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운명적이고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도, 아무런 시련 없이 조용하게 싹트는 법이란 없다. 생과 사라는 극단적인 경계에 선 채 서로에게 잔뜩 날이 선 말들을 던지며 부딪치는 사이에 쌓인 미운정 고운정도, 몇 시간만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안달이 나는 뜨거운 연인들도, 결국 한 두번쯤은 꽤나 어려운 고비를 맞닥뜨리곤 하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의 스티브 로저스와 토니 스타크가- 딱 그 시점에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티브쪽에서 여러모로 동요하고 있었다는 점이 더 맞았을 것이다. 뉴욕 사건을 거치며 토니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몇 번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다 정신을 차려보니 침대 위에서 몸을 섞고 있었다는 게 그들의 뻔한 것 같으면서도 황당한 로맨스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은밀한 연애를 알게 된 몇 안되는 사람들은 으레 그렇듯이 방탕하기로 이름난 토니가 현대에 적응하느라 바쁜 싱싱한 젊은이 (실은 97세의 노인이지만)를 살살 꼬셔서 냉큼 꿰어찬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스티브와 자신의 성격이라거나, 여러가지 면모를 고려했을 때 이 관계가 지나치게 깊어지면 필시 곤란할 것임을 알아차린 토니는 미리부터 거리를 두었다. 애매하게 섹슈얼 텐션이 고조될 때면 과장된 농담이나 오만한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곤 했다. 


그러나 상대는 백전노장, 40년대의 영웅, Living legend- Captain America였다. 토니가 특정한 분위기가 될 때면 잽싸게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다는 걸 퍼뜩 깨달은 스티브는 노련하게 그 뒷덜미를 붙잡았고, 왜 그랬는지 추궁한 다음,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늘 가볍고 헤픈 것 같아도 진심어린 애정에 약한 토니에게 신실한 40년대 남자의 사랑고백은 지나치게 스트라이크 존이었으며 결국 토니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고 말았다.


막 시작한 연인 치고는 심심한 사이였지만 스티브와 토니는 자주 만났고 몰래 데이트했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티브의 과거에 대한 그리움마저 완전히 지워버릴 순 없었다. 토니는 그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스티브가 종종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나갔다가 돌아와도 거기에 대해 섭섭함을 내비치지 않았다. 물론 서운하고 쓸쓸했으나 말한다고 해서 해소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님을 본인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기에 그랬을 뿐이었다. 



"요새 그렇게 로마노프 요원이 당신한테 여자 소개시켜주려고 안달이라면서?"


"소문이 거기까지 났나? 한 번도 수락한 적은 없어."


"그래, 대답도 멋지게 했다고 들었지. 바빠서 안 된다고 그랬다던데."



토니는 짐짓 태연한 척 말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어벤져스 때와는 다른 스텔스 수트를 입은 스티브는 누가 봐도 위압적이며 매력적이었고, 복도를 지나갈 때면 여성들의 시선도 함께 따라왔다. 물론 그 중엔 토니에게 관심을 가진 이들도 있었겠지만 평생을 사람들 시선 속에 살아온 토니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흥미 대상은 스티브 로저스였다. 아무래도 여기 직원 복지예산을 깎으라고 해야겠어.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단단한 손이 다가와 뺨을 어루만졌다. 가죽장갑과 뜨끈한 체온이 닿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젠장, 몇 달 못봤다고 이지경이라니. 토니 스타크 다 죽었군.



"얼굴이 좀 상한 것 같은데, 토니."


"...그냥 좀, 말리부도 부서지고 뭐... 나도 바빴잖아."


"도우러 못 가서.. 미안하네. 아주 나중에야 들었어."


"괜찮아. 쉴드가 개입한다고 해서 어떻게 될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그치들은 정보수집이나 하고 있었겠지."



토니는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스티브는 그 모습을 보고 아릿한 아픔을 느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동정이나 연민을 싫어하는 남자였다.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쉴드 본부가 아니었다면 팔을 뻗어 안아주고 싶었으나 보는 눈도 많았고 무엇보다, 둘에겐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다. 토니가 컨설팅을 하러 온 타이밍과 스티브의 휴식시간이 우연히 겹치지 않았다면 얼굴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요즘 두 사람은 거의 그런 식으로 지내고 있었다. 스티브의 방황과, 토니의 기다림, 묵인.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적은 언제나 상대가 방심하는 틈을 노리지."


"오, 미국의 영웅께서 걱정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는걸. 알았어, 주의하지. 당신이야말로 조심해."



쉴드는 스파이 집단이라 언제 어디서 뭘 해도 놀랍지 않거든. 토니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놀랍게도 스티브는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닉 퓨리 저격, 쉴드 수배, 새로운 동료, 윈터 솔져,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버키의 등장으로 인해 무척 복잡하고 위험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스티브를 뒤흔든 건 오랜 친우이자 가족같은 존재인 버키였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지만 스티브는 그의 친구가 살아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언제쯤 시작할 거야?"


"....그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어. 뭐하면 나중에 합류해도 되고."


"어딜 가느냐에 따라 다르지. 아까 그 간호사 아가씨 만나러 가는 거면 빠지겠지만-"


"아니, 그쪽은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야. 관심 없어."


"그렇게 안 생겼는데, 현대적 가치관은 다 배운거 아니야? 캡틴."


"그랬다면 연락해서 만나자고 했겠지. 어쨌든, 따라올 생각 만만인 것 같으니 그냥 같이 가는게 좋겠군."



쉴드에서 지급한 건 이미 부서진 지 오래였으나, 토니가 생일때 선물한 클래식한 40년대 디자인의 끝내주는 야마하가 남아 있었다. 묘지를 벗어나 몇 블록을 건너 도착한 창고의 문을 열자, 과연 샘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휘파람을 불었고 스티브는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때론 받기 곤란할 정도의 고가 선물들을 안기는 통에 엄격하게 제지한 적도 있었지만 이 오토바이만큼은 토니에게서 받은 것들 중에서도 상당히 아끼는 것이었다. 뉴욕의 또 다른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는 A타워의 뒤쪽으로 돌아간 스티브는 전용 엘리베이터에 지문과 음성을 인식시켰다. 



"타워 최상층."


[스티브 로저스, 인가되었습니다.]


"워, 여기 스타크 타워 아니야? 이런 곳에도 출입문이 있었다니.. 놀라운데."


"아무래도 거리 쪽은 소란스러우니까, 여긴 소수의 관계자들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여기 최상층엔 무슨 일로..."


[문이 열립니다.]



샘이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스티브는 마치 제 집인 양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갔고 샘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 내렸다. 탁 트인 시야와 널찍한 공간, 한쪽에는 미니 바가 자리하고 있는 광경에 그는 좀 질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거 어쩐지 프라이빗한 공간이라는 느낌인데. 스티브가 여상히 공중에 말을 거는 순간 하마터면 샘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 했다.



"자비스. 토니는 어디에 있지?"


-잠시 산책 나가셨습니다만, 지금 곧... 저기 오시는 군요.



바람을 가르는 엔진 소리와 함께 금빛의 수트- 아이언맨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둥그런 발판에 가볍게 내려섰고, 기다렸다는 듯 기계들이 움직이며 수트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는 것에 맞추어 파츠가 하나 둘씩 제거되는 모습은 비현실적이면서도 꽤나 섹시했으며, 매력적이었기에 스티브도 샘도 한동안 말을 잊고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덕분에 토니는 덩치 큰 군인 둘이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걸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기, 둘. 그러다 턱 떨어지겠어."


