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는 거미줄을 특정 장소에 만들어두고 거길 집 겸 사냥터로 이용하며 살아간다. 살아있는 물체가 거미줄에 걸리면 반사적으로 그걸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치게 되는데, 그 움직임은 거미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즉시 사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렇게 사냥한 먹잇감을 그 자리에서 죽여서 바로 먹어버리는 거미가 있는가 하면 식량 보관하듯 기절만 시켜두고 놔 두었다가 후에 먹는 거미가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먹이가 한 번 걸리면 결코 빠져나가게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특별한 몇 가지의- 정말로 운이 좋은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빌보는 문득 자신의 처지가 꼭 그런 식으로 거미줄에 칭칭 감기고 만 나비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린 순간 무의식적으로 발버둥치고, 그로 인해 더욱 조여들어서 결국엔 그대로 먹히고 마는, 어리석고 가여운 생물이.



"오늘은 어딜 간다고 했었지?"


"데일에요. 오늘은 좀 큰 시장이 선다고 하던데요? 바르드- 음. 영주님이 놀러오라고도 했고. 그래서.."


"호위를 데려가. 셋을 붙여주면 되겠군."


"소린, 겨우 시장 구경이에요. 게다가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구요. 굳이 그렇게까지..."


"나가기 싫은가?"



거의 높낮이가 없는, 덤덤하지만 꽤 위협적인 어조의 말이 던져졌다. 소린은 무심한 얼굴로 종이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갑고 푸른 눈과 직접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그가 시선을 주지 않는 쪽이 더 나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빌보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마무리지었다. 아뇨. 그럼.. 다녀올게요. 발린과 드왈린이 엄격하게 고른, 소린의 충실한 병사들 셋이 거의 빌보를 에워싸듯이 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데일에는 정말 큰 시장이 열려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 웃음소리, 수 많은 장식품이나 식료품, 행인과 여행자들. 에레보르를 벗어나 다른 이들이 살아가는 곳에 발을 디디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갇혀있는 죄수의 신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빌보는 소린의 허가 없인, 혹은 그가 붙인 호위들 없인 에레보르 내부는 물론이고 산책으로도 밖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상기운을 감지하고 난 다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뒤였다.



"...마스터 빌보 배긴스?"


"아, 바르드!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한동안 소식이 없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음.. 그게, 이쪽에서 좀 더 머무르게 됐어요. 바빠서 소식을 전할 틈도 없었습니다."


"잘 됐네요. 에스가로스는 사실 봄~여름에 더 볼거리가 많으니 기대해도 될 겁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시장이 열린다기에 구경하러 왔어요. 정말 굉장하네요. 사람들도 모든 것도..."



솔직한 빌보의 감탄에 바르드가 따스하게 미소지었다. 이 작은 호빗의 용기와 행동으로 지금의 에레보르와 에스가로스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자손 대대로 감사해도 모자랄 정도인데, 그는 단지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몫도 다른 이들과 나누고 그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길 원했었다. 소박하고, 평화로운 일상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호빗. 그러다 바르드는 빌보에게 거의 밀착하다시피 서 있는 드워프 셋을 보고 눈썹을 위로 들어올렸다.



"이들은 뭐죠? 당신의 친구로는 안 보이는데."


"소린이.... 호위역으로 같이 가라더군요. 전 사양했지만-"


"좋은 생각이네요. 여긴 아직 한창 재건중인 곳이라, 치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는 있지만 질 나쁜 여행자들도 오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제가 모든 일을 신경쓸 순 없어서 나누어 하고 있지만.. 조심해요."


".....네. 감사합니다, 주의해서 보고 일찍 돌아가도록 하죠."



떨리는 목소리에 어렴풋이 묻어나온 공포를 바르드가 인지하기도 전에, 빌보가 파이프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러고보니 그들은 작은 체구에는 조금 상상이 가질 않지만 연초를 꽤나 즐기는 종족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늘 트인길을 조심하도록 해요, 빌보. 그런곳에서 납치라면 속수무책이니까."


"조언 고맙습니다, 영주님. 소인은 이만 물러가지요~"



연기를 한차례 위로 내뿜고는 손에 파이프를 든 빌보가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자, 바르드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마찬가지로 예를 표하고는 병사들과 함께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빌보의 파이프를 쥔 손이 얼마나 떨리고 있었는지를, 그는 절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이 이상 그 때문에 불필요한 희생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일찍 왔군."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기로 약속했으니까. .....어때요? 일은."


"오늘은 그렇게 신경쓸만한 건 없었어. .....이리와, 빌보."



빌보는 얌전히 그의 말에 따랐다. 저항없이 부드럽게 감겨오는 팔과 따스한 체온에 소린은 기분좋은 듯 나직하게 신음하며 품 안의 몸을 더욱 가까이 안았다. 호빗의 머리칼에선 볕 좋은 태양의 냄새와 희미한 꽃 향기, 그리고 청량한 바람 내음이 났다. 그가 모르는 누군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빌보와 눈을 마주하고 이마에 입술을 찍어누를 수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는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누구보다도 절실한 감정이 함께 섞이어 파도치고 있었다. 빌보가 계속해서 속아온, 아니, 길들여지고 만 그런 애정의 감정같은 것 말이다. 



".....저녁은?"


"아직이에요. 당신이랑 먹으려고..."


"가지."



