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들은 보통 손재주가 있는 편이었다. 그들은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고, 자연 속에서 살았으며, 드워프만큼 정교한 솜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일상적으로 쓰이는 물건들을 섬세하게 디자인하거나 꾸밀 줄 아는 이들이었다. 처음 드워프들이 빌보의 집에 방문했을 때 볼 수 있었던 귀바늘로 뜬 찻잔받침이라거나 테이블보, 덮개 따위가 꽤 섬세한 무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빌보는 어머니만큼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샤이어의 호빗 중에서는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였고 지금 이 순간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 손 끝을 사용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난감하거나 곤란하다기보다는... 신선했다.



"소린,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있다고는 못하겠네요."


"해 본 적이 없나?"


"어... 그렇지는 않아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애매한 대답을 하는 빌보를 보고 소린은 미간을 슬 찌푸렸다. 빌보의 머리는 곱슬거렸지만 짧았고, 얼마 체류하진 않았지만 그가 샤이어에서 본 호빗들은 대체로 머리가 짧은 편이었다. 길어도 어깨를 크게 넘지 않는 정도였고- 그런 환경에서 머리를 땋는 경험을 해 봤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했다. 소린이 본격적으로 추궁하는 얼굴로 팔짱을 끼자 빌보는 급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린 여자아이들이 가끔 부탁하러 오곤 했어요."


"...애들이? 왜?"


"말했잖아요, 나도 모르겠다니까요. 대부분 그 애들의 부모가 바빠서였겠지만.. 뭐. 글쎄요."



빌보는 손가락으로 뺨을 두드리고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소린은 그제서야 딱딱하게 굳은 석상마냥 힘주고 있던 팔을 풀고 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렇다면 충분히 잘 하겠군. 네 손에 맡기지. 빌보는 소린의 목소리에 아주 조금이지만 기대감이 담겨져 있다는 걸 눈치챘다. 사실 오늘이 그저 어제와 같은 일상 중 하나였다면 부담없이 예전 기억을 떠올리면서 소린의 머리카락을 땋거나 묶었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오늘은 무려- 어둠숲에서 스란두일과 레골라스가 교류 및 친선을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지난 달에는 여기에서 갔었던가. 빌보는 남의 일을 떠올리는 것마냥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소린이 무슨 머리를 하고 있었더라. 몇 가닥 땋은 머리에.. 어땠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나중에 후회할 걸요."


"아니. 난 분명 마음에 들 거다, 빌보."



빌보는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의 드워프 왕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 속에 직구를 날릴 때가 종종 있었다. 이런 말까지 듣고 나면 자신이 가진 모든 손재주를 동원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빌보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소린의 머리칼에 손을 가져갔다. 약간 거칠고 곱슬거리는 감촉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수염 다음으로 꽤 아끼는 것 같았던 머리를 그의 손에 맡겨둔 채 얌전히 등을 보이며 앉아있는 소린을 보고 빌보는 괜시리 마음 한 구석이 뜨뜻해져오는 걸 느꼈다. 



"......소린."


"끝났나?"


"음... 그렇다고 할 수 있을것 같네요."


"영 확신이 없는 대답이로군."


"내가 아까부터 말했지만-"


"알았어. 직접 확인하지."



소린은 다시금 항의의 말을 올리려는 빌보를 무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걸어갔다.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양 옆으로 평소보다는 조금 굵은 갈래로 땋아진 머리칼과, 손을 뻗어 만져보니 평소에는 늘어뜨리고 있었던 머리들이 한 데 모아져 뒤쪽에서 반묶음으로 정리된 모양이었다. 머리를 고정하거나 묶는데에 쓰인 장식들도 하나같이 소린의 마음에 드는 것들 뿐이라,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어때?"


"나한테 물어보는 거에요?"


"그럼 여기 누가 또 있나?"


"그야... 음. 위풍당당하고 멋진데요."



언제나처럼. 덧붙여진 말은 워낙 작은 소리였기에 자칫하면 놓칠 뻔 했다. 하지만 소린은 빈틈없이 캐치하고는 팔을 뻗어 빌보를 품에 그러안았다. 얌전히 딸려와 폭 안기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그는 잠시 오후의 정무에 대해 까마득히 잊어버릴 뻔 했다. 앞으로 외부 인사를 접견할 때엔 꼭 네게 맡겨야겠군. 낮게 속삭여오는 목소리에 빌보는 기겁하며 고개를 들어 소린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짖궂게 웃으며 푸른 눈을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 이럴때 정말 얄미운거 알- 결국 빌보가 조금 전에 못다한 말을 꺼내려고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입술이 덮쳐져 왔다. 또 이런 패턴이지! 왕의 기습적인 키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빌보는 조금 심술을 담아 소린의 팔을 꼬집었다. 입 안쪽에서 간지럽다는 듯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귀엽게 굴면 곤란하지. 오늘은 일정이 꽉 차 있거든."


"잘 됐네요, 나도 바쁘거든요. 전하의 옆에 붙어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저쪽에선 너에 대한 접견도 요청해 왔는데, 그거 아쉽군."


"........"


"바쁘다니 할 수 없지. 다음에-"


"좋아요, 알았어요. 옆에 있겠지만 절대로, 그들 앞에서 이렇게 굴진 말아요."


"이렇게가 뭔지 잘 모르겠는걸."



소린은 짐짓 시치미를 떼며 빌보의 이마에 다시금 입술을 붙였다. 그렇게 무뚝뚝하고 날카롭던 드워프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라고 생각하면서 빌보는 눈을 한바퀴 굴렸다. 오늘 일정도 결국 소린의 뜻대로 흘러갈 것이다. 

아마도, 밤까지.


by 치우타 2014. 1. 27. 23:37

 불을 뿜는 사악한 용, 스마우그로부터 되찾은 에레보르에는 매일같이 해야 할 일들이 차고 넘쳤다. 오죽하면 드워프가 아닌 빌보마저 발린이나 오리의 일을 도와야 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본래 그는 다섯군대의 전투가 끝난 후 소린과 원정대원들의 생사를 확인한 뒤 간달프와 함께 떠날 예정이었으나, 침상에 누워 거의 죽음에 이를 뻔 했던 깊은 부상들 때문에 신음하면서도 간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사죄의 말을 건네는 소린의 모습을 본 다음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둘의 사이가 평범한 원정대의 리더와 일원이 아니었다는 것도 물론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아무튼 부상에서 회복된 소린이 정무를 보기 시작한 때부터 본격적으로 에레보르는 소란스럽고 정신없는 틈바구니에 매일같이 놓여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식사를 거르는 이들이 속출하는 바람에, 보다 못한 빌보가 바르드의 도움을 받아 식재료를 조달하고 어떻게든 최소 하루 세 끼는 챙길 수 있도록 했다. 호빗의 기준으로 봤을 때 세 끼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기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경지였지만 워낙 상황이 상황이라 불평할 틈도 없었기에 빌보는 묵묵히 수긍하기로 했다(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그가 오랜 여정을 겪으며 거친 생활에 익숙해진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나날들 속에서 드워프들은 일에 몰두하느라 밥을 거르는 단계를 넘어서 잠을 빼먹거나(고의든, 까먹었든간에) 씻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호빗 맙소사! 빌보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진심으로 기함했다. 여행하는 길에 비를 맞기도 하고, 거미줄을 뒤집어쓰거나 물에 쫄딱 젖거나 하는 일들을 겪으며 그런 상황을 어느정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는' 경우였을 뿐이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 중 그나마 면식이 있는 원정대원들에겐 반쯤 농담을 섞어서 넌지시 청결에 대한 화제를 던져보았지만 다들 하하 웃고 마는 것이었다. 빌보에게 있어 드워프들에 대한 선입견이 하나 더 추가된 기분이었다.