"....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넋을 놓은 모양이군."


"토니 스타크?"


"You know who I am, 스티브의 새로운 친구 씨."


"소개하지. 이쪽은 샘 윌슨. 이번 일에 많은 도움을 준 동료야. 이쪽은.. 말 안해도 알겠지만,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


"만나서 반가워요. 설마 캡이 친구를 데려올줄은 몰랐네."



토니는 샘과 악수를 나누며 씩 웃어보였다. 거기엔 요만큼의 사적인 감정도 들어가있지 않았지만 스티브는 괜시리 혼자 찔리는 마음에 시선을 피해 천장을 훑어보고 있었다. 몇 달만에 만나러 온 것도 모자라 친구를 달고 오다니, 연인 실격은 아닐까.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제대로 이유를 말해주지도 않은 채 오랫동안 방황했던 최근의 자신이 가장 문제였으리라. 스티브는 낡은 파일을 꾹 움켜쥐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토니, 그동안.. 미안했네. 제대로 된 설명도 안 하고, 내가 하고싶은대로만 행동했지. 방황했었어. 꽤 오랫동안,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이어야 할지도 몰랐고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지. 그 중 유일하게 아는 건 오래된 것들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야. 난 멍청했었어. 여기에, 내가 돌아올 장소가 있었는데.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


"그래서 늦었지만 만나러 왔어. 쉴드는 해체됐지만 나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자주 자리를 비울 것 같아. 내 친구, 버키가 살아있었고..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거야. 난 반드시 그를 찾아야 하고, 그러려면 저번보다 더 오래 떠나있게 될 지도 몰라. 그 전에 꼭 만나러 와야겠다고 생각했어. 당신한테 설명하고, 사과하고... 그런다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싶었지."


"..........."



스티브가 진심어린 얼굴로 토니에게 지난 일들에 대해 털어놓는 동안, 샘은 뒤로 물러나서 팔짱을 낀 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랑 아이언맨이, 그러니까 지금 저건 아무리 봐도 사귀는 사람 사이에나 오갈 법한.. 아니아니 어떻게 캡틴 아메리카하고 아이언맨이?? 스티브 로저스하고 토니 스타크가, 사.... (샘은 완성되려는 단어를 황급히 지워버렸다)



"당신을 많이 좋아해, 토니. 이제야 알았어. 난 여기에 돌아올 거고,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야."


"......스티브."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마음을 정리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지만, 이젠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바로 여기,

 당신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올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겠나? ...너무, 염치없는 소리긴 하지만..."


"흠. 당신도 알겠지만 난 성격이 급한 편이야. 솔직히 이런 거 자체가 기적에 가깝기도 하고."


"그거야... 그렇긴 하지."


"한 달에 한 번정도는 돌아와.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연락하고, 어디 있는지 정도는 간략하게 알려줬으면 좋겠군."


"토니, 그러면...."


"내가 쫓아가서 미주알 고주알 참견하는 건 당신도 별로 원하지 않을 테니까, 먼저 알려달라는 뜻이야. 어때? 솔져."


"Fair enough."


"No doubt."



그제야 스티브는 몇 달만에 환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고, 토니를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자세로 보면 토니쪽이 스티브에게 파묻힌 격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스티브가 토니에게 기대어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샘은 너무 많은 비현실과 놀라움, 경악 사이에서 대체 어느 쪽을 먼저 수용해야 할 지 갈팡질팡했다. 한 명의 애꿎은 피해자가 있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스티브와 토니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제야 겨우, 타워 위에 드리워져 있던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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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Denver - How can I leave again 을 듣다가 생각나서 쓴 글. 

윈터솔져를 보고 나니 만약 스티브랑 토니가 어벤져스 이후 썸타고 사귀고 있었다면.. 하는 생각에서 써보게 됐다.

영화 내에서 과거에 매달리는 듯한 모습도 많이 나와서 그런것도 보여주고 싶었고....

노래 가사 중에 보면 some answers are no longer true 라거나 Lost in a storm I've gone blind 라는 내용이 있어서

결국 방황 끝에 자기가 돌아올 곳은 토니 옆이라는 걸 깨닫는 스티브가... 보고싶었음. 노래 좋아요. 정말 좋아하는 곡임. 


by 치우타 2014. 4. 22. 01:27

Marvel Cinematic Universe 

Steve/Tony

Alternative Universe

Writing material by 귤자님


Lion, Man, and Love.



앤서니 에드워드 스타크- 통칭 '토니 스타크' 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 사진작가였다. 그가 찍는 모든 사진은 매혹적이었으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한 채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넓은 주택과 별장, 클래식 카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언제나 많은 여자들이 옆에 들끓었지만 스테디한 관계는 하나도 없었다. 또한 토니는 자신의 저택에 정말 가까운 이들 외엔 아무도 들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몇 번이고 파파라치나 방송사에서 그에 관해 취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한 번도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에겐 유능한 집사가 있었으므로)



"지겨워."


"뭐가 말씀이십니까?"


"방송사들, 파파라치들, 사람들 전부 다. 이젠 인물사진도 질렸어. 다른 게 없을까? 자비스."


"카메라 앞에 서면 누구든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고 좋아하셨던 게 엊그제 같습니다만..."


"그게 문제야! 처음엔 그야 재미있었지. 다들 아닌 척 하고 내 앞에 서서 한껏 자신을 뽐내려고 들지만,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순간 모든 환상이 무너지거든.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땐- 오. 충격적이었다고."


"어쩐지 별로 믿음이 안 가는 군요."


"....처음은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간에, 질렸어. 그들의 욕망을 보는 것도 나한테 지나친 관심을 들이대는 것도! 끔찍해."



고개를 저으며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까지 부르르 떠는 토니를 보고 자비스는 한숨을 쉬면서도 작게 웃었다. 그의 주인은 변덕스럽고, 까다로우며, 제멋대로에다, 30대에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철없이 굴 때가 있지만 사실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주위 친구들에게 틱틱대지만 중요한 순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줄 아는 모습이라던지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미움을 사듯 얄밉게 구는 모습 등이 그랬다. 


그리고 적당히 풍족한 집안에서 자라며 취미로 잡은 카메라가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토니였으나 점차 유명해지면서 원치 않는 허위 스캔들이나 협박, 지나친 관심과 압박에 시달려야 했고 그것은 점점 그로 하여금 인물 사진에서 학을 떼게 만들었던 것이다. 가끔은 사진 자체를 그만둬 버릴까 싶다가도, 서투르게 막 찍어댔던 옛날 사진들에 담긴 애정과 열정을 보고 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사람 외에 다른 걸 찍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사람 말고 다른 거?"


"아예 원점으로 돌아가시는 것도 좋고요. 동물 꽤 좋아하시잖아요."


".....음. 사람하고 달리 겉과 속이 같아서 참 친근하고 좋은 녀석들이지."



자비스는 토니 앞에 화면을 하나 띄워보였다. 자연과 동물 사진 및 다큐로 유명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프리랜서 사진작가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기한은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토니는 갑자기 마음이 동하는 걸 느끼고 잠시 멍한 얼굴로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언제까지지?"


"내일이 마감이군요."


