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비스, 오늘 우리 캡시클 일정이 어떻게 되지?”
[Mr. Rogers는 아침 운동을 마치고 쉴드에 갈 예정이었습니다만, 변경되는 바람에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도서관? 내가 충분한 책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부족한 모양이군. 자비스-“
[Sir, 제가 보기엔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일 자체를 즐기시는 것 같았습니다만.]
“오. 이젠 네가 독심술도 익힌 모양이로군, 끝내주는데? 도서관은 어디야?”
자비스로부터 안내받은 도서관 위치를 보고 토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간다면 브루클린에 있는 도서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타워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여러 귀한 장서들이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시립도서관이었다. 오후 일기예보에는 분명 비가 쏟아질 거라고 했었지.
“그 양반 우산은 챙겼나?”
[아뇨. 예보를 듣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그럼 결정됐군. 아빠는 새엄마 데리러 나갔다 올 테니 저녁준비하고 있어, 아들. 여상히 던져오는 말에 자비스는 충실하게 긍정의 대답을 되돌렸다. 뛰는 듯 경쾌한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토니의 손에는 샛노란 우산이 들려 있었다.
한편 그 시간에 스티브는 책을 반납하고 소설 서가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토니와 지내고 있는 타워에는 물론 각종 서적이 지루할 틈도 없이 꽉 들어차 있었으나 (특히 토니는 스티브 취향의 책을 자비스를 통해 알아내고는 귀신같이 콜렉션을 채워갔다) 그는 아직 21세기에 한창 적응중인 옛날 사람이다 보니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자비스 말대로 그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고 움직였다. 고민 끝에 스티브는 헤밍웨이의 책을 한 권 손에 들고 나왔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자 저마다 우산을 펼쳐 드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제서야 아차 싶은 마음에 밖을 내다보았더니 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는 참이었다.
“곤란하게 됐군… 책이 젖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늦으면 토니가 기다릴테고…”
거리가 멀지 않으니 뛰어갈지 아니면 그칠 때까지 기다릴지에 대한 선택 사이에서 방황하던 스티브의 귓가에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이, 거기 잘생긴 블론디. 우산이 없는 모양인데 같이 쓸래?”
“…! 토니, 자네 여길 어떻게…”
낙낙한 후드에 청바지, 얼굴을 가리기 위해 짙은 색안경을 쓴 토니가 우산을 들고 윙크했다. 가능한 한 시선을 덜 끌기 위해 어두운 옷을 고른 것과는 반대로, 샛노란 우산이 무척 눈에 띄었기에 스티브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비스의 안내로 찾아왔겠지. 말하지 않아도 대강 내막을 파악한 그는 문득 토니의 옷자락에 빗방울이 생각보다 많이 스며들어있음을 깨달았다. 우산을 든 채로 비에 젖다니, 설마.
“언제부터 여기서 기다렸나?”
“기다리다니,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그냥 당신 나올 시간을 계산해서-“
“……손이 차갑군. 이리 주게.”
능글맞게 화제를 피하는 토니의 손을 쥐어 양 손으로 감싼 스티브는 꽤 서늘한 온도에 질책하듯 짧게 혀를 찼다.
“그냥 안으로 들어오지 그랬나.”
“당신이 신경 쓸 것 같아서… 모처럼 휴식시간을 보내는데 방해하긴 싫었거든.”
“토니, 함께 있어도 휴식은 휴식이야. 오히려 그 편이 더 좋네만.”
“……요새 너무 달변가라 무서운걸. 우리 허니는 학습능력도 좋지.”
“알면 잘 하게.”
아예 왼팔을 뻗어 토니를 품에 가둔 스티브는, 우산을 빼앗아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토니는 남 보기 부끄럽다며 꿈틀거렸지만 이내 그것도 몇 번의 입맞춤 끝에 얌전해지고 말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오후, 스티브는 깨어나서 처음으로 토니와 한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앞으로 이 도서관을 오고 갈 때 즐겁게 떠올릴 수 있는 일들이 조금 더 늘어났다는 것은 확실했다. 토니가 자신을 위해 변장까지 하고 기다려준 것도, 플레이보이답지 않게 버드키스로 금세 얌전해지는 것도 오직 그만이 이 거리에서 가질 수 있는 소중한 추억거리였다.
스티브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한 번 토니의 이마에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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