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잠깐, 여기 좀 와 보게." 


토니는 스티브의 황급한 목소리에 삼 초 정도 고민했으나, 이어지는 목소리에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할 시간에 일어나서 오면 되잖나, 빨리. 이번엔 또 뭔지, 요즘따라 현대문물을 열심히 배워가던 스티브는 궁금한 게 있으면 토니를 찾았고 듣다못한 토니는 '내가 바쁠 땐 자비스한테 말해, 허니, 라며 달래두었더랬다.


그런데 이렇게 찾는 걸 보면 또 뭔가 발견이라도 한 모양이지, 노친네. 토니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좀 더 서두르게, 이러다 지나가 버리겠어." 스티브가 급한 손길로 토니를 끌어당겼다. 


"대체 뭔데? 뭐길래 이렇게 난리를..." 


"저것 좀 보게나."


토니는 스티브의 성화에 귀찮은 얼굴을 하며 고개를 들어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석양이 깔린 하늘 위로, 얇은 구름과 그 위에 또 층층이 두꺼운 구름들이 쌓여 있었다. 과연, 이건 소리쳐 부를만한 광경이로군. 토니도 말을 잃고 스티브의 팔에 기대어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때, 멋지지 않은가?"

"....흠, 당신이 최근 날 불러댄 이유들 중에서 가장 괜찮은 것 같기는 해."


토니가 이죽거리며 가볍게 빈정댔다. 그 으스대는 모습이 또 귀여워서, 스티브는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예고없이 떨어지는 입술에 토니는 기다렸다는 듯 팔을 뻗어 스티브의 목에 감았다. 창 밖의 석양이 아쉬운 듯 두 사람의 그림자에 길게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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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위에 구름이 층층이 쌓였다며 살다보면 별걸 다 본다고 멋지고 신기하다는 한량님 트윗을 보고 

불현듯 쓰고 싶어서 설렁탕 먹다 말고 부랴부랴 써내려간 트위터 단문연성. 

140자 기준으로 끊어서 쓰다 보니 아무래도 매끄러운 느낌이 덜하긴 하지만 고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스티브가 군인출신의 딱딱한 남자긴 해도 좋아하는 사람과 이것저것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다르지 않을것 같아서.

난 사실 스토니의 일상적인 모습이 좋더라. 특별하고 놀라운 사건도 좋지만. 평범하게 이쁘게 달달하게 연애하는 거.

투닥거리는 것도 좋고. 서로 오해하고 싸웠다가도 잠시 생각하고 돌아서서 상대방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거. 

by 치우타 2014. 7. 9. 22:05

 토니는 필사적으로 이게 무슨 상황인지에 대해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22세기를 사는 남자, 퓨처리스트, 세계적인 천재이자 조만장자인 그의 책상 위엔 어울리지 않은 서류더미가 몇 더미 쌓여 있었다.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침착하게 같은 물음을 머릿 속에 띄워 올리며 토니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쩌면 꿈이 아닐까. 몇 번 눈을 감았다 뜨면 아무것도 없을거야. 그렇고 말고. 하지만 눈을 아무리 깜박여도, 뺨을 꼬집어 봐도 서류더미는 도통 사라지질 않았다. 이 모든 게, 약 30분 전 타워의 쿨링 시스템이 원인모를 오작동을 일으켜 정지된 덕분이었다.


 타워는 100%에 가깝게 자비스를 메인으로 하여 디지털로 움직이는 장소였으며, 만일을 대비한 아날로그적 장치가 있다고는 해도 거의 쓰이질 않고 있었다. 시스템 업그레이드나 점검 등은 늘상 존재하는 해킹이나 기타 위협에 대비하여 매일같이, 시간대별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토니는 그걸 자비스를 통해 강박적으로 확인하곤 했다. 그러나, 설마 한창 후덥지근한 저녁날에 쿨링 시스템이 급작스레 멈춰버릴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딱, 그 프로그램만 말이다.


"자비스, 상태는?"


[여전히 오작동의 원인을 찾는 중입니다. 보안상 외부에 의한 수리는 불가능하므로 진단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은데?"


[지금 기준으로는 약 20시간 정도입니다.]


"맙소사! 그 동안 여기에서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쪄 죽을지도 모르겠어! 더 빨리는 안 돼?"


[저것도 단축된 시간입니다만, 진단 시스템의 속도를 높이면 다른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돌아버리겠군...."


토니는 아예 바닥에 널부러지듯 벌렁 누웠다. 내일까지 검토를 마쳐야 하는 서류가 쌓여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짜증스럽고 괴로운 마당에, 이젠 더위에 숨막혀서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천하의 토니 스타크가, 쿨링 시스템 고장으로 더위에 시달리다니! 모르긴 몰라도 타블로이드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아까부터 울려대던 전화는 쓸데없는 열을 발산하기에 배터리를 분리해서 내던진 지 오래였고, 처음에 시원하던 소파는 점차 체온을 머금으며 끈적하고 기분 나쁜 느낌만이 남아서 결국 그나마 가장 시원한 바닥이 토니의 유일한 현 안식처였다.


"더워..... 선풍기 같은 건 여기 없다고..."


[Sir, 로저스 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응? 뭐? ....왠일이래? 열어줘."


토니는 여전히 시체처럼 널부러진 채로 손을 휘저었다. 이윽고 단정한 걸음걸이가 들려오더니, 토니의 근처에 우뚝 멈추었다. 기척으로 보아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토니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Hello, sunshine.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연락이라면 아까부터 계속 했었네. 전원이 꺼져 있다기에 찾아왔는데.. 지금 뭐 하는 건가?"


"자비스, 설명."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로저스. 약 한 시간 전부터 타워의 쿨링 시스템이 원인모를 오작동으로 멈추는 바람에 주인님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전화기의 배터리를 분리해서 내던진 것은 약 30분쯤 전이었습니다.]


"그런것까지 말 안해도 돼!"


"오작동? 어쩐지 공기가 후텁지근하다 했더니...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인 모양이군."


"나도 원래 안 이랬는데, 옛날 생각이 가끔 나거든. 그래서 더운 건 질색이야. 추운것도 별로긴 하지만."


"그럼 일어나게."


스티브는 그다지 망설이거나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손을 뻗어 토니를 일으켜 세웠다. 바닥과 거의 합체할 기세로 널부러져 있던 토니는 엉겁결에 뜨거운 스티브의 손을 잡고 웁스, 하며 몸을 움츠렸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일어나서, 그 다음은?"


"우리 집에 가지. 여기보단 훨씬 괜찮은 환경일거야."


"오... 그 말 후회하지 않아야 할 텐데, 허니."


"속고만 살았나? 빨리 오게. 저녁도 같이 해결하면 되겠군. 어서."

스티브는 토니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잠깐만, 나 옷 좀 입고. 아무리 내가 언론에 늘 노출되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이 모습으로 당신이랑 나가면 장난 아닐걸? 토니는 순순히 따라 걸어가면서도 뭐라 종알대었고, 스티브는 소파에 걸쳐져 있던 옷을 토니의 머리 위로 씌워주었다. 평소에 즐겨 입는 수수한 디자인의 셔츠였다. 이건 또 너무 막 입는 것 같은데. 꽁시랑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스티브는 토니를 재촉하듯 손을 끌어당겼고, 토니는 알았어 알았어 하고 못 이기는 척 그 뒤를 따랐다.



"맙소사..... 천국이 따로 없군..."


"내가 말했잖나."


스티브는 부드럽게 웃으며 천천히 토니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성인 남자 둘이 앉아도 넉넉한 소파 위에 다리를 쭉 편 채로, 토니는 스티브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실에는 쾌적하고 시원한 공기가 가득했다. 얼마 전 샘의 도움으로 신형 에어컨을 설치했었는데, 빠르게도 토니가 첫 시연의 주인공이 된 것이었다. 당신은 최고야, 스티브. 고양이가 기분 좋게 가르릉대듯이 토니의 목소리에도 나른함이 묻어나왔다. 별 거 아닌 칭찬인데도 괜시리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스티브는 입술을 내려 토니의 이마에 부볐다. 


정말이지, 심플한 천국이었다.

by 치우타 2014. 7. 8.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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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 산업으로 성장하여, 지금은 첨단 기술을 이끄는 기업이 된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후계자인 토니 스타크는 오메가로 태어나 일찍 부모님을 사고로 잃었으나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았다. 누구나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형질인 알파, 베타, 오메가는 무조건 유전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발현 또한 사람마다 달랐다. 또한 그 중에서도 아이를 가질 수 있고, 그 때문에 후대를 이어갈 수 있는 오메가는 알파나 베타보다 상대적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으며 정부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토니의 경우 이미 부유한 재산과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 있던 덕분에 몇 대째 스타크 가문을 모시고 있는 충실한 집사의 보살핌 아래 매력적으로 성장했다. 모든 걸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토니였으나 그에게도 오랜 고민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연애 문제였다.

