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네가 해봐."


에릭은 충동적으로 내뱉았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에도 물론 스크래치가 생겼지만, 그보다는 묘한 오기가 생겼다는 쪽이 더 맞았다. 환자건 가족이건, 가벼운 관계건간에 누군가를 상대할 때 감정적으로 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찰스를 앞에 두고 있을 때는 그런 것을 잊어버리곤 했다. 찰스는 잠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윽고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괜찮겠어요?"
"뭐가."
"나, 키스 끝내주게 잘 하는데."
"그래서?"
"키스하면 섹스 생각이 날 것 같아서요."


자신만만한 어투로 말하며 생글생글 웃는 찰스를 보고 에릭은 마음 속 어딘가의 스위치가 탁, 하고 소리를 내며 켜지는 것을 들었다.  그의 눈빛이 아주 잠깐동안 형형하게 빛났다.


"해봐. 할 수 있으면."
"난 분명 말했어요."
"잔말 말고 해, 컨설턴트 씨."


에릭이 픽 웃으며 도발하듯 던지자 찰스는 천천히 에릭의 뺨을 양 손으로 감쌌다.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 눈동자에 잠시 넋을 잃은 사이에 색이 선명한 입술이 겹쳐져 왔다. 말캉한 혀가 느릿하게 입술을 쓰다듬고, 달래듯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치열을 핥다가 윗잇몸을 쓱 쓸자 에릭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그 틈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찰스의 혀가 파고들어와 천정을 더듬고, 아래로 내려와 에릭의 혀를 슬슬 건드리더니 그대로 끌어당겨 깊게 빨아들였다. 순간 에릭은 등줄기에 찌릿한 감각이 내달리는 걸 느꼈다. 

이게 키스라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런 식의 키스를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이나 낯설고 생소했다. 그렇지만 얽었던 혀를 당겼다가 풀었다가 하며 입 안의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요망한 움직임에 이쪽이 애가 탈 지경이었다. 결국 에릭이 찰스를 쫓아가 확 빨아들이며 깊게 얽혔다. 어느새 둘은 바짝 밀착해서 끌어안은 상태였고, 에릭은 정신없이 찰스와 키스를 나누며 온 몸에 기분 좋은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특히 하반신 쪽이 슬슬 위험한 느낌으로 달아올라서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쳤군, 키스 하나로 이렇게 흥분하다니.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끈적하게 붙어있던 둘은 찰스가 먼저 입술을 뗌으로서 간신히 기나긴 키스를 끝냈다. 가볍게 숨을 헐떡이던 찰스의 눈썹이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거봐요, 내 말이.... 맞죠?"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둘 다 침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거기다 에릭은 찰스 위에 올라타서 당장이라도 뭔가를 시작할 기세였다. 언제 이렇게 된 거지. 에릭은 혼란에 빠졌다. 찰스는 멍한 얼굴로 패닉 상태가 된 에릭을 보며 픽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내 키스가 끝내준다는 걸 확인도 했으니까 이제 키스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면 좋겠네요."


그대로 침대에서 빠져나가려는 찰스의 어깨를 갑자기 에릭이 꾹 잡아 눌렀다. 찰스는 돌발상황에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여전히 태평한 말투로 툭 내뱉았다.


"음, 에릭. 지금 뭐하는 거죠?"
"뭘 하는 것 같아?"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반칙인데."
"답을 뻔히 알면서 물어보는 것도 마찬가지지."


에릭의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올려다본 옅은 회청색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찰스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그 시선에 허리 부근이 찌르르하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기 때문에 흐트러지거나 흥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 기분이 좋았지만, 스트레이트에 가까운 에릭이(정보에 의하면)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욕정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던 탓이었다.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모양이야. 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의 힘을 뺐다. 말없이 긍정의 사인을 보낸 찰스의 행동을 보고 에릭은 이를 드러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키스가 시작되었다.



by 치우타 2011. 11. 28.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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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스릴러물이었다. 심리적인 긴장감과, 추리, 범인의 역습과 주연 인물들의 아슬아슬한 대처 등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다. 이건 꽤 괜찮네. 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가 끝난 후 저녁식사는 분위기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고 둘은 와인을 곁들여서 적당히 기분 좋게 마셨다. 에릭은 와인을 마시며 뺨이 발갛게 상기되는 찰스를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내려와 밤이 찾아온 다음부터, 에릭의 눈에는 찰스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첫 만남이 원나잇이었던 만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거기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술기운을 즐기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지 찰스는 꽤 조용했고, 그 덕분에 에릭은 운전하면서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그의 흰 피부나 붉은 입술을 힐끔거렸다. 에릭의 아파트에 도착해서 카드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찰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와, 의사라 그런지 남자가 혼자 사는 집 치고는 무척 깨ㄲ...히익!"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찰스가 깜짝 놀라 신음을 울렸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에, 에릭?"