방으로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움직이지 마. 강압적인 명령이 한번 더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빌보는 균열을 느끼면서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신차리고 보니 온통 거미줄에 묶이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누가 귀를 기울여 주겠는가? 게다가 빌보는 소린을 떠날 수 없었다. 그것이 이 거미줄의 가장 큰 약점이자 고질적인 문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목께를 간지럽히는 풍성한 털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오늘도 어쩌면, 아마도 확실히. 



by 치우타 2014. 1. 17. 23:54

차가운 겨울 바람이 지나가는 에레보르에서는, 유난히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 있었다. 빌보는 오늘도 그런 날이 될 거라 확신하며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고풍스럽고 웅장했지만 너무 조용했고, 그의 따스하고 정겨운 샤이어의 백엔드에 비하면 부족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온기라거나, 좋아하는 책이라거나, 향 좋은 찻잎이라거나. 그런 것들.


그는 두꺼운 튜닉을 걸치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왔다. 시간이 늦은 밤이어서인지 복도에는 누구의 인기척도 없는 모양이었다. 숙련된 전사들마냥 어떠한 분위기를 감지하는 능력 따위는 없으나, 에레보르는 돌로 만들어진 요새이며 드워프들은 생각보다 그들의 느낌을 (혹자는 소리라고들 했다) 감추는 데에 서툴렀다. 물론 이것도 모든 드워프에게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는 성급한 결론이었지만 대부분은 퉁탕거리며 걸어다니거나, 왁자하게 웃고, 소란스러운 움직임들이 있었다. 

오죽하면 엘프들이 '어둠속에서 안 보고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고 했던가. 빌보는 웃을수만은 없는 추억을 떠올리며 전망대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이렇게 잠이 안 오는 날에는 별과 달을 보러 나가는 것이 일종의 예식처럼 되곤 한 탓이다. 지금까지 누구와 마주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며 그 명당 자리는 아마도 빌보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으- 조금 추운걸. 완전히 겨울이 왔군...."



완전히 보수가 끝난 전망대에는 완연한 동쪽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빌보는 어깨를 떨며 튜닉을 좀 더 여미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빛이 모여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별들이 휘황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그보다 조금 더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크고 붉은 달이었다.


오. 이건 샤이어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야.


빌보는 손끝이 시려오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시선을 달에 고정시키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질 것 같은 거대한 붉은 달은, 말없이 은은하게 빛나며 주변의 별들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것들을 보고 방에 돌아가면 비로소 잠이 들곤 했다.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차가운 건물이나 바닥, 드워프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저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그런 시간이 그에게는 꼭 필요했다. 늘 땅과 작물, 태양과 가까이 지내던 호빗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빌보?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렇게 잠시 분위기에 젖어 마음이 한창 풀어졌을 무렵, 등 뒤에서 갑작스레 날아든 음성에 빌보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어오를 뻔 했다. 그가 제대로 교육받은 집안의 호빗이 아니었다면 벌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호빗 맙소사! 소린! 당신 지금 날 놀래켜서 죽일 뻔 한거 알아요?"


"그런걸로 죽는다면 네 종족이 얼마나 더 토끼같은지를 증명할 수 있겠는걸."


"내가 전에도 그 전에도 계속 말했잖아요. 제발 놀라게 하지 말아달라고.... 세상에.. 후. 진짜, 못된 행동이라구요."


"몇 번을 말하지만, dear hobbit, 네 그 귀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넋을 놨다는 뜻이겠지."


"....이건 그냥 귀거든요? 동물적인 어떤 게 아니라."


"어련하겠나. 그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길이 복잡할 텐데."


"음, 뭐... 잠이 안 오기도 하고. 그래서 구경삼아 나왔어요. 자주 그래요."



아차. 빌보는 흠칫하여 마지막 말을 얼버무리듯이 뭉개고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한창 에레보르의 복구와 정상화를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쁘게 일하고 있는 소린에게 있어서, 잠깐의 여유나 연애같은 건 일종의 사치에 해당되었다. 그에게 드리워진 아르켄스톤과 황금들의 질병을 걷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에스가로스와 어둠숲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것도 빌보였지만 그를 옆에 끼고 붙어있는다거나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있는 소린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빌보는 그의 가벼운 불면증이나 외로움 같은 것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저 혼자 눌러 담고, 연초의 연기에 실어 보내려고 무던히 노력했을 뿐. 하지만 조금 전의 발언에는 자기도 모르게 약간 칭얼거리는 투로...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드워프 왕은 뭐든 놓치는 법이 없었다. 설령 그것이 아주 작은 속삭임일지라도.



"자주 그랬다고? 언제부터? 몇 번이나?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아직도, 나는 네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건가? 마지막에 붙을 말은 차마 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소린의 목에 걸렸다. 그는 빌보에게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고, 하마터면 그것으로 인해 영영 그의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릴 뻔 했다. 에레보르의 지난 영광을 되찾겠다는 마음과 복수심, 보물의 빛깔에 눈이 멀어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적이 있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빌보는 그의 어리석은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었고, 샤이어가 아니라 여기 에레보르에 그대로 남아 주었다. 계절이 바뀌면 한 번 다녀오겠다는 말을 여러 번 하긴 했으나, 빌보는 문턱까지 가서는 결국 다시 돌아와 그에게 버림받을까봐 두려움에 떠는 소린을 부드럽게 포옹해주곤 했다. 그렇게 조금씩 시간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랬는데 불면증이라니. 향수병만큼은 아니어도 눈치로 보아하니 상당 시간동안 빌보를 괴롭힌 것이 분명했다. 소린은 무거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은... 너무 바쁘잖아요, 나까지 걱정거리 중 하나로 짐을 얹어주고 싶진 않았어요."


