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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기
"....이건 이렇게 하도록 해. 다음."
소린이 서류를 발린에게 넘기며 짧게 목을 가다듬었다. 이상하게 아침부터 목이 갑갑하고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꼭 무언가 걸린 것도 같은데, 물을 마셔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술술 넘어간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하고 나면 몇 번이고 힘을 주어 목소리를 다잡아야 했다.
최근 드워프어를 배우는 재미에 푹 빠졌는지 근처에서 도서를 필사하고 있던 빌보가 참지 못하고 시선을 올려 소린을 바라보았다.
"소린."
"왜 그러지?"
"감기 걸렸어요?"
".......아니."
약간의 간격을 두었지만 재고 없이 튀어나오는 부정의 대답을 들으며, 빌보는 펜을 내려놓고 발린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눈치 빠르고 현명한 드워프인 그는 간단한 서류를 책상위에 남겨두고 그대로 집무실을 나가 문을 닫았다.
둔중한 문이 닫히자 소린이 습관적으로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아침에도 상태 안 좋았잖아요. 어디 좀 봐요."
"괜찮아. 잠이 덜 깨서 그런 거다."
"그런것 치고는 창백했는데. 목 답답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거."
빌보가 손가락으로 목 부근을 가리켜 보이자 소린은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대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바로 이럴 때가, 놓칠 수 없는 빌보의 한숨 포인트였다. 이 완고하고 자존심 센 드워프는 막 재건하기 시작한 왕국의 업무에 몰려서
매일같이 강행군을 되풀이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질 않았다.
칼을 든 전투는 끝났지만 아직도 내부적인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빌보는 최대한 그가 쉬는 시간만이라도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게다가 요 며칠째 늦게까지 서류를 보고 드왈린과 요새의 보안을 점검한 다음 새벽에나 들어오던 소린은
오늘 아침부터 영 수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따스한 차를 건네며 잡아본 손 끝은 차가웠고, 표정은 창백했으며, 뺨에는 약간 열기가 있었다.
설마 감기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 빌보는 가능성을 애써 잡아누르며 그에게 차를 한 잔 더 권헀었다.
"감기가 확실해요. 걸려본 경험자로서 장담하죠."
"그냥 목이 좀 불편한 것 뿐이야. 호들갑 떨지 마."
"오, 나왔네요. 당신의 근거
없는 자신감."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니, 감히."
소린은 낮게 으르렁거리듯 위협적으로 말을 뱉었다. 하지만 빌보도 이제 그와 지낸 지 수개월이 지난 베테랑으로, 그런 것에 일일이
놀라거나 상처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럴 땐 조금 아슬아슬하게 승부욕을 건드려서 제 발로 넘어오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방법임을 깨닫는 경지에까지 올라 있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럼 나랑 내기해요."
"무슨 내기?"
"내가 이기면, 내일 얌전히 누워 있기.
당신이 이기면... 흠. 밤에 원하는 거 다
들어 줄게요."
"....정말인가?"
"난 약속을 잘 지키는 호빗인 걸요, 잘 알고 있겠지만."
"좋아. 후회하게 될 걸."
소린은 벌써부터 승자가 된 기분인지 입가에 삐딱한 미소를 띄우며 빌보의 허리를 끌어당겨 이마에 입맞추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죠. 들릴락 말락하게 속삭이며 빌보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
"거 봐요, 내가 이겼네. 하루동안
얌전히 누워 있기 당첨되셨습니다, 소린 전하."
"......이건 음모야."
진찰을 끝낸 오인이 키득거리며 방을 나서자 소린이 잔뜩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왕꽃잎풀을 달인 물로 차를 우려내며 빌보가 노래하듯 말했다.
"열이 있고, 목이 답답하고, 피곤하고, 얼굴이 창백하면 그게 바로 감기라는 뜻이죠. 음모는 킬리와 필리가
꾸미는 그런 거고요."
"그 녀석들은... 아직도 철이 없어서."
"됐으니까 이거 마시고 오늘은 일찍 자요. 감기엔 맛있는 음식이랑 잠이
최고에요."
".....그건 늘 그런거 아닌가? 네게는."
찻잔을 받아들며 소린이 여상히 던지자 빌보는 손가락을 들어 까딱여 보였다.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만 말해두죠."
결국 소린은 다음날까지 미열로 방에 누운 채(혹은 앉아서) 감기에 좋다는 빌보의 특식과 향기로운 차를 곁들인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릴수는 없었지만, 그가 사랑하는 호빗과 모처럼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 달콤했던 덕분인지 감기는 이틀만에 말끔히 다 나았다.
여담으로는 그날 밤의 침대가 조금 소란스러웠다는 것과, 바톤 터치를 하듯 이틀쯤 후 빌보가 감기에 걸린 것 정도였다.
4. I can't let you go
빌보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익숙한 연초의 냄새, 편안한 의자와 낡은 책들.
정원에서 피어나는 색색의 꽃과 잘 익은 생선냄새, 따뜻한 차 한 잔.
호빗의 삶을 더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일상적인 것들이 모두 그와 함께 있었다.
마치 여행을 떠나기 전과도 같은 익숙함이었다.
벽난로 근처에 앉아 오래 된 지도를 펼치고 바깥의 놀라운 일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드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빌보."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풍경을 흩어뜨렸다. 천천히 백엔드의 풍경이, 그의 하루가 무너져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결국, 꿈인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읽고 싶어했던 책을 찾았다."
소린이 조금 오래된 도서를 침대 근처에 올려두고는 천천히 팔을 뻗어왔다.
빌보는 얌전히 그의 손바닥에 뺨을 대고 눈을 감았다.
투박하지만 강인한 손. 에레보르를 탈환하고,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자신을 여기에 가둔 손.
빌보가 거부의사를 보이지 않자 그는 안도한 듯 참았던 숨을 뱉어내고는 아예 품을 열어 그의 호빗을 끌어당겨 안았다.
자그마한 몸이 빈틈없이 폭 안기는 모양새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소린.."
"안 돼."
"...제발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안 된다고 말했잖나."
금세 날을 세우는 목소리에 빌보는 어깨를 움츠리며 소린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었다. 벌써 몇 달째 이런 식이었다.
샤이어에 보내주기를 청하면, 발에 무거운 족쇄를 채우고 결코 방 밖으로도 내보내주질 않았다.
아마도 다른 이들은 벌써 그가 고향에 도착했으리라고 믿을 것이다. 빌보는 소린의 방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이후로 다른 드워프는 커녕 하늘도 거의 보지 못했다.
난 너를 보내줄 수 없다, 빌보 배긴스.
그저 주문처럼 속삭여오는 한 마디.
달콤한 사랑고백이 아닌, 어둡고 끈적한 그 말에 빌보는 어느새 몸도 마음도 온통 묶여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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