찰스는 꽤 당황하고 말았다. 이걸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설마 아침에 보자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건 아니겠지.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에릭의 손이 셔츠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맙소사, 그런 모양이군. 그를 말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찰스는 금세 목 부근을 헤치고 이를 세우는 에릭의 팔을 일단 꾹 붙잡았다.


"잠깐요, 에릭. 일단 나 할 말이 있어요."
"....무슨 말."
"오늘의 컨설팅은 아까 저녁식사까지로 하죠."


약간 모호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에릭은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낮게 속삭였다.


"철저하군." 
"난 공과 사는 제대로 구분하자는 주의라서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득거린 두 사람은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내일은 일요일이었고, 거기다 찰스는 자고 가는 게 확정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에릭은 거의 작정한 사람처럼 찰스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첫 만남 때 혼자 아침에 눈떴던 경험은, 솔직히 말하자면 상당히 별로였던 데다가 낮의 자신만만하고 활달하던 컨설턴트가 침대 위에서는 이렇게 자신에게 매달려서 울고 애원하고 있다는 갭에 묘한 쾌감도 느끼고 있었다. 대신 오늘 에릭은 착실하게 콘돔을 사용했다(찰스는 집에 대체 몇 개를 놓아두고 있느냐며 혀를 내둘렀다). 새벽까지 이어지던 섹스는 여섯번째인가 일곱번째에 찰스가 절정을 맞고 그대로 기절함으로써 겨우 끝이 났다. 에릭은 다 쓴 콘돔을 쓰레기통 쪽으로 휙 내던지고는 정신을 잃은 찰스를 품에 끌어당겨 안고 자신도 잠을 청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이렇게 안고 자는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애매하게 깜박이는 정신 속에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가 금방 가라앉았다.


다음날 먼저 눈을 뜬 건 찰스 쪽이었다. 온 몸이 뻐근한 감각과 함께 햇살이 피부로 닿아오는 걸 느끼며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자, 눈 앞에는 마른 근육으로 탄탄하게 짜여진 에릭의 가슴이 있었다. 그걸 보며 찰스는 멍하니 지난밤을 회상했다. 기억이 끊어진 것 같은데. 지난 수요일에 했던 섹스보다 더 끝내주는 몸 상태가 됐겠군. 살짝 다리를 움직이자 허벅지에서 허리까지 묵직한 통증이 내달렸고 찰스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딱 죽을 맛이네. 컨설팅은 정신력으로 버텨야겠는걸. 일단 씻어야 될 것 같아서 에릭의 팔을 풀기 위해 꿈지럭거리는데, 더 꽉 끌어당겨지는 걸 느끼며 찰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가."
"샤워하러요."
"가는 게 아니고?"
"에릭. 난 여기 컨설팅을 위해 남은 거에요. 어제 섹스랑은 상관없이."


찰스가 달래듯이 말하자 에릭은 그제서야 순순히 팔을 풀어주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통증을 호소하는 허리 때문에 몇번이고 미끄러질 뻔 했지만, 어떻게든 욕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따뜻한 물을 맞으며 찰스는 에릭의 방금 전 행동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런 건 애인한테나 하는 행동인데 왜 나한테 한 걸까. 그냥 그러고 싶었나? 아니면 전에 먼저 갔다고 삐졌다던가. 찰스는 불퉁한 표정을 짓는 에릭의 얼굴을 상상하며 큭큭거리고 웃었다. 그런데 팔 힘은 진짜 세긴 하더라. 괜히 가슴이 설렐 정도였... 미쳤어 찰스 자비에. 정신차리시지. 찰스는 붉어진 뺨을 때려가며 물을 차가운 걸로 바꿨다. 앗 차거! 샤워실 내에 그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얼굴이 왜 그래?"
"....그냥 좀 부딪쳐서 그래요."
"어디 봐봐."
"됐으니까 샤워하고 나와요. 부엌 좀 써도 되죠?"
"어지르지 말고."
"누가 애인줄 아나 참..."