"짐? 네가 짐이라고? 걱정거리라고? 빌보, 넌 대체..."


"이럴까봐 말 안하려고 했던 거에요. ....화내지 말아요, 소린. 그저 당신을 힘들게 하기 싫었던 거였어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


"...소린."


"지금 네 앞에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스로르의 자손, 스라인의 아들, 두린의 적통 소린 오큰쉴드다. 에레보르를 스마우그의 발톱으로부터 빼앗고,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동족들을 다시 모았고, 그리고.. 사랑하는 이도 찾았지."



소린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윽고 손을 뻗어 빌보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이마, 뺨, 그리고 턱을 차례로 그림을 그려내는 것처럼 쓰다듬었다. 얼마만의 접촉인지, 셀 용기가 나질 않아 빌보는 손을 들어 소린의 거친 손등을 감싸쥐었다.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쪽이 더 괴롭다는 걸, 그때 알았다."


"소린......"


"그러니까 제발 뭐든 좋으니 말을 해. 집무실에 24시간 예고없이 방문해도 되는 건 너 뿐이라는 걸 잊지 마라."



진지한 분위기였지만 빌보는 순간 웃음이 새어나올뻔한 것을 꾹 참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소린은 더없이 엄숙한 얼굴에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근조근 부탁하고 있었고, 그런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긴 했지만 빌보는 그의 말에 숨겨진 장난기를 읽어낸 탓에 문장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어려웠다.



"알았어요. 집무실 방문은 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대신 당신 방으로 쳐들어 갈게요."



언제 돌아오는지 알아야 한다는 게 문제겠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빌보가 윙크해보이자, 소린은 피식 웃으며 가만히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내 방에서 잠을 자지 그래.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볼 텐데. 속삭여오는 목소리에 담겨진 애정을 느끼고 빌보도 마주 웃었다. 그럼 밤 산책도 같이 해줄거에요? 그런걸 할 여유가 있을지는 두고 보자고. 전망대 위에 걸린 붉은 달이 그들을 시기하듯이 반짝였다. 춥지만 아름다운 에레보르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by 치우타 2014. 1. 16. 23:07

"소린, 지금 시간 있어요?"


잠시 서류에서 눈을 떼고 휴식을 취하던 그를 찾아온 것은 익숙한 방문객이었다. 저쪽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던 발린에게 인사를 건네고,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서 있는 드왈린한테 씩 웃어보인 빌보는 조용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소린의 바로 옆으로 섰다. 왠일로 조금은 서두르는 듯한 그 모습에 눈썹을 들어보이자 그는 몇 번 헛기침을 했다.


"무슨 일이지? 급한 용무라도 있나?"


"아뇨, 아뇨.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잠깐 숨 돌릴 여유가 있나 싶어서요. 안 되면 나중에 해도 돼요."


빌보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급한것도 아니고, 중차대한 일도 아니니까 당신이 시간 날 때 말해주면 될 것 같아요. 멋쩍은듯 뺨을 매만지며 빌보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오전 중에 하루 업무 중 반 이상을 이미 끝내둔 소린의 눈에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동작이었다. 또한 일종의 누름쇠 같은 것이기도 했다.


"같이 가지. 안 그래도 쉬려던 참이었어. 발린?"


"오후 업무도 거의 남은 게 없으니 괜찮을 것 같군요. 다녀오시죠."


"호위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으면 하는데."


발린의 흔쾌한 동조에 이어 약간 거친 어조의 말이 따라왔다. 드왈린은 소린의 호위 담당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에레보르 안을 다닐 때도 언제나 그림자처럼 소린의 근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빌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 혼자서도 문제 없었고.


"드왈린, 난 괜찮으니 발린과 함께 차라도 마셔."


"그렇다면야...."


소린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냉큼 저만치 떨어진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가 와일드하게 의자의 강도를 시험하듯 앉았다. 발린이 혀를 차면서 나이를 생각하라고 핀잔을 줬지만 본인은 요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빌보가 푸스스 웃었다.


"가지. 어느 쪽이야?"


"날 따라오면 돼요. 중간에 이상한 데로 빠지지 말아요, 소린."


"....여긴 내- 아니. 우리 집이야. 이상한 데로 빠지다니 무슨 소릴."


"오.. 당신 은근히 길치잖아요. 구조는 다 알면서도 묘하게 틀린 곳으로 간다던지 하는 그런거요."


살짝 손을 맞잡아오며 빌보가 한쪽눈을 찡긋해보였다. 나랑 산책할 때 몇 번이나 길을 잃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나만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소근소근 속삭여오는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담겨 있는 것이 어쩐지 얄미워서, 소린은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빌보를 품으로 끌어당겨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맙소사, 소린! 꽥 소리지르던 빌보는 근처를 지나던 드워프 몇몇이 그들에게 흥미를 보일락말락하는 태도로 서성이는 걸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후회할 걸요."


"제발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군. 빌보."


