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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비의 경우


 스티브와 토니가 썸을 탄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정보를 다루는 쉴드 답게 그 화제는 비밀리에 몇몇 요원들 사이에서만 전파되었고 물론 어벤져스 멤버들은 애저녁에 다 눈치채서 누가 먼저 고백하나, 언제 사귀나로 내기까지 하고 있는 상태였다(토르는 아스가르드에 있다가 온 탓에 바튼의 귀뜸으로 알게 되었다). 그럼 정작 당사자인 두 사람은 어떤고 하니, 사실 토니는 오랜 플레이보이 생활의 감으로 이게 연애 전의 그 비스무리한 뭔가의 번데기 같은 거라고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설마 천하의 캡시클이 날 상대로 그럴리가 있겠어 하고 생각하며 애써 부정하는 중이었다. 또한 스티브는 버키 건을 계기로 예전보다 훨씬 토니랑 가깝게 지내며 이야기도 자주 할 수 있어서 좋은데 그 좋다는 감정이 호감을 넘어서서 연애감정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의 가쉽거리 혹은 사행성(?) 내기로 화제에 오르던 두 사람은 그날도 별 일 없이 스타크 타워의 토니 전용층에서 만나 버키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토니의 현란한 손짓과 자비스의 홀로그램에 온통 시선을 빼앗기며 반쯤 입을 벌린 채 감탄만 하던 스티브가 문득 생각난 듯이 고개를 돌려 토니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보니 요즘 유행하는 벽쿵이라는 거 아나?"

"벽쿵? 그게 뭐야, 젊은 애들 신조어 같은데."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상대에게 당하면 두근거린다고 하더군."

"뭐? 말도 안 돼. 고작 그런걸로 요즘 시대에 누가 그렇게 되겠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가 코웃음치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스티브 자신도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순수한 어린 애들사이에나 통할 법한 소리라곤 생각했지만, 막상 토니에게 강력하게 부정당하고 보니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스티브는 조금 약이 오른 얼굴로 성큼 다가섰다. "그래? 이렇게 하는 건데...."  길쭉한 팔이 뻗어오자 토니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치다가 등이 벽에 닿는 걸 느꼈다. 스티브가 지척에 있었다. 군인 치고는 흰 피부, 햇살에 반짝이는 금발, 언제나 올곧은 푸른 눈동자. 완벽하게 토니의 취향에 부합하는 외모를 갑작스레 코앞에 들이대는 일은 이 성격 나쁜 천재를 꽤 당황하게 만들었다. 플레이보이 타이틀이 무색하게, 토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그 얼굴이 제법 귀여워서 스티브도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어... 어라, 이상한데... 아크리액터.. 아니.. 아니 심장에 문제가 있나...?"

"그..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사람이 말할 땐 좀 들어, 토니..."


 이젠 없는 아크리액터 타령을 하며 말을 더듬는 토니가 자꾸만 시선을 피했다. 스티브는 그 떨리는 눈동자를 자기 앞에 붙들어두고 싶었다. 문득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고, 그는 충실하게 마음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토니는 무언가 결심한 듯 가까이 다가오는 스티브를 보며 본능적으로 키스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토니의 눈이 감겼고, 마침내 두 개의 입술이 하나로 포개졌다.



2. 원작(616)의 경우 


 스티브와 토니는 최근 아주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코 고백하지 않을 토니의 짝사랑이야 몇몇 사람만 알고 있었지만 아주 가끔 토니는 동료들(그 중에서 특히 스티브)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를 치거나 일을 벌리곤 했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앞으로도 쭉 평행선을 그릴 것 같았다. 며칠 전 스티브가 폭탄 터트리듯 토니에게 고백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렇게 친우이자 악우인 채로 지냈을 지도 모른다. 물론 반쯤 혼비백산한 토니가 간신히 이성의 끝자락을 붙들고 힘겨운 목소리로 "지금 착각하는 거야, 내가 자네에게 늘 헌신적이니까. 아니야... 나에게 또 실망할거야. 그럼 난 견딜 수 없을 거고. 미안해, 스티브." 라고 떠듬떠듬 내뱉고는 후다닥 자리를 피해 도망쳤다. 


 그러나 상대는 미국 대장, 백전 노장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였다. 토니를 오랫동안 봐 왔고 감정을 자각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고민했다. 그런 인내와 고뇌의 과정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이 앞으로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스티브는 장기전에 돌입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토니에게 애정어린 말을 건넸고, 표정과 몸짓, 말투와 행동으로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진심임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토니는 그럴 때마다 발을 돌려 다른 곳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부단히 스스로를 다스려야 했다.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상대가 진실한 얼굴로 고백해오는데 어떻게 도망갈 수 있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뛸듯이 기뻐하며 수줍은 여고생마냥 스티브를 받아들이고 싶지만 자신은 언제가 됐든 '사고'를 칠 것이고, 이기적인 개자식처럼 구는 걸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티브는 친구일 때보다 연인일 때 더욱 그에게 실망하고 상처입을 것이며 그건 절대로, 절대로 토니가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스티브가 토니에게 꾸준히 고백하기 시작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었을 무렵, 두 사람은 언제나와 같이 어벤져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조직의 예산, 피해 복구상황, 여론과 팀 내의 분위기 등등 주거니 받거니 평범하게 말이 오고가던 그 때, 스티브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툭 던졌다.


"그러고보니 벽에 상대를 가두면 당한 상대방이 두근거린다고 하더군. 들은 적 있나? 토니."

"아, 요새 떠들썩한 그거 말이지.. 다 과장이야. 감정의 문제일 뿐 행위는 그냥 일종의 수단 같은 거고."

"그래? 그런가?"

"그렇고 말고. 어차피 관심도 없으면 아무리......"


토니는 그 이상 말을 잇질 못했다. 스티브의 길고 튼튼한 팔뚝이 어느새 다가와 그를 부드럽고도 단호하게 벽에 가두어 버린 채였다. 오후의 햇살이 커텐 아래로 스며들어와 발치에 머무르는 걸 꿈처럼 바라보며 토니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이래도 말인가?"