 

문란하다거나 사고를 쳤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라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토니는 자신의 형질에 대해 일찌감치 확실하게 숙지한 상태였으므로 안전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섹스하지 않았고 가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뒹굴 때도 아무렇게나 몸을 내던지지는 않았다(사실 이것은 집사의 오랜 노력 덕분에 이룩해낸 성과들 중 하나였다). 토니가 이번엔 누구와 잤다느니 알파 베타 오메가를 가리지 않는다느니 하는 수군거림이 끊임없이 떠돌았지만 그 중에 사실로 밝혀진 것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그렇다면 대체 연애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하면, 사귀어 온 상대들의 질이 나빴다.

 

주로 가벼운 만남을 선호했던 토니였지만 여럿을 만나다 보면 그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고, 조금씩 자주 마주치고 감정이 쌓이고 하는 사이에 사귀게 되곤 했다. 게다가 토니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20대 중반인 지금 돈 많은 플레이보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해,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생기면 꽤 신실하게 마음을 주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늘 문제는, 상대방이 그런 토니의 진심에 기뻐하고, 감동하다가 이내 집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꼬여갔다.

 

처음 사귀었던 한 청년은 성실하게 학교를 다닌 우등생이고 집안도 괜찮았으며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했으나, 토니에게 집착하고 매달리다가 나중에는 스토킹까지 하는 바람에 고소되었다. 다음에 사귄 사람은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는데 여자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토니와 만나면서 점차 파티에 참석하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토니에게도 그런 자리에 나가지 말라고 강요했다. 그 다음에 만난 사람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어떤 카페의 귀여운 아르바이트 아가씨였고, 토니와 사귀게 된 지 한 달 만에 사람을 시켜 토니를 미행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던 것이 드러나서 법원으로부터 접근 금지령을 받았다.

 

자비스. 아무래도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아닙니다, 도련님. 우연히 나쁜 상대를 만나셨던 것뿐입니다.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만나는 족족...”

 

끝이 안 좋잖아. 토니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자세 나빠지십니다. 집사의 가벼운 타박이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그 속에는 다정함이 담겨져 있었다. 정말 연애를 그만두는 게 좋을까... 이전처럼 원나잇이나 신나게 하고 다니면 훨씬 편할 텐데. 하지만 그걸로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버리고 난 다음이었기에, 그저 일시적인 방황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누군가의 소개를 통해 만나는 건 어떻습니까?”

소개? 그것도 믿을 만한 게 못 되잖아.”

젊은이들 파티에서 만나시거나, 지나가다 우연히 들린 카페에서 만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그거 지금 나 저격하는 거지?”

그렇게 들렸습니까? 자자, 얼른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군요. 군 장성 파티에 참가하셔야죠.”

 

자비스는 짐짓 못 들은 체하며 토니를 일으켜 세우고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중요한 고객들이기도 한 군 관계자들의 파티가 바로 오늘 저녁에 있었다. 토니는 시커먼 아저씨와 할아버지만 잔뜩 있어서 가기 싫다고 투덜거렸지만, 막상 깔끔하고 세련되게 차려입고 나자 금세 젊은 사장님마냥 의젓해졌다. 자비스는 토니의 나비넥타이를 마지막으로 정리해 주었다.

 

정 싫으시면 12시 땡 하기 전에 돌아오셔도 됩니다. 대신 장군들과 인사는 나누시고 나서.”

좋아, 알았어. 늦어지거나 다른 일 생기면 연락할게. 없을 것 같지만.”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토니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차에 올라탔다. 회사의 지분을 물려받고 개발자 겸 CEO로서 군인들의 파티에 참여한 지는 꽤 오래 됐지만 매번 적응이 되질 않았다. 군 관계자들 중엔 알파가 제법 많아서였기도 했지만(온통 내가 더 잘났다고 페로몬들을 뿌려대는 통에 토니는 일부러 억제제를 먹고 패치까지 붙인 채 참석하곤 했다), 그 중 몇몇은 탐욕스런 눈빛으로 토니를 힐끔거리거나 노골적으로 훑어봤기에 오래 있을수록 기분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게 이 파티의 정해진 코스나 다름없었다. 이에 대한 토니 나름의 대처법은 인사를 대충 끝내고 술을 진탕 마시거나 마신 척 한 다음 그의 베타 운전사인 해피를 불러 자택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일부러 호르몬 영향을 받지 않는 베타를 뽑은 것도 있지만 해피는 자비스가 직접 추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에서 토니를 보좌하고 다녔다.

 

, 저기 오는군. 어서 오게, 스타크.”

와 계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토니가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근처에 서 있던 장군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맞이했다. 제멋대로에 권위적인 군인들 중에서 그나마 상식적이고 나라에 충성하는, 뼛속까지 정통 군인인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보좌하는 사관 한 명만 데리고 다니는데, 오늘은 왠 금발의 덩치 좋은 사내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그 뒤에 서 있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토니는 머릿 속의 짧은 리스트를 뒤져 보았지만 애초에 사람 얼굴이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그건 아주 형편없는 시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는 처음 보겠군. 소개하지, 스티븐 그랜트 로저스 대위라네. 이런 정치적인 자리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오늘 내가 자네에게 인사시켜 주고 싶어서 데리고 왔어.”

안녕하십니까, 스타크 씨.”

안녕하세요. 와우, 미남 대위님이시군요. 인기가 많으시겠는데?”

 

장군의 소개에 금발의 사내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딱 겉으로만 보기에도 우성 알파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체격이 좋은 사람이었기에 토니는 아닌 척 하며 손을 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크고 단정한 손이 눈앞에 드밀어진 순간 홀린 듯 마주잡고 있었다. 코 끝에 기분 좋은 냄새가 스쳤다. 칭찬으로 입술을 놀리면서도 토니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팔 안쪽을 더듬어 패치를 확인했다. 잘 붙어 있는데. 스티브가 빙긋 웃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외모만 보고 다가왔다가 재미없다고 금세 흥미들을 잃더군요.”

저런. 다들 대위님의 진면목을 모르는 모양이네요.”

, 그럼 둘이 인사도 나누었으니 안쪽으로 가서 마저 이야기하세.”

 

장군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웃으며 토니와 스티브를 데리고 중앙 홀로 향했다. 파티 내내 스티브는 다른 장성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정중한 태도로 대했지만, 이상하게 토니의 근처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한창 국방장관 및 기타 기관의 수장들과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던 토니가 그걸 알아챈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장군은 어느새 저만치에서 다른 이들과 대화 중이었다.

 

안 가보셔도 되겠습니까?”

 

토니가 샴페인 잔을 홀짝이며 스티브를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꾸러기처럼 웃어보였다. 어차피 저는 정치에 소질이 없어서, 장군님 옆에 있어도 민폐가 되거든요.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휘감기듯이 들려왔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같은데. 토니는 샴페인이 오늘따라 유난히 달다고 생각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스티브는 아직도 토니 옆에 서 있었다. 확실해. 마음을 정한 토니는 파티를 빠져나갈 좋은 핑계가 생겼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핸드폰을 꺼내 다이얼을 눌렀다.

 

, 해피. 정문으로 나와. 아니, 오늘은 다른 데 들릴 거야. 그래.”

벌써 가시는 겁니까?”

 

스티브는 통화 내용을 듣기라도 한 듯, 서운한 얼굴을 했다. 토니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한 방을 날리기 위해 일부러 유혹적으로 웃었다. 스티브의 눈빛이 착 가라앉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빙고.

 

가야죠. 여기 말고, 더 좋은 곳을 알고 있거든요. 어떻습니까? 캡틴 로저스.”

기꺼이 그 초대, 받아들이겠습니다.”

 

때마침 해피가 차를 몰고 와서 미끄러지듯 둘의 앞에 멈추어 섰다. 토니보다 빨리 스티브가 차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먼저 타시죠. 배려하는 듯한 행동에 토니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차에 올라탔고, 뒤이어 스티브가 자리에 앉아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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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귤자님이 썰로 저를 낚으사 미끼를 물고 파닥이는 제가 있으매..... (눈물범벅

다음편이 나올지 안나올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19금은 쓰고싶네요 이러쿵 저러쿵...!!!

by 치우타 2014. 6. 18. 01:34


1. 

맹세컨대, 토니는 지금까지 누구와 사귀든 만나든 자든간에, 기념일이라는 걸 챙겨본 게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페퍼와 진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때도 페퍼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정도만 간신히 챙겼을 뿐, 그것도 자비스가 아니었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갔지도 모른다. 천재는 남들보다 통달한 대신 어떤 부분에서는 부족하다고 누가 그랬던 것도 같았다.