에릭이 샤워하는 동안 찰스는 베이컨을 굽고, 따끈한 오믈렛을 만든 다음 바삭한 토스트를 구워냈다. 늘 바쁘고 귀찮다는 핑계로 대충 먹거나 레토르트 식품을 애용하던 에릭으로서는 무척이나 감동적인 아침 식사였다(그런 사람 집에 식료품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네요, 라고 찰스가 중얼거렸다). 밥을 다 먹고 난 다음 찰스는 에릭에게 양해를 구하고 옷장을 활짝 열어서 체크했다.


"오.... 에릭.........."
"왜?"
"이건, 정말... 그러니까...... 이게..."
"말을 해."
"정말 당신 옷장.... 맞죠? 아버지 거라던가 할아버지 거라던가.....?"
"여긴 내 집이야."
"...........For god's sake..."


어정쩡한 중년 아저씨의 옷장도 이것보다는 나을지도 몰라. 찰스는 머리를 감싸쥐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양복이 제일 봐줄만한 거였다니, 맙소사. 신이시여.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연극을 하듯이 과장된 어투로 마음 속으로만 그런 말을 외치던 찰스는 비장한 얼굴을 하고 돌아서서 에릭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거야. 무섭게."
"에릭. 나랑 당장 나가요."
"뭐?"
"나가자구요. 안 되겠어, 이건 너무 심각해요. 그리고 이 옷들.. 아니다. 일단 쇼핑부터. 옷 입어요, 지금 당장. 차키도 들고."
by 치우타 2011. 11. 24. 01:00


에릭의 차에 올라탄 두 사람은, 아니 정확히 에릭은 운전대를 잡고 시동을 걸어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전에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디로 가지?" 찰스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데이트의 주도권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거에요, 에릭."  "...좋아."  별로 생각해둔 곳은 없었지만 인스턴트적인 관계를 가지던 이들과 가던 장소들 중 몇 군데는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에릭은 운전을 하면서 조수석에 앉은 찰스를 조금씩 힐끔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밤에 봤을 때와 밝은 낮에 보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옷차림도 그렇지만 눈빛이나 말투가 확연히 차이가 나고 있었다. 바에서 만났을 당시에는 좀 더 유혹적이면서도 대담하고, 상대를 끌어당기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차분하면서도 쾌활하고, 예의바른 분위기였다. 잘 배우고 자란 도련님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슨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 같군. 낮에는 젠틀, 밤엔 섹시라니.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피식 웃고 있는 동안, 그걸 보던 찰스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좀 실례해도 되죠?"
".....밑도끝도없이 무슨 소리야."
"셔츠가 답답해서요."


에릭은 그제서야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찰스의 드레스 셔츠를 힐끗 바라보았다. 전에는 오픈형이었지. 그와 동시에 희고 유려한 선을 가진 목덜미가 떠올라 에릭은 재빨리 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좋을대로."


에릭의 허락(?) 이 떨어지자 찰스는 반색을 하더니 단추를 하나만 풀러내리고 큰 숨을 탁 토해냈다. "아, 이제야 살겠네..." 그 말을 듣고 에릭은 다시 찰스를 바라보았다. 겨우 그 정도로 저렇게 해방된 표정이라니. 답답한 걸 싫어하는 건가. 그러면 왜 저렇게 입고 온 거지? 갑자기 물음이 고개를 들었다.


"굳이 그렇게 입고 올 필요가 있었나?"
"클라이언트와의 만남이니까요. 카페 자체 성격도 있고. 거기다...."


말끝을 흐리는 찰스를 보고 에릭은 한 쪽 눈썹을 위로 쓱 치켜올렸다. 뭔가 켕기는 듯한 말투였다. "거기다?" 답을 재촉하기 위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되묻자, 돌아온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이런 걸 백주대낮에 자랑하고 다닐 순 없잖아요?"


마침 신호는 빨간불이었고 에릭은 '이런 게' 뭔가 싶어서 찰스를 쳐다봤다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 했다. 흰 목줄기를 중심으로 쇄골 근처까지, 몇 개의 붉은 울혈들이 자신의 존재를 과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희미하지만 이빨 자국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에릭은 순간 어이가 없고 황당한 가운데서, 이유모를 분노가 쾅쾅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연 그를 찰스가 먼저 가로챘다.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이거 범인 당신이에요."


에릭이 얼빠진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찰스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섹스한 건 수요일 밤이었어요. 덧붙여서 에릭, 진짜 집요하게 물어뜯었던 거 알죠? 난 상어한테 먹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세상에."  ..... 그러고 보니 흰 피부에 남는 자국이 마음에 들어서 집착하듯 두 번씩 깨물고 핥았던 게 기억났다. 에릭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고, 찰스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알았어요?"
".......음."