낮은 웃음소리가 빌보의 귓가에 닿았다가 떨어져나갔다. 가소롭다는 듯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운 드워프의 왕을 보며 그는 한 가지 다짐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고의로 길을 잃게 만들어서 호빗 귀한 줄 알게 해줘야 겠다는 그런 걸 말이다. 게임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 



by 치우타 2014. 1. 15. 23:52

에레보르 탈환을 위한 원정대의 길이 험난하지 않았던 적은 손으로 꼽을 만큼 적었지만, 날이 점점 추워지면서 가장 편안하게 휴식을 취해야 하는 잠자리조차 그 고난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었다. 그나마 산과 바위에서 평생을 살아온 드워프들에게 차가운 땅은 그닥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언제나 따스하고 포근한 샤이어에서 평생을 지내온 빌보에게는 꽤나 힘겨운 밤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특히나 오늘 밤은 바람이 급작스레 차가워져서, 불가 근처가 아니고서는 잠은 커녕 가만히 있기만 해도 이가 부딪칠 정도로 온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빌보의 우연과 운에 맡기는 검 실력으로는 밤의 파수꾼 역할에 적합하지 않았고- 그는 언제나 잠을 자는 쪽이었다. 평소엔 남들보다 조금 더 쉴 수 있음을 감사했으나 이렇게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밤에는 잠보다 불이 더욱 절실하게 그를 끌어당겼다. 결국 빌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포를 두르고 불가로 걸어갔다. 오늘의 불침번 담당은 원정대의 리더, 소린이었다.


"....잠이 안 오나?"


무뚝뚝하지만 나름 다정함이 엿보이는 목소리가 툭 하고 날아들어왔다. 빌보는 다른 드워프들을 깨우지 않도록 주의해서 빠져나온 다음 소린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으며 작게 대답했다.


"조금은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애매한 표현이군."


"사실 나도 잘 모르겠거든요. 왜 그러는지."


빌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타닥타닥 조용히 타오르는 나무에 시선을 던졌다. 확실히 이렇게 불 앞에 앉으니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기와 시린 바람에 잠은 커녕 감기에 걸릴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던 것에 비하면 정말 꿀처럼 달콤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그를 근심하게 만드는 것은 이대로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어버릴 경우 그 무슨 망신이며 어설픈 변명(왜 잠이 안 오는지 모르겠다고 둘러댄)을 자랑하는 꼴이 될 것인지... 빌보는 애써 눈을 부릅뜨며 푸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가까이 와라."


".....뭐라구요?"


"내 옆으로 오라고 했다, 빌보."


아니, 그거 조금 전하고 말이 다른 것 같은데... 대답할 겨를도 없이 뻗어온 팔이 성큼 그를 끌어당겼다. 완전히 무방비하게 앉아있던 덕분에 빌보는 소린이 잡아끄는 대로 쭉 끌려갔고, 이내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이 몸을 덮는 것을 느꼈다. 어리둥절하여 올려다보자, 깊고 푸른 눈동자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뭘 말이지."


"....내가 추워서 못 자고 있었던 거요."


"이런, 추워하는 것만 알았는데 그것때문에 잠도 못 잔 거였다니."


"오 맙소사. 당신 일부러 그런 거죠?"


기가 막힌 얼굴로 반쯤 노려보자 소린은 삐뚜름하게 미소지으며 빌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글쎄, 마음대로 생각해.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달콤해서, 조금만 정신을 놓았다간 일사천리로 잠들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깜박이는 그에게 재차 소린이 속삭여왔다.


"자라, 빌보. 아침 일찍 출발할 거니까."


".....모두가 일어나기 전에-"


"깨워주지."


I promise. 든든한 팔이 느릿하게 몸을 도닥여오자 한계까지 눌러 참았던 수마가 순식간에 밀어닥쳤다. 빌보는 원정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완전한 안락과 평온함 속에 잠이 들 수 있었다. sweet dream, my dear hobbit. 자장가처럼 나직한 말이 그가 기억하는 그날 밤의 마지막이었다. 



by 치우타 2014. 1. 14. 01:51

3. 감기


"....이건 이렇게 하도록 해. 다음."



소린이 서류를 발린에게 넘기며 짧게 목을 가다듬었다. 이상하게 아침부터 목이 갑갑하고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꼭 무언가 걸린 것도 같은데, 물을 마셔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술술 넘어간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하고 나면 몇 번이고 힘을 주어 목소리를 다잡아야 했다.
최근 드워프어를 배우는 재미에 푹 빠졌는지 근처에서 도서를 필사하고 있던 빌보가 참지 못하고 시선을 올려 소린을 바라보았다.


"소린."


"왜 그러지?"

"감기 걸렸어요?"

".......아니."


약간의 간격을 두었지만 재고 없이 튀어나오는 부정의 대답을 들으며, 빌보는 펜을 내려놓고 발린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눈치 빠르고 현명한 드워프인 그는 간단한 서류를 책상위에 남겨두고 그대로 집무실을 나가 문을 닫았다

둔중한 문이 닫히자 소린이 습관적으로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아침에도 상태 안 좋았잖아요. 어디 좀 봐요."


"괜찮아. 잠이 덜 깨서 그런 거다."

"그런것 치고는 창백했는데. 목 답답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거."


빌보가 손가락으로 목 부근을 가리켜 보이자 소린은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대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바로 이럴 때가, 놓칠 수 없는 빌보의 한숨 포인트였다. 이 완고하고 자존심 센 드워프는 막 재건하기 시작한 왕국의 업무에 몰려서 

매일같이 강행군을 되풀이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질 않았다.
칼을 든 전투는 끝났지만 아직도 내부적인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빌보는 최대한 그가 쉬는 시간만이라도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게다가 요 며칠째 늦게까지 서류를 보고 드왈린과 요새의 보안을 점검한 다음 새벽에나 들어오던 소린은 

오늘 아침부터 영 수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따스한 차를 건네며 잡아본 손 끝은 차가웠고, 표정은 창백했으며, 뺨에는 약간 열기가 있었다

설마 감기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 빌보는 가능성을 애써 잡아누르며 그에게 차를 한 잔 더 권헀었다.


