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일을 마치고 타워로 돌아오던 스티브는 문득 바닥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 두어 장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아직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한껏 시샘을 내긴 해도 아침 저녁으로는 조금씩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벌써 계절이 바뀔 때가 온 건가. 거리를 따라 늘어선 가로수들이 붉게 물드는 광경을 상상하며 그는 슬며시 미소지었다.

 

 "어서 와, 스티브. 일은 잘 끝냈어?"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네. 자네가 도와준 덕분이야."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가운 한 장 차림에 커피를 마시려던 토니가 손사래를 쳤다. 당신의 인품이 그렇게 만든 거지. 촉촉하게 젖은 검은 머리를 따라 물방울이 톡, 하니 어깨에 떨어진다. 스티브는 한숨 반 웃음 반을 섞어 뱉으며 마른 수건을 손에 들었다.

 

 "또 머리를 다 말리지 않고 나왔군. 감기 걸리겠어."

 "아. 고마워."

 

 토니가 머그잔을 내려놓는것과 거의 동시에, 마른 수건을 든 스티브가 조심스레 머리의 물기를 털기 시작했다. 사실 당신이 그렇게 한 마디 하고는 머리를 말려주는 게 좋아서 자꾸 잊어버린다고 하면 화내려나. 토니는 보이지 않게 입꼬리를 올리며 얌전히 스티브의 손길을 받았다. 전투에 익숙한 투박하고 커다란 손이 머리를 도닥여오는 느낌은 늘 새롭고, 달콤했다. 가끔은 너무 어린애처럼 굴고 있는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지만 평소에 빈틈을 보이지 않는 토니가 아주 가끔씩 연인이라는 미명 하에 슬몃 기대오는 것을 스티브는 꽤 좋아하는 모양이었다(주변의 평가에 의하면).

 

 "토니."

 "...음?"

 "저건 뭔가? 못 보던 건데."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그릉거리기 시작한 토니의 목덜미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수건을 내려놓은 스티브가 침대 머리맡을 가리켰다. 심플한 디자인의 작은 테이블 위에, 장미 모양의 장식 같은 것이 있었다.

 

 "아, 저거. 수가 준 거야. 요즘 나나 당신이나 피곤해 보인다면서. 숙면에 도움이 된대."

 "자네가 그런 걸 순순히 받아오다니. 조금 놀라운데."

 "그야 지난 사흘 정도 리드를 장기 대여했더니.. 안 받으면 맞을 것 같았거든."

 

 토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과장된 제스쳐를 취해 보였고 스티브는 못 말린다는 듯이 픽 웃었다. 당신도 얼른 씻고 와. 토니의 낮은 속삭임에 스티브는 정말 번개같이 샤워를 하고 뛰쳐나왔다(그런 것도 캡틴의 자질인가? 토니가 농담했다). 입술이 맞닿고, 손가락이 얽히고, 이내 방 불이 소리도 없이 꺼졌다.

 

 

 "스티브!"

 "...어.. 음? 토니?"

 "멍하니 서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데이트 신청한 건 당신이었잖아."

 

 스티브는 가만히 서서 눈을 깜박였다. 방금 전에 토니랑 잠에 든 것 같았는데, 아닌가? 그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인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쇼윈도에 진열된 스카프와 코트. 그리고 토니.

 

 "자네 옷이..."

 "이거? 평소처럼 입으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눈에 띄니까.. 이상한가?"

 

 토니는 평범한 검은색의 티에 품이 넉넉한 후드를 걸치고 있었다. 청바지에 운동화라는 완벽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평소에 늘 입고 있던 정장을 벗으니 조금은 더 앳된 분위기가 풍겼다. 거리를 무심히 지나는 아가씨들 몇몇과 남자들이 힐끔거리며 토니 쪽을 돌아보는 걸 본 스티브는 왠지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아주 잘 어울리네. 귀여워."

 "뭐?"

 "칭찬이니까 인상은 쓰지 말게."

 "남자에게 귀엽다는 건 매력없다는 거랑 거의 동급이라고, 스티브."

 "토니."

