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퍼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조종간과 비슷한 손잡이를 붙잡았을 때, 셰퍼드는 그의 온 몸이 그대로 찢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카탈리스트는 그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우주를, 지구를, 동료들을, 케이든을- 살릴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제 목숨을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었으나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카탈리스트 앞에 선 최초의 유기체로서,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으로서 존 셰퍼드는 끝까지 맞서 싸웠다. 그의 의지가 온 리퍼들에게 전달되고, 카탈리스트에 녹아든 다음 셰퍼드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총상을 입은 부위가 뜨끔하니 아파왔다.


 [놀라워. 살아남을 수 있다니. 넌 정말 우리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존재군.]


 성장한 것처럼 보이는 카탈리스트(그의 모습은 셰퍼드와 상당히 흡사했다)는 확연히 어조가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셰퍼드는 눈을 찡그리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통제는 성공했어. 리퍼는 수확을 멈추고, 우리는 네 의지대로 유기체와 함께 공존해 갈 거다.]

 "그거... 다행이군. 두 번은.. 못할 것 같거든."


 셰퍼드는 힘없이 웃으며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피가 울컥 흘러내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다리는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채로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일어나. 걸어. 돌아가. 만신창이가 된 몸은 뇌의 명령에 최선을 다해 복종하려고 노력했다. 저 쪽으로 가면 셔틀이 남아 있을거야. 카탈리스트가 친절히 방향을 일러 주었다. 셰퍼드는 고맙다는 말 조차 내뱉을 힘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 시체 상태로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복도. 복도. 기나긴 복도는 끝을 모르는 것처럼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분명 시타델은 리퍼에게 수확되고 카탈리스트가 변형시키면서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으나 이 빌어먹을 복도 만큼은 그대로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셰퍼드는 감겨오는 눈과, 실 끊어진 인형처럼 꺾이기 일보직전인 다리를 애써 추스렸다. 무릎이 덜덜 떨려왔다. 조금만 더. 희미하게 붉은 색 셔틀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게 환영이라면 정말 끝장이겠지. 셰퍼드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확신을 가지고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다행스럽게도 셔틀은 정말 남아 있었다. 손으로 셔틀을 더듬어 문을 열고 본능적으로 계기판을 조작한 다음 그는 의자에 말 그대로 완전히 널브러졌다. 멀리서 제 역할을 다 한 시타델이 서서히 닫히는 게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나갈 수 있겠군. 셔틀은 최고 속도로 발진하며 뛰쳐 날아갔다.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셔틀 안에서 셰퍼드는 속절없이 몰려오는 고통에 낮게 신음했다.


 케이든.


 셰퍼드는 눈을 감기 전 속삭이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모든 게 완전히 깜깜해졌다.




 시타델에서 튀어나온 붉은 셔틀은 운 좋게도 다시 근처를 확인하러 왔던 해켓 제독의 함선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다. 그들은 너덜너덜해진 셔틀에 한 번 놀라고, 그 안에서 거의 죽기 직전인 셰퍼드를 발견하고 두 번째로 놀랐으며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거라는 메디베이 닥터의 말에 세 번째로 놀랐다. 해켓은 노르망디에 연락해서 셰퍼드가 살아있음을 알렸고, 깊은 슬픔에 빠져 있던 크루들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이미 최고 속도를 뽑아내고 있는 조커에게 달려가 더 빨리 갈 수는 없냐고 닦달해서 그가 벌컥 화내도록 만들었다. 나가요! 전부 다! 조커의 신경질적인 외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조차 아까운 그를 대신해서 EDI가 케이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전투정보실로 내쫓았다.


 "조커."

 "오 젠장, 케이든!"

 "그게 아니라... ....고마워."