결국 찰스의 셔츠는 그 상태로 놔두는 데에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점심 식사를 위해 도착한 곳은 전형적인 아메리칸 키친이었다. 뷔페식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자유로운 식사 분위기였지만 사람의 습관이란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것이기에 찰스는 에릭의 테이블 매너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우아하게 의자에 앉은 자세부터, 손놀림, 식사 예절, 상대방에 대한 매너까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다. 교육받은 자제의 느낌이라고 하기엔 약간 딱딱했지만 오히려 그것때문에 절제된 동작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신경외과는 뭐 하는 데에요?"
"사람의 신경계를 다루지."
"어려울 것 같은데...."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야. 장단점이 있어."


에릭은 그닥 말이 없는 타입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어야 그에 대해서 더 파악하기가 쉽기 때문에 찰스는 종종 질문을 던지거나 화제를 꺼내 대화를 이끌어냈다. 에릭은 찰스가 툭 던져오는 질문이나 화제에 그럭저럭 잘 응해주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침묵이 찾아오면, 둘 다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신기하군. 에릭은 지금까지 데이트(라고 할 수 있다면)를 하며 대화가 단절되는 순간이 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무기질적인 관계에 어색함까지 더해져서 참기가 힘들었는데, 찰스와는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무척이나 편안했다. 오래된 연인이라는 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군, 하고 잠깐 생각하던 에릭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 문장을 마음 속 저 밑으로 재빨리 구겨넣었다.

식사 후에는 찰스의 제안으로 백화점에 들렀다. 에릭이 평소 어떤 스타일을 입는지 궁금하다면서 그의 손을 거의 잡아끌던 찰스는 그에게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보라고 옷들을 향해 손을 쓱 펼쳐보였다. 에릭은 별 희안한 걸 다 시킨다며 황당해 했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옷을 골랐다. 눈을 반짝이며 그걸 지켜보던 찰스는 점점 표정이 굳어지더니 결국에는 경악한 얼굴을 하고 에릭을 바라보았다.


"...what?"
"그거, 진심이에요?"
"골라보라며."


찰스는 마음 깊은 곳에서 끄집어 낸 듯한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는 옷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영화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 찰스는 내내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건 정말 강수가 필요하겠어. 어림짐작이 맞아떨어졌고, 80%정도 확신이 섰으니 남은 건 직접 가서 확인하는 일만 남았군. 마침 주말이고 하니까 기회도 좋고. 한편 에릭은 그렇게 찰스의 생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 표정을 보며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뭐야, 신경쓰이잖아. 그리고 그때 찰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에릭. 내일 약속 있어요?"


에릭은 머릿속에서 자신의 스케줄 수첩을 좌라락 펼치며 확인해보고 대답했다.


"아니, 없어."
"그럼 오늘 나 좀 재워줘요."


찰스의 폭탄발언에 에릭은 액셀 대신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 했지만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그 상황을 속도를 줄이는 것으로 해서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입을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동요가 실려 있었다.


"....왜."
"컨설팅의 일환이에요. 당신 평일엔 바쁘잖아요? 나도 들쑥날쑥하거든요. 제일 중요한 것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그게 뭔데?"
"내일 아침에 말해줄게요."


그래서 yes or no?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찰스를 보며 에릭은 아주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대체 뭘 하자는 건지도 궁금했지만, 재워달라는 뉘앙스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걸 어떡할지 고민하는 것 보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좋아. 재워주지."
"oh, how nice of you, Erik."


긍정의 대답에 찰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동작으로 감사를 표했고, 에릭은 전혀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며 마주 씩 웃어보였다. 천만에. 오히려 그 말은 내가 해야될 것 같은데, 찰스. 말이 되지 못한 생각의 꼬리표는 한 바퀴 그의 머리를 돌고 자취를 감추었다.