그런 토니가, 얼마 전 지나가던 요원들이 재잘거렸던 키스데이를 어떻게든 잘 보내기 위한 작전을 짰던 것이다.



"진짜로 안 들어올 거야?"

"아직 책을 다 못 읽었어. 자네가 수영하는 것만 봐도 시원하기도 하고..."

"오, 캡, 스티비. 설마 수영을 못하는 건 아니겠지."


토니는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물을 찰박거렸다. 어벤져스 타워 안에는 없는 시설이 없었고, 거기엔 수영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여기는 공용이 아니라 토니가 따로 만들어둔 전용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편의시설들 중 하나였다. 임무가 없어서 쉬던 스티브를 불러내어 함께 수영장까지 온 건 좋았지만 그는 읽지 못한 책이 있다며 토니를 먼저 물로 들여보내고 근처에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재미없기는. 요 며칠간 둘 다 바빠서 얼굴도 자주 못 본 참이었는데 스티브의 반응이 생각보다 냉담하여 토니는 내심 상처받고 있었다.


"수영은 할 줄 아네. 지금 한참 재미있는 부분을 읽고 있거든.."

"재미없어, 로저스. 그럴거면 왜 같이 왔어? 책이나 읽고 있을 것이지."

"같이 있고 싶으니까."


일부러 딱딱한 목소리로 사귀기 전의 호칭을 불렀지만 돌아온 대답이 토니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진심을 던져오니까 당해낼 재간이 없단 말이야. 토니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저만치 헤엄쳐갔다. 사실, 책에 열중하고 있는 스티브에게 물을 튀기거나, 다리를 잡아당겨서 물에 빠뜨릴 생각도 했지만 막상 진중한 얼굴이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럴 마음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해보는 장사인 것 같아. 토니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수영장 바닥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진심도, 잘생긴 얼굴도 좋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섭섭하고 쓸쓸한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에, 아예 바닥에 가라앉아서 혼자 있고 싶었다.


물 속은 조용했다. 숨을 천천히 내쉴 때마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공기방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토니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다음부터는 그냥 혼자 내려와야지. 키스데이라니, 웃기는 일이야. 그 때,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던 토니의 머리 위에서 어떤 외침 같은 것이 들려왔다. 토니! 토니? 토니!!!! 점차 절박해지는 목소리에 토니는 이크 싶은 마음에 천천히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토니!!!! 세상에, 맙소사. 대체 뭐 하고 있었나?"

"뭘 하다니, 당신은 책에 빠져 있고, 나는 할 일이 없으니까 생각이나 하려고 밑으로 내려갔었지. 그게 그렇게 큰일이야?"

"생각이나 하려고... 라니, 말이라도 하지 그랬나. 내가 얼마나......"


스티브는 말을 잇다 말고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목소리가 떨려서 나올 것만 같았다. 토니는 점점 굳어지는 스티브의 표정에 갑자기 쫄아들었다. 아니,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래? 자기가 먼저 날 내버려두고 책이나 읽고 있었으면서! 


"무사했다니 다행이야. 제발, 다음부터는 말이라도 해. 토니."

"오. 아니면 그 전에 찾으러 오던지. 잠수는 안 할테니까 마저 책 보셔, 캡틴."


토니는 손을 흔들고 다시 저 멀리로 헤엄쳤다. 아니, 정확히는 헤엄쳐 가려고 했다. 풍덩, 하는 소리와 갑자기 잡아채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트랙의 끝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놀라 돌아보자 거기엔 약간 화난 얼굴의 스티브가 있었다(상의만 탈의하고 바로 뛰어든 모양이었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찾으러 오라고 방금 그랬잖나. 멀리 가지 말게."

"어차피 당신 보이는 데에 있으려고 했어. 내가 초등-"


-학생도 아니고, 라고 하려던 말은 스티브의 입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토니는 뜨거운 혀가 침범해 들어와 치열을 훑고, 목덜미와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갈 때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다음에는 찰박이는 물 소리와, 급한 호흡 소리, 그리고 낮은 신음 소리만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었다.



2.

스티브는 토니와 사귀게 되면서 하고 싶었던 것과,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둘씩 해나가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허들이 높은 건 바로 '공공장소에서 데이트하기'였다. 스티브도 나름 얼굴이 알려지고 박물관까지 있는 유명인이었던데다가 토니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였다. 그런 두 사람이 같이 있는걸로도 모자라서 데이트라니, 가능할 리가 없었다. 둘 다 쫓기고 있던 시절마냥 후드를 뒤집어쓰고 안경을 쓰면 어느 정도는 커버될 수 있었겠지만 체격이나 스타일 때문에 들킬 가능성도 제법 높았다. 시작하기 전부터 좌절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스티브는 씁쓸하게 웃으며 센트럴 파크 공원을 한참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때 스티브의 시무룩해져있는 등을 토니의 손이 경쾌하게 두드렸다.


"스티비! 뭐 해? 나가야지."

"? 토니. 나가다니 무슨 소리인가?"

"무슨 소리긴, 이 양반이 무드없게. 데이트 하러 가자고. 데이트."


토니는 푸른 색 후드를 입고 모자를 깊게 뒤집어쓴 다음 짙은 선글라스를 낀 채 웃고 있었다. 


"당신도 얼른 저 옷으로 갈아입어. 좀 너드 같겠지만 못 알아보는게 중요하니까." 


스티브는 너드가 어떤 이미지인지 공부해서 알고 있었다. 토니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엔 청바지와 붉은색의 후드티, 야구 캡, 그리고 검은색 뿔테 안경이 있었다. 어쩐지 낯익은 아이템인데. 무심코 토니를 돌아보자 장난꾸러기처럼 웃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빨리 해, 더 늦어지면 아이스크림 트럭이 가 버릴걸. 


밤의 공원은 조용했다. 왁자지껄 뛰노는 아이들도, 그걸 지켜보며 웃는 부모도, 희망에 가득 찬 학생들도 없었다. 거기엔 장사를 마칠 채비를 하는 아이스크림 트럭과 몇몇의 어린 연인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노부부가 고요함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토니는 어색한 듯 머뭇거리는 스티브의 손을 덥석 붙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감 전에 맞춘 모양이네. 무슨 맛 먹고 싶어? 바닐라, 딸기, 초코."

"......바닐라가 좋겠네."

"오.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 그럼 나는 초코. 주인장, 닫기 전에 두 개만 줘요. 더블로."

"...토니 스타크...?"

"닮았단 소리 많이 듣죠. 워낙 잘 생겨서 말이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긴가민가 토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주인장에게 토니는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이렇게 입고 다닐 일도 없을 거 아뇨? 능청스러운 말투에 주인도 수긍했는지 아이스크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멍하니 토니의 현란한 손짓과,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게 표정에 드러나기라도 했는지, 토니가 선글라스를 내리며 시선을 맞춰왔다.


"헤이, 스티비. 정신 차려. 그러다 침 떨어지겠어."

"...어? 아.... ...그럴 일 없네. 크흠."
"내가 당신 소원 리스트 넘버 원을 성취해줘서 기쁜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넋을 놓진 마."

"뭐라고? 자네 설마 내 수첩을..."

"읽은 건 아냐. 짐작한거지. 매일 그렇게 공원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어대는데 모르면 그게 바보 아냐?"

"......토니."

"아, 너무 감동하지 마. 난 원래 이렇게 멋진 남자라고."


스티브가 하도 이름을 불러대는 통에 토니는 목소리 좀 낮추라고 타박을 주며 눈을 흘겼다. 아이스크림 다 됐습니다. 토니는 지폐 한장을 더 끼워주며 마지막 손님이니까 더 받으시라고 너스레를 떨고는 양 손에 콘을 들었다. 


"당신이 바닐라였지? 잠깐만... ....으음. 약간 담백한 맛이네."

"자네 걸 먹으면 되지 않나. 왜 굳이..."

"궁금하잖아. 억울하면 당신도 먹던지?"


토니는 바닐라를 스티브의 손에 건네며 짖궂게 웃었다. 혀로 초코 아이스크림을 핥아올리는 모양새가 제법 야릇했다. 거기에 선글라스 너머 감춰진 눈웃음까지, 거의 완벽하게 홀리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스티브는 침착하게 손 안의 아이스크림을 부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대신 그는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쪽을 택했다. 백전노장, 스티브 로저스 답게.


"그럼 사양않고 먹어보겠네."

"그래, 어차피 더블이니까 넉넉할걸?"


