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는 거미줄을 특정 장소에 만들어두고 거길 집 겸 사냥터로 이용하며 살아간다. 살아있는 물체가 거미줄에 걸리면 반사적으로 그걸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치게 되는데, 그 움직임은 거미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즉시 사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렇게 사냥한 먹잇감을 그 자리에서 죽여서 바로 먹어버리는 거미가 있는가 하면 식량 보관하듯 기절만 시켜두고 놔 두었다가 후에 먹는 거미가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먹이가 한 번 걸리면 결코 빠져나가게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특별한 몇 가지의- 정말로 운이 좋은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빌보는 문득 자신의 처지가 꼭 그런 식으로 거미줄에 칭칭 감기고 만 나비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린 순간 무의식적으로 발버둥치고, 그로 인해 더욱 조여들어서 결국엔 그대로 먹히고 마는, 어리석고 가여운 생물이.



"오늘은 어딜 간다고 했었지?"


"데일에요. 오늘은 좀 큰 시장이 선다고 하던데요? 바르드- 음. 영주님이 놀러오라고도 했고. 그래서.."


"호위를 데려가. 셋을 붙여주면 되겠군."


"소린, 겨우 시장 구경이에요. 게다가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구요. 굳이 그렇게까지..."


"나가기 싫은가?"



거의 높낮이가 없는, 덤덤하지만 꽤 위협적인 어조의 말이 던져졌다. 소린은 무심한 얼굴로 종이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갑고 푸른 눈과 직접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그가 시선을 주지 않는 쪽이 더 나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빌보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마무리지었다. 아뇨. 그럼.. 다녀올게요. 발린과 드왈린이 엄격하게 고른, 소린의 충실한 병사들 셋이 거의 빌보를 에워싸듯이 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데일에는 정말 큰 시장이 열려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 웃음소리, 수 많은 장식품이나 식료품, 행인과 여행자들. 에레보르를 벗어나 다른 이들이 살아가는 곳에 발을 디디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갇혀있는 죄수의 신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빌보는 소린의 허가 없인, 혹은 그가 붙인 호위들 없인 에레보르 내부는 물론이고 산책으로도 밖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상기운을 감지하고 난 다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뒤였다.



"...마스터 빌보 배긴스?"


"아, 바르드!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한동안 소식이 없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요?"


"......음.. 그게, 이쪽에서 좀 더 머무르게 됐어요. 바빠서 소식을 전할 틈도 없었습니다."


"잘 됐네요. 에스가로스는 사실 봄~여름에 더 볼거리가 많으니 기대해도 될 겁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시장이 열린다기에 구경하러 왔어요. 정말 굉장하네요. 사람들도 모든 것도..."



솔직한 빌보의 감탄에 바르드가 따스하게 미소지었다. 이 작은 호빗의 용기와 행동으로 지금의 에레보르와 에스가로스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자손 대대로 감사해도 모자랄 정도인데, 그는 단지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몫도 다른 이들과 나누고 그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길 원했었다. 소박하고, 평화로운 일상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호빗. 그러다 바르드는 빌보에게 거의 밀착하다시피 서 있는 드워프 셋을 보고 눈썹을 위로 들어올렸다.



"이들은 뭐죠? 당신의 친구로는 안 보이는데."


"소린이.... 호위역으로 같이 가라더군요. 전 사양했지만-"


"좋은 생각이네요. 여긴 아직 한창 재건중인 곳이라, 치안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는 있지만 질 나쁜 여행자들도 오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제가 모든 일을 신경쓸 순 없어서 나누어 하고 있지만.. 조심해요."


".....네. 감사합니다, 주의해서 보고 일찍 돌아가도록 하죠."



떨리는 목소리에 어렴풋이 묻어나온 공포를 바르드가 인지하기도 전에, 빌보가 파이프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러고보니 그들은 작은 체구에는 조금 상상이 가질 않지만 연초를 꽤나 즐기는 종족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늘 트인길을 조심하도록 해요, 빌보. 그런곳에서 납치라면 속수무책이니까."