by 치우타 2011. 11. 21. 07:26


찰스의 꿀잠을 깨운 것은 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예전 고객이자 이제 절친한 친구가 된 행크 맥코이였다(그의 연애와 결혼은 전적으로 찰스의 덕분이었다). 그의 아내인 레이븐의 부탁으로 의뢰를 해야 할 것 같다면서, 잘 부탁한다는 인사와 함께 받은 클라이언트의 이름은 바로 어젯밤에 뜨거운 섹스를 나눈 바로 그 '에릭 렌셔' 였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찰스는 사적으로 감탄한 다음 일 모드의 스위치를 켜고 보내온 정보를 확인했다. 에릭 렌셔, 직업은 신경외과 전문의. 어쩐지 느끼는 곳만 골라서 사람을 괴롭히더니만... 3일 이상 지속된 관계 없음. 3일? 애매한 기간인걸. 저도 모르게 눈썹이 찡긋 올라간다. 그야 물론 하루만에 끝장나는 커플을 본 적도 있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아예 하루면 모를까 애매하게 3일이라니. 이건 개인 성격문제 같은데. 찰스는 종이를 펄럭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관심이 없는걸까. 아니면 그냥 단순히 연애 회의주의자일까. 일단 에릭을 직접 만나서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하며 찰스는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섹스는 끝내줬고, 그렇게 잘 생긴 얼굴에, 듣기 좋은 목소리에 잘 나가는 직업을 가진 남자가 인스턴드적 관계만 해왔다니.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잖아. 설마 패션센스 때문은 아니겠지? 평소 옷차림도 체크해봐야겠어. 

약속은 바로 이번 주 주말이었다. 아마 날 보면 눈 튀어나게 놀라지 않을까. 찰스는 괜히 피식 웃으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쳤다. 

대망의 토요일 아침, 찰스는 샤워를 깔끔하게 마친 다음 가운을 걸치고 나와 옷장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평소에 앞이 트인 오픈형 칼라의 셔츠를 즐겨 입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기가 무척 난감했다. 아닌게 아니라 에릭, 그 상어같은 남자가 물어뜯은 자국이 아직도 목과 쇄골에 보란 듯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틀이나 삼일이면 가라앉아서 잘 안 보이기 마련인데, 이건 무슨 이빨 자국도 아직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단 둘이 만나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약속 장소는 조용한 고급 주택가의 카페였던 관계로 옷차림에 더 신경을 써야만 했다. 답답하지만 할 수 없지. 찰스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우아한 디자인의 드레스 셔츠를 꺼내들었다.

카페에는 에릭이 먼저 와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올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그는 오늘도 그 나이먹은 중년풍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조만간 집을 습격해서 스타일 체크를 처음부터 해야될 것 같은데? 찰스는 그렇게 마음먹으며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고, 에릭은 청회색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가늘게 좁혔다. 내 옷차림을 보고 있는 모양이군. 행동심리학을 전공했던 찰스에게는 다 눈에 보이는 행동이었다. 


"연애 컨설턴트라고?"
"아마도요."
"아마도?"
"정확히는 라이프 컨설턴트라고 하죠. 난 고객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조금 도움을 주는 것 뿐이에요."
"예를 들면?"


범인을 심문하는 형사를 닮은 말투에 찰스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에릭의 눈썹이 냉큼 위로 치켜올라가는 것을 보고 일부러 더욱 쾌활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이런, 이거 신뢰도 테스트라던가 그런 건가요?"
"대충은."
"좋아요. 예를 들면, 섹스앤더시티의 주인공처럼 되고 싶다는 고객이 있었죠."
"뭐?"
"섹시하고 스타일리시한 뉴요커가 되게 해 달라는 뜻이에요."
".....아."


드라마 같은 걸 볼 리 없는 에릭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남자들은 드라마를 챙겨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는 하다. 그래도 섹스앤더시티는 엄청 팔린 드라마라서 이름 정도는 알 텐데. 아무래도 의대 다니면서 공부만 한 모양이군. 찰스의 머릿속에서 에릭의 정보가 또 하나 갱신되었다.


"그래서 스타일을 찾아주고, 그녀 자신이 모르던 장점들을 발견하도록 도와줬죠."
"어떤 식으로?"
"그 이상은 비밀. 클라이언트의 프라이버시라서요."
".....흠."

손가락으로 살짝 입술을 누르며 찰스가 윙크를 해 보이자, 에릭은 묘하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덥잖은 대화가 끝나고, 둘의 찻잔이 다 비워질 무렵 찰스는 컨설팅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에릭."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해."


던지듯이 말해오는 에릭의 말투에는 여전히 별로 관심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찰스는 머릿속으로 컨설팅 지도의 콘티를 한번 더 점검해 보았다. 컨설팅의 기본은 상대에 대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파악한 다음부터 시작된다. 두 번째 만남이지만 에릭의 패션센스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깝다는 결론을 내린 것처럼, 가까이에서 습관, 매너, 버릇, 말투 등등을 체크할 거고 대화 주제나 기본상식, 억양, 시선도 제대로 봐야만 했다. 좋았어. 모험을 시작하는 소년과도 같은 표정이 찰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우선 오늘 하루동안 저랑 데이트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찰스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는 '오늘 날이 참 좋군요 놀러가고 싶은 날씨네요' 처럼 아주 평이하면서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에릭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되물었다. (정말로, '멍청한' 어조로!) 