"...뭐?!?!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맙소사, 시간도 없는데! 인물 포트폴리오 따위 쓰고싶지 않다고!"


"어차피 이 근처엔 새도 많고, 운이 좋으면 곰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난 이럴 때마다 네가 무서워, 자비스."


"칭찬으로 듣죠."


"장비 챙겨줘, 당장 나가야겠어. 앞으로 24시간도 채 안 남았는데 뭘 건질 수 있을지 모르겠군."



토니는 허둥지둥 아무옷이나 골라 입으며 자비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충실한 그의 집사, 자비스는 언제 준비해둔 건지 완벽하게 식량과 물이 채워진 가방, 카메라 장비, 비상연락수단(핸드폰을 못 쓰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을 토니에게 냉큼 내밀었다. 끝내주게 유능하기는 해. 토니는 속으로 그가 지금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임에 감사했다.



"다녀올게. 요새 또 몇몇이 어슬렁거리던데, 전기 담장 맛을 보여줘도 되고."


"그러다 고소 당하십니다."


"내가 이길걸. 이따 봐, 자비스! 행운을 빌어줘!"



당신에겐 필요 없을 겁니다. 바람처럼 뛰쳐나가는 토니의 등 뒤로 자비스가 들릴락말락하게 속삭이며 웃었다. 그 후에 토니가 어떤 것과 어떤 식으로 씨름하여 사진을 찍었는지, 무슨 사진을 냈는지는 생략하기로 한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토니는 마감 10분 전에 사진을 제출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사진은 응모된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선정되어, 메인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by 치우타 2014. 4. 18. 01:11

Michael Buble - Call me irresponsible 을 듣고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 윈터솔져 스포 주의. 



스티브 로저스를 좋아한다.


토니는 그제서야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의견이 안 맞아서 다투는 건 기본이요, 성격이나 취향, 전장에서의 행동까지 어느 하나 공통점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다니. 그것도 남자한테! 90살 넘은 (그냥 숫자로만 따지면 그렇긴 하지만) 할아버지한테! 고리타분하고, 지루한데다가, 필요할 땐 인정사정없이 상대를 비꼴 수 있는 군인한테! 토니는 감정을 완전히 자각한 순간 몹시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들고 있던 스패너를 테이블에 내팽개치고 랩을 뛰쳐나왔다. 그 자리에 더 서 있다간 어떤 물건을 파손할 지 몰랐고, 환상적인 세계 최고급 네트워크로 스티브 로저스의 현재 위치와 상황 따위를 찾아볼까봐 겁이 나서였다. 그는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오기도 하는 천재였으니까.


분하고 억울하고 믿을 수 없다는 마음과, 당장에라도 찾아가 들이대며 추근덕거리고 싶은 마음이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토니는 철저하게 스티브에 관한 모든 정보를 차단했다. 섣불리 다가가서 자신을 가벼운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게 싫었고 (실제로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토니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되도 않는 말실수로 엉뚱한 인상을 주는 것도 싫었다. 페퍼 이후로 온 진심을 보여주고 싶어진 상대가 스티브 로저스였다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는 70년이 지난 후에도 신실하고 성실한 남자였다. 그토록 강박적으로 스티브에 대한 정보를 차단했던 토니였지만, 딱 한가지는 어쩔 수 없었다. 페기 카터. 몰래 이야기를 대강 전해들은 것 외에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었다곤 해도 스티브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토니는 씁쓸한 심경을 애써 감추며 카메라에 기록된 영상을 꺼버렸다. 절대 자신은 그런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시작부터 깨닫는 건 정말로,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거나 덜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토니는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스티브가 보고 싶었고, 그의 소식이 궁금했고, 자신이 그의 '관심 인물 리스트'에 들어갔으면 하고 생각했다. 이건 진짜 멍청하고 미친 짓이야. 몇 번씩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어 봤지만 사랑이란게, 원래 다 미친 짓이지 않던가. 유치하고, 무책임하고, 상대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거. 이 나이에 또 하게 될줄은 몰랐지만. 토니는 혀를 차며 머리를 벽에 박았다. (자비스는 이제 색다른 자해를 시도하시는 거냐며 약간의 비아냥이 섞인 걱정을 했다)



그리고 또 한두달이 지난 후, 이렇게 된 거 그냥 거절당하던 말던 말해버릴까? 토니는 한층 퀭해진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며 반쯤 이성을 놓아버린 생각을 했다. 여러 사건이 지나가고 스티브는 페기 카터 외에 또 다른 과거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제임스 뷰캐넌 반즈, 윈터 솔져. 그 사이에 자기가 죽을 뻔 했다는 건 그닥 놀라운 일 축에도 끼지 않았지만 (이미 죽을뻔 했다가 살아난 경험도 있었고) 중요한 건 스티브의 친우가 적으로 돌아왔다가 이젠 행방이 묘연해진 부분이 더 신경쓰였다. 아마 그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겠지. 토니는 클라우드를 띄워 그의 행방을 찾아보려다 그만두었다. 어쩐지 잡을 수 없는 그림자를 쫓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열심인 남자와, 그를 좋아하는 현대의 표상격인 남자. 도저히 어디에서도 교차점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토니는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세상에, 내가 살면서 이렇게 어려운 상대를 만난 적이 있었나? 대답은 No 였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혹은 그가 눈빛만 보내도, 모든 사람은 먼저 다가와 꼬리를 치거나 어떻게든 토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걸 오랫동안 즐겼고 언제 그랬냐는 듯 매정하게 내쳤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죗값을 이런 걸로 받는게 아닐까. 거의 자포자기격으로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꽤 그럴듯했다. 이래서 착하게 살라고 하나보다. 토니는 허허로이 웃음지었다.



결국 토니는 오랜 고민과 고뇌 끝에 스티브와 몇 번 만나고 (우연이든 의도적이건간에) 그의 일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우선 조금 더 가까워지기로 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시작했지만 과정이나 결과가 제법 괜찮았기에 토니는 조금씩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스티브의 행동이나 눈빛, 말투에서 그는 점점 '그냥 같이 싸웠던 동료' 에서 '괜찮은 친구가 될 지도 모르는 동료' 정도까지는 올라선 것 같았다. 못 보던 새로운 얼굴인 샘 윌슨이라는 남자보다도 아직 한참 못한 위치인건 분명했으나 토니로서는 상당히 분발한 셈이었기에 우선은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혼자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고민할 때 보다는 직접 스티브와 만나 부딪치고 대화한 덕분에 훨씬 여유가 생긴 토니는 모르는 사이에 표정도 부드러워지고, 눈빛이 깊어졌다. 그걸 가장 먼저 깨달은 건 놀랍게도 스티브였다. 약간 비꼬는 듯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이전보다 신중하고 노련해진 토니를 보며 그는 처음엔 감탄했고, 두번째에는 놀랐으며, 세번째에는 호감이 생겼다. 뉴욕 사건을 겪으며 부정적이었던 첫인상을 약간 수정하긴 했으나 그다지 관심있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다시 만난 토니는 한층 더 멋진 남자가 되어 있었다. 샘과도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가까워졌고, 버키를 찾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은 가능한한 모두 가져다 주었으며, 피로에 지친 그들에게 맥주를 사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그건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마음에 직접 와 닿는 따스함이었다. 스티브는 점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토니의 얼굴이나 말투, 행동을 조금씩 관찰하기 시작했다.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가 더없이 진지하게 가라앉아서 반짝이는 모습이라던지, 사심 없이 웃을 땐 목소리가 약간 듣기 좋게 낮아진다던지, 변장한답시고 입은 사복이 후드티인데 제법 귀여워서 놀란다던지 (여기서 스티브는 귀엽다는 단어를 재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좀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스티브는 하루가 다르게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을 더 알고 싶어졌다. 단순한 동료로서의 호감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도 모른 채 스티브가 먼저 몇 마디 말을 건네면, 토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해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스티브는 페기에게 버키 뿐만이 아니라 토니의 이야기도 조금씩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씨 좋은 봄날, 스티브는 여느 때와 같이 페기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토니에 대해 말하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페기가 불쑥 끼어들었다.