 

 조커는 뭐라고 더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툭 던졌다. "거기라도 앉아요. 좀 흔들릴 거니까." 크루시블이 발동한 덕택에 리퍼와의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매스 릴레이가 파괴된 덕분에 드라이브 코어를 이용한 이동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노르망디 호는 셰퍼드가 시타델에서 살아 나올거라고 믿으며 마지막까지 기다렸던 덕분에 그다지 멀지 않은 항성계의 한 행성으로 불시착했고 곧 헤켓 제독의 함선과 만날 예정이었다. 케이든은 두 손을 꽉 쥐어 이마에 갖다 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사랑해. 언제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나한테 마지막 인사는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케이든은 셰퍼드의 턱이나 명치를 후려갈기는 상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떤 것도 그의 얼굴을 직접 보기 전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는 노르망디. 승선을 요청합니다. 조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리는 걸 들으며 케이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디베이는 함선의 중심부에 있었다. 케이든은 그곳으로 향하는 내내 발걸음이 꼬여서 두 세번쯤 넘어질 뻔 했으나 다행히 함선 내의 모든 이들은 각자의 업무에 집중하느라 그의 민망한 꼴을 목격할 수 없었다. 노르망디의 모든 크루들은 저마다 셰퍼드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했지만 케이든에게 선두를 양보했다. 차크워스 박사는 케이든이 보고하는 대로 셰퍼드를 노르망디 호에 옮길 수 있도록 바쁘게 움직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치프 닥터가 그를 맞아 주었다.


 "그는.. 그는 어떻습니까?"

 "출혈이 심했습니다. 부분 골절도 많았고, 부서진 수트에 찔려 위험했던 상처도 여럿 있었죠. 강한 정신력이 그를 살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군의관 노릇을 했지만, 이런 환자는 처음이에요."


 소문보다 더 지독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치프 닥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케이든이 셰퍼드와 단 둘이 있을 수 있도록 메디베이를 나서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한두시간 정도 안정을 취하고 나면 옯겨도 문제 없을 겁니다." 문이 닫혔다. 케이든은 천천히 침상에 누워있는 셰퍼드에게 다가갔다. 가벼운 상처는 치료되었는지 얼굴에는 멍자국만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손을 들어 코와 입가에 가져다 대자 얕지만 미지근한 숨이 손가락 끝에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케이든은 크게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셰퍼드. ...셰퍼드.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구었다. 살아 있었다. 살아서, 돌아와 주었다. 이 곳으로. 자신이 기다리는 곳으로. 


케이든은 잠시 동안 제멋대로 흘러내리는 눈물 방울을 내버려 두었다.

 


 셰퍼드는 눈을 떴다. 주변이 온통 깜깜했다. 설마 내가 죽은 건가?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다가 전신에 찌르르하니 퍼지는 격통에 끄응, 하는 소리를 뱉었다. 시야가 닿는 근처에 새까만 우주와 그 사이로 별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셰퍼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우주가 보이는 넓은 창. 긴 의자. 테이블. 책장. 노르망디 호의 좌현 관측실이었다. 케이든이 자주 머무르는. 케이든은 어디 있지? 셰퍼드는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을 보고 있는 젖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일어났습니까?"

 "....케이든." 

 "사흘 동안 잠들어 있었어요. 미동도 않더군요. 숨 쉬는거 빼고는 거의 시체나 다름 없었죠."

 "그렇게나 오래?"

 "조금만 늦었더라도 죽었을 거라고, 해켓 제독 함선의 치프 닥터가 말했습니다."

 "운이 좋았군."


 덤덤한 어조로 말하는 셰퍼드를 보고 케이든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을 뻔했는데도. 며칠 동안 꾹꾹 눌러담았던 감정이 팍 터져나오려는 것이 느껴졌다. 


 "겨우 그것 뿐입니까?"

 "...뭐라고?"

 "죽을 뻔했다고요. 당신이. 그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케이든, 나는.."

 "당신이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케이든의 어조가 점차 격해지려는 찰나, 셰퍼드는 두 팔을 뻗어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널 다시 보고 싶었어." 셰퍼드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 끝에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러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 돌아왔어. 그러니까, 화낼 시간에 안아줬으면 좋겠는데." 셰퍼드는 애써 여유를 되찾는 척하며 덧붙였다. 네가 날 다시 한 번 안을 수 있다면 어떤 불구덩이라도 헤쳐 나올 거라고 했잖아. 


아, 당신은 그것도 잊지 않았구나. 


케이든은 셰퍼드의 등을 강하게 마주 안으며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다 낫고 나면 두고 보시죠. 반쯤 협박과 애정이 뒤섞인 말에 셰퍼드가 푸스스 웃었다. 살살 해줘. 이번엔 케이든도 진심으로 웃었다. 



by 치우타 2015. 8. 13. 2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