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샤이어에서 살고 있었을 때, 빌보는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을 보냈다. 마을에서 장을 보고, 가끔 기분이 나면 근처로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마을 경계를 지나치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친척들과 술을 마시거나 저마다의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 뽐내기도 했었다. 식량 창고를 채우고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행복을 즐기는 것, 그게 바로 호빗이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빌보는 처음 에레보르를 수복하고 난 뒤 광산과 요새를 바삐 오가며 일에 몰두하는 드워프들을 보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대충 때우고 일, 일, 그리고 또 일이었다. 마치 일에 중독된 것마냥 하루종일 어떤 무언가에 투자하고 치중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는 거의 농땡이를 피우지 않았다.
며칠간 그런 그들의 모습을 충분히 관찰한 빌보는 방 안에서 뱅글뱅글 돌며 고민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 드워프와 호빗은 그 생활양상이 같을 수는 없었고 이것을 어떤 기준을 가지고 비교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호빗이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다고 해서 그들이 게으른 게 아닌 것처럼 드워프들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일에 몰두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지나치게 외곬수적인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빌보는 그들 사이에서 평소처럼 지내는 것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하던 차였다. 뭐라도 하면 좋을텐데, 여기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꽤나 한정되어 있었다. 가진 기술이나 능력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겠지만. 결국 빌보는 백엔드에서 가끔 심심풀이로 하던 손뜨개를 떠올렸고 겸사겸사 이 삭막한 에레보르에 몇 가지 장식품을 추가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즉시 재료를 구입하는 일에 착수했다.
"요새 자주 바깥에 나가는 모양이더군."
"아, 필요한 게 있어서요. 데일은 정말 좋은 마을이더군요! 덕분에 새로운 걸 만들어볼 수 있겠어요."
"만들다니? 뭘 만들 생각이지?"
"금방 알게 될 거에요. 거의 다 준비했거든요."
수수께끼같은 말을 하고 빙긋 웃어보이는 빌보를 보며 소린은 이 깜찍한 호빗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에 대해 잠시간 조사인원을 꾸려볼까에 대해 생각했으나, 안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 많은 차에 그런 식으로 인력을 낭비할 수는 없었기에 바로 그만두었다(필리와 킬리는 먼저 자처하여 나설 것 같았으나 그 둘은 더더욱 논외로 쳐야 했다). 무척 다행스럽게도, 소린의 작은 의문에 대한 답은 아주 빨리 찾아왔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물어도 되나?"
"이건 손뜨개라는 건데 꽤 재미있어요. 시간 보내기에도 좋고 유용하고."
".....보통 그런건 여자들이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 남녀차별적 발언이군요. 우린 그런 거 없어요, 하고 싶으면 하는거지."
소린은 복잡한 얼굴로 바로 근처의 의자에 앉아 즐거운 듯이 손뜨개라는 것을 하고 있는 빌보를 응시했다. 자그마한 체구와 조용한 평화를 즐기는 것에 비해 그는 상당히 터프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소린조차 때로 놀라곤 했는데, 이런식으로 손재주가 필요한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전쟁이나 험한 여정과는 거리가 먼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만일 빌보의 나이가 더 어렸다면 소린은 다양한 의미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지금은 뭘 만드는 건지 궁금하군."
"오늘은 찻잔 받침용으로 쓸 걸 뜨고 있어요. 어렵지도 않고, 여러 개를 한꺼번에 하기에도 좋거든요."
빌보의 손가락이 바늘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다음 동작을 이어갔다. 드워프 수염 맙소사. 소린은 속으로 탄식하며 눈 앞에 있던 서류들 중 아무거나 한 장을 급하게 집어들었다. 대낮부터 이런 식으로 혼자 도발당하는 건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특히 빌보가 몰두하고 있을때는 더욱 그랬다. 그는 애써 남은 시간동안 해결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저녁에는 방에 틀어박힐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일이란 오늘도 내일도 끊이지 않을테니 당장 급한 것들만 처리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손뜨개 하나로 너무 멀리 가버리고 있는 소린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빌보는 손 안의 결과물을 즐겁게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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