"당신, 그 사람 좋아하는구나."


"....뭐라고, 페기?"


"그렇잖아. 벌써 눈빛이 다른걸. 말투도 그렇고..."


"....내가 그랬어?"



스티브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더듬으며 괜히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페기는 치매로 기억을 계속 잃었다가 찾았다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때때로 정신을 차리곤 했다. 내가? 토니 스타크를 좋아한다고? 워낙 예상치 못한 발언인데다가 화자가 페기였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페기는 웃으며 스티브의 손을 두드렸다.



"여자의 감이라는 거야, 스티브. 그래도 잘 됐어.. 당신에게 다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페기, 나는-"


"알아. 내가 당신의 best girl 이라고 했지. 이제 당신의 길을 가도 돼, 너무 오래 잃어버리고 있었지만..."


".......페기.."


"그랬으면 좋겠어. 당신이 이 시간을 살아갔으면 좋겠어. 그게 내 바램이야..."



페기는 부드럽게 미소짓고는 작게 몇 번 기침했다. 스티브는 그녀에게 물잔을 건네며 잡은 손을 꽉 쥐었다. 이러고 나면,꼭 다시 치매증상이 돌아오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페기는 또 다시 스티브를 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고 스티브 또한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잠든 그녀의 곁을 떠나오면서 스티브는 페기의 말을 천천히 몇 번이고 곱씹었다.



한편 토니는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고백할 심산이었다. 고리타분하고, 때론 지독하게 냉소적이지만, 언제나 올바른 신념을 가진 남자, 스티브 로저스에게. 길지 않은 시간동안 아주 약간의 진전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토니로서는 그 시간이 마치 2,3년 같았다. 다행히도 지금 토니는 스티브의 '친한 동료' 쯤의 위치까지는 올라온 것 같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백따위 접어버리고 동료, 친구사이로 남는다는 선택지도 물론 고민했다. 그러나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마음이 식기를 기다리며 스티브를 좋아하기 전의 토니 스타크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 죽지는 않겠지. 우주에도 다녀왔고 테러도 당했는데 뭘 못하겠어? 약간 빗나간 느낌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곧 스티브가 타워에 도착할 것이고, 토니는 그에게 고백을 쏟아부을 것이다. 아마 최악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토니는 스티브가 제법 새끈한 차림으로 찾아온 것을 보며 생각했다. 다른 의미로 죽을 수도 있겠군. 


스티브의 취향에 맞춘 식사가 끝나고, 아이스크림(토니)과 커피(스티브) 라는 평소와는 전혀 반대지만 어쨌거나 클래식한 디저트가 나오고 나자 토니는 지금이 그 때임을 직감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이놈의 목은 왜 중요할 때 말을 안 듣는 거야? 아이스크림으로 목을 다시 축이며 스티브를 바라보자, 그도 마침 토니를 바라보았다. 말하기도 전에 죽겠어. 토니는 심호흡을 했다.



"있잖아, 스티브..." "저기, 토니."


동시에 튀어나온 서로의 이름과 목소리에 둘은 동시에 눈을 크게 뜨며 침묵했다. 당신이 먼저 말해, 아냐 자네가 먼저 말하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드라마의 한 장면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두 사람은 결국 토니가 두 손을 들고 우선권을 획득하겠다는 제스쳐를 하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날 무책임하다고 해도 돼."


"....뭐?"


"그냥, 끝까지 들어줘.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도 없겠지. 난 천재지만, 아니 이게 아니고... 그렇게 모든 것에 현명한 건 아니야. 난 그저.. 당신이 좋아. 나는 예측 불가에다가, 터무니없기까지 해. 하지만.. 이것만큼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당신을 좋아한다는, 사랑한다는 거. 착각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냐. 얼토당토 않겠지만 정말, 당신에게 푹 빠져버렸어. .....당신을 좋아해, 스티브."


"....스타...토니."


"답을 못 들어도 좋아. 그냥, 그냥 나는... 말하고 싶었어. 참을 수가 없었지. ...날 싫어해도 괜찮아. 들어준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아니, 잠깐..."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 앞으로는 수트 입고 다녀도 되니까-"


"잠깐, 토니. 좀 닥쳐봐."



횡설수설하며 고백을 줄줄 늘어놓은것도 모자라 이젠 혼자만의 결론으로 치달으려는 토니를 보고 스티브는 황급히 제지했다. 군대 시절의 버릇대로 말투가 험악해진 건 고의가 아니었으나 상당한 효과가 있었는지 토니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려졌고, 스티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잠깐이라고 하면 좀 들어. 자네는 그게 문제야. 너무 달려나가는 거."


"....그.... 미안해. 내가..."


"조용히,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


"솔직히 놀라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도 말할 게 있었어. 생각도 안 해봤던 건데 듣고 보니 맞는 것도 같고."



뭐가? 라고 되묻고 싶어 토니의 입술이 순간 달싹였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스티브 때문에 토니는 다시 얌전히 침묵을 지켰다. 세상에, 그 토니 스타크를 이렇게 오랫동안 조용하게 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이 자리에 나타샤가 있었다면 가장 어이없어 했을 것이다) 스티브는 묘하게 승리감 같은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당신이 좋아. 토니."


"......아, 그렇.... 뭐???!"


"나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쉬운 결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해."


"그, 아니, 어떻, 말도 안, 잠깐만, 나 지금 굉장히 정박아처럼 말하고 있어. 맙소사. 스티브? 정말이야? 당신이..."


"내가 아무리 현대식 농담이 늘었다지만 이런 걸 주제로 삼진 않아. 너무하군."


"농담이라고 안 했어... 그보다.. 아니,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토니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다는 머리도 정작 중요한 순간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니, 세상은 이래서 공평하다고 하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습관적으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려던 찰나 따뜻한 손이 쓱 내밀어졌다. 



"자해하는 취미가 있는줄은 몰랐는데."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놀라서..."


"플레이보이라더니 다 거짓말이었나?"


"아니거든? 지금 날 뭘로 보고...!"


"그럼, 테이블에 머리 박는 거 말고 지금 뭘 해야 될까? 토니. 그 좋은 머리 좀 굴려 봐."


"뭘 해야 되다니? 당연히-"



키스, 라고 말하려던 입술은 다음 순간 부드러운 감촉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약간 거칠지만 따스하고, 다정한 입맞춤에 토니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흠, 아무래도 플레이보이 타이틀 반납해야 될 것 같은데. 스티브가 웃으며 속삭이자 토니는 발끈해서 그의 멱살을 붙잡고 딥키스를 되돌려주었다. 잔에 담긴 커피와, 먹다 만 아이스크림이 다 식고 녹아버릴 때까지 두 사람은 한데 엉켜 떨어질 줄을 몰랐다. 