"하하, 왜 이래... 스티브. 자네도 이런 걸 믿을 정도로 순진한 남자는 아니잖아."

"토니."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색하게 웃던 토니는 문득 정수리가 뜨거운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스티브의 푸른 눈동자 속엔 애틋함과 애정이 가득 담긴 채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어서 한 달 내내 간신히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한 번 마주하고 나니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아... 난 정말 당신을 당해낼 수 없구나. 그렇게 오랫동안 잘 감춰왔다고 생각했는데. 평생 그렇게 살 수 있었는데. 이젠 백기를 들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았다. 토니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을 실망시킬거야.... 견딜 수 없을 거야, 스티브....자신이 없어. 난 못할 거라고..."

"토니, 사람은 누구나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하는 생물이야. 나도 그렇고, 자네도 마찬가지지. 당연한 걸세."

"하지만- 스티브. 난 형편없는 남자라는 걸 알잖아. 당신은 너무 과분해."

"누가 그런 소릴 하던가? 내가 사랑에 빠진 사람을 멋대로 평가하는 건 자네라도 용서하지 않겠네. 그런 말 말게."


토니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이내 다가온 스티브의 손가락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굳은살이 박힌 군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쓰다듬었고 토니는 그런 접촉만으로도 허리가 떨려오는 걸 느꼈다. 맙소사,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제정신이 아니야.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군. ....키스해도 되나?"

"어.... 음..."

"사실 자네의 허락은 필요 없네. 할 거니까."


앗 하는 사이에 다가온 입술은 뜨겁고, 부드럽고, 또 사랑스러웠다. 토니는 저항을 포기하고 스티브의 목에 팔을 둘렀다. 스티브에게서 웃는 기척이 나더니 입맞춤이 더욱 깊어졌다. 등 뒤로 닿아오는 햇살이 따스했다.



3. EMH의 경우


 서류가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책상을 앞에 두고 토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어벤져스 콜에 내내 불려다녔더니, 회사 일이 이모양으로 잔뜩 밀리게 된 것이다. 최대한 페퍼가 도와주기는 했으나 토니의 결제가 필요한 중요건들이 하필이면 이번 주에 한꺼번에 날아온 탓에 그는 며칠 째 쪽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래도 카페인을 공급해야겠어."
 

토니는 머그잔에 새 커피를 가득 담고 바깥의 야경을 감상하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거운 커피를 음미하고 있는데 등 뒤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싶은 생각에 자비스를 부르려던 토니는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토니? 잠깐 시간 괜찮은가?" 

"캡틴? 들어와."

"늦은 시간에 미안하네. 일하고 일하고 있었나?"

"아냐, 괜찮아. 뭐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어? 무슨 일이야?"

"실은... 내가 알고 싶은게 있어서 왔네."


 스티브는 뭔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내 결심한 듯 성큼성큼 토니에게 다가왔다. 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 가능성에 대해서 계산을 시작한 토니는 그에게서 커피 머그를 건네받고 책상 위에 내려놓는 커다란 손을 나중에서야 눈치챘다. 토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캡틴? 스티브...? 그리고 다음 순간, 토니는 야경이 보이는 유리에 등을 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기분이 어떤가? 토니."

"어떠냐니... 캡틴, 이게 대체....."


 두근. 그의 심장박동이 한차례 세게 뛰었다. 어라? 토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반응을 탐색하듯이 기다리는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좋은 비누향이 코에 닿았고, 내려다보는 맑은 푸른 눈빛에는 평소와 다른 진지함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니까.. 어라? 응? 두근, 두근. 심장이 다시 한 번 펄떡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토니는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 보려고 애를 썼다. 스티브는 토니가 고민에 휩싸이거나 말거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토니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토니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그대로 펄쩍 뛰어오를 뻔 했다. 


"두근거리는군."

"어... 어? 어어.... 그러게...말이야."


스티브는 잘생긴 얼굴로 갑자기 씨익 웃어보이고는, 천천히 토니를 가둔 팔을 풀었다. "알았네. 그럼 또 오지. 자네 일이 끝나면 알려주게." 토니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스티브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성큼성큼 걸어서 나가버렸다. 토니는 방금 전 스티브가 손을 댄 심장 부근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두근. 두근. 아까처럼 급격한 박동은 아니었지만 심장은 규칙적으로, 조금 다르게 뛰고 있었다. 방금 전 그건 대체 뭐였을까? 캡틴의 장난? 40년대엔 그런 장난이 유행이기라도 했나? 토니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머그잔에 손을 뻗었다.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스티브에게 연락을 할 것이다. 아마 식사를 할 수도 있겠지. 토니는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4. AA의 경우


 요즘 토니에겐 고민이 한 가지 있었다. 스티브가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어벤져스 일과 운동, 책, 그리고 세상 적응(자비스가 도와주곤 했다)에만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좋을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자꾸만 뭔가 켕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토니는 보다 못해 팔을 걷어부치고 직접 나서기로 했다. 


"헤이, 캡. 이렇게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으면 정말 곰팡이가 슬어버릴지도 몰라."

"...며칠 만에 얼굴 비추면서 하는 말이 그건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솔직히 당신 너무 두문불출하고 있잖아."


스티브는 얄미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토니를 쳐다보다가, 책을 탁 덮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는 그럴 틈도 안 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어? 누구야? 설마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

"공교롭게도 자네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말을 받아치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적잖이 당황했다. 팔짱을 낀 스티브는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그건.. 제법 섹시했다. 수트를 입지 않은 면바지에 티셔츠 차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캡틴 아메리카였다. 토니는 곤두서려는 다른 쪽의 레이더를 애써 무시하며 머리를 팽팽 굴리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토니를 가볍게 벽에 밀쳐 세웠다. 


