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보는 도서관의 책들 속에 푹 파묻힌 채로 오래된 고서들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소린이 대외 일정으로 무척 바빴기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급하게 뛰쳐나간 흔적이 역력한 옆자리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아침 인사를 건넬 수 없었다는 섭섭함을 애써 떨치며 방을 나섰다. 자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아는 드워프는 도중에 우연히 만난 오리, 보푸르, 발린 셋 뿐이었다. 드워프들은 책을 즐겨 읽는 종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간 역사를 훌륭하게 기록할줄은 알았다. 불멸의 두린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이 드워프어로만 쓰여져서 무척 읽기 어려웠지만, 다행히도 빌보의 이런 고충을 알아챈 오리가 공용어로 쓰인 고서들이 있는 자리를 찾아내서 알려 준 덕분에 빌보는 몇 시간이고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소린은 같은 시각에 왕좌에 앉아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난 주에 그가 세웠던 계획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지금쯤 빌보를 데리고 호수에 가서 낚시를 가르쳐 주고 있었을 것이다. 2주일 동안 거의 쉬지도 않고 중요한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자기 직전을 제외하곤 거의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던 그의 호빗과 모처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터였다. 이틀 전 갑자기 철산에서 날아온 서신 때문에 무슨 중차대한 일인가 싶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를 마련했건만, 대표격으로 온 드워프들은 그에게 터무니없는 조건을 가지고 와서 교역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래도 동족이자 다섯 군대의 전투에서 상당한 전력이 되었던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에 최선을 다해 응대하고는 있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이런 조건따위로 에레보르를 얕보러 왔다면 큰 오산이라며 화를 내고 쫓아내고 싶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바로 옆에 선 발린이 눈짓으로 참으라는 사인을 보내왔고, 소린은 속으로 이를 갈며 왕좌의 손잡이 부분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그래봐야 돌이라 소리도 뭣도 나질 않았지만.



"-해서, 빠르면 다음 달부터 시작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희들의 요청입니다."


".......다음 달?"


"에레보르 재건도 순조로운 상황이니,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소린의 인내심이 뚝 하고 끊어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발린이 뒤늦게 알아채고 어떻게든 입을 열어 대충 무마해보려고 시도했으나, 이미 소린의 얼굴에는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 다음 달? 형편없는 조건부터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감히 에레보르 재건 상황을 논한 데다가 일정을 제멋대로 잡아서 요청해? 



"철산에서 어떻게 에레보르 재건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건가?"


"그게 무슨...."


"계획들과 실제 업무들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모자라고 바쁜 이 시기에, 교역이라니. 가능하리라고 보나?"


"허나, 저희가 들은 소식으로는..."


"그래, 그 소식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들었는지 정말 궁금하군. 나조차 모르는 걸 철산에서 알고 있다니 말이야."



소린은 낮게 으르릉거리듯 말하며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철산의 드워프들은 동요하여 서로를 마주보고 웅성대었고, 대표로 나서서 말하고 있던 자는 뻘뻘거리며 입을 뻐끔거렸다. 내부의 첩자를 찾아내는 작업도 필요하겠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이 귀찮은 불청객들을 쫓아내거나 다른 이에게 상대하도록 두고 여길 벗어나는 것이 소린의 가장 시급한 목표였다.



"발린. 나머지는 맡기겠다."


"어딜 가십니까?"


"바람을 쐬고 싶군."


"찾으시는 거라면 도서관 쪽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참고하지."



여전히 우왕좌왕하며 어쩔줄을 모르는 철산의 드워프들을 뒤로 한 채, 소린은 성큼성큼 걸어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참아줄 수가 없었다. 만일 이런식으로라도 뛰쳐나오지 않았더라면 안 좋은 쪽으로 그의 성격이 폭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기나긴 복도와 홀을 지나고 계단을 몇 개 오르고 나자 드디어 도서관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소린은 그의 호빗을 찾아내기 위해 좀 더 걸음을 재촉했다. 먼지 냄새 가득한 책장들을 지나치던 도중 드디어 그의 시선 한 켠에 익숙한 곱슬머리가 들어왔다. 



"빌보!"


"....? 소린?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줄 알았어요?"


"여기에서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것 같나? 그보다 이리 와."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소린, 숨 막혀요. 좀 살살...."



 빌보는 느닷없이 나타나 단단히 제 몸을 끌어안는 소린의 팔 안에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사정은 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끌어안아온 탓에 읽고 있던 책은 바닥에 떨어졌고, 근처에 쌓여 있던 몇 권의 책들도 바닥에 흩어졌다. 어지러이 먼지가 날리어 빌보가 조금 콜록거리자, 소린은 아예 빌보를 품 안에 가두듯 포옹해 버렸다. 아담한 그의 호빗은 뭐라고 웅얼거리며(소린의 옷에 파묻히는 바람에 잘 들리지 않았다) 잠시 바르작거렸지만 이내 얌전해지더니 포기한 듯 마주 팔을 둘러 안아왔다. 그제서야 소린은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며 조금 힘을 풀고 온전히 제 품 안의 체온을 즐겼다.