  

by 치우타 2014. 4. 14. 02:47

토니는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 끼워진, 투박한 금빛의 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걸 언제 받았더라. 벌써 희미해진 기억의 끄트머리를 애써 더듬으며, 토니는 괜시리 목을 조여오는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했다. 숨이 트이는 느낌에 가볍게 공기를 들이마시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기가 폐부를 천천히 채워갔다. 조금 떨어진 키친에선 맛있는 커피의 향기가 솔솔 풍겨나오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도 토니는 데이트 장소를 쉽사리 바꾸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자비스가 준비하는 최상의 드립 커피도, 이 낡은 집에서 마시는 커피보다는 못했다.



"오늘은 조금 진하게 내렸는데.. 어떨지 모르겠군."


"음, 향기 좋고. ....와우, 이 정도면 바리스타로 취직해도 되겠어. 끝내주네."



솔직하게 칭찬하자 금세 기쁨으로 얼굴을 물들이며 푸른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스티브의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설레어 버리고 말았기에 토니는 늘 진정할 수가 없었다. 최근엔 쉴드 일을 돕는답시고 여기저기 불려다녔는데 (물론 모든 임무는 닉의 뒤치닥거리였지만) 근육도 더 탄탄해지고, 머리를 조금 스포츠형으로 다듬어서인지 예전보다는 현대적인 인상이 되었다. 길을 가다 돌아보는 사람도 늘어났으며, 그에게 대놓고 데이트 비스무리한 제안을 해오는 이들도 많아졌다. 물론 토니는 요만큼도 그런 것들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고- 대신 속으로 그들을 어떻게 응징할지에 대해 잠깐씩 고민했다가 치우곤 했다. (내가 이 나이먹고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사실 스티브는 이런 토니의 생각들을 다 꿰뚫고 있었다. 90살 넘은 할아버지 청년치고는 꽤 날카로운 직감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것도 다 모르는 사이 토니가 무방비하게 감정의 파편을 조금씩 흘리고 다녀준 덕분이었다는 것을, 스티브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보통의 토니는 무척이나 유연하면서도 한 치의 틈도 없는 남자였다. 일견 가볍고, 때론 천박하게 느껴지는 표현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모두의' 셀러브러티였지만 그 자신의 진심은 보이지 않는 벽으로 촘촘히 둘러싸여 있었다. 스티브는 그의 외모가 토니 취향에 완벽한 스트라이크에 들어갔다는 점이 토니 스타크의 '연인' 으로서의 자격 중 하나기도 했지만, 몇 번 토니와 감정적으로 (때로는 이성적으로도) 부딪치면서 그의 튼튼한 가드가 어떤 것에 강하고 약한지를 파악해낼 수 있었으므로 지금의 발전적인 관계에 이를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토니는 스티브의 부드러운 시선을 애써 피하며 머그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 만큼 놀아봤다는 플레이보이 토니 스타크가 실은 덩치 큰 연인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평범한 남자가 된다는 걸,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스티브는 숨길 수 없는 행복을 다시금 입가에 걸었다. 토니의 눈이 또 정처없이 허공을 헤매기 시작했다.



"토니."


"어? 왜, 커피 맛있다, 그런데 식으니까 좀 별로네. 응? 뭐라고?"


"사랑해."


"...누가 노친네 아니랄까봐 이런 말도 막 기습적으로 하고 그래, 좀 로맨틱하게-"


"키스하면서 할 수는 없잖나. 지금 할 거야."


"뭐? 잠깐, 이봐-"



항의의 말은 입술 안으로 먹혀들어갔다. 스티브는 조금 꿍꿍이 있는 웃음을 꾹 눌러담으며, 토니의 까칠한 입술에 제 입술을 부볐다. 여기에 열이 생겨나고, 점차 은밀한 방향으로 가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다. 스티브가 천천히 토니를 끌어들여 제 품 안에 가둔 것처럼, 사실은 모두 이렇게 연인이 된다. 토니 스타크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by 치우타 2014. 3. 29. 03:26

*초능력자 AU (원설정자 : 조나쁨)

*스티브 : 바람 / 토니 : 독



 토니는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 유독한 니코틴과 타르 성분이 온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는 이 순간을 위해 그는 가장 독한 담배들만을 하루에도 몇 갑씩 피워대곤 했다. 타고난 능력 덕분에 세상의 온갖 독성물질을 접해왔는데 그 중에서도 기호식품에 해당하는 담배에는 도통 질리지가 않았다. 짧고 강렬한 효과를 위해서는 시거를 피우는 쪽이 더 좋지만, 그건 내킬 때가 아니고서는 굳이 손대질 않았다. 토니는 의외로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강한 독성을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닥치는대로 섭취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독들을 마음껏 취했다.



"여기 있었군, 토니. 한참 찾았네."



나른한 표정으로 희미하게 연기를 뱉어내던 토니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 목소리, 어쩐지 헐레벌떡 뛰어왔지만 아닌 척하려고 노력하는 기색, 이쪽의 분위기를 살피는 듯한 시선까지. 가능하면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의 현 파트너이자 리더- 스티브 로저스임이 틀림없었다. 토니는 자꾸만 삐뚤어지려는 눈썹을 애써 억누르며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한 채 몸을 돌렸다. 금발의 푸른 눈,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나를 왜 찾아? 임무도 없는데."


"그건...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랬네."



심드렁하게 던진 말에 돌아온 것은 글러브 한 가운데를 파고들 정도의 완벽한 스트라이크였다. 토니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몇 번을 들어도 저 솔직함에는 정말이지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원체 사람이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착해빠져서 거짓말을 못하는 건지, 어느쪽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이 강직한 '리더' 씨께서 토니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졸졸 말이다.



"아까 아침에도 얼굴 봤잖아."


"자네가 바쁘다며 휑하니 나가는 바람에 이야기도 못했....."


"할 이야기 있어? 그럼 해봐, 들어줄테니까. 5분. 자 시작."


"뭐? 잠깐, 그렇게 갑작스럽게 말하면 어떡하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준비 씩이나 해야 할 정도로 거창해? 5분이면 되잖아. 초 단위까지 셀거야. 시간은 가고 있어, 캡틴."



냉랭한 토니의 말에 스티브는 금세 풀죽은 얼굴이 되어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다른 약속이 없다면 점심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려고 했네... 마지막은 거의 기어들어가는 소리에 가까워서 토니는 본의 아니게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만 했다. 아니, 내가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이런 벽창호 쑥맥 상대로! 자신의 행동에 화가 난 토니는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던져 세게 짓밟았다. 그 난폭한 행동에 스티브는 약간 움찔했지만, 푸른 눈을 신실하게 반짝이며 여전히 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눈빛에 토니는 아주 조금이지만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다. 토니는 금발에 푸른 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고 (특히 얼굴이 미형이라면 더욱) 스티브 로저스는 비록 그와 성격이든 뭐든 정반대지만 외모만큼은 아주 정확하게 과녁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10점 만점에 100점짜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별따위 관계 없이, 토니는 보기에 괜찮은 외모를 선호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안 되나...?"


"....어디로 갈 건데?"


"...! 전에 자네가 먹고 싶다던 가게에서 얼마전부터 런치를 시작했네. 9번가 골목 중간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일세."