거의 닷새만에 얼굴을 마주한 소린도 사실 여기에서 제외될 순 없었던 모양인지 그는 꽤나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빌보는 이번에야말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름 비장한 얼굴로 그의 앞에 걸어가 섰다. 그림자가 지는 걸 느낀 소린이 문득 고개를 들어 푸른 눈으로 빌보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들어줘요. 소린, 씻은 지 얼마나 됐어요?"


"....충분히 무례하고도 남는 질문이군."


"나도 알아요. 하지만 오늘은 말해야겠어요. 그래서, 얼마나 된 건데요?"


"흠.... 글쎄. 닷새 정도?"


"....지금 시간 돼요?"


"휴식 시간을 묻는 거라면, 한두시간 정도는...낼 수 있을 것 같다."


"잘 됐네요. 정말 잘 됐어요."



소린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꼽아보곤 납득하는 빌보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이 작은 호빗이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틈도 없이, 빌보가 그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고 몇 마디를 더 꺼내었지만 빌보는 소린의 손을 붙잡고 가보면 알 거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마치 제 집인 양 성큼성큼 나아가는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작게 웃음지었다. 평온한 시골 동네에 앉아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하던 빌보가 언제 이렇게 에레보르에 적응한 것일까. 사실 그가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걸 듣고 가장 기뻐했던 것은 아마도 소린이었을 것이다. 붙잡기엔 그가 내뱉은 저주스러운 폭언들이 너무나 무거웠고, 보내기엔 그를 아끼는 마음이 컸던 탓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속을 끓였는데 빌보는 뜻밖에 스스로 남겠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 때 그는 사실 당장이라도 그의 호빗을 끌어안고 수 없이 고맙다고 말하며 입을 맞추고 싶었으나 체면과 기타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하여 꾹 눌러 참았다.



"여긴.... 방이잖나. 왜 대낮에 여길-"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요."


"들어가라니, 어딜?"


"당연히 욕조지 어디겠어요! 지금 당신 정말.. 굉장하다구요. 다른 드워프들은 몰라도, 소린. 당신만은 안 되죠."


"안 된다니, 대체 뭐가... 영문을 모르겠군."


"그런 꼴을 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요! 왕으로서 좀 더 그... 품위라던지! 아무튼 빨리 들어가요!"



대체 왜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빌보가 투덜거리며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린의 클록을 냉큼 빼앗아 들었다. 그제서야 소린은 빌보의 말뜻을 이해하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옷가지들을 벗어 내려놓았다. 미리 준비해둔 것인지, 딱 알맞은 온도의 물이 기분 좋게 몸을 감싸오자 소린은 나직히 신음을 뱉었다. 



"언제 누가 손님으로 올 지도 모르고.. 하여튼 이런거 까먹지 말아요. 말하는 내가 더 민망할 지경인거 알아요?"


".....그렇게 걱정이면 매일 같이 들어오면 되는거 아닌가?"


"귀찮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 정도야 뭐...."



시선을 비껴내며 대답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소린은 충동적으로 빌보를 끌어당겨 입맞추었다. 그 과정에서 손을 허우적대다가 물에 젖어버린 빌보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부러 그랬죠? 아니, 미끄러지는 것까지 생각하진 않았는데. 결국 드워프 왕의 회유와 끈질긴 유혹에 넘어간 빌보는 목욕에 동참했다가 저녁시간을 놓치는 사태를 맞이했대나 어쨌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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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홀릭 드워프들은 어쩐지 저럴것도 같아서 충동적으로 써봤는데 고자라 끝이 흐지부지함

언젠가 야한것도 쓰겠죠 뭘 ㅇㅅaㅇ  


by 치우타 2014. 1. 26. 23:52

 빌보는 느린 발걸음으로 산길을 걷고 있었다. 오늘은 모처럼 하늘이 푸르게 개어 무척이나 맑았고, 봄바람도 적당히 불어와 산책하기에는 최상의 날씨였다. 입가에 문 연초를 조금 게으른 손놀림으로 매만지며 그는 아무렇게나 근처의 바위에 앉았다. 이 시기에만 피는 꽃을 찾으러 온 길이건만 주변의 경치나 분위기에 홀려 자꾸만 이렇게 멈추어버리고 만다. 너무 늦어지면 손님이 집에 와도 만날 수가 없을 텐데. 빌보는 퍼뜩 꿈 생각이 떠올라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오늘 저녁이 될 지도 모른다. 점점 꿈을 꾸는 빈도수가 늘었고, 내용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 전 지나가듯 마을을 방문한 마법사인 간달프에게 상담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었다. 예지몽일지도 모르지, 빌보 배긴스. 언제나 자네의 주변을 정돈하며 때가 되면 찾아올 이를 기다리게. 그런 일일수록 아무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게 되니까 말이네.


 사실 빌보는 몇 달 전부터 같은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있었다. 또 재미있는 점은, 그저 반복만 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즐거운 저녁식사를 맞이하여 식탁 앞에 앉은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문객들이 줄줄이 찾아와 그의 식량창고를 거덜내 버린다. 간달프가 어째서인지 빌보를 설득하려고 하고, 그는 거절했지만 결국 따라나서게 된다. 오크들과 늑대, 거대한 곰, 환각을 보여주는 숲과 괴물 거미들... 여행은 전혀 순탄치 않았고 시련은 점점 많아지기만 했다.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반지와, 어떤 것을 찾으려는 일행들, 불을 내뿜는 용, 빛나는 돌에 얽힌 다툼과 오해, 커다란 전투- 마치 꿈 속에서 잘 쓰여진 책 한 권을 보는 것만 같은 긴박감과 스스로가 거기 참여하고 있다는 현장감에 빌보는 꿈에서 깨고 나서도 한동안 그 여운을 떨쳐낼 수 없었다. 게다가 꼭, 바로 엊그제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마치 꿈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루는 일행들 중 가장 가까웠던- 마치 연인같은 사이였던 이가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거의 죽음에 다다르는 걸 보았는데 그날은 종일 손이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꿈의 내용이 자세해지고 더욱 선명해질수록 빌보는 하릴없이 문가 근처에서 서성이거나, 벤치에 앉아 멍하니 연초를 태우는 날이 늘어났다. 책을 읽고, 시장을 다녀오고, 매일같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저녁이 되면 꼭 문 앞에 누군가 다다를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자신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절도있는 엄숙한 노크 소리가 들려오기만을. 