"......뭐라고?"
"이제부터 데이트 타임이라구요."
"누구랑?"
"Of course, me."


정말로 즐거운 듯 활짝 웃는 찰스를 보고 에릭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끝내줬던 원나잇 상대가 컨설턴트, 그것도 연애에 대해 가르치겠다며 눈 앞에 앉아있는 것도 그렇지만, 대체 이 남자는 뭘 믿고 이렇게 자신감에 넘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헌데 이상한 건 그게 싫지가 않다는 거였다. 선을 넘을 기세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황급히 제지하러 달려와보니 선 바로 앞에 서서 예의를 차리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섹스하던 순간에는 완전히 주도권이 나한테 있었는데. 에릭은 괜히 심술이 났다.


"이유를 들어볼까."
"음, 그야 당신을 컨설팅하려면 우선 알아야 하니까요."
"....볼 거 다 봐놓고도 정식 절차를 밟자는 건가?"
"오, 에릭.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관계였잖아요. 우린 당분간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니까 당연히 정석대로 해야죠."


이쪽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는 장난기와 약간의 애정이 한 데 섞여서 반짝이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둘이 사귀는 줄 알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실제로도, 여기저기에서 둘을 힐끗거리거나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시선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일단 나가지."
"그러는 게 좋겠어요. 여긴 쓸데없는 소문이 잘 나는 카페라서."   


찰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고, 에릭도 그 뒤를 따랐다. 노래하는 듯한 가벼운 걸음걸이와, 무뚝뚝한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더니 이내 카페 문을 나섰다.

  
by 치우타 2011. 11. 13.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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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은 어딘가 팔 안이 허전한 감각에 문득 눈을 떴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자, 돌아온 것은 서늘한 침대 시트의 촉감 뿐이었다. 샤워라도 하러 간 건가 싶어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지만 물소리는 커녕 누군가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없이 밀려드는 실망감과 아쉬움에 몇 시인가 살펴보기 위해 침대 옆 테이블로 시선을 던진 에릭은 작은 메모를 발견했다.

'늦잠꾸러기 상어씨에게. 환상적인 밤 고마웠어요. 반은 내가 지불했으니 신경쓰지 말아요. Adieu'

반듯한 글씨체는 남자와 많이 닮아있었다. 에릭은 잠시동안 상어라는 단어에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비유적인 표현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다른 것이 그의 관심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이 아니라 이름을 가르쳐 준 것부터 시작해서 원나잇 상대는 보통 여자가 대부분이었는데 어제는 남자였고, 거기다 자신이 먼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호텔비는 자신이 카드로 지불해왔는데 더치페이를 하게 된 것, 아침에도 먼저 자리를 뜨는 건 언제나 에릭의 몫이었지만 선수를 뺴앗긴 것, 마지막으로 그렇게 죽여주는 섹스를 한 상대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꿈이라도 꾼 기분이군."


아무도 없는 허공에 중얼거린 말은 공기중으로 금세 흩어졌다.

에릭은 그대로 복잡한 머리를 안고 병원에 출근했다. 언제나와 같이 회진을 하고, 차트를 체크하고, 수술 스케줄에 변경된 것은 없는지를 살펴보고 나자 어느새 점심시간이 돌아와 있었다. 오늘도 메뉴 고민부터 시작해야겠군.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어젯밤의 기억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사무실의 문을 열자 책상에서 요란하게 진동이 울려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에릭은 핸드폰을 주워들어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오늘 수술 일정 별로 없던거 아니야?]"
"의사의 스케줄을 만만하게 보는군. 무슨일인데."
"[...오빠. 요즘 만나는 사람은 있어?]"


또 시작이다. 에릭은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일에 관심이 많고 간섭도 그만큼 하려고 드는 여동생의 존재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괴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레이븐. 그 이야기라면 됐어."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내년이면 오빠 나이가 몇이게? 애인 한명 정도는 있어야 맞잖아.]"
"나이가 숫자의 개념으로 바뀐 지 오래전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걱정이 되서 그래. 연애 좀 해, 오빠. 제발. 제대로 된 걸로.]"
"때가 되면 하겠지. 더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아 잠깐! 용건은 끝까지 들어야지! 행크 아는사람 통해서 컨설턴트랑 계약 끝냈으니까 그렇게 알아.]"
"....뭐?"
"[이번주 주말에 약속 잡아뒀고 번호랑 다 문자로 갈거야.]"
"그런 거 필요없어. 왜 멋대로 일을 진행하는거야."
"[벌써 계약금도 다 지불했고 끝난 이야기니까 알아서 해, 오빠. 그럼 끊을게.]"