"그래? 런치를 시작했다고? 당신치곤 상당한 정보력인걸."



별 것 아닌 칭찬에 스티브의 얼굴이 온통 기쁨의 빛으로 물들었다. 거의 반짝이기까지 할 기세로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은 충분히 토니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고, 그는 속으로 험한 말을 뇌까렸다. 젠장, 왜 나는 이딴 취향을 가지고 있는거야!



"뭐... 좋아. 점심 정도 같이 먹는건 어렵지 않을 것 같군. 앞장서, 캡틴."


"! 정말인가? 그럼 이쪽으로 가세. 조금 빠른 길을 알고 있어."



처음 말을 걸었을 때와는 달리 신이 난 스티브는 앞장서서 걷다가 문득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토니는 새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눈으로 대답했다. 왜? 대답보다 빨리 약간 큰 손이 눈 앞에 내밀어졌다. 



"자네를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겠나?"


"...정말 가지가지 하네, 당신.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렇게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 좀 하지마! 독 나올것 같으니까!"



자연스럽게 가시돋친 말을 퍼부어주려던 토니는 아까보다 더 처량한(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할지도 모르겠지만) 스티브의 눈을 보고 짜증을 내며 손을 맞잡아 주었다. 그제서야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스티브의 등을 보며, 토니는 어쩐지 요즘 이 멍멍이 같은 남자의 요청을 꽤 자주 수락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도 주변을 맴돌기에 귀찮아서, 혹은 별 생각 없이 응낙하곤 했던 여러가지 일들이 촤라락 필름마냥 머릿속을 지나갔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고, 특히 토니는 스티브에 대한 호감도가 요만큼도 올라간 것 같지가 않았다. 기분 탓이겠지. 남아있는 한 손으로 다시 담배를 입에 물면서 그는 잡생각을 털어냈다.



-조금 나중의 일이지만 토니는 이 때가 자신의 야생의 감각이 살아있을 때였다고 회상하게 된다.

by 치우타 2014. 3. 12. 01:37

첫 번째 : 토니의 경우


헬리케리어에 올라탄 토니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회의실로 향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옆에 누군가 있었다면, 그 토니 스타크도 세상이 다 꺼져버릴 것 같은 한숨을 쉴 만한 일도 있냐며 놀라워하거나 혹은 쉴드 내의 사소한 가십거리로 만들어 버렸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요사이 토니의 고민은 딱 한 가지였다. 캡틴 아메리카, aka 스티브 로저스.


시작부터 견원지간마냥 아웅다웅 다퉜던 둘이었지만 어벤져스 활동을 통해서 약간 변화가 생기는가 싶더니... 그 이후로는 이렇다할 진전이 전혀 없었다. 여전히 둘은 의견차로 말다툼을 했고, 주로 스티브의 의견대로 일이 진행되었으며(물론 토니가 거기에 순순히 따르지만은 않았다) 많은 확률로 스티브가 옳았지만 토니의 주장이 훨씬 효율적이고 피해가 적었던 경우도 있었다. 몇 번 그런일이 반복되자 토니는 화가 났고, 지쳤지만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치거나 그만두진 않았다. 스티브에겐 그런 모습이 플러스가 되었던 모양인지 일이 마무리된 후에 먼저 토니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기도 했다. 사실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성격 말고는 외모고 뭐고 완전히 토니의 스트라이크존이었던 스티브였기에, 토니로선 거절하거나 허세를 부리며 내칠 이유가 요만큼도 없었다. 대신 점잔을 빼기는 했다. 남자로서의 자존심도 있고 솔직히 좋아하는 티를 너무 내는 건 어쩐지 지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조금씩 신뢰와 동료로서의 애정 비슷한 걸 쌓아가면서 점점 스티브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 토니였으나, 문제는 그 상대인 스티브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토니 혼자서 썸을 타고 있다고나 할까. 분명 이건 공통적인 분위기이며 감정이 맞는 것 같은데(적어도 플레이보이 경력이 상당한 토니의 눈으로 봤을땐) 종종 스티브가 인사를 먼저 건네거나 하는 일은 있어도 식사 제안이나 가벼운 대화를 걸어오는 적은 거의 없었다. 주로 대화도 토니가 주도했으며 식사 제안도 토니쪽에서 꺼냈다. 그리고 이건 단 둘도 아니라 어벤져스 멤버들이 다 낀 그런 공적인 자리로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분명 토니는 스티브에게 제안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멤버 집합이 되어있더라는 이야기다.


아무래도 이 90년산 얼음덩이 캡틴이 분위기 파악을 못 해도 너무 못 하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토니는 머리를 짚으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바른 생활이 일상인 남자에게 호감을 갖게 되다 보니, 파티에서 멀어진 생활로 일찌감치 방향을 바꿨던 토니였지만 한층 더 자기 관리에 매진하게 되었다. 최대한 덜 방탕하게 보이려고 노력했고 사람들에게 공격적인 말을 던지지 않도록 조심했다(물론 이건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게 왠걸, 스티브는 눈치도 못 채고 엉뚱하게 다른 사람들이나 만나며 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토니의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쓸쓸하기도 했고,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져 멍하니 삼십분 가량을 앉아있기도 했다. 


그냥 때려치울까. 토니는 몇백번이고 했던 생각을 프로그래밍하듯 머릿속에 띄워올렸다. 가망도 없어 보이는데 관둬버리는게 낫다고 이성은 차분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고, 감성은 사람 마음이라는 건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며 달래고 있었다. 그런 정신나간 듯한 자신과의 싸움도 시야에 스티브가 들어오면 깨끗이 자취를 감추어버리니, 미칠 노릇이었다.



"좋은 아침이군, 토니."


"아.. 좋은 아침, 스티브."



사람 좋은 미소를 앞에 두고 최대한 입술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어낸 토니는 속으로 한숨을 재차 삼키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 긴가민가한 사이를 어쩌면 좋을까. 스티브의 옆얼굴을 힐끔거리며 회의 내용은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토니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평소보다 좀 더 묘한 얼굴을 한 닉 퓨리가 걸어왔고 그 뒤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금발에.... 덩치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토니는 기시감이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노려보았다.



"토니!"


".....퀼?"



스티브 못지 않게 훌륭한 외모를 지닌 남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리더- '스타로드' 피터 퀼이 그에게 기쁜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토니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깃든 반짝임을 보는 순간, 왠지는 모르겠지만 앞날이 그닥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감하며 허허로이 웃음을 지었다.


by 치우타 2014. 3. 10. 01:45

-어디가 좋아


"있잖아, 솔직하게 대답해봐. 당신은 내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콕 집어서 말해야 하나?"

"그래도 되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규칙이니까 그것만 지키면 돼."

"흠. 우선 자네는 귀엽지."

"뭐? 귀엽.... 그래 그렇다 치자. 또?"

"장난기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긴장으로 떨릴 때면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어지네."

"그거.... 무척 구체적인걸. 다른 건?"

"뭘 입어도 매력적이고 섹시하지만, 사실 자네가 작업할 때 입는 나시티가 정말 좋다고 생각해."

"워, 말하면서 벗기는 거 반칙이야. 난 지금 대화가 하고 싶은 거라고."

"그럼 키스하는 건 된다는 소리군. 자네가 셔츠를 벗을 때 다가가서 품에 가두고 싶어."