잘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 냅킨을 목에 걸고, 생선에 소금을 천천히 뿌리며 빌보는 오늘도 이렇게 지나가는군, 하고 체념했다. 그 때, 문 쪽에서 정확히 세 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 지금, 바로 나갑니다!"



가운을 여미고 허둥지둥 뛰쳐나가 문을 열자, 거기엔 꿈 속에서만 보던 이가 서 있었다.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의 검은 머리,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 길지 않은 수염. 정말 너무나 똑같아서 빌보는 지금이야말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따끔한 아픔이 금세 몰려와 그는 안도할 수 있었다. 



"......빌보."


"....소.....린...?"



눈 앞에 선 남자의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놀랄 겨를도 없이, 빌보 또한 어떤 이름을 주저하며 입에 담았다. 그가 꿈에서 부르던, 남자의 이름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에 무척 놀란 듯,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표정을 한 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빌보는 어쩐지 그 모습이 무척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는 성큼 거리를 좁히더니 팔을 뻗어 빌보를 가두듯 끌어안았다. 아, 꿈에서와 같구나. 낯설지 않은 체온, 차가운 바람과 바위의 냄새. 빌보는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남자의 등을 마주 그러안았다. 그 작은 움직임에 남자는 흠칫 떨더니 아예 고개를 빌보의 어깨부근에 파묻었다. 미안하다, 내가... 좀 더 일찍.... 너무 늦었을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남자의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에는 반 쯤 울음이 섞여 있었다. 


보는 그제서야 조금씩 꿈과 현실의 다리를 이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그 꿈들은 단순히 상상이 아니라, 그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아직 그걸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자신을 끌어안은 채 서투른 고백을 쏟아놓으며 울먹이는 남자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다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빌보는 넓은 등을 달래듯 토닥이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소린. 그 한 마디에 끌어안는 힘이 더욱 강해졌고, 빌보는 조금 등이 아파왔지만 어쩐지 남자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의 지루한 저녁 기다림도, 언제 가졌는지 모를 칼과 가방, 몇 가지 짐들에 대한 의문도 해결되었다. 어색하던 일상의 끝이 찾아옴과 동시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빌보는 기분 좋게 웃으며 눈을 감고 이 순간을 음미했다. 고소한 생선 냄새가, 완전히 식어 사그라들 때까지 둘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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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싶어 설명 추가. 빌보는 다섯 군대의 전투 때문에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설정으로 생각한 글입니다.

 소린은 에레보르 재건의 밑바탕을 다 마련해두고 빌보에게 달려왔지요. 그리고 해피엔딩.

by 치우타 2014. 1. 25. 23:44

 소린은 어두운 복도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일행과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닥 많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지금 스마우그에게 허무한 개죽음을 당할 생각같은 건 요만큼도 없었다. 어차피 요새 안에서의 길은 한정되어 있고 일행들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찾으며 각자 스마우그의 공격을 피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었다. 소린은 칼을 고쳐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왕가의 널따란 홀이 바로 코 앞이었다.



"소린 오큰쉴드! 거기에 있는걸 다 알고 있다. 어디에 숨어도 소용없어, 냄새가 나거든."


"느려터지고 멍청한 지렁이 주제에, 입은 쉴새없이 잘도 놀려대는군. 와서 잡아 보지 그래?"


"오, 안 되지. 이 게임의 주도권은 완전히 나한테 있다. 네가 찾는 것도, 네가 데리고 있던 것도 말이야."



사악하고 우릉대는 스마우그의 목소리가 홀 저편에서 들려왔고, 소린은 최대한 불 공격을 바로 피할 수 있도록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며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스마우그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완 다르게 어떤 여유 같은 것이 엿보였고, 말 끝부분엔 이상한 단어를 섞어 뱉고 있었다. 찾는 것? 데리고 있던 것?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아 경계하며 걸음을 늦추려던 때 스마우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네가 찾는 건 바로 아르켄스톤이라는 걸 안다. 이 번쩍이는 보석이 너희에겐 더없는 보물이니까."


"더러운 네 발 아래에 있기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물건이지. 애초부터 우리 것이었다."


"탐욕스럽고 멍청한 너희가 산으로부터 빼앗은 게 아니고? 어쨌든, 지금은 그걸로 논쟁할 생각은 없어. 다른 재미있는 게임이 준비되어 있다. 그래, 아주 흥미로운 게임이야."


"게임이라고?"


"간단해. 선택을 하면 되는 게임이다. 고르는 역할은 드워프, 네가 맡게 됐지."



 스마우그는 뻐기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꼬리를 크게 움직였다. 근처의 작은 동상 하나가 그 기세에 부숴졌고, 빼앗긴 집이 훼손되기까지하는 장면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엔 없는 소린은 이를 으드득 갈며 주변을 살폈다. 흩어진 원정대 일행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고, 스마우그의 발치 근처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고르는 역할이라니, 또 무슨 사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자, 시간이 없어. 난 호수마을 놈들을 먼저 처리하고 올 생각이거든. 선택해라, 드워프. 아르켄스톤인가? 아니면 네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인가?"


"내가 이 게임 따위에 참여하길 거절하겠다면?"


"그렇게 되면 오만한 드워프, 너는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 선택해라. 어느 쪽이지?"



 소린은 고민에 빠졌다. 아르켄스톤은 그가 찾아헤매던 오랜 목표였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 어떤건지 모르는 상태에서 바로 결정을 내려도 되는지가 의문이었다. 에레보르일 수도 있고, 혹은 아예 다른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만일 그의 짐작대로 에레보르나 혹은 다른 물건이라면 아르켄스톤을 먼저 찾은 후 언제든 되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린은 마음을 정하고 몸을 숨긴 채 외쳤다.



"네가 빼앗아간 모든 것을 되찾겠지만, 지금은 아르켄스톤을 택하겠다!"


"그럼 결정된 거로군! 어디 이걸 가지고 잘 해봐라!"



