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에도 개는 여전히 소파 위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주인에게 버려져서(이미 토니의 머릿속에는 그런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있었다) 정처없이 헤메이다가, 혹은 주인을 기다리다가 세찬 비를 맞고 비틀거리고 있었으니, 지쳤을만도 하겠지. 오늘 저녁은 사이좋게 스테이크로 할까? 토니는 자비스에게 자신의 저녁식사와 하나는 개에게 줄 양으로 아무 조미료 없이 레어로 구워진 소고기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잘 자네, 숨소리도 잘 안 내고. ....자비스, 얘 몇 살쯤 되어 보여?"
[사람 나이로 치면 20대 후반쯤인 것 같습니다.]
"다 컸다는 거군. 어릴때만 귀여워하다가 버렸다는 건가.. 완전 쓰레기같은 놈이네."
토니는 혀를 차며 숨을 쉬느라 들썩이는 개의 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털도 부드럽고, 관리가 잘 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홀대를 받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토니는 가능하면 전 주인의 여러 가지 이유에 대해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결론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귀여운 개를 버리다니 인간 실격' 으로 돌아왔다. 사람이란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때론 죽이기도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애정을 퍼부어주던 애완동물을 질렸다는 이유로 내다 버릴 수 있는게 바로 인간이었다. 정말 자기 편할대로 사는 생물이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음식이 준비되었다는 자비스의 알림에 그는 잠들어 있는 개를 토닥였다.
"Hey, buddy. 저녁 먹어야지. 잠은 이따가 더 자."
"....끙..."
"배고프잖아. 자, 이리 와. 맛있는 거 준비했어."
스티브는 무거운 눈을 끔벅이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멍한 머리로 눈 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실루엣과, 익숙한 목소리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이내 그것이 브루넷의 동그란 머리와 토니의 목소리라는 걸 깨닫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래, 갑자기 개가 되는 바람에 무작정 그를 찾아와서- 스티브는 고개를 털듯 흔들었다.
"이제 깼어? 테이블은 이쪽이야."
"멍!"
'스타크, 내 말 좀 들어 봐.' 스티브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번 짖었지만 토니는 그것이 저녁식사를 반기는 소리로 알아들은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할 뿐이었다. 어떡하면 좋지. 그는 소파 위에서 안절부절하다가 코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 정확히는 환상적인 고기 냄새에 이끌려 토니가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게 아닌데! 스티브는 순간 본능에 따라 행동한 자신을 보고 경악했지만 토니가 웃는 얼굴로 접시에 담아 내민 음식을 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수긍했다. 넓은 접시엔 보기에도 훌륭한, 겉만 살짝 익은 소고기 스테이크가 고급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너한테 줄 만한 음식은 지금 고기밖에 없더라고. 사료는 내일 도착할 것 같거든."
"멍! 멍!"
'아니, 사료를 준비할 것까진 없는데.' 스티브는 그런 뜻으로 짖은 다음에야 본인이 개로 변해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 조금 시무룩해졌다. 일반적으로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은 사료를 먹는다. 사람이 먹는 것으로는 소화기관에 문제가 생길수도 있고, 영양 균형에 맞추어 요즘은 좋은 사료들도 많이 나오는 모양이었다(가끔 지나가는 펫샵을 구경한 적이 있다). 스티브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기 접시를 쳐다보거나 말거나, 토니는 긍정의 신호로 알아듣고는 자비스와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오, 마음에 들어? 실컷 먹어. 또 있으니까. 잠깐만, 자비스, 개도 먹는 양을 스스로는 조절 못하던가?"
[보통은 그렇습니다. 견종이나 각자의 특성에 따라 적게는 하루 1회~3회 정도 준다고 하는군요.]
"골든 리트리버는 어떤데?"
[저 정도의 나이라면 2-3회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흠. 좋아. 관련 정보는 카테고리로 묶어놨으니까.. 어서 먹어, 멍멍아. 살짝 익히기만 해서 뜨겁지도 않아."
스티브는 그제야 접시에 고개를 들이밀고 식사를 시작했다. 토니의 말대로 겉만 약간 익힌 고기는 부드럽고 신선했으며, 끝내주는 맛이 났다. 사람일 때 먹어본 어떤 종류의 스테이크도 이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군. 스티브는 거의 전투적으로 커다란 고기를 공격했다. 토니는 아주 잘 먹는다며 기뻐하더니 두어 덩이를 더 덜어 주었고 그는 사양않고 맛있게 먹어치웠다. 배가 채워지고 나자 갑작스레 하품이 나오는 바람에 스티브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런.
"그러고보니 네 이름을 지어줄까 하는데."
스티브는 입맛을 다시다가 토니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좋을까. 토니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개를 잠시 말없이 응시했다. 푸른 눈. 금빛 털. 이건 뭐 이름 후보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약간 바보처럼 느껴지는걸. 토니는 허공에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스티브가 눈을 크게 뜨며 짖었다.
'스타크! 설마!'
"너도 알아? 캡틴 아메리카의 상징이지. 비브라늄 방패. 널 보고 있으니 생각나더라고."
"멍! 멍멍! 멍!"
"안다고? 왠지 그렇게 들리는데. 아무튼 그래서 이제부터는 널- 캡틴이라고 부를거야. 어때? 캡틴."
'내가 그 캡틴이야! 스티브 로저스라고!'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멍멍 짖으며 빙글빙글 도는 개를 바라보고 토니가 씩 웃었다. 나중에 진짜 캡틴이 알면 화내려나? 하지만 당신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보라고. 개도 마음에 드는 이름이랬어. 그는 변명, 아니 설명할 이유를 몇 가지 떠올리며 여전히 토니의 발치를 빙빙 도는 캡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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