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믿어주지 않겠지만 토니, 난 사실 자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스티브는 다시 연필로 문장 위에 줄을 직직 그으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벌써 이걸로 몇 번째의 편지가 버려진 건지 세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말로 해보면 쉽게 튀어나오는데, 이상하게도 편지로 옮기는 순간 달콤하고 솔직한 말은 자취를 감춰버리고 남는 것은 어색한 표현과 초등학생 수준의 문장 뿐이었다. 전쟁 전에는 오히려 이것보다 더 나은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스티브는 머리를 헝클어트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면 상대가 나빠서- 아니, 너무 훌륭해서 상대적으로 뭘 하든지간에 형편없어 보이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지금 스티브가 낑낑대며 쓰고 있는 연서의 수신자란, 바로 그 토니 스타크였으니까.
"헤이, 캡! 그렇게 넋 놓고 다니다간 누가 지갑을 슬쩍해가도 모르겠어. 과연 누가 간 크게 당신을 건드릴진 모르겠지만."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무심코 돌아보니 장난기 어린 그린 헤이즐넛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하마터면 너무 놀라 이상한 소리를 낼 뻔 했지만 간신히 목 뒤로 눌러 참으며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되돌렸다. 오랜만이네, 토니. 그러면 토니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당신 요새 날 이름으로 부르네. 싫다는 게 아니야, 그냥 좀 묘한 느낌이라서. 하는 말을 던지고는 손을 흔들면서 먼저 회의실 쪽으로 걸어가 버리곤 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도 약간 대화 내용은 달랐지만 패턴은 거의 동일했다. 그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난 후에는, 그런 감정을 가지기 전의 자신이 토니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고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도통 기억나질 않아 스티브는 한참을 쩔쩔매었다.
이 마음을 전달할지 말지에 대해서도 정말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70년 후 외따로 뚝 떨어진 시대를 벗어난 남자(Man out of the time)였고, 영웅이지만 가진 게 없는 초라한 청년이었기에 현대의 아이콘과도 같은 토니 스타크를 사랑하게 되고부터는 이러한 감정마저도 몰염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고, 사랑에 빠진 상대의 소문이나 과거가 그 아무리 복잡하다곤 해도 매일 아침 새로운 기분으로 자신을 일깨워주는 사람에게 호감 이외의 다른 것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기에 스티브는 계속 토니를 좋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고민한 지 어언 세 달째, 앓느니 죽겠다는 심정으로 스티브는 자신의 모든 진심을 담은 편지를 쓰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언젠가는 틀림없이 자네도 날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네. 물론 지금은 어림없는 소리 말라면서 웃어 넘기거나,
날 정신나간 노친네 취급을 하며 놀릴 것 같지만... 토니. 자네도 머지 않아 이런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게 될 걸세.]
스티브는 연필을 멈추었다. 뭐라고 써내려가도 유치하고 느끼하기만 해서 되는 대로 손을 움직이고 있었으나 썩 마음에 드는 문장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약간 문제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적고 보니 불안감이나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들이 싹 걷혀가는 기분이 들었다. 스티브는 그대로 조금 더 몇 줄을 추가하고는 소중하게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겉에는 스티브 로저스로부터, 토니 스타크에게. 그 짧은 두 마디 이외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설레이는 마음을 감추지 않은 채,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여담 : 토니는 후에 스티브와 사귀게 된 다음 편지를 다시 읽어봤는데, 처음 읽었을 때는 기가 막혔어도 꽤 로맨틱하게 보였는데 이제 보니 나를 문장으로 낚으려는 수작이었다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티브에게 입술을 막히는 바람에 더 이상 불평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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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나의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 노래를 소재로 주신 레밤님을 위해 쓴 글입니다.
노래 줄창 틀어놓고 의식의 흐름으로 썼는데.... 어떨지는 잘 모르겠네요 으아앙 ㅇ<-<
전 스티브가 자기 상황 재면서 토니가 오히려 자신에게 과분한 상대라고 생각하는게 참 좋더라구요. 취향이 나옵니다.
이렇게 약간 뻔뻔한 구석도 좋고 안절부절하는 캡이 참 좋다고 합니다. 거기 홀라당 넘어가는 토니도 무척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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