"감기가 확실해요. 걸려본 경험자로서 장담하죠."


"그냥 목이 좀 불편한 것 뿐이야. 호들갑 떨지 마."

", 나왔네요. 당신의 근거 없는 자신감."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니, 감히."


소린은 낮게 으르렁거리듯 위협적으로 말을 뱉었다. 하지만 빌보도 이제 그와 지낸 지 수개월이 지난 베테랑으로, 그런 것에 일일이 

놀라거나 상처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럴 땐 조금 아슬아슬하게 승부욕을 건드려서 제 발로 넘어오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임을 깨닫는 경지에까지 올라 있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럼 나랑 내기해요."


"무슨 내기?"


"내가 이기면, 내일 얌전히 누워 있기. 당신이 이기면... . 밤에 원하는 거 다 들어 줄게요."


"....정말인가?"


"난 약속을 잘 지키는 호빗인 걸요, 잘 알고 있겠지만."


"좋아. 후회하게 될 걸."



소린은 벌써부터 승자가 된 기분인지 입가에 삐딱한 미소를 띄우며 빌보의 허리를 끌어당겨 이마에 입맞추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죠. 들릴락 말락하게 속삭이며 빌보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


"거 봐요, 내가 이겼네. 하루동안 얌전히 누워 있기 당첨되셨습니다, 소린 전하."


"......이건 음모야."


진찰을 끝낸 오인이 키득거리며 방을 나서자 소린이 잔뜩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왕꽃잎풀을 달인 물로 차를 우려내며 빌보가 노래하듯 말했다.


"열이 있고, 목이 답답하고, 피곤하고, 얼굴이 창백하면 그게 바로 감기라는 뜻이죠. 음모는 킬리와 필리가 꾸미는 그런 거고요."


"그 녀석들은... 아직도 철이 없어서."

"됐으니까 이거 마시고 오늘은 일찍 자요. 감기엔 맛있는 음식이랑 잠이 최고에요."

".....그건 늘 그런거 아닌가? 네게는."


찻잔을 받아들며 소린이 여상히 던지자 빌보는 손가락을 들어 까딱여 보였다.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만 말해두죠."

결국 소린은 다음날까지 미열로 방에 누운 채(혹은 앉아서) 감기에 좋다는 빌보의 특식과 향기로운 차를 곁들인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릴수는 없었지만, 그가 사랑하는 호빗과 모처럼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 달콤했던 덕분인지 감기는 이틀만에 말끔히 다 나았다

여담으로는 그날 밤의 침대가 조금 소란스러웠다는 것과, 바톤 터치를 하듯 이틀쯤 후 빌보가 감기에 걸린 것 정도였다.




4. I can't let you go

빌보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익숙한 연초의 냄새, 편안한 의자와 낡은 책들

정원에서 피어나는 색색의 꽃과 잘 익은 생선냄새, 따뜻한 차 한 잔.
호빗의 삶을 더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일상적인 것들이 모두 그와 함께 있었다

마치 여행을 떠나기 전과도 같은 익숙함이었다

벽난로 근처에 앉아 오래 된 지도를 펼치고 바깥의 놀라운 일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드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빌보."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풍경을 흩어뜨렸다. 천천히 백엔드의 풍경이, 그의 하루가 무너져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결국, 꿈인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읽고 싶어했던 책을 찾았다."


소린이 조금 오래된 도서를 침대 근처에 올려두고는 천천히 팔을 뻗어왔다

빌보는 얌전히 그의 손바닥에 뺨을 대고 눈을 감았다

투박하지만 강인한 손. 에레보르를 탈환하고,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자신을 여기에 가둔 손.

빌보가 거부의사를 보이지 않자 그는 안도한 듯 참았던 숨을 뱉어내고는 아예 품을 열어 그의 호빗을 끌어당겨 안았다

자그마한 몸이 빈틈없이 폭 안기는 모양새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소린.."


"안 돼."


"...제발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안 된다고 말했잖나."


금세 날을 세우는 목소리에 빌보는 어깨를 움츠리며 소린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었다. 벌써 몇 달째 이런 식이었다.
샤이어에 보내주기를 청하면, 발에 무거운 족쇄를 채우고 결코 방 밖으로도 내보내주질 않았다.
아마도 다른 이들은 벌써 그가 고향에 도착했으리라고 믿을 것이다. 빌보는 소린의 방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이후로 다른 드워프는 커녕 하늘도 거의 보지 못했다

난 너를 보내줄 수 없다, 빌보 배긴스.

그저 주문처럼 속삭여오는 한 마디

달콤한 사랑고백이 아닌, 어둡고 끈적한 그 말에 빌보는 어느새 몸도 마음도 온통 묶여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by 치우타 2014. 1. 8. 01:13

원문주소 : http://archiveofourown.org/works/737528/chapters/1373874


아침에 일어났을 때, 빌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지만 그건 그런 종류의 좋은 게 아니었다. 그의 위가 얼얼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는 해도, 엄청나게 갈증이 나는 것 같았다.

