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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의 아침 일과인 운동을 끝내고 나온 스티브는 최근 한 번도 울리지 않은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서투르게 날짜를 확인해보니 오늘은 수요일- 지난 일주일동안 그가 손꼽아 기다리던 바로 그 날이었다. 지금이 몇 시지? 같은 화면에 떠 있는 숫자는 7:30. 겨우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스티브는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뛰쳐나갔다.
"남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해야 하는 상황이 제일 싫어..."
"그만 불평해요, 토니. 엎질러진 물이잖아요."
"내 일만 해도 모자랄 판에 수습이나 하고 있어야 되니까 그렇지. 재능낭비, 시간낭비야."
스티브 보고 싶다.... 이젠 거의 주문처럼 튀어나오는 토니의 말에 페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2주 가량이 지났고 토니는 그때 보낸 몇 시간의 휴식의 배는 더 일하고 있었다. 단순히 쉬었기 때문에 일이 많아진 게 아니라, 잘못을 거짓으로 덮어 만회하려던 어느 간부의 행적이 최근에서야 완전히 드러나는 바람에 최고경영자인 페퍼와 이젠 뒤로 물러난 토니가 덤터기를 쓰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제까지의 책임을 물어 즉시 해고된것은 물론 그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고소까지 겹쳐서 인생이 몰락할 지경에 처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좀 불쌍하긴 했지만 그가 저지른 일의 뒷처리 때문에 스티브와의 저녁식사를 취소해야 했던 토니로서는, 이것보다 더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누가 알아요, 그러다 좋은 일이 생길지."
"이 상황에서 좋은일이란, 페퍼. 남은 스케줄이 취소되거나 하는 거 말곤 없을걸."
페퍼와 대화하는 와중에도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눈으로는 화면을 쫓던 토니가 어깨를 잠시 으쓱여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단정을 비웃는 것처럼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둘의 시선이 모두 문쪽으로 향했다. 들어오세요. 페퍼의 대답에 나무로 된 고급 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렸다.
"......스티브...?"
"좋은 아침, 토니."
누구든 한 번쯤은 돌아볼 정도로 잘 생긴 얼굴에다 금발에 푸른 눈이라는 완벽한 조건마저 갖추고 있지만 한 사람 외엔 시선도 거의 주질 않는 신실한 남자- 스티브 로저스가 수줍은 듯 노란 후리지아 꽃다발을 든 채 서 있었다. 막 체육관에서 달려온 것이 역력한 가벼운 옷차림이었지만 그게 그의 매력을 가리거나 흐리게 할 수는 없었다. 멍한 얼굴로 잠시 작업을 멈춘 토니를 내버려두고 페퍼가 스티브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린 토니는 데이터를 처리하던 손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포츠 양에게 자네의 스케줄을 물어봤네. 급히 변경되는 일정까지는 자비스가 확인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침 오늘은 회의 시작 전에 10분 정도는 시간이 있다기에 만나러 왔지."
"...내가 이번주 내내 연락 못한건 말야, 워낙 바빴어서..."
"알고 있네. 지금도 무척 바쁘다는 것도 알아. 그래서 내가 왔어, 너무 보고싶어서."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진납세를 시전하려는 토니의 말을 가로막으며 스티브는 다시 미소지었다. 토니는 원래 바쁜 사람이었고, 그건 사귀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너무 일상적인 것이었기에 토니는 굳이 스티브에게 바쁘다는 말을 하진 않았고 거기에 대해 스티브도 지적하거나 자주 언급하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직접 바쁘다고 말하고 있었고(손을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좋은 증거였다), 책상엔 서류가 잔뜩 쌓여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토니는 고개를 들어 스티브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무리 눈을 맞추는 것이 대화의 기본이라고는 해도 토니는 필요하다면 화면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스티브는 그래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고, 허세투성이에, 어디서든 매력만점이라 불안한 그의 연인이었지만 이런 사소한 행동들에 토니의 진심이 담겨있음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꽃은 바로 꽃병에 꽂기만 하면 되도록 미리 손질해달라고 했네. 자네 책상에 두었으면 좋겠어. 벌써 시간이 없으니 아쉽지만 이만 돌아가야겠군. 그럼... 토니, 오늘도 수고하게."
어느새 코 앞에 다가온 스티브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고개를 내려 약간 거칠어진 토니의 입술에 쪼듯이 입맞추고는 물러났다. 그의 넓고 든든한 등이 문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토니는 멍청한 얼굴로 앉아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눈부신 금발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다음에야 그는 책상 위로 푹 무너졌다. 스티브 로저스와 사귀면서 얻을 수 있는 것. 급작스레 없던 기운이 솟아나는 걸 느끼며, 토니는 바른 자세로 고쳐 앉았다.
연인으로부터의 꽃과 키스, 토니 스타크의 피로를 단숨에 날려버린 것은 아주 단순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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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한량님이랑 기운내 보아요 하다가 생각나서 잽싸게 연성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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