토니의 붉은 혀가 다시 아이스크림을 낼름 핥았고, 스티브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걸어들어가고 있던 곳은 마침 사람이 없는 공원의 안쪽이었다. 앗 하고 놀랄 틈도 없이 부드럽지만 거칠게 덮어오는 입술에 토니는 그만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철퍽,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초코 아이스크림은 바닐라보다 더 달콤하고, 진했고, 끝맛이 오래 남았다. 스티브는 손 안의 바닐라가 조금 녹아서 흐를 때까지, 토니가 숨 막힌다며 끙끙거리고 밀어낼 때까지 그 맛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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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틀이나 지났지만 키스데이 연성을 하고 싶었습니다.....

원래는 귀엽고 발랄 / 유치하고 약간 섹시 한 느낌으로 쓰려고 했는데 그런거 없어...

둘의 공통 주제는 제목에도 썼듯이 토니의 완패 ㅋㅋㅋㅋㅋ 스티브가 리드하는 것도 좋더라구요. 

숲솔의 진심에 당황하고 쩔쩔매는 조만장자가 귀엽습니다. 둘 다 오래오래 행복하락우 유 라이프루이너(멱살



by 치우타 2014. 6. 16. 02:29

Marvel Cinematic Universe 

Steve/Tony

Alternative Universe

Writing material by 귤자님


Lion, Man, and Love.



나무 위에서 선잠을 자고, 때론 목숨을 걸고 반쯤 자란 풀숲을 보호책 삼아 침낭에서 겨우겨우 잠을 청하며 사자 무리들과 함께 지낸 지 일주일 째. 드디어 사자들은 토니에 대한 경계를 어느 정도 푼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건 겉으로 보기에 그랬다는 의미로, 실제 그 무서운 맹수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프로젝트 팀은 토니가 자연스럽게 무리 속에 녹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토니도 지친 얼굴로,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작업은 제법 순조로웠다. 더운 날씨에도 그럭저럭 적응했고 마른 먼지나 동물들의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딱 한 가지만 제외한다면.



"넌 대체.... 니네 엄마가 이번에야말로 날 죽일거야. 제발, 저리 좀 가. 응?" 



토니는 반쯤 행복한, 나머지 반쯤은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발치에서 뒹굴고 있는 것을 내려다 보았다. 저 혼자 신이 난 듯 바지 밑단에 온통 털을 발라대며 갸르릉대고 있는 것은 얼마 전 토니가 물을 먹여준 새끼 사자였다. 다른 또래들에 비해 몸이 조금 말랐지만 큰 문제는 없어 보이는 이 녀석은 언제부터인가 토니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내리 사흘 정도를 시달리던 토니는 일부러 어제와 다른 자리, 또 다른 자리, 아예 냄새를 맡기 힘든 곳 등에 숨어 있어도 귀신같이 찾아내서는 바짓가랑이를 물어뜯으며 칭얼대는 바람에 토니는 다른 사자들이 쫓아올까봐 기함하며 도망가는 걸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이 새끼 사자는 토니가 옆에 있으면 만족한듯 갸릉거리며 한껏 애교를 피웠다.


눈 앞에 귀여운 새끼 사자가 나랑 놀아달라고 온갖 묘기를 선보이는데도 놀아줄 수 없다니, 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토니는 괴짜에다 기본적으로 마이웨이 스타일이라, 누가 뭐라고 해도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성미였지만 여기는 야생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 남아프리카의 사바나였다. 좀 귀엽다고 이성을 잃고 새끼 사자를 만지작거렸다가 어미의 손에 처참하게... 토니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휘휘 내젓고 카메라를 바로 잡았다. 오늘은 새끼 사자 무리와, 사냥을 다녀오는 어미 사자 무리를 각각 몇장씩 더 찍어야 했다. 


가릉가릉. 셔터를 몇 번 누르지도 않았는데 새끼 사자가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며 토니의 운동화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 제발. 토니는 애써 그 울음소리를 무시하고 눈 앞의 광경에 집중했다. 새끼 사자들이 저마다 구르고 쫓으며 재미나게 노는 모습이 보였다. 찰칵 찰칵 찰칵, 셔터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토니는 점차 찍는 일에 빠져들어 갔다.



"갸오옹-"



새끼 사자는 몇 번 울어도 토니가 거들떠보지 않자, 좀 더 대담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토니는 자세를 고정하고 사진을 찍느라 무릎을 땅에 딛은 채 반쯤 꿇고 있었다. 새끼 사자는 토니를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발톱을 세워 옷을 타고 무릎 위로 기어올라갔다. 아무리 어린 새끼라지만 애완 고양이들처럼 깎은 발톱이 아니기에, 토니는 뜨끔한 아픔을 느끼고 짧게 신음을 흘렸다.



"아얏, 어.. 어어..! 끙......너 정말....."

"갸옹, 그르릉...."



괜찮은 샷을 건졌다고 좋아하던 기쁨도 잠시, 아예 무릎 위로 올라온 새끼 사자 때문에 토니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쳐다보자 새끼 사자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토니를 올려다 보며 가냘프게 끙끙거렸다. 이거 다 알고 그러는 거 같은데. 동그란 눈망울이 화내지 말라는 듯이 쳐다보는데, 누가 화를 낼 수 있을까. 물론 날 때도 있겠지만. 토니는 그대로 카메라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너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 완전 고문이야. 알아? 모르겠지, 귀여운데 널 만지면 내 목숨은 이거라고 이거, 훅 간다니까?

 .....아 그렇게 머리 들이대지 마! 안 만져줘! 못 만져줘! 에비!"



토니가 화를 못 낸다는 걸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새끼 사자는 금세 기세등등해져선 숫제 토니의 품에 머리를 들이대고 있었다. 이건 어느 동네의 신종 괴롭힘이지? 사바나인가? 이 녀석만인가? 토니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애써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외면했다. 부모, 안되면 어미 사자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새끼에게 손을 대는 건 그야말로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지고 싶다. 배 간지럽히고 싶다. 토니는 손이 근질거렸지만 마음 속으로 라이언 킹 주제곡을 부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다 보니 사냥 갔던 암사자들이 돌아왔고, 새끼 사자의 어미는 식사를 하고 온 다음인지 입가에 피칠을 하고 자기 새끼를 데리러 토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그 모습이 가히 호러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토니는 숨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나 네 새끼 안 만졌어."

"...."

"진짜야. 손도 안 댔다고! 얘가 나한테 일방적으로 들이댄거야!"

"........"



이번엔 용감하게 자기 변호를 시도한 토니를 무감각한 표정으로 보던 어미 사자는 토니 무릎위에 있던 새끼 사자를 입으로 물어 데리고 갔다(이 과정에서 토니는 반쯤 졸도할 뻔 했고 새끼 사자는 토니 바지에 발톱으로 매달렸으나 결국 끌려갔다). 돌아가기 전에 어미 사자는 토니의 무릎에 머리를 한번 슥 부벼주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 버렸고, 남겨진 토니는 한참 동안 패닉에 빠져 있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하이에나 울음 소리에 퍼뜩 깨어 캠프로 허둥지둥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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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허락이 떨어졌다!

토니가 스티브를 만질 수 있게 되었다! (띠링띠링)

휴 저렇게 귀여운 생물이 애교 떨고 있는데 못 만지는 것도 진짜 고문이겠죠. 힘내라 토니.

사자 주제에 너무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것 같지만 원래 동물은 귀신같이 알아요. 누가 해꼬지할지 아닌지.

이제 좀 더 보들보들 귀여운 장면도 많이 쓰고.... 빨리 스티브 키워서 토니랑 살게 해주고 싶네요 으아아아아아아아

by 치우타 2014. 6. 9. 23:23

Marvel Cinematic Universe 

Steve/T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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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material by 귤자님


Lion, Man, and Love.



"....젠장, 사자들하고 친해지기 전에 더위에 쪄 죽겠네."



토니는 목에 걸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랴부랴 제출했던 사진이 운좋게 뽑혀서 메인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된 건 무척 기쁜 일이었지만, 팀원들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토니는 시원한 자신의 저택이 그리워졌다. 물론, 그들이 토니를 속인건 아니었다. 계약 초반에 프로젝트의 내용과 장소에 대해 설명했고 토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고 토니는 흔쾌히 승낙했다(사바나라니! 끝내주네, 거기가 자연 동물원이라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상상과 현실에는 제법 큰 차이가 있는 법이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팀원들은 장기 프로젝트며 야생 동물들에는 초보인 토니에게 가장 중요한 수칙을 가르쳐 주었다.

'절대 그들을 자극하지 말고, 같은 무리처럼 자연스럽게 친해질 것'.