빌보는 그의 위 속에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뒤섞인 채 가라앉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뭐였든지간에, 빌보는 그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번도 어떤 것에 기대하는 즐거움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는 기다리는 것과, 깜짝 놀라는 건 싫어했으며 그게 바로 빌보가 스릴러를 보는 걸 혐오하는 이유였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그 사실이 빌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의 성격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려줄 수 있었다. 


그는 한동안 침대에 앉아서 해가 충분히 떠올라 그의 방 온도를 가늠하듯 슬쩍 발가락을 기웃거릴 때까지 다른 쪽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게 동의할만한 상황이었다고 판단되었는지, 그는 침대를 빠져나와서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욕실로 터벅터벅 걸어들어갔다. 


그는 최대한 떠나는 것을 늦추었다. 심지어 바삭한 패스트리들을 하나씩 상자에 집어넣으면서 그것들을 나란히 맵시 있게 조정하기까지 했다. 그런 다음, 마침내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필리의 생일 선물을 팔 아래에 단단히 말아넣은 다음, 11시 15분 즈음에 디스의 집으로 향했다.


날씨가 정말 좋았고, 빌보는 차분해지기 위해 아침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걸어갔다. 


그들이 사는 거리에 다다랐을 때, 빌보는 두린 가 사람들을 보기 전에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괴성은 뒷마당에서 들려왔고, 그가 문에 노크했을 때 과연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아무도 오지 않는 문에 서서 그는 다시 한 번 노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선물을 문 앞에 두고 집으로 돌아갈지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문이 던져지듯 열렸다.


"그것들은 패스트리인가?"  남자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말이었다.


"아, 네." 그는 그것을 넘겨주었다. "필리와 킬리가 이걸 가져다 주길 원했거든요." 그의 머리는 밝은 오렌지 색이었고, 빌보는 그의 머리가 어디에서 끝나는지, 또 두꺼운 콧수염은 어디에서 시작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곤란했다. 그는 또한 사람이 이렇게나 크고, 붉은 색의 둥그런 뺨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워했다.


"당신이 빌보겠군!"  남자가 기쁜 듯 껄껄 웃었다.


"네, 그래요, 저에요."  하지만 그는 들어오라고 말하는 대신, 몸을 돌리더니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보푸르! 이리 와 봐, 빌보라는 친구가 왔어!"  얼굴에 미소를 띄운 사람이 그를 환영하기 위해 왔다.


"안녕!" 그는 손가락이 없는 낡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난 보푸르에요." 그의 목소리는 두껍고 아일랜드 억양이 섞여 있었으며, h 를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 모자가 마음에 드네요." 빌보는 뭐라고 하면 좋을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말했다. 그가 쓴 코사크 모자(춤이 없고 챙이 높은 방한모) 는 털로 만들어져서 좀 따뜻해 보였지만, 빌보는 거기에 대해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고마워요! 난 이걸 영원히 쓰고 있을 거에요." 그는 모자의 귀 부분을 붙잡고 말했다. "거의 벗지를 않죠. 들어와요, 들어와요!" 그는 다른 남자를 바깥으로 밀며 빌보를 향해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봄부르는 때론 그가 온 문가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까먹죠." 그는 전염성이 있는 웃음을 터트리기 전에 빌보에게 말했고, 갑자기 빌보 또한 이유도 모른 채 조금 키득거렸다. 


보푸르는 대화의 대부분을 이끌었고, 그에게 자신의 일에 대해 모두 말해주었다. 장난감을 직접 만드는 토이 메이커로서 그것을 나라 곳곳에 판다고 했다. 그는 이제 몇몇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서 두번째 가게를 내어 사업을 확장하는 단계에 있었다. 때로 사람들이 지나갔고 보푸르는 그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지금까지 수년 전 용접 사고로 머리에 뜻밖의 부상을 입은 비푸르를 만났다. 피부가 회복되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금속 조각이 아직 그의 두개골에 있고, 제거하기엔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의사는 그것을 안전하게 놔두기로 했다고 한다. 보푸르는 농담조로 비푸르가 사고 이후 어떤 것에도 안전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게 되었으며, 그가 작은 무언가를 깎을 때마다 끊임없이 조심하라고 말한다고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부엌에 갔고, 거기에서 우연히 또 다른 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쪽은 오인이에요." 보푸르는 테이블에서 뭔가를 섞고 있는 남자에게 손짓했다. 오인은 움직이는 대신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움직이는 접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경쓰지 마요." 보푸르는 빌보가 속상함을 나타내자 납득시키려는 듯 말했다. "그는 청각 장애가 있거든요- 때가 되면 당신을 알아차릴 거에요." 그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는 오인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어 다른 남자가 부엌에 들어왔고, 그는 보푸르와 빌보를 보자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이쪽은 글로인." 보푸르는 그를 소개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글로인은 손을 흔들어 악수했고, 빌보는 그의 손에 수많은 상처와 굳은살이 배겨 있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이 지금 문제인 거죠?" 그는 오인의 어깨를 두드렸고, 덕분에 나이 든 남자가 펄쩍 뛰어오르게 만들었다. "네 그 빌어먹을 보청기 좀 켜!" 글로인이 오인에게 소리쳤다. 오인은 그의 귀에 손을 뻗어 조청기를 조작했다.


"뭐?" 그가 물었다.


"이제 드디어 됐군!" 보푸르는 부엌에 들어오는 남자를 향해 넓게 팔을 뻗었다. "오인, 이쪽은 빌보에요. 오인은 의사죠." 그는 빌보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평소보다 조금 크게 말하도록 해요." 그가 조용히 지시했다.