"똑똑한 자네라면 알텐데."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봐, 내가 천재라지만 그런 맥락없는 문장으로는-"


토니는 약간 발끈하며 스티브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거기엔 조금 전의 장난기 대신 무척 진지한 눈빛과 호감 가득한 잘생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몇 번을 봐도 참 어딘가의 왕자님 같은 외모란 말이지. 


"이렇게 하면 두근거린다고 요새 인터넷에 유행이던데, 어때? 토니."

".....흠. 제법 설레네. 그래서 지금.. 나 꼬시는 거야? 캡."

"스티브.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은, yes 야."


오. 토니는 소리 없이 감탄하며 입술을 오므렸다. 설마 그의 은둔(?)생활에 기여한 게 바로 자신이었다니,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살아있는 전설, 미국의 영웅인 그를 존경하고 좋아했지만 이런 식으로 감정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스티브의 말대로 벽에 밀쳐져서 팔 안에 갖힌, 어떻게 보면 남자로선 그닥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그와 조금 더 다른 시도를 해보고도 싶었다. 연애가 뭐 별건가. 아니,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어쨌든간에. 


"좋아. 토니 스타크의 오후 스케줄은 전부 당신 거니까 지금부터 잘 생각해봐."

"드디어 시간을 내 주는 모양이로군. 우선 점심부터 같이 하겠나?"


스티브가 개구진 얼굴로 웃으며 둘러싼 팔을 풀고 손을 내밀었다. 토니는 순서가 바뀐것 같은데, 하고 꽁시랑거렸지만 이미 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부터 뭔가 달라질 것 같았다. 아주 많이. 더 좋은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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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트위터에서 봤던 '벽쿵을 당하면 두근거린대' 하는 귀여운 네칸만화를 보고... 스토니로 보고 싶어진 나머지

이렇게 전 기반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하하 일을 벌렸구나!!! EMH랑 AA는 꾸준히 봤는데도 아직 해석이 제대로 안 된건지 적응이 안되서 그런건지 영 쓰면서도 불안했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스토니는 사랑입니다. 마이 라이프루이너!

by 치우타 2014. 10. 1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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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피곤할 때면 무심코 나오는 버릇이었다.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격무에 시달리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피로는 충분히 다스릴 수 있었지만 그 토니 스타크조차도 수면부족을 이겨낼 순 없었다. 그것도 거의 일주일 가까이 하루 최소 세 시간 이상도 눈을 붙이지 못하면(게다가 그 중 반절은 악몽으로 설쳤다), 자기도 모르게 내려오는 무거운 눈꺼풀의 존재를 순간 순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 안 되지.


아직 어벤져스 정기 회의는 끝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토니의 옆자리에는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가 있었다. 평소에는 누구나가 스티브의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신경전을 벌이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스티브의 오른쪽 자리가 비어있었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회의 시간에 도착한 토니는 꿀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채 십분도 안 되어 그 행운에 대해 맹렬하게 후회하게 되었다. 


둘은 원래 비밀리에 연애 중이었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결국 멤버들이 알아차리는 바람에 거의 공공연한 커플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캡틴 아메리카의 팬보이들은 '니가 토니 스타크지만 회의 시간마저 옆자리에 앉을 순 없지' 하는 마음으로 절대 토니를 스티브 옆자리에 앉혀 주질 않았다. 마주보거나, 혹은 대각선, 때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은 적도 있었다. 토니는 눈에 띄게 아쉬워하며 농담을 날리곤 했지만 어차피 밤에는 스티브의 옆자리를 독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본심이었다.


이런게 승자의 여유지. 토니는 늘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다툼을 하는 멤버들을 비웃곤 했으나 오늘만큼은, 스티브의 옆자리가 너무 곤란했다. 악몽으로 잠을 설쳤다는 말이나 너무 바빠서 세 시간도 채 못잔다는 하소연 같은 건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수면부족으로 슬슬 퀭해지는 눈가와 자기도 모르게 조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스티브는 필시 무섭게 추궁해올 것이 분명했다. 토니는 가능하면 스티브에게 비밀을 만들거나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사람이 어디 그렇게 쉽게 바뀌던가. 습관이라는 게 무서운 거라는 말은 괜히 있는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토니는 어떻게든 잠을 쫓아내기 위해서 허벅지를 꼬집고 입 안쪽을 세게 깨물며 눈을 부릅뜨고 버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회의는 다행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토니의 의견이 필요한 사안이 아니었기에 그는 오직 잠을 쫓는데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늘이 무심하진 않았는지 드디어 눈꺼풀은 제 위치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대로 회의가 끝나고, 침대에 들어가서.. 짧은 대화를 나누고 쓰러져 잠들면 스티브도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었다. 토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벅지를 할퀴던 걸 그만두었다. 문득 옆에서 기척이 나더니 스티브가 토니의 손을 잡아왔다.


"그래, 이제 잠은 좀 깼나?"


나지막한 속삭임이 귓가를 타고 몸 안쪽까지 퍼졌다. 토니는 그 한 마디에, 정말로 잠이 확 깨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거의 뛰어오를 뻔한 토니를 누른 건 스티브였다. 


"쉬이... 진정하게. 곧 끝날 것 같거든. 요새 거의 못 잔게 틀림없지? 변명은 침대에서 들려주게나."


진중하고 달콤한 목소리에 토니는 그만 덫에 걸린 사냥감처럼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오늘밤은 죽었구나.



뒷이야기 : 스티브는 토니가 악몽을 꾸느라, 격무와 연구를 병행하느라 잠을 설치고 거의 못 잤다는 사실을 낱낱이 밝혀내고는 이틀 정도를 푹 잠만 잘 수 있도록 토니를 좋은 쪽으로 혹사시켰다고 한다. 경사로세 경사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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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시는 글로님 트윗을 보고 즉석 연성한 616 스토니입니다. 옮기고 보니까 분량이 꽤 되네요 와.....