"조언 고맙습니다, 영주님. 소인은 이만 물러가지요~"



연기를 한차례 위로 내뿜고는 손에 파이프를 든 빌보가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자, 바르드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마찬가지로 예를 표하고는 병사들과 함께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빌보의 파이프를 쥔 손이 얼마나 떨리고 있었는지를, 그는 절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이 이상 그 때문에 불필요한 희생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일찍 왔군."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기로 약속했으니까. .....어때요? 일은."


"오늘은 그렇게 신경쓸만한 건 없었어. .....이리와, 빌보."



빌보는 얌전히 그의 말에 따랐다. 저항없이 부드럽게 감겨오는 팔과 따스한 체온에 소린은 기분좋은 듯 나직하게 신음하며 품 안의 몸을 더욱 가까이 안았다. 호빗의 머리칼에선 볕 좋은 태양의 냄새와 희미한 꽃 향기, 그리고 청량한 바람 내음이 났다. 그가 모르는 누군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빌보와 눈을 마주하고 이마에 입술을 찍어누를 수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는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누구보다도 절실한 감정이 함께 섞이어 파도치고 있었다. 빌보가 계속해서 속아온, 아니, 길들여지고 만 그런 애정의 감정같은 것 말이다. 



".....저녁은?"


"아직이에요. 당신이랑 먹으려고..."


"가지."



방으로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움직이지 마. 강압적인 명령이 한번 더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빌보는 균열을 느끼면서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신차리고 보니 온통 거미줄에 묶이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누가 귀를 기울여 주겠는가? 게다가 빌보는 소린을 떠날 수 없었다. 그것이 이 거미줄의 가장 큰 약점이자 고질적인 문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목께를 간지럽히는 풍성한 털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오늘도 어쩌면, 아마도 확실히. 



by 치우타 2014. 1. 17. 23:54

차가운 겨울 바람이 지나가는 에레보르에서는, 유난히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 있었다. 빌보는 오늘도 그런 날이 될 거라 확신하며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고풍스럽고 웅장했지만 너무 조용했고, 그의 따스하고 정겨운 샤이어의 백엔드에 비하면 부족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온기라거나, 좋아하는 책이라거나, 향 좋은 찻잎이라거나. 그런 것들.


그는 두꺼운 튜닉을 걸치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왔다. 시간이 늦은 밤이어서인지 복도에는 누구의 인기척도 없는 모양이었다. 숙련된 전사들마냥 어떠한 분위기를 감지하는 능력 따위는 없으나, 에레보르는 돌로 만들어진 요새이며 드워프들은 생각보다 그들의 느낌을 (혹자는 소리라고들 했다) 감추는 데에 서툴렀다. 물론 이것도 모든 드워프에게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는 성급한 결론이었지만 대부분은 퉁탕거리며 걸어다니거나, 왁자하게 웃고, 소란스러운 움직임들이 있었다. 

오죽하면 엘프들이 '어둠속에서 안 보고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고 했던가. 빌보는 웃을수만은 없는 추억을 떠올리며 전망대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이렇게 잠이 안 오는 날에는 별과 달을 보러 나가는 것이 일종의 예식처럼 되곤 한 탓이다. 지금까지 누구와 마주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며 그 명당 자리는 아마도 빌보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으- 조금 추운걸. 완전히 겨울이 왔군...."



완전히 보수가 끝난 전망대에는 완연한 동쪽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빌보는 어깨를 떨며 튜닉을 좀 더 여미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빛이 모여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별들이 휘황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그보다 조금 더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크고 붉은 달이었다.


오. 이건 샤이어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야.


빌보는 손끝이 시려오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시선을 달에 고정시키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질 것 같은 거대한 붉은 달은, 말없이 은은하게 빛나며 주변의 별들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것들을 보고 방에 돌아가면 비로소 잠이 들곤 했다.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차가운 건물이나 바닥, 드워프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저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그런 시간이 그에게는 꼭 필요했다. 늘 땅과 작물, 태양과 가까이 지내던 호빗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빌보?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렇게 잠시 분위기에 젖어 마음이 한창 풀어졌을 무렵, 등 뒤에서 갑작스레 날아든 음성에 빌보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어오를 뻔 했다. 그가 제대로 교육받은 집안의 호빗이 아니었다면 벌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호빗 맙소사! 소린! 당신 지금 날 놀래켜서 죽일 뻔 한거 알아요?"