"오, 아주 인상적이네요." 빌보가 이야기했다. 오인은 그걸 칭찬으로 받아들이며 미소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은 생일을 맞이한 녀석을 아직 못 봤나요?" 글로인이 그의 관심을 끌며 물었다.


"아직요." 빌보는 고개를 흔들었다. "보푸르가 모두를 먼저 소개해 줬거든요."


"음, 그가 당신에 대해 계속 물어봤어요." 그는 빌보에게 이제야 알려주었다. "킬리도요."


"그랬나요?" 그는 뱃속에서 약간의 죄책감이 기어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럼 가서 인사하는 게 좋겠어요. 전 그들을 기다리게 하는 게 싫거든요." 그는 일시적으로 햇빛때문에 가려진 뒷마당 쪽으로 갔다.


"아, 빌보 씨!"  프레린이 제일 먼저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군요."


"저도요."  그는 그 외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빌보 삼촌!"  킬리는 빌보에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거의 그를 땅에 태클하다시피 했다.


"뭐 하는 거니?"  그는 킬리를 다리에서 떼어내기 위해 애썼다. "우린 겨우 어제 만났잖아."


"그렇지만 우린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필리!" 그는 이제 자기 형을 불렀다. "빌보가 왔어, 필리!"  필리의 금발과 아주 비슷한 바람이 번개같이 달려왔고, 필리는 그를 향해 열렬히 다가왔다.


"빌보!"


빌보는 팔을 내밀어 저지했다. "나한테 달려들진 말아줘!"  필리는 미끄러지면서 멈추었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잔디가 온통 그의 머리에 얽혀 있었고 머리엔 형편없는 색의 종이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킬리가 그를 위해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빌보는 그걸 알아채고 미소지었다.


"하지만 킬리는 당신한테 뛰어들었잖아요."


"킬리는 나한테 묻지도 않았어."  빌보는 그를 앉히고는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생일 축하한다,"  필리가 활짝 웃었다. "선물받은 것들은 벌써 열어 봤니?" 


"네!" 필리는 빌보가 등 뒤에 무언가를 감추었는지 보려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 선물은 어디 있어요?"


"안에, 가서 뜯어보렴- 하지만 조심해야 돼!"  필리는 벌써 흥분해서 달려나갔고, 뒤이어 킬리가 따라갔다.


디스가 미소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뭐 좀 마시겠어요?"  빌보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필요할 것 같아요."


"이제 당신이 모두를 만났을 것 같은데요."  디스는 음료를 가지러 테이블로 향하며 물었다.


"네, 보푸르가 제게 어제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소개해 줬어요."


안쪽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내 생각엔 필리가 드디어 당신 선물을 열어본 것 같네요." 디스가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필리가 연습용 칼을 위험하게 흔들며 달려 나왔다. "당신이 내게 칼을 줬군요! 내게 칼을 줬어요! 빌보 삼촌이 나한테 칼을 줬다고요!" 


"그래, 나도 봤단다 아가야."  디스가 미소지었다.  "조심하렴, 넌 그걸로 창문을 깨거나... 다른 사람을 찌를지도 몰라."

 

"너희 엄마랑 상의했단다."  빌보가 필리에게 알려주었다.  "네가 수업을 열심히 들었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그걸 줘도 괜찮다고 했어."


"이건 정말 끝내줘요!"  그는 그것을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옆으로 휘둘렀다. "고마워요, 빌보 삼촌!" 그런다음 그는 흥분에 차서 마치 도살업자마냥 나무를 향해 달려나갔다.


"오, 저런."


"걱정 말아요, 그가 부숴보지 않은 구조물이란 없으니까. 난 그걸 승리라고 부르죠. 소린," 디스는 그녀의 오빠를 불렀다.

"와서 빌보에게 인사해요." 빌보는, 정말 감사하게도, 꽥 소리를 칠 뻔한 것을 억누를 수 있었다. "소린을 기억하죠, 빌보?"


"네, 물론 기억하죠."  그는 다른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안녕하세요."


"안녕."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소린이 그 외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기에, 빌보는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요. 음... 저는 가서 좀 앉아야 할 것 같아요." 그는 미끄러지듯 재빨리 움직여 걸었다.  "만약 괜찮다면요.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좀 지쳤거든요." 


"오, 물론 그래도 좋아요. 당신은 오늘 여기에 일하러 온 게 아닌걸요, 빌보. 나도 쉬는 날이구요."  


"맞아요, 그렇죠."  무서울 정도로 큰 남자에게 멀어지며 그는 안도했고, 한 의자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주저앉았다. 킬리가 기운넘치는 모습으로 구르듯 그에게 달려왔다.


"패스트리를 가지고 왔나요, 빌보 삼촌?"


"그것들은 안에 있단다. 내가 좀 가져다 줄까?"


"너무 늦었어!"  봄부르가 얼굴에 넓직한 미소를 걸고 외쳤다.  "내가 그걸 다 먹었거든."


킬리의 입이 툭 벌어졌고, 그의 얼굴엔 배신감과 충격의 감정이 뒤섞였다.


"상당히 맛있었어."  봄부르는 전혀 자각없이 이어 말했다.  "당신이 그것들을 만든 거야??"


"네, 그래요. 제가 만들었어요."  빌보는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이 그걸 다  먹었다고요? 앉은 자리에서?"