스마우그의 비웃음섞인 목소리에 뒤이어 어떠한 비명같은 것이 짧게 울리고, 이내 사그라들었다. 안 돼! 누군지 모르겠지만 익숙한 외침 또한 들려왔다. 소린은 가슴 속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황급히 앞으로 뛰쳐나왔고 스마우그는 날개를 펼쳐 호수마을을 공격하기 위해 날아가 버렸다. 그 거대하고 끔찍한 덩치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쓰러진 인영 하나와,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로 물든 채 영롱하게 빛나는... 아르켄스톤이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이의 바로 근처에서 원정대원들이 슬픔과 분노, 충격에 휩싸인 채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달려가던 소린의 손 끝에서 칼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온통 피투성이인 모습으로 쓰러진 것은- 이 원정대의 마지막 일원인, 빌보였다.



"......안돼.........."



소린은 쥐어짜내듯 그 한 마디만을 뱉어냈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덜컥거렸다. 바로 눈 앞에 아르켄스톤이 있었지만 당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절망으로 가득 찬 그의 두 눈에는 핏물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빌보만이 보일 뿐이었다. 안돼, 안 돼.... 제발. 거의 기듯이 다가가 빌보를 안아올렸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촛점이 없었고, 숨을 쉬는 기색도 느낄 수 없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소린은 죽음을 맞이한 그의 사랑스런 호빗을 끌어안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다. 그가 빌보를 죽였다.




".....린, 소린!"


"....헉!"



 다음 순간 소린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깜깜한 방 안에 곧 작은 불이 켜지고,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깜박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빌보가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안 좋은 꿈을 꾸는 것 같길래 깨웠는데...."


"......꿈....이라고.."


"맙소사, 당신 무슨 식은땀을 이렇게 흘렸어요? 가운은 갈아입는게 좋겠어요. 지금 가져올-"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와 뺨을 만지더니 금세 떨어져나갔다. 소린은 침대에서 벗어나려는 빌보의 몸을 다급히 끌어안았다. 우왓. 거의 습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갑작스러운 포옹에 빌보가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소린?"


"....그냥, 이대로 잠시만..."



빌보는 떨리는 소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꽈악 잡았다. 차갑게 식은 몸이 아닌, 따스하고 부드러운 체온이 닿아오자 소린은 이것이 현실임을 직감하며 더욱 품 안의 몸을 세게 안았다. 악몽이라곤 해도 정말 질이 나빴다. 게다가 일전에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에게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는 그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기만을, 소린은 마음 속으로 바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by 치우타 2014. 1. 24. 23:48

  빌보는 도서관의 책들 속에 푹 파묻힌 채로 오래된 고서들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소린이 대외 일정으로 무척 바빴기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급하게 뛰쳐나간 흔적이 역력한 옆자리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아침 인사를 건넬 수 없었다는 섭섭함을 애써 떨치며 방을 나섰다.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아는 드워프는 도중에 우연히 만난 오리, 보푸르, 발린 셋 뿐이었다. 드워프들은 책을 즐겨 읽는 종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간 역사를 훌륭하게 기록할줄은 알았다. 불멸의 두린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이 드워프어로만 쓰여져서 무척 읽기 어려웠지만, 다행히도 빌보의 이런 고충을 알아챈 오리가 공용어로 쓰인 고서들이 있는 자리를 찾아내서 알려 준 덕분에 빌보는 몇 시간이고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소린은 같은 시각에 왕좌에 앉아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난 주에 그가 세웠던 계획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지금쯤 빌보를 데리고 호수에 가서 낚시를 가르쳐 주고 있었을 것이다. 2주일 동안 거의 쉬지도 않고 중요한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자기 직전을 제외하곤 거의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던 그의 호빗과 모처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터였다. 이틀 전 갑자기 철산에서 날아온 서신 때문에 무슨 중차대한 일인가 싶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를 마련했건만, 대표격으로 온 드워프들은 그에게 터무니없는 조건을 가지고 와서 교역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래도 동족이자 다섯 군대의 전투에서 상당한 전력이 되었던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에 최선을 다해 응대하고는 있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이런 조건따위로 에레보르를 얕보러 왔다면 큰 오산이라며 화를 내고 쫓아내고 싶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바로 옆에 선 발린이 눈짓으로 참으라는 사인을 보내왔고, 소린은 속으로 이를 갈며 왕좌의 손잡이 부분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그래봐야 돌이라 소리도 뭣도 나질 않았지만.



"-해서, 빠르면 다음 달부터 시작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희들의 요청입니다."


".......다음 달?"


"에레보르 재건도 순조로운 상황이니,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소린의 인내심이 뚝 하고 끊어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발린이 뒤늦게 알아채고 어떻게든 입을 열어 대충 무마해보려고 시도했으나, 이미 소린의 얼굴에는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 다음 달? 형편없는 조건부터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감히 에레보르 재건 상황을 논한 데다가 일정을 제멋대로 잡아서 요청해? 



"철산에서 어떻게 에레보르 재건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건가?"


"그게 무슨...."


"계획들과 실제 업무들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모자라고 바쁜 이 시기에, 교역이라니. 가능하리라고 보나?"


"허나, 저희가 들은 소식으로는..."


"그래, 그 소식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들었는지 정말 궁금하군. 나조차 모르는 걸 철산에서 알고 있다니 말이야."



소린은 낮게 으르릉거리듯 말하며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철산의 드워프들은 동요하여 서로를 마주보고 웅성대었고, 대표로 나서서 말하고 있던 자는 뻘뻘거리며 입을 뻐끔거렸다. 내부의 첩자를 찾아내는 작업도 필요하겠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이 귀찮은 불청객들을 쫓아내거나 다른 이에게 상대하도록 두고 여길 벗어나는 것이 소린의 가장 시급한 목표였다.



"발린. 나머지는 맡기겠다."


"어딜 가십니까?"


"바람을 쐬고 싶군."


"찾으시는 거라면 도서관 쪽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참고하지."



여전히 우왕좌왕하며 어쩔줄을 모르는 철산의 드워프들을 뒤로 한 채, 소린은 성큼성큼 걸어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참아줄 수가 없었다. 만일 이런식으로라도 뛰쳐나오지 않았더라면 안 좋은 쪽으로 그의 성격이 폭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나긴 복도와 홀을 지나고 계단을 몇 개 오르고 나자 드디어 도서관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소린은 그의 호빗을 찾아내기 위해 좀 더 걸음을 재촉했다. 먼지 냄새 가득한 책장들을 지나치던 도중 드디어 그의 시선 한 켠에 익숙한 곱슬머리가 들어왔다. 



"빌보!"


"....? 소린?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줄 알았어요?"


"여기에서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것 같나? 그보다 이리 와."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소린, 숨 막혀요. 좀 살살...."