"그래서 어제 갑자기...."

"쉴 새 없이 많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입술도 사랑스럽네."

"읍푸.....음, 당신, 지금.. 또 반칙....."

"어떻게 하면 나를 흔들어 볼까 하고 못된 장난을 궁리하는 것도 좋고."

"그런식으로 애 취급하는 거 싫다고 했잖아. 이봐 솔져, 엉덩이에서 손 떼."

"언제 만져도 탄력적인 이 곳도 충분히 좋고 말이네."

"지금 당신 반쯤 날 벗기고 있.... 질문은 그게 아니잖아! 점점 다른 길로 가고 있다고, 이봐!"

"그렇게 부르면 더 하고 싶어지는걸. 이렇게 넥타이를 푸르면 순식간에 흐트러지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어."

"알았어, 알았다고! 스티브! 어디가 좋냐고 물어본거지 이걸 하자는 말이-"

"싫은가?"

"..........그건 아니지만... 젠장, 또 당신 페이스야. 완전 짜증나."

"시작은 자네가 했으니 내 탓은 하지 말게."

"됐으니까 키스나 해, 미국대장님."

"분부대로 하지, 사장님."



by 치우타 2014. 2. 13. 23:57

 언제나의 아침 일과인 운동을 끝내고 나온 스티브는 최근 한 번도 울리지 않은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서투르게 날짜를 확인해보니 오늘은 수요일- 지난 일주일동안 그가 손꼽아 기다리던 바로 그 날이었다. 지금이 몇 시지? 같은 화면에 떠 있는 숫자는 7:30. 겨우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스티브는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뛰쳐나갔다. 


 

"남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해야 하는 상황이 제일 싫어..."


"그만 불평해요, 토니. 엎질러진 물이잖아요."


"내 일만 해도 모자랄 판에 수습이나 하고 있어야 되니까 그렇지. 재능낭비, 시간낭비야."



스티브 보고 싶다.... 이젠 거의 주문처럼 튀어나오는 토니의 말에 페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2주 가량이 지났고 토니는 그때 보낸 몇 시간의 휴식의 배는 더 일하고 있었다. 단순히 쉬었기 때문에 일이 많아진 게 아니라, 잘못을 거짓으로 덮어 만회하려던 어느 간부의 행적이 최근에서야 완전히 드러나는 바람에 최고경영자인 페퍼와 이젠 뒤로 물러난 토니가 덤터기를 쓰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제까지의 책임을 물어 즉시 해고된것은 물론 그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고소까지 겹쳐서 인생이 몰락할 지경에 처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좀 불쌍하긴 했지만 그가 저지른 일의 뒷처리 때문에 스티브와의 저녁식사를 취소해야 했던 토니로서는, 이것보다 더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누가 알아요, 그러다 좋은 일이 생길지."


"이 상황에서 좋은일이란, 페퍼. 남은 스케줄이 취소되거나 하는 거 말곤 없을걸."



페퍼와 대화하는 와중에도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눈으로는 화면을 쫓던 토니가 어깨를 잠시 으쓱여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단정을 비웃는 것처럼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둘의 시선이 모두 문쪽으로 향했다. 들어오세요. 페퍼의 대답에 나무로 된 고급 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렸다. 



"......스티브...?"


"좋은 아침, 토니."



누구든 한 번쯤은 돌아볼 정도로 잘 생긴 얼굴에다 금발에 푸른 눈이라는 완벽한 조건마저 갖추고 있지만 한 사람 외엔 시선도 거의 주질 않는 신실한 남자- 스티브 로저스가 수줍은 듯 노란 후리지아 꽃다발을 든 채 서 있었다. 막 체육관에서 달려온 것이 역력한 가벼운 옷차림이었지만 그게 그의 매력을 가리거나 흐리게 할 수는 없었다. 멍한 얼굴로 잠시 작업을 멈춘 토니를 내버려두고 페퍼가 스티브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린 토니는 데이터를 처리하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포츠 양에게 자네의 스케줄을 물어봤네. 급히 변경되는 일정까지는 자비스가 확인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침 오늘은 회의 시작 전에 10분 정도는 시간이 있다기에 만나러 왔지."


"...내가 이번주 내내 연락 못한건 말야, 워낙 바빴어서..."


"알고 있네. 지금도 무척 바쁘다는 것도 알아. 그래서 내가 왔어, 너무 보고싶어서."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진납세를 시전하려는 토니의 말을 가로막으며 스티브는 다시 미소지었다. 토니는 원래 바쁜 사람이었고, 그건 사귀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너무 일상적인 것이었기에 토니는 굳이 스티브에게 바쁘다는 말을 하진 않았고 거기에 대해 스티브도 지적하거나 자주 언급하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직접 바쁘다고 말하고 있었고(손을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좋은 증거였다), 책상엔 서류가 잔뜩 쌓여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토니는 고개를 들어 스티브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무리 눈을 맞추는 것이 대화의 기본이라고는 해도 토니는 필요하다면 화면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스티브는 그래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고, 허세투성이에, 어디서든 매력만점이라 불안한 그의 연인이었지만 이런 사소한 행동들에 토니의 진심이 담겨있음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꽃은 바로 꽃병에 꽂기만 하면 되도록 미리 손질해달라고 했네. 자네 책상에 두었으면 좋겠어. 벌써 시간이 없으니 아쉽지만 이만 돌아가야겠군. 그럼... 토니, 오늘도 수고하게."



어느새 코 앞에 다가온 스티브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고개를 내려 약간 거칠어진 토니의 입술에 쪼듯이 입맞추고는 물러났다. 그의 넓고 든든한 등이 문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토니는 멍청한 얼굴로 앉아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눈부신 금발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다음에야 그는 책상 위로 푹 무너졌다. 스티브 로저스와 사귀면서 얻을 수 있는 것. 급작스레 없던 기운이 솟아나는 걸 느끼며, 토니는 바른 자세로 고쳐 앉았다. 


연인으로부터의 꽃과 키스, 토니 스타크의 피로를 단숨에 날려버린 것은 아주 단순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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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한량님이랑 기운내 보아요 하다가 생각나서 잽싸게 연성해봄.

by 치우타 2014. 2. 5. 09:38

[믿어주지 않겠지만 토니, 난 사실 자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스티브는 다시 연필로 문장 위에 줄을 직직 그으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벌써 이걸로 몇 번째의 편지가 버려진 건지 세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말로 해보면 쉽게 튀어나오는데, 이상하게도 편지로 옮기는 순간 달콤하고 솔직한 말은 자취를 감춰버리고 남는 것은 어색한 표현과 초등학생 수준의 문장 뿐이었다. 전쟁 전에는 오히려 이것보다 더 나은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스티브는 머리를 헝클어트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면 상대가 나빠서- 아니, 너무 훌륭해서 상대적으로 뭘 하든지간에 형편없어 보이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지금 스티브가 낑낑대며 쓰고 있는 연서의 수신자란, 바로 그 토니 스타크였으니까.