글로님을 센터에 놓고 616 스토니를 스위치! 스위치!!!


by 치우타 2014. 9. 4.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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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소재 및 원작(?) : 마파코기

*스티브는 빌런이며, 싱글로 활동 중. 군인 출신인 탓인지 원칙을 벗어나는 자들과 범법자들에게 특히 무자비함.

방패가 주 무기. 악질적인 상대일 수록 가차없는 양상을 보임. 냥토니와는 어느 연구소에서 만났으며, 철창 안에 갖힌 토니를 어쩌다 보니 주워오게 됨. 토니는 15~16세 정도의 소년 모습이고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달고 있음.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쓸 생각이기 때문에 의식의 흐름일 수 있음.



1. 고양이는 박스를 좋아해


"토니, 안 돼. 너는 거기 못 들어가."

"-....."


토니는 두 손(토니는 손을 자주 앞발처럼 사용하곤 했다)을 박스에 넣은 채 왜 안되는데? 하고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스티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어쩐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식료품이 든 종이 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토니는 아직 말을 못하고 있었다. 안 하고 있는 건지, 정말 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겨우 같이 살기 시작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기에 토니가 먼저 액션을 취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스티브는 파닥이는 토니의 귀를 보며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 박스를 봐. 작잖아."

"......."

"그리고 넌 그것보다 훨씬 크고."

".....!"

"아니라는 표정 짓지 마. 못 믿겠으면 들어가서 앉아 보던가. 자."



제대로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 상대를 데리고 말로 설득하기보단 직접 겪는게 빠르겠지 하는 생각에 스티브는 토니를 번쩍 들어서 상자에 그대로 앉혔다. 놀란 토니는 귀를 세우고 스티브의 팔에 손톱을 세웠지만 간지럽지도 않았다. 과연 작은 종이박스는 토니가 들어가자마자 푹 하는 힘없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구겨지고 무너져 내렸다. 어때, 봤지? 못 들어간다니까. 스티브가 그거 보라는 듯 고개를 저었고, 토니의 표정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아니 잠깐만. 왜 울것 같은 얼굴인거야.



"토니."

"........."

"그렇게 박스가 좋아?"

".............."

"알았어, 다음엔 약간 큰 게 있는지 찾아볼게."

".....!"



스티브는 자기도 모르게 멋대로 말을 쏟아내고 있는 입술에 경악했지만 금세 토니가 기쁜 얼굴을 하며 살짝 웃어보이자 어쩐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예감이 안 좋군. 주워올 때부터도 그랬지만. 스티브는 눈치를 보면서도 슬금슬금 다가와 옷자락을 붙잡는 토니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아직 오지 않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by 치우타 2014. 8. 28. 23:53

 스티브는 긴장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서서 몇 번이고 옷을 가다듬었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자리는 아냐, 스티브. 지금 당신이 입은 옷도 정말 끝내준다고. 토니가 옆에서 진심을 담아 칭찬했지만 (평소 스티브의 옷차림에 까다로운 토니를 생각해 보면 이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아닐세, 넥타이가 좀 비뚤어진 것 같아, 정말 괜찮나? 여기가 자꾸 접혀. 자켓이 조금 끼는 것 같아. 머리가 어색하진 않나? 토니는 대체 왜 그가 이렇게 정성을 들여 단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기왕 같이 참석하는 파티 자리이고, 스티브는 토니의 경호원 역이지만 바로 옆에 서서 파트너를 겸할 예정이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둘의 교제를 인정하기엔 사회의 관심이 지나쳤기에, 토니가 스티브에게 연인으로서의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건 이런 자리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티브는 눈에 띄게 기뻐하며 수줍은 듯 미소지었고 토니는 그 미소에 사르르 녹아버렸다.


"스티브, 시간 거의 다 됐어."


"나도 이제... 다 된 것 같네. ....어떤가? 보기에 괜찮은가? 이상하진 않나?"


"흠, 어디 봐. 와우, 누구 애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잘생긴데다 섹시하기까지 한걸? 오늘 밤 시간 있어? 허니."


"장난 치지 마, 토니. 물론 자네를 위해서라면 내 시간은 언제나 비어 있네."


눈을 흘기면서도 다정하게 대답해오는 목소리에 토니는 목을 움츠렸다. 파티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처음 사귈때만 해도 군인 아니랄까봐 서툴고, 딱딱하고, 자기 생각에 많이 빠져 있는 느낌이었지만 이 70년 묵은 캡틴 아이스는 쉴드 해체 사건을 겪고 나서 몰라보게 달라졌다. 토니에게 자주 말을 걸었고, 최대한 그를 존중하려고 노력했으며, 토니가 버릇대로 비아냥거릴때도 한 발자국 물러서서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냥도 누가 채갈까 걱정되는 미국의 이상형인데, 이제는 세계의 이상형이 될 모양이지. 토니는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조용히 마음 속으로 불꽃을 이글이글 태워올렸다.


 토니와 스티브를 태운 차는 천천히 어느 저택 입구에 멈추어섰다. 이미 번호판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다니는 토니였기에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도 토니 스타크가 왔다면서 그를 보기 위해 문 근처로 몰려들었다. 먼저 스티브가 내리고, 바깥에서는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수근거리는 소리가 잇따랐다. 내 애인이 좀 끝내주기는 하지. 토니는 속으로 마음껏 으쓱거리며 이내 눈 앞으로 내밀어진 스티브의 손을 잡고 차 밖으로 내려섰다. 터지는 스포트라이트와, 토니! 스타크! 그를 연호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토니는 그 부름들에 환한 미소로 답하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스티브는 그 모습이 플래시보다 더 눈부시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망과 욕망의 시선으로 토니를 바라보고 있을 사람들 생각에 불쑥 심술이 솟아올랐다. 미안하지만 내 거라서. 스티브는 짐짓 카메라 불빛때문에 그런 양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토니의 손을 꽉 잡은 채 파티장으로 이끌었다.


"워, 스티비. 좀 천천히 걸어. 나 넘어지겠어."