 빌보는 느닷없이 나타나 단단히 제 몸을 끌어안는 소린의 팔 안에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사정은 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끌어안아온 탓에 읽고 있던 책은 바닥에 떨어졌고, 근처에 쌓여 있던 몇 권의 책들도 바닥에 흩어졌다. 어지러이 먼지가 날리어 빌보가 조금 콜록거리자, 소린은 아예 빌보를 품 안에 가두듯 포옹해 버렸다. 아담한 그의 호빗은 뭐라고 웅얼거리며(소린의 옷에 파묻히는 바람에 잘 들리지 않았다) 잠시 바르작거렸지만 이내 얌전해지더니 포기한 듯 마주 팔을 둘러 안아왔다. 그제서야 소린은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며 조금 힘을 풀고 온전히 제 품 안의 체온을 즐겼다.



"어디 갈 때는 나한테 미리 말하기로 했을 텐데."


"오늘 아침부터 당신 바빴잖아요. 인사도 못 할 정도로..."


"그래도, 와서 말하고 가도록 해."


"....이럴 때 당신이 고집쟁이라는 걸 느낀다니까요."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다."



 금세 여유를 되찾은 소린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되받아쳤고, 빌보는 체념한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소린의 가슴에 기댔다. 고집세고 자기멋대로인 드워프 왕은 자신의 이점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또한 빌보가 그에게는 한없이 약해진다는 것도 숙지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주도권이 소린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후엔 낚시하러 갈 수 있는지 물어볼까. 빌보는 손가락으로 소린의 땋은 머리를 매만지며 작게 웃음지었다. 여러 번 양보했으니 오늘 한 가지 정도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소린도 그의 작은 호빗에게는 한없이 약해졌으므로.




by 치우타 2014. 1. 23. 23:21

 눈을 굴리는 작업은 생각보다 쉬웠으나, 문제는 애써 뭉쳐두면 자꾸 스르르 풀어져 내리고 만다는 점이었다. 뭔가 이렇게 단단한 느낌으로 덩어리가 되는 게 아니라 포슬한 눈가루를 억지로 모아둔 것 같았다. 빌보는 어정쩡하게 모아진 눈덩이들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샤이어에는 눈이 거의 오질 않으니 이런 식으로 뭔가를 만들 생각은 해 본적도 없었거니와 운이 좋은 날엔 그저 되는대로 뭉쳐서 눈싸움에 뛰어들기에 바빴다. 눈뭉치, 눈덩이.... 제자리를 맴돌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드리던 빌보는 다음 순간 고개를 번쩍 들어 근처의 작은 웅덩이를 보았다.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것과 비슷하게, 눈뭉치를 조금 적시면 좀 더 단단하게 뭉쳐지지 않을까? 그는 고민하는 걸 그만두고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무서운 기세로 일을 처리해나가던 소린이 빌보가 어딘가로 향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빌보 자신이 예상한 대로 점심 즈음이었다.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제안서를 읽었으며 온갖 집무와 시스템, 에레보르의 보물을 관리하거나 드워프들의 불만에 대해서도 조금씩 따로 조사하고 있던 그로서는 숨 쉴 시간도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빠르던 늦던 언제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점심식사도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법이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발린의 차분한 목소리에 소린은 드디어 펜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빌보는? 어디 갔지?"


"아까 성문 쪽으로 나가는 것을 봤습니다만."


"나갔다고? 어딜? 데일에 간다고 하던가? 아니면 호수마을?"


"진정해요, 소린. 그는 성문 바로 근처에 있다고 아까 보푸르가 알려왔습니다."


"성문 근처... 다행이군. 최근 늑대들이 심심찮게 내려온다고 해서 걱정이라.... 별 일 없겠지."


"어차피 그도 꽤 터프한 사내잖습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발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소린은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되어 괜시리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너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말라고는 했건만, 그래도 점심은 같이 먹고 싶었는데. 그는 심술이 삐죽삐죽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수염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들어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빌보. 



"...?! 방금 그거 뭐지?"



 빌보는 급작스레 끼쳐온 한기에 놀라 몸을 움츠리며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따란 평지와 웅장한 에레보르의 성, 그리고 새하얗게 쌓인 눈과 자신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산에서 심심찮게 늑대나 들개가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빌보는 서둘러서 눈뭉치를 다듬었다. 몸통에 조금 두꺼운 나무를 끼우고, 머리에는 머리칼처럼 약간의 재주를 부려서 풀로 꾸미고, 코까지 바로 세워준 다음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펴고 섰다. 조금 전까지 힘 없이 흘러내리던 눈뭉치가 있던 자리에는 귀여운 사이즈에 비해 꽤나 엄숙한 표정을 한 눈사람이 있었다.



"생각보다 꽤 닮은 것 같아. 특히 얼굴이."


"그렇군. 연구 열심히 했는걸."


"맙소사, 세상에! 소린!! 당신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심장마비를 유도했다간 국물도 없을 줄 알아요!"



등 뒤에서 갑작스레 불쑥 튀어나온 소린의 모습에 빌보는 소릴 꽥 지르며 돌아섰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니고 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 이젠 안 그런 적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소린은 이런 식으로 빌보를 놀래키곤 했다. 전투에 익숙한 드워프 왕으로서 기척도 내지 않고 살금살금 빌보의 등 뒤로 다가와서는 귓가에 속삭이거나, 포옹하거나, 일부러 더 놀라는 모습을 보려고 큰 목소리를 내거나 하는 식의 아이같은 장난이었다. 저 여유로운 얼굴에 눈이라도 던져주지 않고는 도저히 못 견디겠는걸. 빌보는 이내 침착한 얼굴로 발 아래의 눈을 금세 뭉쳐서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 눈사람은 나인가? 머리도 만들었군."


"그래요. 당신이에요, 나중에 보여주려고 했더니만.... 에잇!"



작은 손이 앞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소린의 얼굴은 기가 막힌 스트라이크 눈덩이를 정면으로 맞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빌보의 손 힘이 약했다는 것이고, 눈이 단단하게 뭉쳐지지 않아 크게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거였다. 소린은 입가에 짖궂은 미소를 한가득 떠올렸다.



"후회할텐데, 빌보."


"그렇게 만들 수 있으면 해 봐요! 아니면 그 시간에 던지던가!"



또 다시 눈덩이가 날아왔고 이번엔 여유롭게 고개를 틀어 피해낸 소린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어깨에 눈뭉치를 맞았다. 잠시 말문을 잃고 어깨와 빌보를 바라보는 소린이 좀 귀여워서 빌보는 애써 참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오, 지금 웃었다 이거지. 소린의 승부욕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불길이었다. 가여운 빌보는 상대의 어떤 스위치를 켰는지도 모른 채 활짝 웃으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쯤 눈에 파묻히게 해 두고, 그대로 성에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린은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노련한 손놀림으로 눈을 조금 단단하게 뭉쳤다. 