대답은 들을 거 없다는 듯이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고, 에릭은 덕분에 한동안 멍한 얼굴로 뚜- 뚜- 하는 통화 종료음을 듣고 있었다. 점심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밥이 넘어갈만한 기분은 아니었다. 에릭은 전화를 던지듯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이번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감싸쥐었다. 이 나이 먹도록 부모님도 아니고 여동생의 연애 간섭이라니. 보나마나 이건 레이븐의 독단임에 틀림없었다. 부모님은 에릭이 의사가 되어 병원에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 다음부터는 터치하는 걸 그만두었고, 엠마 또한 니 인생은 니가 알아서 하라는 태도를 취했다. 대체 레이븐만 왜 이런 걸까. 형제들 중 제일 먼저 결혼해서 그런건지 천성인지.. 그때 마침 핸드폰에서는 문자의 도착을 알리는 진동이 울렸고 거기엔 컨설턴트의 이름과 전화번호, 만날 장소, 시간 등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Charles F. Xavier] 모로 보아도 남자의 이름이다. 거기에 미들네임이라니, 어디 귀족 자제라도 되시는 모양이지. 에릭은 괜히 만나지도 않은 컨설턴트를 비아냥거리며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주말이 찾아왔고, 에릭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어쩔 수 없이 약속 장소인 카페로 향했다. 막 점심이 되려는 시간대의 카페는 본래 붐비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소위 상류층들이 자주 온다는, 예약 없이 들어오기란 힘든 그런 고급형 카페였기 때문에 대체로 조용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창가 자리를 안내받아 자리에 앉은 에릭은 밖의 풍경에 잠시 시선을 던지다가, 건너편에 자연스럽게 앉는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
"여긴 어떻게..."
"약속이 있어서요."
"...나도 마찬가지야."


얼마 전에 뜨거운 밤을 함께 보낸 그 남자였다. 그날 밤과는 다르게 빈틈없이 잠긴 드레스 셔츠와 깔끔하고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짙은 푸른색의 정장을 입은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기에 에릭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거 대단한 우연이네요. 어떤 약속인가요?"
"네가 알 거 없어."


차갑게 뚝 끊어서 말하고서도 에릭은 스스로에게 잠시 놀랐다. 보통 안면이 없는 사이에도 이런 식으로 후려치듯이 말을 던진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남자의 얼굴을 보자 아침에 혼자 일어나 차가운 옆자리를 봤을 때의 당혹감과 묘한 실망감이 가슴을 뒤흔들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말을 뱉은 후였다. 그렇지만 남자는 오히려 장난스러운 눈빛을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너무 쌀쌀맞네요. 앞으로 계속 볼 얼굴인데, 좀 친하게 지내는 건 어떻습니까? 에릭 렌셔 씨."


이번에는 정말 깜짝 놀라서 에릭은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연애 컨설턴트, 찰스 프란시스 자비에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에릭."
 

by 치우타 2011. 11. 10. 20:04

한 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경력을 쌓은 것처럼 보이는 나이든 간호사가 어디론가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지금의 자리에 올라와 있는 그녀였지만,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좀처럼 간호사를 호출하지 않는(수술이나 기타 업무 이외에는) 의사에게서 이렇게 '퇴근 전에' 호출을 받는 것을 이례적인 일임은 틀림없었다. 
- 하물며 그 의사가, 신경외과의 에릭 렌셔일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수간호사는 드디어 그의 진찰실 앞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리자, 들어와. 라는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출하셨죠? 무슨 일로...."
"이 차트들 전부 정리 끝났으니 가져가도록. 그리고."


겨우 차트를 가져가라고 나를 불렀다고? 그녀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으려는 찰나 에릭이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을텐데. 공적인 우편물 이외에는 보고싶지 않아."


에릭은 차트더미와 함께 줄로 묶은 한 다발의 편지뭉치를 건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색색의 편지봉투들은 안 봐도 그 내용이 뻔한 것들이겠지. 수간호사는 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절하게 구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야. 다음부터는 전부 휴지통이나 소각로행이니 그리 알라고 해."