"그런걸로 죽는다면 네 종족이 얼마나 더 토끼같은지를 증명할 수 있겠는걸."


"내가 전에도 그 전에도 계속 말했잖아요. 제발 놀라게 하지 말아달라고.... 세상에.. 후. 진짜, 못된 행동이라구요."


"몇 번을 말하지만, dear hobbit, 네 그 귀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넋을 놨다는 뜻이겠지."


"....이건 그냥 귀거든요? 동물적인 어떤 게 아니라."


"어련하겠나. 그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길이 복잡할 텐데."


"음, 뭐... 잠이 안 오기도 하고. 그래서 구경삼아 나왔어요. 자주 그래요."



아차. 빌보는 흠칫하여 마지막 말을 얼버무리듯이 뭉개고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한창 에레보르의 복구와 정상화를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쁘게 일하고 있는 소린에게 있어서, 잠깐의 여유나 연애같은 건 일종의 사치에 해당되었다. 그에게 드리워진 아르켄스톤과 황금들의 질병을 걷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에스가로스와 어둠숲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것도 빌보였지만 그를 옆에 끼고 붙어있는다거나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있는 소린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빌보는 그의 가벼운 불면증이나 외로움 같은 것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저 혼자 눌러 담고, 연초의 연기에 실어 보내려고 무던히 노력했을 뿐. 하지만 조금 전의 발언에는 자기도 모르게 약간 칭얼거리는 투로...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드워프 왕은 뭐든 놓치는 법이 없었다. 설령 그것이 아주 작은 속삭임일지라도.



"자주 그랬다고? 언제부터? 몇 번이나?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아직도, 나는 네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건가? 마지막에 붙을 말은 차마 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소린의 목에 걸렸다. 그는 빌보에게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고, 하마터면 그것으로 인해 영영 그의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릴 뻔 했다. 에레보르의 지난 영광을 되찾겠다는 마음과 복수심, 보물의 빛깔에 눈이 멀어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적이 있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빌보는 그의 어리석은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었고, 샤이어가 아니라 여기 에레보르에 그대로 남아 주었다. 계절이 바뀌면 한 번 다녀오겠다는 말을 여러 번 하긴 했으나, 빌보는 문턱까지 가서는 결국 다시 돌아와 그에게 버림받을까봐 두려움에 떠는 소린을 부드럽게 포옹해주곤 했다. 그렇게 조금씩 시간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랬는데 불면증이라니. 향수병만큼은 아니어도 눈치로 보아하니 상당 시간동안 빌보를 괴롭힌 것이 분명했다. 소린은 무거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은... 너무 바쁘잖아요, 나까지 걱정거리 중 하나로 짐을 얹어주고 싶진 않았어요."


"짐? 네가 짐이라고? 걱정거리라고? 빌보, 넌 대체..."


"이럴까봐 말 안하려고 했던 거에요. ....화내지 말아요, 소린. 그저 당신을 힘들게 하기 싫었던 거였어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


"...소린."


"지금 네 앞에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스로르의 자손, 스라인의 아들, 두린의 적통 소린 오큰쉴드다. 에레보르를 스마우그의 발톱으로부터 빼앗고,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동족들을 다시 모았고, 그리고.. 사랑하는 이도 찾았지."



소린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윽고 손을 뻗어 빌보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이마, 뺨, 그리고 턱을 차례로 그림을 그려내는 것처럼 쓰다듬었다. 얼마만의 접촉인지, 셀 용기가 나질 않아 빌보는 손을 들어 소린의 거친 손등을 감싸쥐었다.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쪽이 더 괴롭다는 걸, 그때 알았다."


"소린......"


"그러니까 제발 뭐든 좋으니 말을 해. 집무실에 24시간 예고없이 방문해도 되는 건 너 뿐이라는 걸 잊지 마라."



