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운명적이고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도, 아무런 시련 없이 조용하게 싹트는 법이란 없다. 생과 사라는 극단적인 경계에 선 채 서로에게 잔뜩 날이 선 말들을 던지며 부딪치는 사이에 쌓인 미운정 고운정도, 몇 시간만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안달이 나는 뜨거운 연인들도, 결국 한 두번쯤은 꽤나 어려운 고비를 맞닥뜨리곤 하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의 스티브 로저스와 토니 스타크가- 딱 그 시점에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티브쪽에서 여러모로 동요하고 있었다는 점이 더 맞았을 것이다. 뉴욕 사건을 거치며 토니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몇 번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다 정신을 차려보니 침대 위에서 몸을 섞고 있었다는 게 그들의 뻔한 것 같으면서도 황당한 로맨스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은밀한 연애를 알게 된 몇 안되는 사람들은 으레 그렇듯이 방탕하기로 이름난 토니가 현대에 적응하느라 바쁜 싱싱한 젊은이 (실은 97세의 노인이지만)를 살살 꼬셔서 냉큼 꿰어찬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스티브와 자신의 성격이라거나, 여러가지 면모를 고려했을 때 이 관계가 지나치게 깊어지면 필시 곤란할 것임을 알아차린 토니는 미리부터 거리를 두었다. 애매하게 섹슈얼 텐션이 고조될 때면 과장된 농담이나 오만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곤 했다. 


그러나 상대는 백전노장, 40년대의 영웅, Living legend- Captain America였다. 토니가 특정한 분위기가 될 때면 잽싸게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다는 걸 퍼뜩 깨달은 스티브는 노련하게 그 뒷덜미를 붙잡았고, 왜 그랬는지 추궁한 다음,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늘 가볍고 헤픈 것 같아도 진심어린 애정에 약한 토니에게 신실한 40년대 남자의 사랑고백은 지나치게 스트라이크 존이었으며 결국 토니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고 말았다.


막 시작한 연인 치고는 심심한 사이였지만 스티브와 토니는 자주 만났고 몰래 데이트했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티브의 과거에 대한 그리움마저 완전히 지워버릴 순 없었다. 토니는 그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스티브가 종종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나갔다가 돌아와도 거기에 대해 섭섭함을 내비치지 않았다. 물론 서운하고 쓸쓸했으나 말한다고 해서 해소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님을 본인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기에 그랬을 뿐이었다. 



"요새 그렇게 로마노프 요원이 당신한테 여자 소개시켜주려고 안달이라면서?"


"소문이 거기까지 났나? 한 번도 수락한 적은 없어."


"그래, 대답도 멋지게 했다고 들었지. 바빠서 안 된다고 그랬다던데."



토니는 짐짓 태연한 척 말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어벤져스 때와는 다른 스텔스 수트를 입은 스티브는 누가 봐도 위압적이며 매력적이었고, 복도를 지나갈 때면 여성들의 시선도 함께 따라왔다. 물론 그 중엔 토니에게 관심을 가진 이들도 있었겠지만 평생을 사람들 시선 속에 살아온 토니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흥미 대상은 스티브 로저스였다. 아무래도 여기 직원 복지예산을 깎으라고 해야겠어.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단단한 손이 다가와 뺨을 어루만졌다. 가죽장갑과 뜨끈한 체온이 닿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젠장, 몇 달 못봤다고 이지경이라니. 토니 스타크 다 죽었군.



"얼굴이 좀 상한 것 같은데, 토니."


"...그냥 좀, 말리부도 부서지고 뭐... 나도 바빴잖아."


"도우러 못 가서.. 미안하네. 아주 나중에야 들었어."


"괜찮아. 쉴드가 개입한다고 해서 어떻게 될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그치들은 정보수집이나 하고 있었겠지."