"어디 갈 때는 나한테 미리 말하기로 했을 텐데."


"오늘 아침부터 당신 바빴잖아요. 인사도 못 할 정도로..."


"그래도, 와서 말하고 가도록 해."


"....이럴 때 당신이 고집쟁이라는 걸 느낀다니까요."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다."



 금세 여유를 되찾은 소린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되받아쳤고, 빌보는 체념한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소린의 가슴에 기댔다. 고집세고 자기멋대로인 드워프 왕은 자신의 이점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또한 빌보가 그에게는 한없이 약해진다는 것도 숙지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주도권이 소린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후엔 낚시하러 갈 수 있는지 물어볼까. 빌보는 손가락으로 소린의 땋은 머리를 매만지며 작게 웃음지었다. 여러 번 양보했으니 오늘 한 가지 정도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소린도 그의 작은 호빗에게는 한없이 약해졌으므로.




by 치우타 2014. 1. 23. 23:21

 눈을 굴리는 작업은 생각보다 쉬웠으나, 문제는 애써 뭉쳐두면 자꾸 스르르 풀어져 내리고 만다는 점이었다. 뭔가 이렇게 단단한 느낌으로 덩어리가 되는 게 아니라 포슬한 눈가루를 억지로 모아둔 것 같았다. 빌보는 어정쩡하게 모아진 눈덩이들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샤이어에는 눈이 거의 오질 않으니 이런 식으로 뭔가를 만들 생각은 해 본적도 없었거니와 운이 좋은 날엔 그저 되는대로 뭉쳐서 눈싸움에 뛰어들기에 바빴다. 눈뭉치, 눈덩이.... 제자리를 맴돌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드리던 빌보는 다음 순간 고개를 번쩍 들어 근처의 작은 웅덩이를 보았다.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것과 비슷하게, 눈뭉치를 조금 적시면 좀 더 단단하게 뭉쳐지지 않을까? 그는 고민하는 걸 그만두고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무서운 기세로 일을 처리해나가던 소린이 빌보가 어딘가로 향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빌보 자신이 예상한 대로 점심 즈음이었다.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제안서를 읽었으며 온갖 집무와 시스템, 에레보르의 보물을 관리하거나 드워프들의 불만에 대해서도 조금씩 따로 조사하고 있던 그로서는 숨 쉴 시간도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빠르던 늦던 언제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점심식사도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법이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발린의 차분한 목소리에 소린은 드디어 펜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빌보는? 어디 갔지?"


"아까 성문 쪽으로 나가는 것을 봤습니다만."


"나갔다고? 어딜? 데일에 간다고 하던가? 아니면 호수마을?"


"진정해요, 소린. 그는 성문 바로 근처에 있다고 아까 보푸르가 알려왔습니다."


"성문 근처... 다행이군. 최근 늑대들이 심심찮게 내려온다고 해서 걱정이라.... 별 일 없겠지."


"어차피 그도 꽤 터프한 사내잖습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발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소린은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되어 괜시리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너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말라고는 했건만, 그래도 점심은 같이 먹고 싶었는데. 그는 심술이 삐죽삐죽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수염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들어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빌보. 



"...?! 방금 그거 뭐지?"



 빌보는 급작스레 끼쳐온 한기에 놀라 몸을 움츠리며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따란 평지와 웅장한 에레보르의 성, 그리고 새하얗게 쌓인 눈과 자신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산에서 심심찮게 늑대나 들개가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빌보는 서둘러서 눈뭉치를 다듬었다. 몸통에 조금 두꺼운 나무를 끼우고, 머리에는 머리칼처럼 약간의 재주를 부려서 풀로 꾸미고, 코까지 바로 세워준 다음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펴고 섰다. 조금 전까지 힘 없이 흘러내리던 눈뭉치가 있던 자리에는 귀여운 사이즈에 비해 꽤나 엄숙한 표정을 한 눈사람이 있었다.



"생각보다 꽤 닮은 것 같아. 특히 얼굴이."


"그렇군. 연구 열심히 했는걸."


"맙소사, 세상에! 소린!! 당신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심장마비를 유도했다간 국물도 없을 줄 알아요!"



등 뒤에서 갑작스레 불쑥 튀어나온 소린의 모습에 빌보는 소릴 꽥 지르며 돌아섰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니고 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 이젠 안 그런 적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소린은 이런 식으로 빌보를 놀래키곤 했다. 전투에 익숙한 드워프 왕으로서 기척도 내지 않고 살금살금 빌보의 등 뒤로 다가와서는 귓가에 속삭이거나, 포옹하거나, 일부러 더 놀라는 모습을 보려고 큰 목소리를 내거나 하는 식의 아이같은 장난이었다. 저 여유로운 얼굴에 눈이라도 던져주지 않고는 도저히 못 견디겠는걸. 빌보는 이내 침착한 얼굴로 발 아래의 눈을 금세 뭉쳐서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 눈사람은 나인가? 머리도 만들었군."