생김새도 냄새도 다른 토니를 모두 경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위협이 느껴질 경우 바로 공격해 올 거라는 베테랑의 주의 및 조언에 토니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죽기밖에 더 하겠어. 정글에서 살아남은 적도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그리고 지금, 한 사자무리의 근처에서 토니는 위험한 맹수보다는 더위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쟤네들은 저렇게 털을 잔뜩 두르고 덥지도 않나... 보호수단이면서 생존전략이겠지만, 어우.."



사진기는 늘 손에 들고 만일을 대비한 마취총과 조명탄, 기타 구급물품을 상비한 채 사자들과 익숙해지기 놀이를 한 지 벌써 사흘째였지만 여전히 사자들은 그를 경계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옷도 자연색에 맞추었고 숨도 눈치 봐가면서 쉬었으며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었건만 저 빌어먹을 동물들은 수틀리면 토니를 물어제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원한 게 내 인생의 실수였던건 아닐까? 토니는 이제와서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는 카메라 렌즈로 사자들을 살피며,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땀을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



토니는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선가 무척 갸날픈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그 순간 다시 한 번 같은 소리가 들렸고, 환청이 아님을 확인한 토니는 근처 덤불을 천천히 헤치며 작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보았다. 사자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1m 정도 주위를 쑤석거리자 드디어 자그마한 털뭉치가 시선에 들어왔다. 아직 어린 새끼가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너.... 아직 어린데, 엄마는 어디 있어? ....굉장히 마르고, 맙소사. 물이라도 마실래?"



알아들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이 멋대로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토니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새끼의 입에 천천히 물을 흘려넣어 주었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끙끙거리던 새끼 사자는 혀를 내밀어 물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새끼들과 만나면 섣불리 손대지 말라던 팀장의 엄중한 경고를 떠올리면서 토니는 약간 거리를 두었다. 더운 날씨에 지치기라도 한 건지, 새끼 사자는 토니의 소중한 물통을 다 비우고 나자 그제야 정신을 조금 차리는 것 같았다.



"이게 오늘 최대 비축분이었는데.... 다시 돌아가서 가져와야겠군. 너 나중에 신세 갚아라."



토니는 투덜거리며 물병을 품에 갈무리했다. 어쩐지 옆 얼굴이 따가운 느낌이 들어 돌아보자, 새끼 사자가 토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귀여워 죽겠네. 만지고 싶은데 그랬다간 오늘로 내 인생 종치겠지. 참자 토니 스타크... 괜히 움찔거리는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토니는 애써 새끼로부터 눈을 돌렸다. 아예 여길 뜨는 게 낫지 않을까? 진작 그랬어야지! 하지만 그가 천천히 등을 돌리고 발걸음을 하나 떼자마자, 새끼가 처량맞게 울부짖었다. 갸오오옹. 



"야, 난 느이 엄마 아냐. 왜 그렇게 울어? 누가 꼭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용히 해."



토니가 황급히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새끼를 바라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새끼는 얌전해졌다. 뭐야 이거? 토니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어 약간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얼굴을 보면서 발을 뒤로 빼서 물러났더니, 새끼는 숫제 하소연하듯 울어댔다. 이거 지금 나더러 가지 말라고 이러는 거지? 난 죽었다. 토니는 새하얗게 질렸다. [토니 스타크, 새끼 사자와 접촉하는 바람에 물어 뜯겨] [토니 스타크, 어이없는 죽음] [사바나의 안전, 이대로 좋은가?] 상상할 수 있는 몇 가지의 헤드라인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새끼 사자는 이제 아예 토니의 발치로 다가와서 머리를 부비적대고 있었다. 하하... 인생이란 이렇게 허무한 거였군. 자비스 말이나 잘 들을걸. 석상처럼 굳어가는 토니의 등 뒤에서 이번엔 낮게 그르릉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유언장 갱신하고 올 걸 그랬어. 토니는 신호탄이니 뭐니 하는 안전 수칙을 전부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고개를 돌렸다.


제법 덩치가 큰 암사자가 토니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토니와 발치의 새끼 사자를. 토니는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어보일까 싶었지만, 그랬다간 위협적인 행동으로 보일까봐 닥치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이봐, 내가 그런거 아냐. 네 새끼야? 얘가 나한테 먼저 들이댔다고. 가지말라고 크게 울어대고. 내가 뭘 어쩔 수 있었겠어? 응?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는 말은 목구멍 속으로 시시각각 사라져 갔다. 암사자는 잠시 코를 킁킁대더니 느릿하게 토니에게 걸어왔다.


아, 죽었구나.


눈을 질끈 감은 토니의 옆을 암사자는 가볍게 스쳐가더니 발치의 새끼를 입으로 물어 올렸다. 그러고는 꼬리로 토니를 툭툭 치고는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 버렸다. 새끼가 끙끙댔지만 암사자는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살았어?"



토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기도 했지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온 몸을 감싸왔다. 암사자가 꼬리로 자신을 쳤을 때 이러다 공격당하는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가 버린 것이다. 자비스한테 전화라도 해야겠어. 몇 분간의 안정을 취한 후, 토니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캠프 쪽으로 발을 옮겼다. 텅 빈 물통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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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지지리도 안 나가네요 드디어 스티브와의 첫 만남! 새끼 사자 스티브 ㅋㅋㅋㅋㅋㅋ 헤헤

by 치우타 2014. 6. 6. 02:22

그 어떤 운명적이고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도, 아무런 시련 없이 조용하게 싹트는 법이란 없다. 생과 사라는 극단적인 경계에 선 채 서로에게 잔뜩 날이 선 말들을 던지며 부딪치는 사이에 쌓인 미운정 고운정도, 몇 시간만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안달이 나는 뜨거운 연인들도, 결국 한 두번쯤은 꽤나 어려운 고비를 맞닥뜨리곤 하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의 스티브 로저스와 토니 스타크가- 딱 그 시점에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티브쪽에서 여러모로 동요하고 있었다는 점이 더 맞았을 것이다. 뉴욕 사건을 거치며 토니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몇 번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다 정신을 차려보니 침대 위에서 몸을 섞고 있었다는 게 그들의 뻔한 것 같으면서도 황당한 로맨스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은밀한 연애를 알게 된 몇 안되는 사람들은 으레 그렇듯이 방탕하기로 이름난 토니가 현대에 적응하느라 바쁜 싱싱한 젊은이 (실은 97세의 노인이지만)를 살살 꼬셔서 냉큼 꿰어찬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스티브와 자신의 성격이라거나, 여러가지 면모를 고려했을 때 이 관계가 지나치게 깊어지면 필시 곤란할 것임을 알아차린 토니는 미리부터 거리를 두었다. 애매하게 섹슈얼 텐션이 고조될 때면 과장된 농담이나 오만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곤 했다. 


그러나 상대는 백전노장, 40년대의 영웅, Living legend- Captain America였다. 토니가 특정한 분위기가 될 때면 잽싸게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다는 걸 퍼뜩 깨달은 스티브는 노련하게 그 뒷덜미를 붙잡았고, 왜 그랬는지 추궁한 다음,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늘 가볍고 헤픈 것 같아도 진심어린 애정에 약한 토니에게 신실한 40년대 남자의 사랑고백은 지나치게 스트라이크 존이었으며 결국 토니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고 말았다.


막 시작한 연인 치고는 심심한 사이였지만 스티브와 토니는 자주 만났고 몰래 데이트했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티브의 과거에 대한 그리움마저 완전히 지워버릴 순 없었다. 토니는 그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스티브가 종종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나갔다가 돌아와도 거기에 대해 섭섭함을 내비치지 않았다. 물론 서운하고 쓸쓸했으나 말한다고 해서 해소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님을 본인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기에 그랬을 뿐이었다. 



"요새 그렇게 로마노프 요원이 당신한테 여자 소개시켜주려고 안달이라면서?"


"소문이 거기까지 났나? 한 번도 수락한 적은 없어."


"그래, 대답도 멋지게 했다고 들었지. 바빠서 안 된다고 그랬다던데."



토니는 짐짓 태연한 척 말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어벤져스 때와는 다른 스텔스 수트를 입은 스티브는 누가 봐도 위압적이며 매력적이었고, 복도를 지나갈 때면 여성들의 시선도 함께 따라왔다. 물론 그 중엔 토니에게 관심을 가진 이들도 있었겠지만 평생을 사람들 시선 속에 살아온 토니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흥미 대상은 스티브 로저스였다. 아무래도 여기 직원 복지예산을 깎으라고 해야겠어.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단단한 손이 다가와 뺨을 어루만졌다. 가죽장갑과 뜨끈한 체온이 닿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젠장, 몇 달 못봤다고 이지경이라니. 토니 스타크 다 죽었군.