나가봐. 대답은 필요없다는 듯 에릭은 고개를 돌려 책상 위의 파일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서류를 뒤적이던 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구겨진 얼굴로 앉아있던 에릭은 의자에서 팩 일어났다. 평소에도 이런 편지나 은근한 신호들에 시달려 오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짜증이 밀려왔다.

길어야 3일, 늘 인스턴트적인 관계만을 유지하던 그에게 여자들의 관심과 유혹은 귀찮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도, 아예 그런 생각도 안 하는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일방적인 이별(?)을 감당 못하고 집요하게 그의 뒤를 따라다니던 여자들도 에릭이 '정말로' 연애세포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눈물을 훔치며 혹은 욕설을 하며 떨어져 나갔다. 어쨌든 에릭은 이런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요만큼도 들지 않았고, 오늘은 누구라도 괜찮은 상대를 하나 낚아서 질펀하게 섹스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옷을 갈아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늘 가던 단골바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상대를 물색하고 싶었기에 즉석공연과 술이 맛있기로 유명한 Bar Cerebro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사람들이 누군가를 무대에 올리려고 하는 참이었는지 시끌벅적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술은 조용한 곳에서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에릭이었지만, 그냥 신경쓰지 않기로 하며 바에 걸터앉았다.


"마티니. 드라이로."
"알겠습니다."


처음에 그는 즉석공연에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간혹 프로 뺨치는 사람들이 부르기도 한다던가,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프로가 불렀다던가 하는 소문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바텐더가 만드는 마티니, 특히 드라이 마티니는 에릭의 까다로운 입맛에도 훌륭하다고 느껴질 만큼 맛이 있었고, 여기에서 만났던 원나잇 상대들은 보통 중상급 이상들이었기에 여기를 택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곧 에릭은 마이크를 통해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Des yeux qui font baisser les miens
시선을 떨구게 하는 눈
Un rire qui se perd sur sa bouche
이내 입가에서 사라지던 웃음
Voila le portrait sans retouche
내가 몸을 바쳐 사랑하는
de l'homme au quel j'appartiens.
한 남자의 고치지 않은 초상화가 있었지요.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스탠딩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남자는 약간 아담한 체구였지만 딱 떨어지는 블랙 정장과 오픈형 셔츠가 아주 잘 어울렸다. 어디에서 들어본 곡인데. 에릭은 곰곰이 생각하며 바텐더가 내어놓은 드라이 마티니를 손에 들었다.

Quand il me prend dans ses bras
그가 두 팔로 나를 껴안을 때
il me parle tout bas
나에게 나직히 속삭일 때
Je vois la vie en rose
나는 장미빛 인생을 보았어요

남자는 다음 부분을 부르며 감았던 눈을 뜨고 살풋 미소지었고, 에릭은 순간 못 박힌 것처럼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되었다. 눈꺼풀 속에 가려져 있던 푸른 눈동자와, 잘 익은 체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붉은 입술은 강렬한 색채의 대비임과 동시에 남자의 인상을 확실하게 결정짓는 요소였다. 거기에 듣기 좋은 목소리로 부르는 나른한 La vie en rose 라니. 에릭은 좋아하는 마티니를 마시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남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에릭의 그런 강렬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자 또한 노래의 마지막 부분을 부를 때는 에릭을 바라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노래가 끝나자 엄청난 환호와 박수가 바를 가득 채웠고, 남자는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거기에 답하고는 천천히 에릭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그제서야 자각한 에릭은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몸이 굳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자는 이윽고 에릭의 앞에 도착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미스터."


에릭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면 무례하게 생각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남자는 오히려 그 허락의 몸짓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눈을 휘며 부드럽게 웃고 브랜디를 주문했다. 


"노래, 좋아하시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에릭은 옆에 앉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를 내내 뚫어져라 쳐다보고 계시길래."
"....몇 번, 들어봤습니다."
"좋아하지는 않구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자, 남자가 브랜디를 훌쩍 마시더니 에릭에게 바싹 다가서서 속삭였다.


"그럼 내가 마음에 든 거군요."


의문형이 아닌, 자신에 찬 말투를 들으며 에릭은 다가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두 눈동자는 더욱 푸르렀고, 셔츠 사이로 보이는 흰 목덜미는 마음 속의 어떤 것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에릭은 남자의 목을 물어뜯어서 표식을 남기고 싶다는 난폭한 충동에 휩싸였고, 덕분에 몸에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미련 없이 남은 마티니를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지."


남자는 에릭의 말을 듣더니 피식 웃었다.


"좋아요."
by 치우타 2011. 11. 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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