"헤이, 캡! 그렇게 넋 놓고 다니다간 누가 지갑을 슬쩍해가도 모르겠어. 과연 누가 간 크게 당신을 건드릴진 모르겠지만."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무심코 돌아보니 장난기 어린 그린 헤이즐넛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하마터면 너무 놀라 이상한 소리를 낼 뻔 했지만 간신히 목 뒤로 눌러 참으며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되돌렸다. 오랜만이네, 토니. 그러면 토니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당신 요새 날 이름으로 부르네. 싫다는 게 아니야, 그냥 좀 묘한 느낌이라서. 하는 말을 던지고는 손을 흔들면서 먼저 회의실 쪽으로 걸어가 버리곤 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도 약간 대화 내용은 달랐지만 패턴은 거의 동일했다. 그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난 후에는, 그런 감정을 가지기 전의 자신이 토니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고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도통 기억나질 않아 스티브는 한참을 쩔쩔매었다.


이 마음을 전달할지 말지에 대해서도 정말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70년 후 외따로 뚝 떨어진 시대를 벗어난 남자(Man out of the time)였고, 영웅이지만 가진 게 없는 초라한 청년이었기에 현대의 아이콘과도 같은 토니 스타크를 사랑하게 되고부터는 이러한 감정마저도 몰염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고, 사랑에 빠진 상대의 소문이나 과거가 그 아무리 복잡하다곤 해도 매일 아침 새로운 기분으로 자신을 일깨워주는 사람에게 호감 이외의 다른 것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기에 스티브는 계속 토니를 좋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고민한 지 어언 세 달째, 앓느니 죽겠다는 심정으로 스티브는 자신의 모든 진심을 담은 편지를 쓰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언젠가는 틀림없이 자네도 날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네. 물론 지금은 어림없는 소리 말라면서 웃어 넘기거나,

날 정신나간 노친네 취급을 하며 놀릴 것 같지만... 토니. 자네도 머지 않아 이런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게 될 걸세.]


스티브는 연필을 멈추었다. 뭐라고 써내려가도 유치하고 느끼하기만 해서 되는 대로 손을 움직이고 있었으나 썩 마음에 드는 문장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약간 문제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적고 보니 불안감이나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들이 싹 걷혀가는 기분이 들었다. 스티브는 그대로 조금 더 몇 줄을 추가하고는 소중하게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겉에는 스티브 로저스로부터, 토니 스타크에게. 그 짧은 두 마디 이외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설레이는 마음을 감추지 않은 채,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여담 : 토니는 후에 스티브와 사귀게 된 다음 편지를 다시 읽어봤는데, 처음 읽었을 때는 기가 막혔어도 꽤 로맨틱하게 보였는데 이제 보니 나를 문장으로 낚으려는 수작이었다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티브에게 입술을 막히는 바람에 더 이상 불평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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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나의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 노래를 소재로 주신 레밤님을 위해 쓴 글입니다.

노래 줄창 틀어놓고 의식의 흐름으로 썼는데.... 어떨지는 잘 모르겠네요 으아앙 ㅇ<-<

전 스티브가 자기 상황 재면서 토니가 오히려 자신에게 과분한 상대라고 생각하는게 참 좋더라구요. 취향이 나옵니다.

이렇게 약간 뻔뻔한 구석도 좋고 안절부절하는 캡이 참 좋다고 합니다. 거기 홀라당 넘어가는 토니도 무척 좋습니다. 

by 치우타 2013. 12. 5. 01:04


자비스, 오늘 우리 캡시클 일정이 어떻게 되지?”


[Mr. Rogers는 아침 운동을 마치고 쉴드에 갈 예정이었습니다만, 변경되는 바람에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도서관? 내가 충분한 책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부족한 모양이군. 자비스-“


[Sir, 제가 보기엔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일 자체를 즐기시는 것 같았습니다만.]


. 이젠 네가 독심술도 익힌 모양이로군, 끝내주는데? 도서관은 어디야?”



자비스로부터 안내받은 도서관 위치를 보고 토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간다면 브루클린에 있는 도서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타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여러 귀한 장서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시립도서관이었다.  오후 일기예보에는 분명 비가 쏟아질 거라고 했었지.


그 양반 우산은 챙겼나?”


[아뇨. 예보를 듣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그럼 결정됐군. 아빠는 새엄마 데리러 나갔다 올 테니 저녁준비하고 있어, 아들. 여상히 던져오는 말에 자비스는 충실하게 긍정의 대답을 되돌렸다. 뛰는 듯 경쾌한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토니의 손에는 샛노란 우산이 들려 있었다.


한편 그 시간에 스티브는 책을 반납하고 소설 서가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토니와 지내고 있는 타워에는 물론 각종 서적이 지루할 틈도 없이 꽉 들어차 있었으나 (특히 토니는 스티브 취향의 책을 자비스를 통해 알아내고는 귀신같이 콜렉션을 채워갔다) 그는 아직 21세기에 한창 적응중인 옛날 사람이다 보니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자비스 말대로 그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고 움직였다. 고민 끝에 스티브는 헤밍웨이의 책을 한 권 손에 들고 나왔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자 저마다 우산을 펼쳐 드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제서야 아차 싶은 마음에 밖을 내다보았더니 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는 참이었다.


곤란하게 됐군책이 젖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늦으면 토니가 기다릴테고…”



거리가 멀지 않으니 뛰어갈지 아니면 그칠 때까지 기다릴지에 대한 선택 사이에서 방황하던 스티브의 귓가에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이, 거기 잘생긴 블론디. 우산이 없는 모양인데 같이 쓸래?”


“…! 토니, 자네 여길 어떻게…”



낙낙한 후드에 청바지, 얼굴을 가리기 위해 짙은 색안경을 쓴 토니가 우산을 들고 윙크했다. 가능한 한 시선을 덜 끌기 위해 어두운 옷을 고른 것과는 반대로, 샛노란 우산이 무척 눈에 띄었기에 스티브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비스의 안내로 찾아왔겠지. 말하지 않아도 대강 내막을 파악한 그는 문득 토니의 옷자락에 빗방울이 생각보다 많이 스며들어있음을 깨달았다. 우산을 든 채로 비에 젖다니, 설마.



언제부터 여기서 기다렸나?”


기다리다니,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그냥 당신 나올 시간을 계산해서-“


“……손이 차갑군. 이리 주게.”



능글맞게 화제를 피하는 토니의 손을 쥐어 양 손으로 감싼 스티브는 꽤 서늘한 온도에 질책하듯 짧게 혀를 찼다.



그냥 안으로 들어오지 그랬나.”


당신이 신경 쓸 것 같아서모처럼 휴식시간을 보내는데 방해하긴 싫었거든.”


토니, 함께 있어도 휴식은 휴식이야. 오히려 그 편이 더 좋네만.”


“……요새 너무 달변가라 무서운걸. 우리 허니는 학습능력도 좋지.”


알면 잘 하게.”



아예 왼팔을 뻗어 토니를 품에 가둔 스티브는, 우산을 빼앗아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토니는 남 보기 부끄럽다며 꿈틀거렸지만 이내 그것도 몇 번의 입맞춤 끝에 얌전해지고 말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오후, 스티브는 깨어나서 처음으로 토니와 한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앞으로 이 도서관을 오고 갈 때 즐겁게 떠올릴 수 있는 일들이 조금 더 늘어났다는 것은 확실했다. 토니가 자신을 위해 변장까지 하고 기다려준 것도, 플레이보이답지 않게 버드키스로 금세 얌전해지는 것도 오직 그만이 이 거리에서 가질 수 있는 소중한 추억거리였다


스티브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한 번 토니의 이마에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by 치우타 2013. 11. 27.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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