"얼굴이 좀 상한 것 같은데, 토니."


"...그냥 좀, 말리부도 부서지고 뭐... 나도 바빴잖아."


"도우러 못 가서.. 미안하네. 아주 나중에야 들었어."


"괜찮아. 쉴드가 개입한다고 해서 어떻게 될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그치들은 정보수집이나 하고 있었겠지."



토니는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스티브는 그 모습을 보고 아릿한 아픔을 느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동정이나 연민을 싫어하는 남자였다.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쉴드 본부가 아니었다면 팔을 뻗어 안아주고 싶었으나 보는 눈도 많았고 무엇보다, 둘에겐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다. 토니가 컨설팅을 하러 온 타이밍과 스티브의 휴식시간이 우연히 겹치지 않았다면 얼굴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두 사람은 거의 그런 식으로 지내고 있었다. 스티브의 방황과, 토니의 기다림, 묵인.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적은 언제나 상대가 방심하는 틈을 노리지."


"오, 미국의 영웅께서 걱정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는걸. 알았어, 주의하지. 당신이야말로 조심해."



쉴드는 스파이 집단이라 언제 어디서 뭘 해도 놀랍지 않거든. 토니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놀랍게도 스티브는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닉 퓨리 저격, 쉴드 수배, 새로운 동료, 윈터 솔져,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버키의 등장으로 인해 무척 복잡하고 위험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스티브를 뒤흔든 건 오랜 친우이자 가족같은 존재인 버키였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지만 스티브는 그의 친구가 살아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언제쯤 시작할 거야?"


"....그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어. 뭐하면 나중에 합류해도 되고."


"어딜 가느냐에 따라 다르지. 아까 그 간호사 아가씨 만나러 가는 거면 빠지겠지만-"


"아니, 그쪽은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야. 관심 없어."


"그렇게 안 생겼는데, 현대적 가치관은 다 배운거 아니야? 캡틴."


"그랬다면 연락해서 만나자고 했겠지. 어쨌든, 따라올 생각 만만인 것 같으니 그냥 같이 가는게 좋겠군."



쉴드에서 지급한 건 이미 부서진 지 오래였으나, 토니가 생일때 선물한 클래식한 40년대 디자인의 끝내주는 야마하가 남아 있었다. 묘지를 벗어나 몇 블록을 건너 도착한 창고의 문을 열자, 과연 샘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휘파람을 불었고 스티브는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때론 받기 곤란할 정도의 고가 선물들을 안기는 통에 엄격하게 제지한 적도 있었지만 이 오토바이만큼은 토니에게서 받은 것들 중에서도 상당히 아끼는 것이었다. 뉴욕의 또 다른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는 A타워의 뒤쪽으로 돌아간 스티브는 전용 엘리베이터에 지문과 음성을 인식시켰다. 



"타워 최상층."


[스티브 로저스, 인가되었습니다.]


"워, 여기 스타크 타워 아니야? 이런 곳에도 출입문이 있었다니.. 놀라운데."


"아무래도 거리 쪽은 소란스러우니까, 여긴 소수의 관계자들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여기 최상층엔 무슨 일로..."


[문이 열립니다.]



샘이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스티브는 마치 제 집인 양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갔고 샘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 내렸다. 탁 트인 시야와 널찍한 공간, 한쪽에는 미니 바가 자리하고 있는 광경에 그는 좀 질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거 어쩐지 프라이빗한 공간이라는 느낌인데. 스티브가 여상히 공중에 말을 거는 순간 하마터면 샘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 했다.



"자비스. 토니는 어디에 있지?"


-잠시 산책 나가셨습니다만, 지금 곧... 저기 오시는 군요.



바람을 가르는 엔진 소리와 함께 금빛의 수트- 아이언맨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둥그런 발판에 가볍게 내려섰고, 기다렸다는 듯 기계들이 움직이며 수트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는 것에 맞추어 파츠가 하나 둘씩 제거되는 모습은 비현실적이면서도 꽤나 섹시했으며, 매력적이었기에 스티브도 샘도 한동안 말을 잊고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덕분에 토니는 덩치 큰 군인 둘이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걸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기, 둘. 그러다 턱 떨어지겠어."


"....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넋을 놓은 모양이군."


"토니 스타크?"


"You know who I am, 스티브의 새로운 친구 씨."


"소개하지. 이쪽은 샘 윌슨. 이번 일에 많은 도움을 준 동료야. 이쪽은.. 말 안해도 알겠지만,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


"만나서 반가워요. 설마 캡이 친구를 데려올줄은 몰랐네."



토니는 샘과 악수를 나누며 씩 웃어보였다. 거기엔 요만큼의 사적인 감정도 들어가있지 않았지만 스티브는 괜시리 혼자 찔리는 마음에 시선을 피해 천장을 훑어보고 있었다. 몇 달만에 만나러 온 것도 모자라 친구를 달고 오다니, 연인 실격은 아닐까.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제대로 이유를 말해주지도 않은 채 오랫동안 방황했던 최근의 자신이 가장 문제였으리라. 스티브는 낡은 파일을 꾹 움켜쥐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토니, 그동안.. 미안했네. 제대로 된 설명도 안 하고, 내가 하고싶은대로만 행동했지. 방황했었어. 꽤 오랫동안,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이어야 할지도 몰랐고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지. 그 중 유일하게 아는 건 오래된 것들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야. 난 멍청했었어. 여기에, 내가 돌아올 장소가 있었는데.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


"그래서 늦었지만 만나러 왔어. 쉴드는 해체됐지만 나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울 것 같아. 내 친구, 버키가 살아있었고..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거야. 난 반드시 그를 찾아야 하고, 그러려면 저번보다 더 오래 떠나있게 될 지도 몰라. 그 전에 꼭 만나러 와야겠다고 생각했어. 당신한테 설명하고, 사과하고... 그런다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싶었지."


"..........."



스티브가 진심어린 얼굴로 토니에게 지난 일들에 대해 털어놓는 동안, 샘은 뒤로 물러나서 팔짱을 낀 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랑 아이언맨이, 그러니까 지금 저건 아무리 봐도 사귀는 사람 사이에나 오갈 법한.. 아니아니 어떻게 캡틴 아메리카하고 아이언맨이?? 스티브 로저스하고 토니 스타크가, 사.... (샘은 완성되려는 단어를 황급히 지워버렸다)



"당신을 많이 좋아해, 토니. 이제야 알았어. 난 여기에 돌아올 거고,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야."


"......스티브."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마음을 정리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지만, 이젠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바로 여기,

 당신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올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겠나? ...너무, 염치없는 소리긴 하지만..."


"흠. 당신도 알겠지만 난 성격이 급한 편이야. 솔직히 이런 거 자체가 기적에 가깝기도 하고."


"그거야... 그렇긴 하지."


"한 달에 한 번정도는 돌아와.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연락하고, 어디 있는지 정도는 간략하게 알려줬으면 좋겠군."


"토니, 그러면...."


"내가 쫓아가서 미주알 고주알 참견하는 건 당신도 별로 원하지 않을 테니까, 먼저 알려달라는 뜻이야. 어때? 솔져."


"Fair enough."


"No doubt."



그제야 스티브는 몇 달만에 환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고, 토니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자세로 보면 토니쪽이 스티브에게 파묻힌 격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스티브가 토니에게 기대어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샘은 너무 많은 비현실과 놀라움, 경악 사이에서 대체 어느 쪽을 먼저 수용해야 할 지 갈팡질팡했다. 한 명의 애꿎은 피해자가 있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스티브와 토니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제야 겨우, 타워 위에 드리워져 있던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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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Denver - How can I leave again 을 듣다가 생각나서 쓴 글. 

윈터솔져를 보고 나니 만약 스티브랑 토니가 어벤져스 이후 썸타고 사귀고 있었다면.. 하는 생각에서 써보게 됐다.

영화 내에서 과거에 매달리는 듯한 모습도 많이 나와서 그런것도 보여주고 싶었고....

노래 가사 중에 보면 some answers are no longer true 라거나 Lost in a storm I've gone blind 라는 내용이 있어서

결국 방황 끝에 자기가 돌아올 곳은 토니 옆이라는 걸 깨닫는 스티브가... 보고싶었음. 노래 좋아요. 정말 좋아하는 곡임. 


by 치우타 2014. 4. 22. 01:27

Marvel Cinematic Universe 

Steve/Tony

Alternative Universe

Writing material by 귤자님


Lion, Man, and Love.