진지한 분위기였지만 빌보는 순간 웃음이 새어나올뻔한 것을 꾹 참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소린은 더없이 엄숙한 얼굴에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근조근 부탁하고 있었고, 그런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긴 했지만 빌보는 그의 말에 숨겨진 장난기를 읽어낸 탓에 문장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어려웠다.



"알았어요. 집무실 방문은 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대신 당신 방으로 쳐들어 갈게요."



언제 돌아오는지 알아야 한다는 게 문제겠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빌보가 윙크해보이자, 소린은 피식 웃으며 가만히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내 방에서 잠을 자지 그래.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볼 텐데. 속삭여오는 목소리에 담겨진 애정을 느끼고 빌보도 마주 웃었다. 그럼 밤 산책도 같이 해줄거에요? 그런걸 할 여유가 있을지는 두고 보자고. 전망대 위에 걸린 붉은 달이 그들을 시기하듯이 반짝였다. 춥지만 아름다운 에레보르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by 치우타 2014. 1. 16. 23:07

"소린, 지금 시간 있어요?"


잠시 서류에서 눈을 떼고 휴식을 취하던 그를 찾아온 것은 익숙한 방문객이었다. 저쪽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던 발린에게 인사를 건네고,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서 있는 드왈린한테 씩 웃어보인 빌보는 조용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소린의 바로 옆으로 섰다. 왠일로 조금은 서두르는 듯한 그 모습에 눈썹을 들어보이자 그는 몇 번 헛기침을 했다.


"무슨 일이지? 급한 용무라도 있나?"


"아뇨, 아뇨.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잠깐 숨 돌릴 여유가 있나 싶어서요. 안 되면 나중에 해도 돼요."


빌보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급한것도 아니고, 중차대한 일도 아니니까 당신이 시간 날 때 말해주면 될 것 같아요. 멋쩍은듯 뺨을 매만지며 빌보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오전 중에 하루 업무 중 반 이상을 이미 끝내둔 소린의 눈에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동작이었다. 또한 일종의 누름쇠 같은 것이기도 했다.


"같이 가지. 안 그래도 쉬려던 참이었어. 발린?"


"오후 업무도 거의 남은 게 없으니 괜찮을 것 같군요. 다녀오시죠."


"호위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으면 하는데."


발린의 흔쾌한 동조에 이어 약간 거친 어조의 말이 따라왔다. 드왈린은 소린의 호위 담당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에레보르 안을 다닐 때도 언제나 그림자처럼 소린의 근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빌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 혼자서도 문제 없었고.


"드왈린, 난 괜찮으니 발린과 함께 차라도 마셔."


"그렇다면야...."


소린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냉큼 저만치 떨어진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가 와일드하게 의자의 강도를 시험하듯 앉았다. 발린이 혀를 차면서 나이를 생각하라고 핀잔을 줬지만 본인은 요만큼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빌보가 푸스스 웃었다.


"가지. 어느 쪽이야?"


"날 따라오면 돼요. 중간에 이상한 데로 빠지지 말아요, 소린."


"....여긴 내- 아니. 우리 집이야. 이상한 데로 빠지다니 무슨 소릴."


"오.. 당신 은근히 길치잖아요. 구조는 다 알면서도 묘하게 틀린 곳으로 간다던지 하는 그런거요."


살짝 손을 맞잡아오며 빌보가 한쪽눈을 찡긋해보였다. 나랑 산책할 때 몇 번이나 길을 잃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나만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소근소근 속삭여오는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담겨 있는 것이 어쩐지 얄미워서, 소린은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빌보를 품으로 끌어당겨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맙소사, 소린! 꽥 소리지르던 빌보는 근처를 지나던 드워프 몇몇이 그들에게 흥미를 보일락말락하는 태도로 서성이는 걸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후회할 걸요."


"제발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군. 빌보."


낮은 웃음소리가 빌보의 귓가에 닿았다가 떨어져나갔다. 가소롭다는 듯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띄운 드워프의 왕을 보며 그는 한 가지 다짐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고의로 길을 잃게 만들어서 호빗 귀한 줄 알게 해줘야 겠다는 그런 걸 말이다. 게임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 



by 치우타 2014. 1. 15. 2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