"엄살 부리지 말게. 자네 걸음으로 들어왔다간 저 인파에 잡혀서 아무것도 안 돼."


"그야 늘상 있는 일-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당신밖에 안 보인다고."


내 눈부신 블론디 글래머가 세계 제일이거든. 토니가 눈을 찡긋하며 웃어보이자 스티브는 플레이보이 혀에는 기름칠이라도 했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내심 기분 좋은 눈치였다. 경호원 겸 파트너라고는 해도 이 파티의 주요 귀빈은 토니였기에 그를 앞세우고 스티브는 바로 뒤에 붙어서 넓은 홀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보며 토니에게 인사를 건넸고, 토니는 적당히 받아넘기거나 눈웃음으로 대신하며 오늘 초대장을 보낸 호스트에게 직접 축하 인사를 했다. 그 동안 사람들은 토니의 옆에 바짝 붙어있는 스티브를 힐끔거리면서 저마다 수군댔다. (잘 생겼다. 몸도 좋네. 경호원이라던데? 세상에, 그림 같은 남자들이야..) 청력이 남들에 비해 4배나 좋은 수퍼솔져인 그에게 들려오는 말들은 때론 노골적이고, 때론 무례했다. 토니는 매일 이런 말들을 들어왔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금세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지만, 인사를 빠르게 끝냈는지 어느새 토니가 샴페인 잔을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발코니로 나갈까? 내가 너무 여기 있으면 호스트가 외면당하거든. 스티브는 흔쾌히 승낙했다.


"저, 토니...."


"음? 왜 그래, 스티비."


"자네 기분은 어떤가?"


"내 기분? 그건 갑자기 왜?"


스티브는 의아한 듯 물어오는 토니의 목소리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듣고 있었던 그런, 저질적인 언사들을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미 오랫동안 이런 것들에 시달려왔을 그의 소중한 연인에게 굳이 중요하지도 않은 지껄임을 전해서 모처럼 괜찮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약간 허둥거렸으나 최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일 수 있었다.


"그냥, 한동안 이런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잖나. 내 부탁 때문에 오기도 했고, 그래서 혹시나...."


"스티비, 달링, 스티브. 싫었다면 당신의 부탁이라도 거절했을거야. 내 성격 알잖아?"


"...그건, 그렇네만..."


"솔직히 말해서 난 지금 정말 끝내주는 기분이야. 오늘 밤은, 당신이 옆에 있어서 그렇겠지만.. 정말 좋아."


"정말로?"


"그래.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당신이랑 파티에 나오고 싶을 정도로."


"내가 싫은데."


"푸흐, 그럴 줄 알았어. 인사는 다 했으니까 이것만 마시고 돌아가도 돼. 사실..."


아까부터 당신한테 키스하고 싶어 죽겠거든. 토니가 목소리를 낮추어 소근거렸다. 스티브는 흥분으로 몸이 확 치달아 오르는 걸 느끼며 손에 쥔 잔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가볍게 잔이 부딪치고, 옅은 황금색 액체가 두 사람의 목울대 너머로 사라졌다. 마지막 한 방울이 전부 넘어가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스티브는 토니를 품에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사람 없는 발코니이긴 했으나 언제 누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척이나 위험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토니 또한 스티브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입술을 되돌려 주었다. 평소의 능란한 테크닉이 아닌, 솜털같이 부드러운 입맞춤에 스티브는 간신히 이성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아쉬운 듯 토니를 품에서 떼어냈다.


"후우, 세상에... 어지러워, 스티비. 나 좀... 부축해줘. 이대로 나가면 핑계도 딱 좋겠어..."


"괜찮나, 토니? 내가 너무 갑자기, 키스하는 바람에..."


"세기의 플레이보이를 뭘로 보는 거야? 그냥 좀, 당신 샴페인에 취한 것 같아서 그래. 별 거 아니니까 빨리... 가자고."


하고 싶어.... 귓가에 속살대는 음성은 아까보다 한층 열에 들떠 있었다. 스티브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뭐든지 보통 사람의 4배라서 참 다행이었다) 그를 덮치려는 욕구를 눌러내리며 토니를 부축한 채 파티장을 나섰다. 이제 더 이상 천박한 말소리들은 그에게 들려오지 않았다. 눈 앞의 연인만이 오직 그의 관심사였다. 차 문이 닫히고, 프라이빗 창문이 올라가는 걸 확인한 토니는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키득 웃고는 상냥하고 섹시한 그의 연인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이제 해도 돼. 토니의 허락을 신호로 스티브는 기다렸다는 듯 시트를 조작해서 토니를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금발의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는 걸 감상하며, 토니는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Come on, soldier. let's play."


"What I always win, d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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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님이 원고를 하셔야 하는데.. 너무 힘들어하시고.... 전 뭔가 해드리고 싶고..!

해서 마감을 응원하는 연성입니다. 와인도 맛있고 노래도 좋고 해서 후딱 썼네요!! 하하 뭔가 더 있을것 같지만 없습니다

저도 이런거 해보고 싶었어.... 물론 이러다가 제풀에 낚여서 이어지는 어덜트 어쩌구를 쓸지도 모릅니다.

스토니는 왜 이렇게 좋을까요? 죽을 것 같습니다. 정말 좋다. 둘이 걍 콩깍지나 씌여서 평생 살았으면....

by 치우타 2014. 7. 10. 23:23

"토니! 잠깐, 여기 좀 와 보게." 


토니는 스티브의 황급한 목소리에 삼 초 정도 고민했으나, 이어지는 목소리에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할 시간에 일어나서 오면 되잖나, 빨리. 이번엔 또 뭔지, 요즘따라 현대문물을 열심히 배워가던 스티브는 궁금한 게 있으면 토니를 찾았고 듣다못한 토니는 '내가 바쁠 땐 자비스한테 말해, 허니, 라며 달래두었더랬다.