"그래요. 당신이에요, 나중에 보여주려고 했더니만.... 에잇!"



작은 손이 앞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소린의 얼굴은 기가 막힌 스트라이크 눈덩이를 정면으로 맞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빌보의 손 힘이 약했다는 것이고, 눈이 단단하게 뭉쳐지지 않아 크게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거였다. 소린은 입가에 짖궂은 미소를 한가득 떠올렸다.



"후회할텐데, 빌보."


"그렇게 만들 수 있으면 해 봐요! 아니면 그 시간에 던지던가!"



또 다시 눈덩이가 날아왔고 이번엔 여유롭게 고개를 틀어 피해낸 소린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어깨에 눈뭉치를 맞았다. 잠시 말문을 잃고 어깨와 빌보를 바라보는 소린이 좀 귀여워서 빌보는 애써 참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오, 지금 웃었다 이거지. 소린의 승부욕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불길이었다. 가여운 빌보는 상대의 어떤 스위치를 켰는지도 모른 채 활짝 웃으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쯤 눈에 파묻히게 해 두고, 그대로 성에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린은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노련한 손놀림으로 눈을 조금 단단하게 뭉쳤다. 


-결국 눈싸움은 빌보의 완전한 패배로 돌아갔고, 벨트 없는 챔피언이 된 소린은 기진맥진한 빌보를 들고 그대로 침실에 직행했다고 한다.

 

by 치우타 2014. 1. 22. 23:30

 소린은 불가 앞에 앉아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크 무리를 따돌린 것은 좋았지만, 조랑말 없이 걷고 뛰어서 움직여야 하는 그들이 언제고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계속해서 도망치듯 달려온 길에 모두 지쳤는지 얕은 숨을 내쉬며 곯아떨어졌다. 특히 평소에 크게 코를 골며 자던 봄부르조차 걱정될 정도로 조용하게 숙면하고 있는 상태였다. 불이 지나치게 약해지진 않도록 불쏘시개와 작은 장작으로 조절하며, 그는 문득 시선을 바로 옆의 호빗- 빌보에게 돌렸다. 빌보는 약간 불편한 자세로 담요를 거의 얼굴까지 끌어올린 채 잠에 빠져 있었다. 소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쓰다듬었고, 빌보가 그 기척에 어깨를 조금 들썩였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에레보르를 잃고, 인간들의 도시와 황야를 떠돌며 그는 내내 겨울의 차가운 삭풍과 희뿌연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뜨거운 불 앞에서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동안 죽어간 동족들과 불을 뿜는 용을 떠올렸고, 소식을 모르는 아버지와 목이 잘린 할아버지의 얼굴이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소린은 결코 어떤 것도 용서하거나 잊어버릴 수 없었다. 좋은 것은 그에게 사치였으며 사람들의 값싼 동정이나 무심한 눈길, 호기심에 더욱 경계하고 날을 세웠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고, 타인에게 정을 주거나 받을 생각따위 요만큼도 하지 않았다. 


....이 작고 경이로운 호빗을 만나기 전까지는.


  소린은 이번엔 빌보의 뺨을 살며시 매만졌다. 힘들고 괴로운 여정일 텐데도,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부지런히 그와 다른 드워프들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때로는 더 좋은 길을 제시하기도 하고, 지름길을 찾아내기도 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무겁고 지친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빌보는 한낮에 떠오른 태양처럼 따스했고, 부드러운 존재였다. 그의 옆에 있으면 고향을 잃은 후로 느껴보지 못했던 정착감, 안도감 같은 것이 조심스럽게 마음 구석 어딘가에 자리잡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더불어 욕심이 났다. 언제까지고 복수와 의무에 떠밀려 방황하는 삶이 아닌, 정착하여 그 자리에 충실하는 그런 삶이. 그리고 그것은 빌보의 옆에서라면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려한 에레보르의 황금빛 방 대신에 소박한 백엔드의 난롯가 앞에서 나란히 앉아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일상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코 가질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작은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이 그 때는 아니었다. 아마도 소린이 원하는 평범한 삶이란 힘든 여정의 끝에서 스마우그를 물리치고 에레보르를 되찾은 다음, 동족들의 삶을 다시 일구고, 그 자리를 여동생과 조카들에게 물려준 후 비로소 그가 얻을 수 있는 최후의 보상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언제쯤 올까. 그때까지 너는 내 옆에 있어 줄까. 따스한 옆자리를 내게 내어 줄까. 세상 모르고 잠든 빌보에게 들리지 않을 질문을 던지며, 소린은 가만히 몸을 숙여 빌보의 이마에 입술을 찍어눌렀다. 


by 치우타 2014. 1. 21. 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