토니는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스티브는 그 모습을 보고 아릿한 아픔을 느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동정이나 연민을 싫어하는 남자였다.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쉴드 본부가 아니었다면 팔을 뻗어 안아주고 싶었으나 보는 눈도 많았고 무엇보다, 둘에겐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다. 토니가 컨설팅을 하러 온 타이밍과 스티브의 휴식시간이 우연히 겹치지 않았다면 얼굴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두 사람은 거의 그런 식으로 지내고 있었다. 스티브의 방황과, 토니의 기다림, 묵인.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적은 언제나 상대가 방심하는 틈을 노리지."


"오, 미국의 영웅께서 걱정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는걸. 알았어, 주의하지. 당신이야말로 조심해."



쉴드는 스파이 집단이라 언제 어디서 뭘 해도 놀랍지 않거든. 토니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놀랍게도 스티브는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닉 퓨리 저격, 쉴드 수배, 새로운 동료, 윈터 솔져,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버키의 등장으로 인해 무척 복잡하고 위험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스티브를 뒤흔든 건 오랜 친우이자 가족같은 존재인 버키였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지만 스티브는 그의 친구가 살아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언제쯤 시작할 거야?"


"....그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어. 뭐하면 나중에 합류해도 되고."


"어딜 가느냐에 따라 다르지. 아까 그 간호사 아가씨 만나러 가는 거면 빠지겠지만-"


"아니, 그쪽은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야. 관심 없어."


"그렇게 안 생겼는데, 현대적 가치관은 다 배운거 아니야? 캡틴."


"그랬다면 연락해서 만나자고 했겠지. 어쨌든, 따라올 생각 만만인 것 같으니 그냥 같이 가는게 좋겠군."



쉴드에서 지급한 건 이미 부서진 지 오래였으나, 토니가 생일때 선물한 클래식한 40년대 디자인의 끝내주는 야마하가 남아 있었다. 묘지를 벗어나 몇 블록을 건너 도착한 창고의 문을 열자, 과연 샘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휘파람을 불었고 스티브는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때론 받기 곤란할 정도의 고가 선물들을 안기는 통에 엄격하게 제지한 적도 있었지만 이 오토바이만큼은 토니에게서 받은 것들 중에서도 상당히 아끼는 것이었다. 뉴욕의 또 다른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는 A타워의 뒤쪽으로 돌아간 스티브는 전용 엘리베이터에 지문과 음성을 인식시켰다. 



"타워 최상층."


[스티브 로저스, 인가되었습니다.]


"워, 여기 스타크 타워 아니야? 이런 곳에도 출입문이 있었다니.. 놀라운데."


"아무래도 거리 쪽은 소란스러우니까, 여긴 소수의 관계자들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여기 최상층엔 무슨 일로..."


[문이 열립니다.]



샘이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스티브는 마치 제 집인 양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갔고 샘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 내렸다. 탁 트인 시야와 널찍한 공간, 한쪽에는 미니 바가 자리하고 있는 광경에 그는 좀 질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거 어쩐지 프라이빗한 공간이라는 느낌인데. 스티브가 여상히 공중에 말을 거는 순간 하마터면 샘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 했다.



"자비스. 토니는 어디에 있지?"


-잠시 산책 나가셨습니다만, 지금 곧... 저기 오시는 군요.



바람을 가르는 엔진 소리와 함께 금빛의 수트- 아이언맨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둥그런 발판에 가볍게 내려섰고, 기다렸다는 듯 기계들이 움직이며 수트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는 것에 맞추어 파츠가 하나 둘씩 제거되는 모습은 비현실적이면서도 꽤나 섹시했으며, 매력적이었기에 스티브도 샘도 한동안 말을 잊고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덕분에 토니는 덩치 큰 군인 둘이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걸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기, 둘. 그러다 턱 떨어지겠어."


"....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넋을 놓은 모양이군."


"토니 스타크?"


"You know who I am, 스티브의 새로운 친구 씨."


"소개하지. 이쪽은 샘 윌슨. 이번 일에 많은 도움을 준 동료야. 이쪽은.. 말 안해도 알겠지만,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


"만나서 반가워요. 설마 캡이 친구를 데려올줄은 몰랐네."