앤서니 에드워드 스타크- 통칭 '토니 스타크' 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 사진작가였다. 그가 찍는 모든 사진은 매혹적이었으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한 채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넓은 주택과 별장, 클래식 카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언제나 많은 여자들이 옆에 들끓었지만 스테디한 관계는 하나도 없었다. 또한 토니는 자신의 저택에 정말 가까운 이들 외엔 아무도 들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몇 번이고 파파라치나 방송사에서 그에 관해 취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한 번도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에겐 유능한 집사가 있었으므로)



"지겨워."


"뭐가 말씀이십니까?"


"방송사들, 파파라치들, 사람들 전부 다. 이젠 인물사진도 질렸어. 다른 게 없을까? 자비스."


"카메라 앞에 서면 누구든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고 좋아하셨던 게 엊그제 같습니다만..."


"그게 문제야! 처음엔 그야 재미있었지. 다들 아닌 척 하고 내 앞에 서서 한껏 자신을 뽐내려고 들지만,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순간 모든 환상이 무너지거든.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땐- 오. 충격적이었다고."


"어쩐지 별로 믿음이 안 가는 군요."


"....처음은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간에, 질렸어. 그들의 욕망을 보는 것도 나한테 지나친 관심을 들이대는 것도! 끔찍해."



고개를 저으며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까지 부르르 떠는 토니를 보고 자비스는 한숨을 쉬면서도 작게 웃었다. 그의 주인은 변덕스럽고, 까다로우며, 제멋대로에다, 30대에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철없이 굴 때가 있지만 사실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주위 친구들에게 틱틱대지만 중요한 순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줄 아는 모습이라던지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미움을 사듯 얄밉게 구는 모습 등이 그랬다. 


그리고 적당히 풍족한 집안에서 자라며 취미로 잡은 카메라가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토니였으나 점차 유명해지면서 원치 않는 허위 스캔들이나 협박, 지나친 관심과 압박에 시달려야 했고 그것은 점점 그로 하여금 인물 사진에서 학을 떼게 만들었던 것이다. 가끔은 사진 자체를 그만둬 버릴까 싶다가도, 서투르게 막 찍어댔던 옛날 사진들에 담긴 애정과 열정을 보고 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사람 외에 다른 걸 찍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사람 말고 다른 거?"


"아예 원점으로 돌아가시는 것도 좋고요. 동물 꽤 좋아하시잖아요."


".....음. 사람하고 달리 겉과 속이 같아서 참 친근하고 좋은 녀석들이지."



자비스는 토니 앞에 화면을 하나 띄워보였다. 자연과 동물 사진 및 다큐로 유명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프리랜서 사진작가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기한은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토니는 갑자기 마음이 동하는 걸 느끼고 잠시 멍한 얼굴로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언제까지지?"


"내일이 마감이군요."


"...뭐?!?!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맙소사, 시간도 없는데! 인물 포트폴리오 따위 쓰고싶지 않다고!"


"어차피 이 근처엔 새도 많고, 운이 좋으면 곰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난 이럴 때마다 네가 무서워, 자비스."


"칭찬으로 듣죠."


"장비 챙겨줘, 당장 나가야겠어. 앞으로 24시간도 채 안 남았는데 뭘 건질 수 있을지 모르겠군."



토니는 허둥지둥 아무옷이나 골라 입으며 자비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충실한 그의 집사, 자비스는 언제 준비해둔 건지 완벽하게 식량과 물이 채워진 가방, 카메라 장비, 비상연락수단(핸드폰을 못 쓰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을 토니에게 냉큼 내밀었다. 끝내주게 유능하기는 해. 토니는 속으로 그가 지금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임에 감사했다.



"다녀올게. 요새 또 몇몇이 어슬렁거리던데, 전기 담장 맛을 보여줘도 되고."


"그러다 고소 당하십니다."


"내가 이길걸. 이따 봐, 자비스! 행운을 빌어줘!"



당신에겐 필요 없을 겁니다. 바람처럼 뛰쳐나가는 토니의 등 뒤로 자비스가 들릴락말락하게 속삭이며 웃었다. 그 후에 토니가 어떤 것과 어떤 식으로 씨름하여 사진을 찍었는지, 무슨 사진을 냈는지는 생략하기로 한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토니는 마감 10분 전에 사진을 제출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사진은 응모된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선정되어, 메인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by 치우타 2014. 4. 18. 01:11

Michael Buble - Call me irresponsible 을 듣고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 윈터솔져 스포 주의. 



스티브 로저스를 좋아한다.


토니는 그제서야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의견이 안 맞아서 다투는 건 기본이요, 성격이나 취향, 전장에서의 행동까지 어느 하나 공통점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다니. 그것도 남자한테! 90살 넘은 (그냥 숫자로만 따지면 그렇긴 하지만) 할아버지한테! 고리타분하고, 지루한데다가, 필요할 땐 인정사정없이 상대를 비꼴 수 있는 군인한테! 토니는 감정을 완전히 자각한 순간 몹시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들고 있던 스패너를 테이블에 내팽개치고 랩을 뛰쳐나왔다. 그 자리에 더 서 있다간 어떤 물건을 파손할 지 몰랐고, 환상적인 세계 최고급 네트워크로 스티브 로저스의 현재 위치와 상황 따위를 찾아볼까봐 겁이 나서였다. 그는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오기도 하는 천재였으니까.


분하고 억울하고 믿을 수 없다는 마음과, 당장에라도 찾아가 들이대며 추근덕거리고 싶은 마음이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토니는 철저하게 스티브에 관한 모든 정보를 차단했다. 섣불리 다가가서 자신을 가벼운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게 싫었고 (실제로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토니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되도 않는 말실수로 엉뚱한 인상을 주는 것도 싫었다. 페퍼 이후로 온 진심을 보여주고 싶어진 상대가 스티브 로저스였다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는 70년이 지난 후에도 신실하고 성실한 남자였다. 그토록 강박적으로 스티브에 대한 정보를 차단했던 토니였지만, 딱 한가지는 어쩔 수 없었다. 페기 카터. 몰래 이야기를 대강 전해들은 것 외에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었다곤 해도 스티브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토니는 씁쓸한 심경을 애써 감추며 카메라에 기록된 영상을 꺼버렸다. 절대 자신은 그런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시작부터 깨닫는 건 정말로,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거나 덜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토니는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스티브가 보고 싶었고, 그의 소식이 궁금했고, 자신이 그의 '관심 인물 리스트'에 들어갔으면 하고 생각했다. 이건 진짜 멍청하고 미친 짓이야. 몇 번씩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어 봤지만 사랑이란게, 원래 다 미친 짓이지 않던가. 유치하고, 무책임하고, 상대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거. 이 나이에 또 하게 될줄은 몰랐지만. 토니는 혀를 차며 머리를 벽에 박았다. (자비스는 이제 색다른 자해를 시도하시는 거냐며 약간의 비아냥이 섞인 걱정을 했다)



그리고 또 한두달이 지난 후, 이렇게 된 거 그냥 거절당하던 말던 말해버릴까? 토니는 한층 퀭해진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며 반쯤 이성을 놓아버린 생각을 했다. 여러 사건이 지나가고 스티브는 페기 카터 외에 또 다른 과거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제임스 뷰캐넌 반즈, 윈터 솔져. 그 사이에 자기가 죽을 뻔 했다는 건 그닥 놀라운 일 축에도 끼지 않았지만 (이미 죽을뻔 했다가 살아난 경험도 있었고) 중요한 건 스티브의 친우가 적으로 돌아왔다가 이젠 행방이 묘연해진 부분이 더 신경쓰였다. 아마 그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겠지. 토니는 클라우드를 띄워 그의 행방을 찾아보려다 그만두었다. 어쩐지 잡을 수 없는 그림자를 쫓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열심인 남자와, 그를 좋아하는 현대의 표상격인 남자. 도저히 어디에서도 교차점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토니는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세상에, 내가 살면서 이렇게 어려운 상대를 만난 적이 있었나? 대답은 No 였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혹은 그가 눈빛만 보내도, 모든 사람은 먼저 다가와 꼬리를 치거나 어떻게든 토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걸 오랫동안 즐겼고 언제 그랬냐는 듯 매정하게 내쳤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죗값을 이런 걸로 받는게 아닐까. 거의 자포자기격으로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꽤 그럴듯했다. 이래서 착하게 살라고 하나보다. 토니는 허허로이 웃음지었다.