-결국 눈싸움은 빌보의 완전한 패배로 돌아갔고, 벨트 없는 챔피언이 된 소린은 기진맥진한 빌보를 들고 그대로 침실에 직행했다고 한다.

 

by 치우타 2014. 1. 22. 23:30

 소린은 불가 앞에 앉아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크 무리를 따돌린 것은 좋았지만, 조랑말 없이 걷고 뛰어서 움직여야 하는 그들이 언제고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계속해서 도망치듯 달려온 길에 모두 지쳤는지 얕은 숨을 내쉬며 곯아떨어졌다. 특히 평소에 크게 코를 골며 자던 봄부르조차 걱정될 정도로 조용하게 숙면하고 있는 상태였다. 불이 지나치게 약해지진 않도록 불쏘시개와 작은 장작으로 조절하며, 그는 문득 시선을 바로 옆의 호빗- 빌보에게 돌렸다. 빌보는 약간 불편한 자세로 담요를 거의 얼굴까지 끌어올린 채 잠에 빠져 있었다. 소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쓰다듬었고, 빌보가 그 기척에 어깨를 조금 들썩였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에레보르를 잃고, 인간들의 도시와 황야를 떠돌며 그는 내내 겨울의 차가운 삭풍과 희뿌연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뜨거운 불 앞에서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동안 죽어간 동족들과 불을 뿜는 용을 떠올렸고, 소식을 모르는 아버지와 목이 잘린 할아버지의 얼굴이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소린은 결코 어떤 것도 용서하거나 잊어버릴 수 없었다. 좋은 것은 그에게 사치였으며 사람들의 값싼 동정이나 무심한 눈길, 호기심에 더욱 경계하고 날을 세웠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고, 타인에게 정을 주거나 받을 생각따위 요만큼도 하지 않았다. 


....이 작고 경이로운 호빗을 만나기 전까지는.


  소린은 이번엔 빌보의 뺨을 살며시 매만졌다. 힘들고 괴로운 여정일 텐데도,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부지런히 그와 다른 드워프들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때로는 더 좋은 길을 제시하기도 하고, 지름길을 찾아내기도 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무겁고 지친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빌보는 한낮에 떠오른 태양처럼 따스했고, 부드러운 존재였다. 그의 옆에 있으면 고향을 잃은 후로 느껴보지 못했던 정착감, 안도감 같은 것이 조심스럽게 마음 구석 어딘가에 자리잡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더불어 욕심이 났다. 언제까지고 복수와 의무에 떠밀려 방황하는 삶이 아닌, 정착하여 그 자리에 충실하는 그런 삶이. 그리고 그것은 빌보의 옆에서라면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려한 에레보르의 황금빛 방 대신에 소박한 백엔드의 난롯가 앞에서 나란히 앉아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일상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코 가질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작은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이 그 때는 아니었다. 아마도 소린이 원하는 평범한 삶이란 힘든 여정의 끝에서 스마우그를 물리치고 에레보르를 되찾은 다음, 동족들의 삶을 다시 일구고, 그 자리를 여동생과 조카들에게 물려준 후 비로소 그가 얻을 수 있는 최후의 보상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언제쯤 올까. 그때까지 너는 내 옆에 있어 줄까. 따스한 옆자리를 내게 내어 줄까. 세상 모르고 잠든 빌보에게 들리지 않을 질문을 던지며, 소린은 가만히 몸을 숙여 빌보의 이마에 입술을 찍어눌렀다. 


by 치우타 2014. 1. 21. 23:03

 두린의 날이 지나가고, 드디어 에레보르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중간계에서도 서늘한 지역에 속하는 외로운 산과 그 인근은 겨울이 찾아오면 혹독한 바람과 부족한 식량에 대비해야만 했다. 여기에 눈이라도 많이 내리는 날이면 호수마을은 거의 모든 업무가 마비되었고,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춘 데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에레보르는 요새로서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는 만큼 겨울준비가 무척 중요한 사안에 속했고 그래서 이 시기의 드워프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소린, 내가 도와줄만한 일은 없어요?"


"아니, 이건 우리가 직접 하는 게 낫다. 여길 되찾고 첫 겨울을 나는 거니까 확실하게 다시 익혀두지 않으면 안 돼. 지금은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때니까 주의하도록 하고."


"오, 어.... 으음. 알았어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빌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린은 그제야 만족한 듯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 처음엔 드워프와 호빗 간의 전혀 다른 습성이나 생활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충돌을 일으켜 온 그였던 만큼, 아직 빌보에 대해 잘 모르는 혈기왕성한 드워프들이 쓸데없는 호승심으로 그의 호빗을 귀찮게 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일일이 옆에 붙어다니거나 원정대원을 붙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미리부터 다짐을 받아 두는 쪽이 훨씬 더 이득이었던 것이다. 일과 자신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무섭게 집중하기 시작한 소린을 보며 빌보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내 포기하고는 살금살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소린은 아마 점심때가 되어서야 그의 부재를 눈치채리라.


 빌보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에레보르의 입구(출구로도 사용되지만)를 향해 걸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지금 이 시간대에는 대부분의 드워프들이 광산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감별하거나 가공하는 드워프들도 거대한 작업대 앞에 보이질 않았다. 에레보르를 탈환한 소린 오큰쉴드와 그 원정대가 여기뿐만 아니라 중간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영역침범을 무척 불쾌하게 생각하는 다른 드워프들에게 있어서 빌보의 존재란 이질적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나마 최근에는 발린이 소린의 명으로 빌보에게 어떤 시비나 위해를 가하는 자가 있다면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는 포고령 비슷한 것을 내렸기에 노골적인 시선이나 무례한 언행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어디에든 멍청한 이는 있는 법이었다. 그런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소린은 지금 이 시기엔 주의하라고 빌보에게 따로 언질을 준 것이다.



"아예 데일에서 사나흘 정도 있다가 올까?"


 무심코 생각을 입 밖에 흘려내던 빌보는 이내 혼자서 픽 웃고 말았다. 반나절 정도의 외출에는 소린도 그닥 신경쓰지 않았지만, 하루를 넘기는 일정이 될 경우 대체 왜 그런 일정을 잡았으며 혼자서는 위험하다는 둥 볼 것도 없는데 자꾸 어딜 나가냐는 둥 마치 반려자를 의심하는 사람처럼 굴곤 했던 것이다. 안 그러게 생겨서는, 역시 사람, 아니 드워프는 같이 지내봐야 안다니까.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빌보는 암, 암 하고 격하게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 앞에 어느새 에레보르의 거대한 입구가 떡하니 서 있었다. 경비원들은 빌보를 보고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주었고, 그는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빌보는 문자 그대로 입을 쩍 벌리며 굳어버렸다.



"오, 세상에. 눈이라니...."



