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가 끝나고 난 후, 스티브는 사후처리를 위해 먼저 맨션으로 돌아가려는 토니를 붙들었다. 아이언맨의 아머 헤드가 찰칵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스티브? 무슨 일이야?" 전투로 인한 약간의 흥분과 피로감이 남아있는 푸른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갑작스럽게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어떤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침착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나? 잠깐이면 되네."
"어.. 잠깐만. ....음, 괜찮을 것 같아. 이 일로 스케줄이 붕 떴거든."
"그렇다면 자네 층에서 만나지. 내가 올라갈테니."
어딘가 안도한 듯 부드럽게 미소짓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것만 같았다. 어벤져스의 리더로서가 아닌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을 보는 것은 아직도 그에게 처음과 같은 설레임을 안기곤 했다. 특히 이렇게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서는 더더욱.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뭔가 심각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토니는 잠깐 머리를 굴렸지만 어차피 상대가 상대인 만큼 고민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알았어. 이따 봐, 스티브." 가볍게 눈인사를 남기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토니의 뒷모습을 보며 스티브는 헤드기어를 벗었다. 땀에 젖은 금발이 옆으로 흩어졌다. 뒷정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야겠군. 그는 현장 요원들에게 여러 가지 사항을 지시한 다음 서둘러 맨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토니는 맨션에 돌아와 처리해야 할 일들을 끝내고 가볍게 한숨을 토하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오전부터 회의에 오찬, 그리고 빌런소탕, 서류 결제와 피해에 대한 복구대책. 늘상 이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처리하고 있었지만 유달리 피로감이 몸을 덮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요새 운동을 덜 해서 그런가? 뒷목을 주무르며 근처의 생수병에 손을 뻗는 순간, 방문 너머 플로어의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왔다. 누군가 방문했다는 뜻이었다. 이 시간에? 토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아홉시 반. 고개를 갸웃하는 토니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금발이었다. 스티브.
"미안하네, 조금 시간이 걸려버렸군. 기다렸나?"
"아니, 아니.. 실은 일을 하느라 당신이 언제쯤 올지도 생각 못하고 있었어. 들어와."
토니는 그답지 않게 살짝 허둥거리며 스티브를 미니 바로 안내했다. 뭐라도 마시겠어? 토니의 권유에 스티브는 시원한 물이면 된다고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오늘따라 왜 저러지. 토니는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차가운 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스티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마냥 단숨에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 크게 숨을 내쉬었다.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토니는 괜히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전의 그건가? 아니면 일루미나티? 아니면 최근 회사의 캠페인이 문제인가? 리드와의 연구? 짚이는 것도 예상되는 것도 너무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토니는 새삼 자신이 어떤 인간이라는 걸 상기하며 쓴웃음을 목구멍 너머로 감추었다.
"토니."
"음?"
"사실 자네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어. 겁줄 생각도 없었고. 그런데 벌써 실패한 것 같군."
"그게 무슨 소리야."
"긴장하고 있잖나, 그렇게 등을 꼿꼿이 세우고."
스티브의 지적에 토니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괜히 수염을 매만졌다. "그게 그렇게 티가 났어?" 스티브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얼마 동안이나 알아온 사이인지 자네가 더 잘 알잖나." 그리고 보통 그럴 땐 자네가 나한테 숨기는 것이 있을 때지. 여상하게 덧붙여온 뒷말에 토니는 마시던 물을 뿜을 뻔 했다. 맙소사, 스티브! 토니가 가볍게 타박을 주자 스티브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인 모양이군." 자포자기한 얼굴의 토니가 양 손을 들어올리며 항복의 제스쳐를 취했다.
"좋아, 캡틴 스티브. 무슨 일인지 이제 제대로 말해주지 않겠어? 내 자백이 먼저여야 하나?"
"아니, 내 고백이 먼저니 기다리게."
"......하아?"
토니는 입을 쩍 벌리며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품위없게, 토니 스타크가 완전히 허를 찔린 표정으로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있었다. 스티브는 그 모양새에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손을 내밀어 토니와 맞잡았다. 토니는 그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펄쩍 뛰어오를 것 처럼 움찔대었지만 다행히 잡은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내가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그래도 좋네,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린 많이 다르고 자주 충돌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또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그게 조금은 달라졌으면 좋겠네. 적어도 둘이 있을 때에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아니라... 스티브 그랜트 로저스와 앤서니 에드워드 스타크로. 다른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같이 잠들고 싶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네가 필요해. 자네를 원해, 토니. 어떤 것보다 더. ......내 고백을 받아 주겠나?"
스티브는 평소와 달리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열정적이고 뜨겁게 마음을 토해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그의 친우, 토니 스타크라는 사내는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볼 수 있지만 유달리 스티브에게만큼은 중요한 순간에 벽을 세우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다. 자신의 마음이 결코 순간적인 충동이 아님을 알아주길 원했다. 또한 토니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기를, 만일 아니라면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것 정도는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오랜 전략가로서의 본능은 토니가 그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반쯤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티브는 숙고 끝에 시도했고, 이제 남은 것은 판결 뿐이었다. 예스인가, 노인가.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고 스티브는 손 끝에 닿아있는 체온이 부디 자신의 편이기를 빌며 신실한 눈빛으로 토니를 바라보았다.
"......스티브."
"그래, 토니."
"내 뺨을 한 번만 때려주지 않겠나?"
"뭐?"
"너무 세게는 말고. 내일 인터뷰가 있거든. 살살, 그래도 현실이라는 건 알 수 있게-"
횡설수설하는 토니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본 스티브는 말 없이 팔을 잡아당겨 토니를 품에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훅 끼쳐왔다. 토니, 꿈이 아니야. 잘 들어 보게. 스티브는 토니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가슴께에 가져다 대었다. 두근 두근, 자신과 거의 비슷한 박동으로 뛰는 심장 고동이 손 끝에서부터 온 몸으로 전해졌다. 토니는 뭔가 울컥하니 차오르는 걸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스티브의 등을 마주 안았다. 넓고 탄탄한 근육이 기쁘게 닿아왔다.
"Yes, Steve... yes."
토니가 거의 헐떡이듯 중얼거렸다. 내가 그 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어? 당신을 상대로. 스티브는 고백하기 전의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토니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약간 거칠어진 입술에 망설임 없이 키스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 너머로 뉴욕의 아름다운 야경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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