 비겁하게 사람이 방심한 틈을 노리다니!"

 "거짓말을 하는 당신은 어떻고? 멀쩡하잖아."


 스티브는 선글라스를 뒷주머니에 꽂으며 팔짱을 꼈다. 그거 비싼 거야, 달링. 제발 부수지 마. 토니가 애원하듯 투덜거리면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흔들었다. 이유 말이야, 토니. 어물쩡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엄격한 표정을 한 스티브가 푸른 눈으로 재촉했다. 저거 분명 자기 외모가 먹히는 걸 알고 있다니까. 틀림없어.


 "알았어. 그냥 좀, 억울해서. 당신은 정말 금욕적인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거침없이 손을 셔츠 안으로 집어넣고 그러잖아! 나는 눈에 자꾸 감정이 드러나니까 들키는데... 윽. 말해버리다니. 미쳤군."

 "오, 토니. 그렇다면 말을 하지 그랬나."

 "이런 걸 어떻게 말해? 지금 내 나이가 몇인줄 알긴 해?"

 "나보다 어리다는 건 알지."


 스티브가 짐짓 웃어른처럼 말하며 선글라스를 대신 썼다. 이러면 어떤가? 푸른 눈동자가 선글라스 너머로 감춰진 모습은 제법 색다르고 섹시했지만, 토니는 어쩐지 아쉬움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저 뒤에 얼마나 아름답고 단호하고 반짝이는 보석 같은 눈동자가 숨겨져 있는지- 금세 안절부절하는 토니를 보고 스티브는 씩 미소지었다. 토니, 토니. 요즘 자네가 너무 귀여워서 못 살겠어. 


 "이래서 내가 자네 선글라스를 매일 벗기는 거야."

 "정말 치사해...."


 스티브는 토니의 허리를 끌어당겨 가볍게 입을 맞췄다. 우물거리는 입술이 불만을 토해내려고 몇 번 움찔댔지만 모르는 척 살을 맞대고 부비며 한 마디도 꺼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항복한 토니가 스티브의 등을 끌어안았다. 키스와 숨소리, 키득거리는 웃음 소리 사이로 어느새 벗겨진 선글라스가 근처 테이블 위를 헤매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침실 저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by 치우타 2015. 5. 23. 21:46

 지난 소탕작전에서 적의 공격을 받은 스티브는, 얼마 전부터 극심한 추위에 시달리며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 검사 결과에서 몸에는 이상이 없다고 나왔지만 잠이 들기만 하면 꼭 한번은 숨이 찰 정도로 추위를 느끼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뛰어나오곤 한 것이다. 토니와 배너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고심했지만 며칠 째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슬슬 스티브가 잠을 기피하기 시작할 무렵, 하루는 소파에 앉아 꾸벅 졸고있던 스티브에게 토니가 다가와 혀를 차며 모포를 덮어주었는데 그 따스함에 놀란 스티브가 눈을 번쩍 떴다. 토니도 깜짝 놀랐다. 


 "캡틴? 내가 깨웠나? 조금 더 자. 추우면 온도 높여줄게." 


미안하다는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 토니를 멍청하게 바라보며 스티브는 모포를 만졌다. 따뜻했다. 

 "이거... 데운 건가?" 


그는 거의 얼간이처럼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토니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여기서 잘 때 쓰는 거긴 한데.. 왜?"
 "...굉장히, 따뜻해."
 

 스티브는 모포에 남아있는 온기를 더 느끼려는 것처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눈 앞의 토니를 보았다. 홀린 듯이 바라봐 오는 푸른 눈동자에 토니가 움찔했다. 노친네, 얼굴만 잘생기면 다야? 그래 다겠지. 얼굴 깡패 같으니라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토니는 태연한 척 스티브와 눈을 맞췄다. 

 "잠깐 안아봐도 되나?"
 "난 되게 비싼 몸인데... ...알았어, 좋아. 잠깐이라면."

 뭐라고 투덜거리려던 토니는 꽤 절박한 스티브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스티브 자신도 반쯤 애매한 얼굴로 팔을 뻗어 작지만 탄탄한 몸을 끌어안았다. 모포보다 더 따뜻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스티브는 순간 낮게 신음을 흘리며 반사적으로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워, 캡틴! 캡! 잠깐..." 
 "....따뜻해. ....토니."
 