 흰 눈송이가 하늘에서 소리도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땅에 쌓이고 나무와 바위, 산에 쌓여서 온통 흰 색으로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빌보는 교양없게 딱 벌어진 입을 수습하는 것도 잊은 채 눈 앞의 진풍경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샤이어는 일년동안 거의 대부분이 따뜻한 곳이라 눈 구경을 하려면 정말로 운이 좋던지 아니면 마을을 벗어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샤이어의 호빗들은 이미 알려졌다시피 모험이나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 눈을 볼 가능성이 남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빌보는 천천히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손을 쭉 뻗었다. 반짝이는 눈송이가 손에 닿아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모습이 무척 애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빌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 보푸르! 구경 나왔어요. 다들 바쁜데 제가 도와줄 일은 없다고 해서... 보푸르야말로 어떻게?"


"데일에 뭣 좀 사러 왔다가 들어가는 길이지. 눈이 오길래 서둘렀어. 그보다 손 시렵지 않아?"



보푸르가 빌보의 맨 손을 가리키며 여상히 물었다. 빌보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았던 손 끝에 한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타고 올라와서 간지럽고, 찌릿하고, 차가운 감각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좀 그런것도 같네요. 아무 생각 없이 나왔어요."


"그럼 이거라도 좀 끼고 있어. 나중에 주면 되니까."



불쑥 눈 앞에 들이밀어진 것은 속에 부드러운 털이 있는 가죽 장갑이었다. 고마워서 어쩌죠, 보푸르. 빌보는 어쩔줄 몰라하며 장갑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만지기만 해도 벌써 손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난 들어갈테니 너무 늦게까지 놀진 마!"


"노골적으로 논다는 말 들으니까 좋네요! 이따 봐요!"



빌보는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하고는 돌아서서 눈이 많이 쌓인 곳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한창 자라는 중인 식물이나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나니 실질적으로 눈이 쌓인 장소가 크진 않지만, 이 정도면 확실하게 작은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빌보의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엄청나게 뛰어난 기술을 가진 건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그는 눈을 뭉쳐서 동그랗게 굴리면서 움직였다. 



by 치우타 2014. 1. 20. 22:47

 샤이어에서 살고 있었을 때, 빌보는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을 보냈다. 마을에서 장을 보고, 가끔 기분이 나면 근처로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마을 경계를 지나치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친척들과 술을 마시거나 저마다의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 뽐내기도 했었다. 식량 창고를 채우고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행복을 즐기는 것, 그게 바로 호빗이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빌보는 처음 에레보르를 수복하고 난 뒤 광산과 요새를 바삐 오가며 일에 몰두하는 드워프들을 보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대충 때우고 일, 일, 그리고 또 일이었다. 마치 일에 중독된 것마냥 하루종일 어떤 무언가에 투자하고 치중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는 거의 농땡이를 피우지 않았다.


 며칠간 그런 그들의 모습을 충분히 관찰한 빌보는 방 안에서 뱅글뱅글 돌며 고민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 드워프와 호빗은 그 생활양상이 같을 수는 없었고 이것을 어떤 기준을 가지고 비교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호빗이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다고 해서 그들이 게으른 게 아닌 것처럼 드워프들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일에 몰두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지나치게 외곬수적인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빌보는 그들 사이에서 평소처럼 지내는 것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하던 차였다. 뭐라도 하면 좋을텐데, 여기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꽤나 한정되어 있었다. 가진 기술이나 능력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결국 빌보는 백엔드에서 가끔 심심풀이로 하던 손뜨개를 떠올렸고 겸사겸사 이 삭막한 에레보르에 몇 가지 장식품을 추가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즉시 재료를 구입하는 일에 착수했다.



"요새 자주 바깥에 나가는 모양이더군."


"아, 필요한 게 있어서요. 데일은 정말 좋은 마을이더군요! 덕분에 새로운 걸 만들어볼 수 있겠어요."


"만들다니? 뭘 만들 생각이지?"


"금방 알게 될 거에요. 거의 다 준비했거든요."



 수수께끼같은 말을 하고 빙긋 웃어보이는 빌보를 보며 소린은 이 깜찍한 호빗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에 대해 잠시간 조사인원을 꾸려볼까에 대해 생각했으나, 안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 많은 차에 그런 식으로 인력을 낭비할 수는 없었기에 바로 그만두었다(필리와 킬리는 먼저 자처하여 나설 것 같았으나 그 둘은 더더욱 논외로 쳐야 했다). 무척 다행스럽게도, 소린의 작은 의문에 대한 답은 아주 빨리 찾아왔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물어도 되나?"


"이건 손뜨개라는 건데 꽤 재미있어요. 시간 보내기에도 좋고 유용하고."


".....보통 그런건 여자들이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 남녀차별적 발언이군요. 우린 그런 거 없어요, 하고 싶으면 하는거지."



 소린은 복잡한 얼굴로 바로 근처의 의자에 앉아 즐거운 듯이 손뜨개라는 것을 하고 있는 빌보를 응시했다. 자그마한 체구와 조용한 평화를 즐기는 것에 비해 그는 상당히 터프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소린조차 때로 놀라곤 했는데, 이런식으로 손재주가 필요한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전쟁이나 험한 여정과는 거리가 먼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만일 빌보의 나이가 더 어렸다면 소린은 다양한 의미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지금은 뭘 만드는 건지 궁금하군."


"오늘은 찻잔 받침용으로 쓸 걸 뜨고 있어요. 어렵지도 않고, 여러 개를 한꺼번에 하기에도 좋거든요."



 빌보의 손가락이 바늘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다음 동작을 이어갔다. 드워프 수염 맙소사. 소린은 속으로 탄식하며 눈 앞에 있던 서류들 중 아무거나 한 장을 급하게 집어들었다. 대낮부터 이런 식으로 혼자 도발당하는 건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특히 빌보가 몰두하고 있을때는 더욱 그랬다. 그는 애써 남은 시간동안 해결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저녁에는 방에 틀어박힐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일이란 오늘도 내일도 끊이지 않을테니 당장 급한 것들만 처리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손뜨개 하나로 너무 멀리 가버리고 있는 소린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빌보는 손 안의 결과물을 즐겁게 마무리지었다. 



by 치우타 2014. 1. 19. 23:46

 넓은 복도와 홀을 비추는 불빛만이 남아 약하게 반짝이는 늦은 밤, 소린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내려갔다. 모양새를 보아하면 꼭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정작 그의 펜 끝이 만들어내고 있는 문장이란 아주 시덥잖은 내용들 뿐이었다. 에레보르 재건의 현황, 앞으로 해야 할 일들, 필리와 킬리의 교육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 그 밖에 원정대원들의 근황 등 누가 보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할만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약간 두서없는 내용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줄을 조금 더 추가한 후, 소린은 펜을 내려놓았다. 손의 압력에서 벗어난 종이가 제멋대로 도르르 말리어 원래 모습을 되찾았고 잘 말린 것을 리본으로 묶은 다음 겉봉투에 인장을 찍고 나면 비로소 오늘 하루가 끝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그의 마지막 일과를 받아들 인물이란 바로- 샤이어, 백엔드의 빌보 배긴스였다.