토니는 샘과 악수를 나누며 씩 웃어보였다. 거기엔 요만큼의 사적인 감정도 들어가있지 않았지만 스티브는 괜시리 혼자 찔리는 마음에 시선을 피해 천장을 훑어보고 있었다. 몇 달만에 만나러 온 것도 모자라 친구를 달고 오다니, 연인 실격은 아닐까.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제대로 이유를 말해주지도 않은 채 오랫동안 방황했던 최근의 자신이 가장 문제였으리라. 스티브는 낡은 파일을 꾹 움켜쥐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토니, 그동안.. 미안했네. 제대로 된 설명도 안 하고, 내가 하고싶은대로만 행동했지. 방황했었어. 꽤 오랫동안,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이어야 할지도 몰랐고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지. 그 중 유일하게 아는 건 오래된 것들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야. 난 멍청했었어. 여기에, 내가 돌아올 장소가 있었는데.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


"그래서 늦었지만 만나러 왔어. 쉴드는 해체됐지만 나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울 것 같아. 내 친구, 버키가 살아있었고..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거야. 난 반드시 그를 찾아야 하고, 그러려면 저번보다 더 오래 떠나있게 될 지도 몰라. 그 전에 꼭 만나러 와야겠다고 생각했어. 당신한테 설명하고, 사과하고... 그런다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싶었지."


"..........."



스티브가 진심어린 얼굴로 토니에게 지난 일들에 대해 털어놓는 동안, 샘은 뒤로 물러나서 팔짱을 낀 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랑 아이언맨이, 그러니까 지금 저건 아무리 봐도 사귀는 사람 사이에나 오갈 법한.. 아니아니 어떻게 캡틴 아메리카하고 아이언맨이?? 스티브 로저스하고 토니 스타크가, 사.... (샘은 완성되려는 단어를 황급히 지워버렸다)



"당신을 많이 좋아해, 토니. 이제야 알았어. 난 여기에 돌아올 거고,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야."


"......스티브."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마음을 정리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지만, 이젠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바로 여기,

 당신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올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겠나? ...너무, 염치없는 소리긴 하지만..."


"흠. 당신도 알겠지만 난 성격이 급한 편이야. 솔직히 이런 거 자체가 기적에 가깝기도 하고."


"그거야... 그렇긴 하지."


"한 달에 한 번정도는 돌아와.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연락하고, 어디 있는지 정도는 간략하게 알려줬으면 좋겠군."


"토니, 그러면...."


"내가 쫓아가서 미주알 고주알 참견하는 건 당신도 별로 원하지 않을 테니까, 먼저 알려달라는 뜻이야. 어때? 솔져."


"Fair enough."


"No doubt."



그제야 스티브는 몇 달만에 환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고, 토니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자세로 보면 토니쪽이 스티브에게 파묻힌 격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스티브가 토니에게 기대어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샘은 너무 많은 비현실과 놀라움, 경악 사이에서 대체 어느 쪽을 먼저 수용해야 할 지 갈팡질팡했다. 한 명의 애꿎은 피해자가 있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스티브와 토니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제야 겨우, 타워 위에 드리워져 있던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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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Denver - How can I leave again 을 듣다가 생각나서 쓴 글. 

윈터솔져를 보고 나니 만약 스티브랑 토니가 어벤져스 이후 썸타고 사귀고 있었다면.. 하는 생각에서 써보게 됐다.

영화 내에서 과거에 매달리는 듯한 모습도 많이 나와서 그런것도 보여주고 싶었고....

노래 가사 중에 보면 some answers are no longer true 라거나 Lost in a storm I've gone blind 라는 내용이 있어서

결국 방황 끝에 자기가 돌아올 곳은 토니 옆이라는 걸 깨닫는 스티브가... 보고싶었음. 노래 좋아요. 정말 좋아하는 곡임. 


by 치우타 2014. 4. 22. 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