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테이블 앞에 앉아 두 명의 드워프를 노려보았다. 아침의 불청객, 필리와 킬리는 평소의 선량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아니라 당장에라도 누구든 콱 물어뜯을 것만 같은 서슬퍼런 호빗의 눈초리에 찔끔하여 테이블 밑으로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이건 형 아이디어였잖아, 어떡할거야! 아니, 보고싶다고 한건 언제고? 작은 목소리로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철없는 두 왕자를 보며 빌보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둘 다. 조용히 해요."



그야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악마같은 분위기의 말투에 필리와 킬리는 다시 헙 하며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았다. 사건의 발단은 별 거 아니었다. 최근 에레보르의 일들을 돕느라 이래저래 분주했던 빌보가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가진다는 첩보를 주워들은 둘은, 이때다 싶어 그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일 아니면 소린 삼촌에게 붙들려 있느라 얼굴은 커녕 머리털도 구경하기 힘들어진 이 호빗은 묘하게 사람 마음을 안정시키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킬리는 형인 필리에게 빌보가 보고 싶다며 운을 띄웠고, 마침 삼촌도 집무실에서 바쁘겠다 기회가 좋은 김에 그저 만나러 온 것 뿐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들은 빌보가 조심스레 운반하던 쟁반을 엎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도 방금 끓여낸, 얼마 없는 샤이어의 찻잎으로 만든 런치 티 타임의 차 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내가 이전부터 분명 노크해달라고 했었죠."


"어.. 그랬던가?"


"분명 처음에는 그랬던것 같기도 하고..."


"말 했어요. 세 번이나, 여기 와서도. 그런데 어떻게 했죠?"


"우리가..."   "동의없이.."  "문을 열어젖혔지."   "아주 시원하게."   "부딪힐 기세로."    "자비없이."


"잘못을 인식하고 있다니 다행이군요."



얼음이 뚝뚝 떨어질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하며 빌보가 환하게 웃었다. 형, 나 지금 도망치고 싶어. 조용히 해, 나도 마찬가지니까. 빌보가 제대로 화를 내는 모습을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식으로 보게 되는구나. 둘은 들리지 않을 마음의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오후에 있을 그들의 일정에 대해 안녕을 고했다. 어쩐지, 잘못을 천천히 짚어가도록 조근조근 말하는 것부터가 심상치가 않았다. 빌보가 뭐라고 다시 입을 열려던 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시죠?"


"나다."


"소린...? 들어오세요."



방문자의 정체를 알고 흠칫하는 동시에 만세를 불렀다. 삼촌의 목소리가 이토록 반가울 수가 있다니! 드워프 수염 맙소사, 오래 살고 볼일이야! 발린이나 드왈린, 소린이 들었다면 이게 무슨 가소로운 소리인가 싶은 생각이었지만 지금의 필리와 킬리에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푸른 클록을 걸친 소린이 들어오며 둘을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치켜떴다. 오, 삼촌의 저 표정마저도 무섭지가 않아. 저 웃는 얼굴에 비하면.



"필리, 킬리.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저희가 그만,"   "엎질렀어요."   "빌보의 차를 말이죠."   "그러려던건 아니었는데-" 


"거기까지. 너무 정신없으니까 번갈아가면서 대답하지 마라. 그래서 볼일은?"


"어- 다 끝난 것 같은데요. 그렇지, 킬리?"


"그럼요! 물론이죠! 우리의 용건 같은건 이미 아까 한참전에 끝났거든요."


".....그럼 가봐."


"알겠습니다, 삼촌! 그럼 나중에 봐 빌보! 정말 미안했어!"



필리와 킬리는 소린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재빠르게 의자를 박차고 문 밖으로 튀어나갔다. 정신없이 인사를 날리는 둥 마는둥하며 도망치는 둘을 보고 소린이 혀를 찼다. 아직도 철 들려면 한참 멀었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바쁘다던데."


"나머지는 발린에게 맡겼어. 기왕이면.. 같이 마실까 했거든."



소린은 작은 주머니를 들며 웃어보였다. 얼마 전 데일의 영주인 바르드에게서 받아온 희귀한 잎차가 든 꾸러미였다. 빌보는 주머니를 받아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미소를 짓고는 소린을 부둥켜안았다.



"고마워요! 이거 전부터 말했던 거네요, 그럼 지금 바로- 아끼던 건 깨져서 이것뿐인데... 괜찮아요?"


"상관없어. 더 좋은 걸로 마련해줄테니 오늘은 임시로 참도록 하지."



소린은 바닥에 처참한 모습으로 깨어진 주전자를 흘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빌보가 바쁘게 물을 올리러 가는 뒷태를 감상하며, 그는 오후에 있을 교육의 강도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by 치우타 2014. 1. 31. 2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