 

 달래듯 이름을 부르자 토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당신은 오늘도 잘생겼군. 약간 아저씨 같긴 하지만. 목소리에는 심통이 담겨 있었으나 그런 주제에 더없이 진지해서 스티브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금방 마음이 풀어진 두 사람은 사이 좋게 거리의 사람들 속에 녹아 들었다.

 

 "어디 갈까? 당신이 정해봐."

 "내가 말인가?"

 "신청한 건 당신이니까 우선권이 있지."

 "그럼.. 센트럴 파크."

 

 스티브는 말을 꺼내놓은 다음에야 아차 하는 마음에 토니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토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 이 시간이면 딱 좋군. 가자고. 그런 다음 덥석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어벤져스 멤버들 앞에서야 일부러 과시 겸 괴롭힘(?)용으로 스킨쉽을 과장되게 해올 때도 있었지만, 밖에서는 스티브의 이미지라던지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해서 최소한의 접촉만을 하곤 했었다. 이런 백주 대낮의 뉴욕 거리에서 깍지 낀 손이라니. 기쁜 마음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는 했으나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기에 차마 말은 못하고 스티브는 토니의 옆얼굴을 흘끔 넘겨보았다. 거기엔 불안이나 두려움이 아닌, 순수한 애정과 즐거움이 반짝이고 있었다.

 

 "스티브?"

 "아무것도 아닐세. 가지."

 

 스티브는 행여나 놓칠 세라 깍지 낀 손을 더욱 세게 마주잡았다. 꽉 잡힌 손이 제법 아플 법한데도 토니는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오, 이건 좀 장관이네."

 

 토니가 감탄하며 발을 앞으로 딛었다.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스티브도 약간 입을 벌린 채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센트럴 파크 안쪽의 산책로에는 제각기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들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마치 동화 속의 그림처럼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토니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근처에 떨어져 있던 낙엽을 슬슬 주워모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넋을 놓고 있던 스티브의 머리 위로 흩뿌렸다.

 

 "토니."

 "하하, 잘 어울리는데. 당신 파란 자켓이랑, 이 낙엽들. 그림 같아."

 "자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는 것이 스티브의 지론이었다. 물론 거기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겠지만 이 경우엔 토니가 먼저 도발해온 것이므로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스티브 역시 예쁘게 모인 낙엽을 모아 토니에게 뿌려 주었다. 두 사람은 십대 어린애들마냥 낄낄거리며 한동안 그렇게 낙엽을 서로 주고받았다. 어느 순간 스티브가 토니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고, 토니가 얌전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면서 귀여운 낙엽 전쟁은 끝이 났다.

 

 "스티브."

 "왜 부르나."

 "행복해?"

 "더할나위없이, 무척."

 

 토니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됐어. 솔직하고 애정어린 그 표정에 스티브 또한 이끌리듯이 환하게 웃었다. 낙엽이 바람에 춤추듯 휘날렸다.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자 토니가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속삭였다.

 

 "꿈이야, 스티브. 이제 일어나야지."

 

 

 스티브는 눈을 번쩍 떴다. 여전히 방 안은 어두웠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다 꿈이었나. 아쉬운 감정이 마음 한 구석을 덮는 것을 느끼며 그는 손을 뻗어 품 안의 토니를 확인했다. 작은 움직임에도 쉬이 잠을 깰 정도로 예민한 그가 거의 미동도 없이 숨소리만 내면서 쿨쿨 자고 있었다. 수의 선물이 효과를 본 모양이군. 스티브는 살그머니 토니를 좀 더 끌어당겨 안았다. 으음, 하는 소리를 작게 내면서도 토니는 깨지 않았다.

 

 센트럴 파크에서의 데이트는 비록 꿈이었지만, 곧 가을이 오고 나뭇잎이 물들어 낙엽이 지면 다시 한 번 데이트를 신청할 것이다. 후드를 입은 토니의 손을 잡을 수 없다고 해도 좋다. 함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스티브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래, 가을이 오면.

 

 

*놜님의 그림을 보고 충동적으로 연성한 글입니다. 정말 너무너무 예쁘고 포근한 두 사람이 좋아요.

 +허락받고 놜님 그림을 모셔왔습니다!!!! (_noirnoir) 

 

by 치우타 2015. 9. 9. 1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