 여러 가지 일들을 겪고 난 후, 소린은 기실 빌보로 하여금 에레보르에 좀 더 체류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여기에서 그의 요청이란 꽤 간절할 때에는 무척 절실하게 들리지만 소린의 급한 성정이 섞이고 나면 강압적이거나 혹은 방임적인 어조를 띄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오랜 여행과 낯선 경험으로 심신이 지쳐버린 빌보는 정중하게 사양하고 간달프와 함께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겨우 이틀정도 쉬고 난 뒤 짐을 꾸려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당장에라도 붙잡아 품에 가두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였으나, 그는 이제 막 되찾은 '집' 인 에레보르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지위를 가진 이들은 때론 어떤 것을 희생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소린은 쓴 속내를 애써 감추고 말없이 그들을 배웅했다.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사랑하는 이를 돌려보낸 지 반 년. 계절은 벌써 여름에 들어서고 있었다. 봄도 여름도, 바뀌는 모든 계절을 함께 감상하고 싶었건만 야속하게도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으며, 시일이 흐를 수록 비어있는 옆자리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게 해줄 뿐이었다. 문득 가슴 속을 치받아오르는 어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린은 이미 굳게 눌린 인장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못쓰게 되어버린 봉투는 치워버리고, 편지의 마지막에 충동적으로 짧은 문장을 추가했다.


I missed you so much, my dear hobbit. 



 그리고 얼마 후 외로운 산에도 슬슬 녹음이 뚜렷해지기 시작할 무렵, 소린은 평소보다도 더 헐레벌떡 뛰어온 필리와 킬리로부터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의 호빗이, 빌보 배긴스가- 에레보르에 마악 도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말을 듣고 잠시동안 서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건 발린이었다. 



"그렇게 보셔도 서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소린. 정말로 그가 왔으니까요." 


".....그게 정말인가?"


"그와 관련된 일로, 감히 왕께 거짓을 고할 자가 여기 있다고 보십니까? 아닐 걸요."



 발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린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이건 절대로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뛰쳐나갔다'는 뜻이었다. 그 기세에 종이가 몇 장 바닥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졌고, 발린은 고개를 저으며 그것들을 주워다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저렇게도 좋으실까. 근래 반년 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급한 얼굴로 일이고 뭐고 내팽개친 채 달려나가는 소린이라니,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소린은 급한 발걸음으로 (사실 뛰고 있었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쳐 에레보르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가던 길에 지나치는 드워프들이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는 요만큼도 없었다. 몇몇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개중에는 원정대원들의 얼굴도 보였다. 이 젠장할 놈의 복도는 끝이 없군! 대체 어디까지 이어진 거야? 쓸데없이 규모만 커서...!  만약 그의 이런 생각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들었다면 어이없다못해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소린은 지금 절박하고 다급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드디어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조랑말의 머리를 쓰다듬는 익숙한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까운 곳에 보푸르와 오리, 노리가 서서 그를 맞이하고 있던 참이었다. 푸른색의 벨벳 자켓에 밝은 색 스카프, 곱슬거리는 짙은 금발, 자그마한 체구와 부피가 꽤 컸던 것으로 짐작되는 가방. 그가 기억하던 마지막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이렇게나 그를 뒤흔들 수 있는 호빗이란 딱 한 명 뿐이었다.



"빌보......?"


"....소린! 당신은 지금 바쁘다고-"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빌보가 돌아서서 놀란 얼굴로, 하지만 기쁜 듯이 미소지었다. 그의 입술에서 몇 마디 말이 미끄러져 나오기도 전에 소린은 앞으로 튕기듯 몸을 내던졌고 다음 순간 두 팔 안에 온전히 따스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레 뜨거운 포옹을 선사해오는 그에게 빌보는 무척 당황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낑낑거리며 소린에게 눌린 팔을 빼내고 넓은 등을 마주안았다. 소린은 순간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단 둘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다른 드워프들도 있었다. 왕으로서 꼴나사운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이성을 최대한 풀가동시켜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러나 메인 목소리까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여길... 혼자서, 위험하게..."


"당신이 편지에 그렇게 썼잖아요. 보고 싶다고."


".....내가?"


"써 놓고도 잊어버린건 아니겠죠. 그러면 화 낼건데."


"아니, 아니... 그런것은 아니다. 하지만, 겨우 그것 때문에...."



 소린은 팔을 풀어내고 빌보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아주 예전에 그랬듯이 혹시나 그에게 상처는 없는지 조심스레 살피며 더듬거리듯 말을 이었다. 여전히 목소리는 형편없이 잠긴 채였다. 가관이군. 소린은 그 부분에 대해 빠르게 포기하고는 시선을 다시 위로 올려 빌보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농담이죠? 겨우 그거라니. 처음이었잖아요."


"......뭐가?"


"그렇게 매일같이 편지를 주구장창 보냈으면서, 보고싶다고 솔직하게 쓴 거 말이에요."


"............"



 뚱하니 입을 다물어버린 드워프 왕을 보고 빌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알고보면 소린은 꽤나 외로움을 타는 남자였다. 그걸 의무감과 복수, 책임 등 다른 것들로 메꾸고 감춰두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누구보다도 혈육을 아끼며 동족들을 염려하는 드워프였기에, 당연히 특별한 이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오히려 충만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온 빌보가 견디기 쉬웠던 것에 비해 소린은 매일 새롭게 젖어드는 그리움과 외로움에 괴로워했을 것이었다. 이 무뚝뚝하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소린이 아무도 모르게 편지를 매일 썼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증거였다.



"그래서 내가 만나러 왔죠. 그러지 않고선 당신은 거기 앉아서 보고싶다는 말만 쓰고 한숨만 푹푹 쉴 것 같았으니까."


".....못 보던 사이에 말재주가 늘었군, 빌보."


"흠. 당신 말솜씨가 줄어든 게 아니고요?"



빌보가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씩 웃었다. 소린은 어쩐지 약이 올라서 다시 한 번 그를 꽈악 끌어당겨 안았다. 으악, 숨막혀요! 그렇게 힘 조절 안하면 아프다니까, 소린! 작은 항의와 비명을 무시하며 소린은 품에서 느껴지는 실재를 즐겼다. 꿈이 아니었다. 신기루가 아니었다. 빌보가 여기에 왔고, 지금 품 안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소린은 모든 걸 소유한 왕이 된 기분이었다. 등 뒤로 다가오는 필리와 킬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린은 빌보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by 치우타 2014. 1. 1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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