 어린아이처럼 스티브가 거의 토니의 품에 파고들듯이 고개를 묻었다. 토니는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며 되는 대로 지껄였지만 (내가 섹시하긴 해도- 아니, 캡틴, 왜 이래? 배너! 살려줘!) 드디어 온기를 찾은 스티브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침착했던 배너가 테스트한 결과 토니의 체온이 스티브의 추위를 없애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결국 토니는 대의를 위해 한 몸 희생하기로 하며 밤마다 스티브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마치 테디베어마냥 스티브의 품에 안긴 채 잠드는 나날 동안, 토니는 잘 생긴 스티브의 자는 얼굴과 섹시한 몸매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부리는 어리광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며칠 후, 토니는 스티브의 열렬한 고백과 포옹, 키스에 홀라당 넘어가 코를 꿰이고 말았지만 이때의 토니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눈 앞의 승리에 잔뜩 도취되어 있을 뿐이었다. 


 메데타시, 메데타시.


*무챠님이 그려주신 토니베어 아트를 허락맡고 올립니당.. 존귀대폭발!!!

 늘 토니가 스티브옆에서 안겨있을수 없어서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토니베어.


by 치우타 2015. 5. 9. 01:33

 비전은 어벤져스의 새 멤버로서 스티브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지만, 토니가 있는 어벤져스 타워로 종종 찾아가곤 했다. 울트론 사태 이후 당분간 쉴 거라며 못을 박았던 토니였지만 비전의 방문에 대해서는 어떤 태클도 걸지 않았다. 그리고 5월 8일, 네트워크로 여러 가지 지식을 흡수하던 비전은 오늘이 Mother's day (어머니의 날) 임을 알게 되었다. 

 토니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 비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무언가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공원 구석에서 제풀에 떨어진 들꽃을 모아 작은 꽃다발을 만들었다. 살아있는 생명을 억지로 꺾고 자른 것은 영 내키지 않은 탓이었다. 보안을 거쳐 토니의 개인층에 도달한 비전을 보고 토니가 돌아보았다. 약간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반짝이고 있었다.


 "안녕, 비전. 오늘도 왔군. 그런데... 그건 뭐야?"

꽃다발을 발견한 토니는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비전은 천천히, 공격적이지 않은 태도로 다가가 토니의 손에 있던 패널과 자신의 꽃다발을 교환했다. 토니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한테 주는 건가?"

 "그렇습니다. 오늘이 그런 날이라고 해서요."
  "오늘.. 자... 으음. 프라이데이. ....어머니의 날?"


 토니는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꽃다발과 비전에게 번갈아 시선을 던졌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푸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 와 봐." 순순히 토니에게 다가간 비전은 자기보다 작은 체구의 토니에게 끌어안겼다. 따스한 체온에 비전은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마워, 비전." 토니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비전은 희마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이제야 웃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았다.

by 치우타 2015. 5. 9. 01:29

 전투가 끝나고 난 후, 스티브는 사후처리를 위해 먼저 맨션으로 돌아가려는 토니를 붙들었다. 아이언맨의 아머 헤드가 찰칵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스티브? 무슨 일이야?" 전투로 인한 약간의 흥분과 피로감이 남아있는 푸른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갑작스럽게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어떤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침착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나? 잠깐이면 되네."

 "어.. 잠깐만. ....음, 괜찮을 것 같아. 이 일로 스케줄이 붕 떴거든."

 "그렇다면 자네 층에서 만나지. 내가 올라갈테니."

 

 어딘가 안도한 듯 부드럽게 미소짓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것만 같았다. 어벤져스의 리더로서가 아닌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을 보는 것은 아직도 그에게 처음과 같은 설레임을 안기곤 했다. 특히 이렇게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서는 더더욱.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뭔가 심각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토니는 잠깐 머리를 굴렸지만 어차피 상대가 상대인 만큼 고민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알았어. 이따 봐, 스티브." 가볍게 눈인사를 남기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토니의 뒷모습을 보며 스티브는 헤드기어를 벗었다. 땀에 젖은 금발이 옆으로 흩어졌다. 뒷정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야겠군. 그는 현장 요원들에게 여러 가지 사항을 지시한 다음 서둘러 맨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토니는 맨션에 돌아와 처리해야 할 일들을 끝내고 가볍게 한숨을 토하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오전부터 회의에 오찬, 그리고 빌런소탕, 서류 결제와 피해에 대한 복구대책. 늘상 이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처리하고 있었지만 유달리 피로감이 몸을 덮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요새 운동을 덜 해서 그런가? 뒷목을 주무르며 근처의 생수병에 손을 뻗는 순간, 방문 너머 플로어의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왔다. 누군가 방문했다는 뜻이었다. 이 시간에? 토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아홉시 반. 고개를 갸웃하는 토니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금발이었다. 스티브.