그런데 이렇게 찾는 걸 보면 또 뭔가 발견이라도 한 모양이지, 노친네. 토니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좀 더 서두르게, 이러다 지나가 버리겠어." 스티브가 급한 손길로 토니를 끌어당겼다. 


"대체 뭔데? 뭐길래 이렇게 난리를..." 


"저것 좀 보게나."


토니는 스티브의 성화에 귀찮은 얼굴을 하며 고개를 들어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석양이 깔린 하늘 위로, 얇은 구름과 그 위에 또 층층이 두꺼운 구름들이 쌓여 있었다. 과연, 이건 소리쳐 부를만한 광경이로군. 토니도 말을 잃고 스티브의 팔에 기대어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때, 멋지지 않은가?"

"....흠, 당신이 최근 날 불러댄 이유들 중에서 가장 괜찮은 것 같기는 해."


토니가 이죽거리며 가볍게 빈정댔다. 그 으스대는 모습이 또 귀여워서, 스티브는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예고없이 떨어지는 입술에 토니는 기다렸다는 듯 팔을 뻗어 스티브의 목에 감았다. 창 밖의 석양이 아쉬운 듯 두 사람의 그림자에 길게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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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 위에 구름이 층층이 쌓였다며 살다보면 별걸 다 본다고 멋지고 신기하다는 한량님 트윗을 보고 

불현듯 쓰고 싶어서 설렁탕 먹다 말고 부랴부랴 써내려간 트위터 단문연성. 

140자 기준으로 끊어서 쓰다 보니 아무래도 매끄러운 느낌이 덜하긴 하지만 고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스티브가 군인출신의 딱딱한 남자긴 해도 좋아하는 사람과 이것저것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다르지 않을것 같아서.

난 사실 스토니의 일상적인 모습이 좋더라. 특별하고 놀라운 사건도 좋지만. 평범하게 이쁘게 달달하게 연애하는 거.

투닥거리는 것도 좋고. 서로 오해하고 싸웠다가도 잠시 생각하고 돌아서서 상대방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거. 

by 치우타 2014. 7. 9. 22:05

 토니는 필사적으로 이게 무슨 상황인지에 대해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22세기를 사는 남자, 퓨처리스트, 세계적인 천재이자 조만장자인 그의 책상 위엔 어울리지 않은 서류더미가 몇 더미 쌓여 있었다.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침착하게 같은 물음을 머릿 속에 띄워 올리며 토니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쩌면 꿈이 아닐까. 몇 번 눈을 감았다 뜨면 아무것도 없을거야. 그렇고 말고. 하지만 눈을 아무리 깜박여도, 뺨을 꼬집어 봐도 서류더미는 도통 사라지질 않았다. 이 모든 게, 약 30분 전 타워의 쿨링 시스템이 원인모를 오작동을 일으켜 정지된 덕분이었다.


 타워는 100%에 가깝게 자비스를 메인으로 하여 디지털로 움직이는 장소였으며, 만일을 대비한 아날로그적 장치가 있다고는 해도 거의 쓰이질 않고 있었다. 시스템 업그레이드나 점검 등은 늘상 존재하는 해킹이나 기타 위협에 대비하여 매일같이, 시간대별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토니는 그걸 자비스를 통해 강박적으로 확인하곤 했다. 그러나, 설마 한창 후덥지근한 저녁날에 쿨링 시스템이 급작스레 멈춰버릴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딱, 그 프로그램만 말이다.


"자비스, 상태는?"


[여전히 오작동의 원인을 찾는 중입니다. 보안상 외부에 의한 수리는 불가능하므로 진단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은데?"


[지금 기준으로는 약 20시간 정도입니다.]


"맙소사! 그 동안 여기에서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쪄 죽을지도 모르겠어! 더 빨리는 안 돼?"


[저것도 단축된 시간입니다만, 진단 시스템의 속도를 높이면 다른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돌아버리겠군...."


토니는 아예 바닥에 널부러지듯 벌렁 누웠다. 내일까지 검토를 마쳐야 하는 서류가 쌓여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짜증스럽고 괴로운 마당에, 이젠 더위에 숨막혀서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천하의 토니 스타크가, 쿨링 시스템 고장으로 더위에 시달리다니! 모르긴 몰라도 타블로이드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상황임은 틀림없었다. 아까부터 울려대던 전화는 쓸데없는 열을 발산하기에 배터리를 분리해서 내던진 지 오래였고, 처음에 시원하던 소파는 점차 체온을 머금으며 끈적하고 기분 나쁜 느낌만이 남아서 결국 그나마 가장 시원한 바닥이 토니의 유일한 현 안식처였다.


"더워..... 선풍기 같은 건 여기 없다고..."


[Sir, 로저스 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응? 뭐? ....왠일이래? 열어줘."


토니는 여전히 시체처럼 널부러진 채로 손을 휘저었다. 이윽고 단정한 걸음걸이가 들려오더니, 토니의 근처에 우뚝 멈추었다. 기척으로 보아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토니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Hello, sunshine.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연락이라면 아까부터 계속 했었네. 전원이 꺼져 있다기에 찾아왔는데.. 지금 뭐 하는 건가?"


"자비스, 설명."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로저스. 약 한 시간 전부터 타워의 쿨링 시스템이 원인모를 오작동으로 멈추는 바람에 주인님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전화기의 배터리를 분리해서 내던진 것은 약 30분쯤 전이었습니다.]


"그런것까지 말 안해도 돼!"


"오작동? 어쩐지 공기가 후텁지근하다 했더니...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인 모양이군."


"나도 원래 안 이랬는데, 옛날 생각이 가끔 나거든. 그래서 더운 건 질색이야. 추운것도 별로긴 하지만."


"그럼 일어나게."


스티브는 그다지 망설이거나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손을 뻗어 토니를 일으켜 세웠다. 바닥과 거의 합체할 기세로 널부러져 있던 토니는 엉겁결에 뜨거운 스티브의 손을 잡고 웁스, 하며 몸을 움츠렸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일어나서, 그 다음은?"


