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두린의 날이 지나가고, 드디어 에레보르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중간계에서도 서늘한 지역에 속하는 외로운 산과 그 인근은 겨울이 찾아오면 혹독한 바람과 부족한 식량에 대비해야만 했다. 여기에 눈이라도 많이 내리는 날이면 호수마을은 거의 모든 업무가 마비되었고,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춘 데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에레보르는 요새로서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는 만큼 겨울준비가 무척 중요한 사안에 속했고 그래서 이 시기의 드워프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소린, 내가 도와줄만한 일은 없어요?"
"아니, 이건 우리가 직접 하는 게 낫다. 여길 되찾고 첫 겨울을 나는 거니까 확실하게 다시 익혀두지 않으면 안 돼. 지금은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때니까 주의하도록 하고."
"오, 어.... 으음. 알았어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빌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린은 그제야 만족한 듯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 처음엔 드워프와 호빗 간의 전혀 다른 습성이나 생활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충돌을 일으켜 온 그였던 만큼, 아직 빌보에 대해 잘 모르는 혈기왕성한 드워프들이 쓸데없는 호승심으로 그의 호빗을 귀찮게 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일일이 옆에 붙어다니거나 원정대원을 붙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미리부터 다짐을 받아 두는 쪽이 훨씬 더 이득이었던 것이다. 일과 자신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무섭게 집중하기 시작한 소린을 보며 빌보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내 포기하고는 살금살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소린은 아마 점심때가 되어서야 그의 부재를 눈치채리라.
빌보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에레보르의 입구(출구로도 사용되지만)를 향해 걸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지금 이 시간대에는 대부분의 드워프들이 광산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감별하거나 가공하는 드워프들도 거대한 작업대 앞에 보이질 않았다. 에레보르를 탈환한 소린 오큰쉴드와 그 원정대가 여기뿐만 아니라 중간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영역침범을 무척 불쾌하게 생각하는 다른 드워프들에게 있어서 빌보의 존재란 이질적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나마 최근에는 발린이 소린의 명으로 빌보에게 어떤 시비나 위해를 가하는 자가 있다면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는 포고령 비슷한 것을 내렸기에 노골적인 시선이나 무례한 언행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어디에든 멍청한 이는 있는 법이었다. 그런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소린은 지금 이 시기엔 주의하라고 빌보에게 따로 언질을 준 것이다.
"아예 데일에서 사나흘 정도 있다가 올까?"
무심코 생각을 입 밖에 흘려내던 빌보는 이내 혼자서 픽 웃고 말았다. 반나절 정도의 외출에는 소린도 그닥 신경쓰지 않았지만, 하루를 넘기는 일정이 될 경우 대체 왜 그런 일정을 잡았으며 혼자서는 위험하다는 둥 볼 것도 없는데 자꾸 어딜 나가냐는 둥 마치 반려자를 의심하는 사람처럼 굴곤 했던 것이다. 안 그러게 생겨서는, 역시 사람, 아니 드워프는 같이 지내봐야 안다니까.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빌보는 암, 암 하고 격하게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 앞에 어느새 에레보르의 거대한 입구가 떡하니 서 있었다. 경비원들은 빌보를 보고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주었고, 그는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빌보는 문자 그대로 입을 쩍 벌리며 굳어버렸다.
"오, 세상에. 눈이라니...."
흰 눈송이가 하늘에서 소리도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땅에 쌓이고 나무와 바위, 산에 쌓여서 온통 흰 색으로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빌보는 교양없게 딱 벌어진 입을 수습하는 것도 잊은 채 눈 앞의 진풍경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샤이어는 일년동안 거의 대부분이 따뜻한 곳이라 눈 구경을 하려면 정말로 운이 좋던지 아니면 마을을 벗어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샤이어의 호빗들은 이미 알려졌다시피 모험이나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 눈을 볼 가능성이 남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빌보는 천천히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손을 쭉 뻗었다. 반짝이는 눈송이가 손에 닿아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모습이 무척 애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빌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 보푸르! 구경 나왔어요. 다들 바쁜데 제가 도와줄 일은 없다고 해서... 보푸르야말로 어떻게?"
"데일에 뭣 좀 사러 왔다가 들어가는 길이지. 눈이 오길래 서둘렀어. 그보다 손 시렵지 않아?"
보푸르가 빌보의 맨 손을 가리키며 여상히 물었다. 빌보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았던 손 끝에 한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타고 올라와서 간지럽고, 찌릿하고, 차가운 감각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좀 그런것도 같네요. 아무 생각 없이 나왔어요."
"그럼 이거라도 좀 끼고 있어. 나중에 주면 되니까."
불쑥 눈 앞에 들이밀어진 것은 속에 부드러운 털이 있는 가죽 장갑이었다. 고마워서 어쩌죠, 보푸르. 빌보는 어쩔줄 몰라하며 장갑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만지기만 해도 벌써 손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난 들어갈테니 너무 늦게까지 놀진 마!"
"노골적으로 논다는 말 들으니까 좋네요! 이따 봐요!"
빌보는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하고는 돌아서서 눈이 많이 쌓인 곳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한창 자라는 중인 식물이나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나니 실질적으로 눈이 쌓인 장소가 크진 않지만, 이 정도면 확실하게 작은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빌보의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엄청나게 뛰어난 기술을 가진 건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그는 눈을 뭉쳐서 동그랗게 굴리면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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