 "미안하네, 조금 시간이 걸려버렸군. 기다렸나?"

 "아니, 아니.. 실은 일을 하느라 당신이 언제쯤 올지도 생각 못하고 있었어. 들어와."


 토니는 그답지 않게 살짝 허둥거리며 스티브를 미니 바로 안내했다. 뭐라도 마시겠어? 토니의 권유에 스티브는 시원한 물이면 된다고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오늘따라 왜 저러지. 토니는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차가운 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스티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마냥 단숨에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 크게 숨을 내쉬었다.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토니는 괜히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전의 그건가? 아니면 일루미나티? 아니면 최근 회사의 캠페인이 문제인가? 리드와의 연구? 짚이는 것도 예상되는 것도 너무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토니는 새삼 자신이 어떤 인간이라는 걸 상기하며 쓴웃음을 목구멍 너머로 감추었다.


 "토니."

 "음?"

 "사실 자네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어. 겁줄 생각도 없었고. 그런데 벌써 실패한 것 같군."

 "그게 무슨 소리야."

 "긴장하고 있잖나, 그렇게 등을 꼿꼿이 세우고."


 스티브의 지적에 토니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괜히 수염을 매만졌다. "그게 그렇게 티가 났어?" 스티브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얼마 동안이나 알아온 사이인지 자네가 더 잘 알잖나." 그리고 보통 그럴 땐 자네가 나한테 숨기는 것이 있을 때지. 여상하게 덧붙여온 뒷말에 토니는 마시던 물을 뿜을 뻔 했다. 맙소사, 스티브! 토니가 가볍게 타박을 주자 스티브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인 모양이군." 자포자기한 얼굴의 토니가 양 손을 들어올리며 항복의 제스쳐를 취했다.


 "좋아, 캡틴 스티브. 무슨 일인지 이제 제대로 말해주지 않겠어? 내 자백이 먼저여야 하나?"

 "아니, 내 고백이 먼저니 기다리게."

 "......하아?"


 토니는 입을 쩍 벌리며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품위없게, 토니 스타크가 완전히 허를 찔린 표정으로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있었다. 스티브는 그 모양새에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손을 내밀어 토니와 맞잡았다. 토니는 그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펄쩍 뛰어오를 것 처럼 움찔대었지만 다행히 잡은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내가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그래도 좋네,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린 많이 다르고 자주 충돌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또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그게 조금은 달라졌으면 좋겠네. 적어도 둘이 있을 때에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아니라... 스티브 그랜트 로저스와 앤서니 에드워드 스타크로. 다른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같이 잠들고 싶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네가 필요해. 자네를 원해, 토니. 어떤 것보다 더. ......내 고백을 받아 주겠나?"


 스티브는 평소와 달리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열정적이고 뜨겁게 마음을 토해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그의 친우, 토니 스타크라는 사내는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볼 수 있지만 유달리 스티브에게만큼은 중요한 순간에 벽을 세우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다. 자신의 마음이 결코 순간적인 충동이 아님을 알아주길 원했다. 또한 토니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기를, 만일 아니라면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것 정도는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오랜 전략가로서의 본능은 토니가 그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반쯤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티브는 숙고 끝에 시도했고, 이제 남은 것은 판결 뿐이었다. 예스인가, 노인가.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고 스티브는 손 끝에 닿아있는 체온이 부디 자신의 편이기를 빌며 신실한 눈빛으로 토니를 바라보았다.


 "......스티브."

 "그래, 토니."

 "내 뺨을 한 번만 때려주지 않겠나?"

 "뭐?"