"우리 집에 가지. 여기보단 훨씬 괜찮은 환경일거야."


"오... 그 말 후회하지 않아야 할 텐데, 허니."


"속고만 살았나? 빨리 오게. 저녁도 같이 해결하면 되겠군. 어서."

스티브는 토니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잠깐만, 나 옷 좀 입고. 아무리 내가 언론에 늘 노출되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이 모습으로 당신이랑 나가면 장난 아닐걸? 토니는 순순히 따라 걸어가면서도 뭐라 종알대었고, 스티브는 소파에 걸쳐져 있던 옷을 토니의 머리 위로 씌워주었다. 평소에 즐겨 입는 수수한 디자인의 셔츠였다. 이건 또 너무 막 입는 것 같은데. 꽁시랑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스티브는 토니를 재촉하듯 손을 끌어당겼고, 토니는 알았어 알았어 하고 못 이기는 척 그 뒤를 따랐다.



"맙소사..... 천국이 따로 없군..."


"내가 말했잖나."


스티브는 부드럽게 웃으며 천천히 토니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성인 남자 둘이 앉아도 넉넉한 소파 위에 다리를 쭉 편 채로, 토니는 스티브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실에는 쾌적하고 시원한 공기가 가득했다. 얼마 전 샘의 도움으로 신형 에어컨을 설치했었는데, 빠르게도 토니가 첫 시연의 주인공이 된 것이었다. 당신은 최고야, 스티브. 고양이가 기분 좋게 가르릉대듯이 토니의 목소리에도 나른함이 묻어나왔다. 별 거 아닌 칭찬인데도 괜시리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스티브는 입술을 내려 토니의 이마에 부볐다. 


정말이지, 심플한 천국이었다.

by 치우타 2014. 7. 8. 22:16


1. 

맹세컨대, 토니는 지금까지 누구와 사귀든 만나든 자든간에, 기념일이라는 걸 챙겨본 게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페퍼와 진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때도 페퍼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정도만 간신히 챙겼을 뿐, 그것도 자비스가 아니었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갔지도 모른다. 천재는 남들보다 통달한 대신 어떤 부분에서는 부족하다고 누가 그랬던 것도 같았다.


그런 토니가, 얼마 전 지나가던 요원들이 재잘거렸던 키스데이를 어떻게든 잘 보내기 위한 작전을 짰던 것이다.



"진짜로 안 들어올 거야?"

"아직 책을 다 못 읽었어. 자네가 수영하는 것만 봐도 시원하기도 하고..."

"오, 캡, 스티비. 설마 수영을 못하는 건 아니겠지."


토니는 놀리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물을 찰박거렸다. 어벤져스 타워 안에는 없는 시설이 없었고, 거기엔 수영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여기는 공용이 아니라 토니가 따로 만들어둔 전용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편의시설들 중 하나였다. 임무가 없어서 쉬던 스티브를 불러내어 함께 수영장까지 온 건 좋았지만 그는 읽지 못한 책이 있다며 토니를 먼저 물로 들여보내고 근처에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재미없기는. 요 며칠간 둘 다 바빠서 얼굴도 자주 못 본 참이었는데 스티브의 반응이 생각보다 냉담하여 토니는 내심 상처받고 있었다.


"수영은 할 줄 아네. 지금 한참 재미있는 부분을 읽고 있거든.."

"재미없어, 로저스. 그럴거면 왜 같이 왔어? 책이나 읽고 있을 것이지."

"같이 있고 싶으니까."


일부러 딱딱한 목소리로 사귀기 전의 호칭을 불렀지만 돌아온 대답이 토니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진심을 던져오니까 당해낼 재간이 없단 말이야. 토니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저만치 헤엄쳐갔다. 사실, 책에 열중하고 있는 스티브에게 물을 튀기거나, 다리를 잡아당겨서 물에 빠뜨릴 생각도 했지만 막상 진중한 얼굴이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럴 마음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해보는 장사인 것 같아. 토니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수영장 바닥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진심도, 잘생긴 얼굴도 좋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섭섭하고 쓸쓸한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에, 아예 바닥에 가라앉아서 혼자 있고 싶었다.


물 속은 조용했다. 숨을 천천히 내쉴 때마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공기방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토니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다음부터는 그냥 혼자 내려와야지. 키스데이라니, 웃기는 일이야. 그 때,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던 토니의 머리 위에서 어떤 외침 같은 것이 들려왔다. 토니! 토니? 토니!!!! 점차 절박해지는 목소리에 토니는 이크 싶은 마음에 천천히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토니!!!! 세상에, 맙소사. 대체 뭐 하고 있었나?"

"뭘 하다니, 당신은 책에 빠져 있고, 나는 할 일이 없으니까 생각이나 하려고 밑으로 내려갔었지. 그게 그렇게 큰일이야?"

"생각이나 하려고... 라니, 말이라도 하지 그랬나. 내가 얼마나......"


스티브는 말을 잇다 말고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목소리가 떨려서 나올 것만 같았다. 토니는 점점 굳어지는 스티브의 표정에 갑자기 쫄아들었다. 아니,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래? 자기가 먼저 날 내버려두고 책이나 읽고 있었으면서! 


"무사했다니 다행이야. 제발, 다음부터는 말이라도 해. 토니."

"오. 아니면 그 전에 찾으러 오던지. 잠수는 안 할테니까 마저 책 보셔, 캡틴."


토니는 손을 흔들고 다시 저 멀리로 헤엄쳤다. 아니, 정확히는 헤엄쳐 가려고 했다. 풍덩, 하는 소리와 갑자기 잡아채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트랙의 끝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놀라 돌아보자 거기엔 약간 화난 얼굴의 스티브가 있었다(상의만 탈의하고 바로 뛰어든 모양이었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찾으러 오라고 방금 그랬잖나. 멀리 가지 말게."