결국 토니는 오랜 고민과 고뇌 끝에 스티브와 몇 번 만나고 (우연이든 의도적이건간에) 그의 일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우선 조금 더 가까워지기로 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시작했지만 과정이나 결과가 제법 괜찮았기에 토니는 조금씩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스티브의 행동이나 눈빛, 말투에서 그는 점점 '그냥 같이 싸웠던 동료' 에서 '괜찮은 친구가 될 지도 모르는 동료' 정도까지는 올라선 것 같았다. 못 보던 새로운 얼굴인 샘 윌슨이라는 남자보다도 아직 한참 못한 위치인건 분명했으나 토니로서는 상당히 분발한 셈이었기에 우선은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혼자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고민할 때 보다는 직접 스티브와 만나 부딪치고 대화한 덕분에 훨씬 여유가 생긴 토니는 모르는 사이에 표정도 부드러워지고, 눈빛이 깊어졌다. 그걸 가장 먼저 깨달은 건 놀랍게도 스티브였다. 약간 비꼬는 듯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이전보다 신중하고 노련해진 토니를 보며 그는 처음엔 감탄했고, 두번째에는 놀랐으며, 세번째에는 호감이 생겼다. 뉴욕 사건을 겪으며 부정적이었던 첫인상을 약간 수정하긴 했으나 그다지 관심있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다시 만난 토니는 한층 더 멋진 남자가 되어 있었다. 샘과도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가까워졌고, 버키를 찾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은 가능한한 모두 가져다 주었으며, 피로에 지친 그들에게 맥주를 사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그건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마음에 직접 와 닿는 따스함이었다. 스티브는 점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토니의 얼굴이나 말투, 행동을 조금씩 관찰하기 시작했다.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가 더없이 진지하게 가라앉아서 반짝이는 모습이라던지, 사심 없이 웃을 땐 목소리가 약간 듣기 좋게 낮아진다던지, 변장한답시고 입은 사복이 후드티인데 제법 귀여워서 놀란다던지 (여기서 스티브는 귀엽다는 단어를 재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좀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스티브는 하루가 다르게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을 더 알고 싶어졌다. 단순한 동료로서의 호감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도 모른 채 스티브가 먼저 몇 마디 말을 건네면, 토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해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스티브는 페기에게 버키 뿐만이 아니라 토니의 이야기도 조금씩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씨 좋은 봄날, 스티브는 여느 때와 같이 페기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토니에 대해 말하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페기가 불쑥 끼어들었다.



"당신, 그 사람 좋아하는구나."


"....뭐라고, 페기?"


"그렇잖아. 벌써 눈빛이 다른걸. 말투도 그렇고..."


"....내가 그랬어?"



스티브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더듬으며 괜히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페기는 치매로 기억을 계속 잃었다가 찾았다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때때로 정신을 차리곤 했다. 내가? 토니 스타크를 좋아한다고? 워낙 예상치 못한 발언인데다가 화자가 페기였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페기는 웃으며 스티브의 손을 두드렸다.



"여자의 감이라는 거야, 스티브. 그래도 잘 됐어.. 당신에게 다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페기, 나는-"


"알아. 내가 당신의 best girl 이라고 했지. 이제 당신의 길을 가도 돼, 너무 오래 잃어버리고 있었지만..."


".......페기.."


"그랬으면 좋겠어. 당신이 이 시간을 살아갔으면 좋겠어. 그게 내 바램이야..."



페기는 부드럽게 미소짓고는 작게 몇 번 기침했다. 스티브는 그녀에게 물잔을 건네며 잡은 손을 꽉 쥐었다. 이러고 나면,꼭 다시 치매증상이 돌아오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페기는 또 다시 스티브를 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고 스티브 또한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잠든 그녀의 곁을 떠나오면서 스티브는 페기의 말을 천천히 몇 번이고 곱씹었다.



한편 토니는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고백할 심산이었다. 고리타분하고, 때론 지독하게 냉소적이지만, 언제나 올바른 신념을 가진 남자, 스티브 로저스에게. 길지 않은 시간동안 아주 약간의 진전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토니로서는 그 시간이 마치 2,3년 같았다. 다행히도 지금 토니는 스티브의 '친한 동료' 쯤의 위치까지는 올라온 것 같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백따위 접어버리고 동료, 친구사이로 남는다는 선택지도 물론 고민했다. 그러나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마음이 식기를 기다리며 스티브를 좋아하기 전의 토니 스타크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 죽지는 않겠지. 우주에도 다녀왔고 테러도 당했는데 뭘 못하겠어? 약간 빗나간 느낌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곧 스티브가 타워에 도착할 것이고, 토니는 그에게 고백을 쏟아부을 것이다. 아마 최악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토니는 스티브가 제법 새끈한 차림으로 찾아온 것을 보며 생각했다. 다른 의미로 죽을 수도 있겠군. 


스티브의 취향에 맞춘 식사가 끝나고, 아이스크림(토니)과 커피(스티브) 라는 평소와는 전혀 반대지만 어쨌거나 클래식한 디저트가 나오고 나자 토니는 지금이 그 때임을 직감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이놈의 목은 왜 중요할 때 말을 안 듣는 거야? 아이스크림으로 목을 다시 축이며 스티브를 바라보자, 그도 마침 토니를 바라보았다. 말하기도 전에 죽겠어. 토니는 심호흡을 했다.



"있잖아, 스티브..." "저기, 토니."


동시에 튀어나온 서로의 이름과 목소리에 둘은 동시에 눈을 크게 뜨며 침묵했다. 당신이 먼저 말해, 아냐 자네가 먼저 말하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드라마의 한 장면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두 사람은 결국 토니가 두 손을 들고 우선권을 획득하겠다는 제스쳐를 하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날 무책임하다고 해도 돼."


"....뭐?"


"그냥, 끝까지 들어줘.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도 없겠지. 난 천재지만, 아니 이게 아니고... 그렇게 모든 것에 현명한 건 아니야. 난 그저.. 당신이 좋아. 나는 예측 불가에다가, 터무니없기까지 해. 하지만.. 이것만큼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당신을 좋아한다는, 사랑한다는 거. 착각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냐. 얼토당토 않겠지만 정말, 당신에게 푹 빠져버렸어. .....당신을 좋아해, 스티브."


"....스타...토니."


"답을 못 들어도 좋아. 그냥, 그냥 나는... 말하고 싶었어. 참을 수가 없었지. ...날 싫어해도 괜찮아. 들어준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아니, 잠깐..."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 앞으로는 수트 입고 다녀도 되니까-"


"잠깐, 토니. 좀 닥쳐봐."



횡설수설하며 고백을 줄줄 늘어놓은것도 모자라 이젠 혼자만의 결론으로 치달으려는 토니를 보고 스티브는 황급히 제지했다. 군대 시절의 버릇대로 말투가 험악해진 건 고의가 아니었으나 상당한 효과가 있었는지 토니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려졌고, 스티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잠깐이라고 하면 좀 들어. 자네는 그게 문제야. 너무 달려나가는 거."


"....그.... 미안해. 내가..."


"조용히,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


"솔직히 놀라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도 말할 게 있었어. 생각도 안 해봤던 건데 듣고 보니 맞는 것도 같고."



뭐가? 라고 되묻고 싶어 토니의 입술이 순간 달싹였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스티브 때문에 토니는 다시 얌전히 침묵을 지켰다. 세상에, 그 토니 스타크를 이렇게 오랫동안 조용하게 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이 자리에 나타샤가 있었다면 가장 어이없어 했을 것이다) 스티브는 묘하게 승리감 같은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당신이 좋아. 토니."


"......아, 그렇.... 뭐???!"


"나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쉬운 결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해."


"그, 아니, 어떻, 말도 안, 잠깐만, 나 지금 굉장히 정박아처럼 말하고 있어. 맙소사. 스티브? 정말이야? 당신이..."


"내가 아무리 현대식 농담이 늘었다지만 이런 걸 주제로 삼진 않아. 너무하군."


"농담이라고 안 했어... 그보다.. 아니,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토니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다는 머리도 정작 중요한 순간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니, 세상은 이래서 공평하다고 하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습관적으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려던 찰나 따뜻한 손이 쓱 내밀어졌다. 



"자해하는 취미가 있는줄은 몰랐는데."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놀라서..."


"플레이보이라더니 다 거짓말이었나?"


"아니거든? 지금 날 뭘로 보고...!"


"그럼, 테이블에 머리 박는 거 말고 지금 뭘 해야 될까? 토니. 그 좋은 머리 좀 굴려 봐."


"뭘 해야 되다니? 당연히-"



키스, 라고 말하려던 입술은 다음 순간 부드러운 감촉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약간 거칠지만 따스하고, 다정한 입맞춤에 토니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흠, 아무래도 플레이보이 타이틀 반납해야 될 것 같은데. 스티브가 웃으며 속삭이자 토니는 발끈해서 그의 멱살을 붙잡고 딥키스를 되돌려주었다. 잔에 담긴 커피와, 먹다 만 아이스크림이 다 식고 녹아버릴 때까지 두 사람은 한데 엉켜 떨어질 줄을 몰랐다. 

  

by 치우타 2014. 4. 14. 0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