 "너무 세게는 말고. 내일 인터뷰가 있거든. 살살, 그래도 현실이라는 건 알 수 있게-"


 횡설수설하는 토니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본 스티브는 말 없이 팔을 잡아당겨 토니를 품에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훅 끼쳐왔다. 토니, 꿈이 아니야. 잘 들어 보게. 스티브는 토니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가슴께에 가져다 대었다. 두근 두근, 자신과 거의 비슷한 박동으로 뛰는 심장 고동이 손 끝에서부터 온 몸으로 전해졌다. 토니는 뭔가 울컥하니 차오르는 걸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스티브의 등을 마주 안았다. 넓고 탄탄한 근육이 기쁘게 닿아왔다. 


 "Yes, Steve... yes."


 토니가 거의 헐떡이듯 중얼거렸다. 내가 그 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어? 당신을 상대로. 스티브는 고백하기 전의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토니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약간 거칠어진 입술에 망설임 없이 키스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 너머로 뉴욕의 아름다운 야경이 반짝였다.




by 치우타 2015. 5. 2. 22:01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스티브가 의외로 단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와 사귀고 조금 후의 일이었다. 타워 여기저기에 놓아둔, 가끔 두뇌회전을 위해 섭취하는 초콜렛이나 사탕, 캐러맬 같은 주전부리에서 쉽게 손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토니가 피식 웃었다. 


 "이 썩는다고 이런건 싫어할 줄 알았는데, 우리 노친네가 귀여운 데가 있군."

 "내가 어릴 땐 설탕이 귀했거든. 그 당시엔 뭐든 그랬지만, 아주 가끔 한 스푼 정도는 맛볼 수 있었어. 정말 좋았지."


 스티브가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푸른 셔츠에 짙은 색 바지를 입은 모습은 무척 섹시하고, 잘생겼고, 또.. 그를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스티브 로저스로 보이게 만들었다. 토니는 그게 아주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물론 리더로서 명령을 내릴 때도 섹시하지만 캡틴일때는 꼬박꼬박 스타크 운운하는 것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상할 때도 있었던 것이다. 아마 토니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고 중얼거리며 작은 초콜렛을 까먹는 스티브를 흐뭇한 얼굴로 보던 토니가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 자주 들르는 가게에서 아주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들여놓았다고 한 걸 들었던 것도 같았다.  바닐라였나 딸기였나, 기억은 잘 안나는데 아무튼 뭐 생과일을 넣었다던가. "자비스? 우리 타워 근처에 거기 있잖아. 애들이 바글거리는 가게. 신메뉴 나왔지?" 아쉬운 듯 입술을 핥는 스티브를 곁눈질하며 토니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오늘 막 개시하는 것 같군요. 손님이 많이 모일 것 같습니다.] 오, 안 되지. 토니는 전화를 돌려 가게 주인에게 갤런 사이즈로 서둘러 주문을 마치고는 아이언맨 수트를 배달에 이용했다. (토니, 직권 남용이야! 스티브가 투덜거렸다)


 "자, 스티브."

 "이게 뭔가? ....아이스크림?"

 "그래. 이 근처에서 제일 맛이 괜찮은 곳이야. 오늘 신메뉴 개시! 라길래 사봤어. 별로 당신 먹으라고 그런건 아니고."


 스푼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하는 토니에게 스티브는 못 말린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지만, 다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뭐든 솔직하지 못한 것이 토니의 단점이긴 했으나 이런 게 그의 애정표현이었고, 관심이었으며, 최대한의 노력임을 알게 된 덕분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싸운 나날이 제법 길었는데. 스티브는 질릴 정도로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에 스푼을 가져가 한 입 먹어보았다. "어때?" 토니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아이스크림을 샀다는 사람치곤 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답 대신 스티브는 몸을 돌려 토니의 몸을 끌어당겼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웅얼거리는 신음이 새었지만 스티브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조용해졌다.


 "아주 맛있어. 토니."

 "노친네, 어디서 이런 거만 배워와서는...." 

 "뻐기는 걸 좋아하는 애인이 잘 가르쳐 주거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는 토니의 입에 이번엔 스푼이 들어왔다. 뜨뜻미지근했던 딸기 아이스크림은 무척 달콤하고, 부드럽고, 시원하고 맛있었지만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토니는 막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이번엔 스티브의 목에 팔을 감았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이 맛이야. 토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고 스티브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앙큼한 연인의 허리를 단단히 안았다.






by 치우타 2015. 4. 25. 22:05
| 1 2 3 4 5 ···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