봄부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안될게 뭐 있나?"


"당신이 우리 패스트리를 다 먹었어! 필리!!!"  킬리가 봄부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빌보가 우리를 위해 만든 패스트리를 봄부르가 다 먹었어!!"


"그것들은 내 거야!"  필리는 익살맞게 웃으며 구르고 있던 봄부르를 칼로 겨누어 휘두르고 쓰러뜨렸다. 킬리는 그의 형의 지시에 따라 빌보 옆에서 떨어져 나온 다음 가여운 남자를 공격했다.


"너와 네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필리가 소리지르며 남자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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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길었네요... 가족 소개하다가 한 편이 다 지나가 버렸어 소린하고 헬로밖에 못했엌ㅋㅋㅋㅋ 슬프네요..

그리고 봄부르가 나빴습니다. 애들 주려고 만든 패스트리를 다 먹어치우다니, 맞아도 싸요. 

먹을걸로 원한 생기면 장난 아닌데..... 쯧쯔


by 치우타 2014. 1. 5. 13:25

에레보르를 눈 앞에 두고 원정대는 잠시 지친 몸을 쉬어가기로 결정했다.바로 코 앞까지 다가온 두린의 날과, 금방에라도 닿을것 같은 거리의 왕국을 두고 쉬이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으나 고블린 동굴에서의 일과 더불어 뒤쫓아온 아조그 무리와의 사투 덕분인지 다들 금세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불침번은 가장 기운이 남아도는 킬리가 담당했고, 부상을 입은 소린은 불가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빌보는 어디 있는가 하면- 조금 놀랍게도 소린의 바로 근처였다. 소린의 목숨을 구했으며, 원정대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자신의 몫을 다 해낸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몇 번 뒤척이던 빌보가 드디어 숨을 색색 내쉬며 잠에 빠져들자, 소린은 감았던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킬리는 이쪽을 등진 채 주위를 경계하고 있으니 눈치채진 못한 것 같았다



"....빌보."



시험삼아 나직하니 이름을 불러 보았더니, .. 하는 작은 신음만 들려오고 여전히 잠에 빠져들어 있다

소린은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빌보를 약간 일으키고는, 부상당한 사람답지 않은 빠른 손놀림으로 조끼를 벗겨냈다. 잠깐이라고는 하나 손이 와 닿았으니 깨어날 법도 한데, 평생 인연이라곤 없었을 칼도 쓰고 용기도 낸 탓인지 미동도 하지 않고 쿨쿨 잠들어 있기만 했다. 소린에게는 무척 다행이었다벗겨낸 조끼는 단추가 온통 뜯겨져 나가 있었다


늘 잠그고 있던 옷이 어째 영 헐렁해 보인다 했더니, 아무래도 고블린 동굴에서 탈출할 때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보온 효과도 별로 없겠군. 짐도 거의 빼앗기거나 잃어버렸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건 별로 없었지만, 새 단추를 달아줄 정도의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소린은 바위에 등을 기대어 앉아 천천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으, 등에서 소리가 난 것 같아.."



다음날 아침 누구보다도 일찍 잠에서 깨어난 빌보는 기지개를 켜며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시선을 부드럽게 움직이자 등을 돌린 채 불침번을 서고 있는 킬리가 보였고, 근처에 팔짱을 끼고 잠든 필리, 바닥에 누워서 코를 골고 있는 봄부르, 옆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보푸르와 비푸르, 대자로 뻗어있는 노리와 도리, 그에 비에 얌전하게 잠든 오리, 자는 모습조차 와일드한 드왈린, 엎드려서 기절하듯 자고 있는 오인과 글로인, 잘 안 보이는 발린, 그리고 자신의 조끼를 손에 쥔 채 약간 불편하게 잠든 소린이 보였다. 모두 그대로였다. 빌보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다가 홱 돌렸다


내 조끼를 든 소린? 불편한 자세로? 빌보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눈을 아무리 깜박여 봐도 눈 앞에 있는 소린의 모습은 틀림이 없었으며 그 손 끝에 들려있는 조끼 또한 자신의 것이었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일단 소린의 눈 앞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 깨어나지 않는다. 빌보는 조심스레 조끼를 소린의 손 안에서 빼내고 살펴보았다. 그리고 응당 없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단추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양 가지런히 달려 있었다. 몸도 성치 않은 상태에서, 에레보르를 앞에 두고 여러가지 생각이 많았을 텐데. 그는 늦게까지 이 작업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옷이 벗겨질 때 아무것도 모른 채 쿨쿨 자고 있던 자신을 앞에 두고. 빌보는 조끼를 꽈악 쥐었다. 어제의 일들이 다시 되살아나며 괜히 뺨이 홧홧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 또 어떤 것이 있을까. 빌보는 잠든 소린을 내려다보며 뭉클한 감정에 휩싸였다.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러자면, 일단..아침식사부터 준비해 볼까?"



호빗인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이면서, 또한 가장 자신있는 일들 중 한 가지. 현재로서는 그게 최선이었고 또 아침식사 중에 분명히 소린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감사와, 신뢰, 그리고.. 그리고 또 다른 고마움의 표시를. 빌보는 다른 드워프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살금살금 걸어가 킬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먹을 것을 찾으러 나섰다. 아껴두었던 허브잎으로 놀래켜 주면 다들 좋아하겠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걸친 조끼에서 단추가 햇살에 비쳐 반짝반짝 빛이 났다




by 치우타 2014. 1. 4.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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