"어차피 당신 보이는 데에 있으려고 했어. 내가 초등-"


-학생도 아니고, 라고 하려던 말은 스티브의 입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토니는 뜨거운 혀가 침범해 들어와 치열을 훑고, 목덜미와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갈 때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다음에는 찰박이는 물 소리와, 급한 호흡 소리, 그리고 낮은 신음 소리만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었다.



2.

스티브는 토니와 사귀게 되면서 하고 싶었던 것과,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둘씩 해나가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허들이 높은 건 바로 '공공장소에서 데이트하기'였다. 스티브도 나름 얼굴이 알려지고 박물관까지 있는 유명인이었던데다가 토니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였다. 그런 두 사람이 같이 있는걸로도 모자라서 데이트라니, 가능할 리가 없었다. 둘 다 쫓기고 있던 시절마냥 후드를 뒤집어쓰고 안경을 쓰면 어느 정도는 커버될 수 있었겠지만 체격이나 스타일 때문에 들킬 가능성도 제법 높았다. 시작하기 전부터 좌절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스티브는 씁쓸하게 웃으며 센트럴 파크 공원을 한참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때 스티브의 시무룩해져있는 등을 토니의 손이 경쾌하게 두드렸다.


"스티비! 뭐 해? 나가야지."

"? 토니. 나가다니 무슨 소리인가?"

"무슨 소리긴, 이 양반이 무드없게. 데이트 하러 가자고. 데이트."


토니는 푸른 색 후드를 입고 모자를 깊게 뒤집어쓴 다음 짙은 선글라스를 낀 채 웃고 있었다. 


"당신도 얼른 저 옷으로 갈아입어. 좀 너드 같겠지만 못 알아보는게 중요하니까." 


스티브는 너드가 어떤 이미지인지 공부해서 알고 있었다. 토니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엔 청바지와 붉은색의 후드티, 야구 캡, 그리고 검은색 뿔테 안경이 있었다. 어쩐지 낯익은 아이템인데. 무심코 토니를 돌아보자 장난꾸러기처럼 웃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빨리 해, 더 늦어지면 아이스크림 트럭이 가 버릴걸. 


밤의 공원은 조용했다. 왁자지껄 뛰노는 아이들도, 그걸 지켜보며 웃는 부모도, 희망에 가득 찬 학생들도 없었다. 거기엔 장사를 마칠 채비를 하는 아이스크림 트럭과 몇몇의 어린 연인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노부부가 고요함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토니는 어색한 듯 머뭇거리는 스티브의 손을 덥석 붙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감 전에 맞춘 모양이네. 무슨 맛 먹고 싶어? 바닐라, 딸기, 초코."

"......바닐라가 좋겠네."

"오.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 그럼 나는 초코. 주인장, 닫기 전에 두 개만 줘요. 더블로."

"...토니 스타크...?"

"닮았단 소리 많이 듣죠. 워낙 잘 생겨서 말이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긴가민가 토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주인장에게 토니는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이렇게 입고 다닐 일도 없을 거 아뇨? 능청스러운 말투에 주인도 수긍했는지 아이스크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멍하니 토니의 현란한 손짓과,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게 표정에 드러나기라도 했는지, 토니가 선글라스를 내리며 시선을 맞춰왔다.


"헤이, 스티비. 정신 차려. 그러다 침 떨어지겠어."

"...어? 아.... ...그럴 일 없네. 크흠."
"내가 당신 소원 리스트 넘버 원을 성취해줘서 기쁜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넋을 놓진 마."

"뭐라고? 자네 설마 내 수첩을..."

"읽은 건 아냐. 짐작한거지. 매일 그렇게 공원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어대는데 모르면 그게 바보 아냐?"

"......토니."

"아, 너무 감동하지 마. 난 원래 이렇게 멋진 남자라고."


스티브가 하도 이름을 불러대는 통에 토니는 목소리 좀 낮추라고 타박을 주며 눈을 흘겼다. 아이스크림 다 됐습니다. 토니는 지폐 한장을 더 끼워주며 마지막 손님이니까 더 받으시라고 너스레를 떨고는 양 손에 콘을 들었다. 


"당신이 바닐라였지? 잠깐만... ....으음. 약간 담백한 맛이네."

"자네 걸 먹으면 되지 않나. 왜 굳이..."

"궁금하잖아. 억울하면 당신도 먹던지?"


토니는 바닐라를 스티브의 손에 건네며 짖궂게 웃었다. 혀로 초코 아이스크림을 핥아올리는 모양새가 제법 야릇했다. 거기에 선글라스 너머 감춰진 눈웃음까지, 거의 완벽하게 홀리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스티브는 침착하게 손 안의 아이스크림을 부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대신 그는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쪽을 택했다. 백전노장, 스티브 로저스 답게.


"그럼 사양않고 먹어보겠네."

"그래, 어차피 더블이니까 넉넉할걸?"


토니의 붉은 혀가 다시 아이스크림을 낼름 핥았고, 스티브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걸어들어가고 있던 곳은 마침 사람이 없는 공원의 안쪽이었다. 앗 하고 놀랄 틈도 없이 부드럽지만 거칠게 덮어오는 입술에 토니는 그만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철퍽,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초코 아이스크림은 바닐라보다 더 달콤하고, 진했고, 끝맛이 오래 남았다. 스티브는 손 안의 바닐라가 조금 녹아서 흐를 때까지, 토니가 숨 막힌다며 끙끙거리고 밀어낼 때까지 그 맛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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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틀이나 지났지만 키스데이 연성을 하고 싶었습니다.....

원래는 귀엽고 발랄 / 유치하고 약간 섹시 한 느낌으로 쓰려고 했는데 그런거 없어...

둘의 공통 주제는 제목에도 썼듯이 토니의 완패 ㅋㅋㅋㅋㅋ 스티브가 리드하는 것도 좋더라구요. 

숲솔의 진심에 당황하고 쩔쩔매는 조만장자가 귀엽습니다. 둘 다 오래오래 행복하락우 유 라이프루이너(멱살



by 치우타 2014. 6. 16.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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