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스티브와 토니는 실로 오랜만에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거의 2주 만의 일이었다. 스티브는 새로운 어벤져스를 훈련시키느라, 토니는 소코비아 사태가 끝난 뒤 남은 일거리를 수습하고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또한 해명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본의 아니게 떨어져 있어야 했던 연인들은 문자와 화상 통화로 아쉬움을 달래며 서로를 그리워해야 했다.
스티브, 일 끝났어? 나도 이제 퇴근이야.
얼굴이 많이 상했군.
괜찮아, 그래도 밥은 잘 먹어. 당신이야말로 눈 밑이 시커매.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고등학생마냥 키득거리면서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었다. 누가 보면 스타크가 어디 외국에라도 나가 있는 줄 알겠네. 헤죽거리는 스티브 옆을 지나가며 나타샤가 조금 가시돋힌 말을 던졌다. 스티브는 그녀의 심술에 놀라지도 않고 도리어 엽서 하나를 내밀었다. "토니가 전해주라더군. 배너가 쉴드 주소는 못 외웠대." 누가 봐도 관광지에서 팔고 있다는 게 엄청 티 나는 디자인이었지만 나타샤는 눈썹을 움찔거리며 받아들고 쌩하니 사라졌다. (이후 그녀는 스티브의 눈꼴신 연애에 대해 그닥 말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 겨우 맞이한, 그것도 희귀한 바깥 데이트였건만.
"이렇게 비가 올 줄 누가 알았겠어."
토니가 투덜거리며 차양 안쪽으로 몸을 붙였다. 스티브는 토니가 젖을세라 조금 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삼십 분쯤 전에 두 사람은 스티브가 좋아하는 작은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근처를 산책하던 참이었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면서 손을 잡고, 누가 볼세라 후드며 선글라스를 잔뜩 뒤집어쓴 채 스티브와 토니는 설레는 마음으로 보통의 연인들처럼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걸었다. 새로운 감각이었다. 언제고 한 번은 이러고 싶었어. 낮게 중얼거리는 스티브의 목소리에 토니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 영감 귀여운 데가 있는 줄은 진작에 알았지. 장난기 섞인 말투였지만 거기에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 있음을 스티브는 알았다. 재빨리 토니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가 뗀 스티브 덕분에 토니는 바보처럼 입을 쩍 벌렸다가 황급히 닫았다. 그러던 그들의 머리 위에 툭, 투둑 하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채 오 분도 되기 전에 세찬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기서 타워까지.. 얼마나 걸리나?"
"음, 우린 지금 걷고 있으니까. 한 25분 정도? 뛰면.. 당신 기준으로 10분. 나는 17분쯤일지도."
"내가 안고 뛰면?"
"워, 난 대답 안 할거야. 비 오는 거리를 그 스피드로 날 안고 뛰면 어떻게 되겠어? 누군가한테 찍힐걸. 타워랑 같이."
".....아. 그래도 지금은 어두워서-"
"요즘엔 별 게 다 보정되는 시대야. 천천히 걸어가면 모를까, 아니면 같이 뛰던지."
어차피 뛴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맞는 비의 양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 생쥐꼴이 되겠지만. 토니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잠시 둘러본 주위엔 비 때문인지 사람들이 적어진 느낌이었다. 스티브는 토니에게 후드를 더 단단히 씌웠다. 왜 그래? 비장한 얼굴인데. 토니가 스티브를 올려다 보았다.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같이 타워까지 뛰어가지."
"뭐? 이 빗속을 뚫고?"
"기다리는 것 보다 빠를 것 같거든. 그리고.."
돌아가서 같이 샤워하고 싶군. 스티브는 일부러 입술을 토니의 귀에 바짝 붙이고 나지막히 속삭였다. 토니가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씩 웃었다. 섹시한 제안은 언제고 대환영이야.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대로 손을 잡고 비가 쏟아지는 거리에 나섰다. 토니는 이게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고, 스티브는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타워에 돌아가면 샤워를 하고 토니와 함께 그 영화를 봐야지.
비 오는 뉴욕의 밤거리 사이로, 두 남자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한 데 섞이어 공기를 가로질렀다.
*스티브가 생각한 영화는 Singing in the rain. 진 켈리가 집으로 돌아가며 부르는 노래를 떠올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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