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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오해와 반목을 끝내고, 에레보르와 어둠숲 간의 합동 연회가 열린 것은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저녁이었다. 본래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다시금 맺어진 동맹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연회 장소는 어둠숲의 널찍한 광장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날만큼은 드워프도 엘프도 관계 없이 주어진 음식과 술을 즐기며 자유롭게 연회에 참석할 수가 있었다. 물론, 그 둘 중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간달프라던지 빌보도 함께 있었지만 말이다.
“가게 주인이 말했다네~ 저 사기꾼이 술을 훔쳐갔다고!”
흥겨운 노랫소리와 조금 요란한 춤을 추는 몇몇 드워프들과 (중심에는 보푸르가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리고 그걸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며 제법 장단을 맞추는 몇 엘프들, 혹은 아예 간단한 율동으로 함께 어우러져서 저마다의 흥을 즐기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평화롭고 왁자지껄한 축제의 장이었다.
특히 빌보는 유일한 호빗 참가자로서 많은 엘프들의 주목을 받았고, 어둠숲의 왕 스란두일을 시작으로 여러 엘프들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종족을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샤이어나 호빗에 대해 설명하면서 빌보는 오랜만에 이야기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레보르 원정대는 그의 고향이나 식성, 특징, 축제, 역사 등에 대해 조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고 그것은 스마우그에게서 외로운 산을 탈환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소린이나 오리, 발린 정도가 그의 향수병을 달래줄 겸해서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해오긴 했으나 이렇게 진심으로 그들 호빗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엘프들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 마음먹었던 것보다 더욱 신이 나서 간달프와 함께 보따리를 풀어놓았고 엘프들은 무척 흥미진진한 얼굴로 들으며 간혹 질문하기도 했다.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았다니 미처 몰랐군.”
잠시 목을 축이러 테이블에 들린 빌보의 등 뒤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뻔히 알아낼 수 있는 존재감, 특유의 분위기. 그는 포도주 잔을 손에 든 채 조금 과장된 몸짓으로 홱 돌아섰다.
“소린. 갑자기 나타나면 놀라잖아요, 이전부터 말했지만.”
“그랬나? 보통은 근처에서 눈치채고 돌아봤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빌보의 타박 어린 말에 소린이 약간 심술궂은 어조로 팩 되받아쳤다. 이 호빗은 지나치게 무방비해서, 가만히 놔두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어딘가 휩쓸려가 있곤 했다. 어젯밤에는 몇 번이고 침대에서 뒤척이는 바람에 잠을 설쳐놓고는 이렇게 쌩쌩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아무래도 엘프들을 만난 것이 무척 즐거운 모양이지. 그는 속으로 이를 갈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야 난 목이 말랐으니까 포도주에 정신이- 잠깐, 소린!”
“이제 그만하면 된 거 아닌가? 적당히 하고 이리 와.”
“한창 재미있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샤이어의 호빗과 브리의 호빗이 다른 이유라던지 성격이나 그런 것들-”
“어차피 오늘 듣고 내일 잊어버릴걸. 뭐하러 입 아프게 설명하고 있지? 시간 낭비야.”
잔을 쥔 반대쪽 손을 잡혀서 반 강제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빌보는 오늘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보통 소린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 때는, 몇 가지 정해진 이유가 있었는데 (그걸 일일이 나열할 순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것이 없었다. 엘프들과 이야기한 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 먼저 화해의 제의를 받아들인 건 소린이면서! 빌보는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되어 속절없이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갔다.
“네가 누구와 같이 여기에 왔고, 또 누구와 돌아가게 될 건지를 잊지 말도록, 빌보.”
“당신 질투한 거에요?”
“나는 단지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이야. 틀렸나?”
혹시나 싶어 슬쩍 미끼를 던져보니 소린은 그걸 교묘하게 피하며 시선도 다른 쪽으로 던졌다. 이 드워프 양반 좀 보게. 빌보는 미간을 슬 찌푸렸다. 솔직하게 한 마디만 해도 곧장 자신의 옆으로 달려올 것을, 꼭 이렇게 멀리 돌아가는 방법으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곤 하는 것이 그의 드워프 왕의 방식이었다. 그래놓고 굳이 필요하지 않을 때엔 지나치게 솔직한 말을 하는 걸 보면 낮과 밤의 갭이... 빌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머릿 속의 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깊게 파헤칠수록 자신이 지는 싸움이었다.
“알았어요. 그럼 같이 한 잔 해요. 당신은 딱 이것까지만 마시기로 하고.”
“그 정도로 약하진 않아.”
“아하. 그래서 얼마 전에 나랑 내기한-”
“이 잔만 마시고 산책이라도 하지.”
소린은 냉큼 말을 자르며 포도주잔을 들어올렸고, 빌보가 웃음을 참으며 그 잔에 건배하듯이 잔을 가져다 대었다. 드워프와 엘프의 연회는 밤이 깊어가도록 계속되었으나, 오직 소린과 빌보만이 양해를 구하고 먼저 에레보르에 돌아갔다는 건 측근들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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