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뿜는 사악한 용, 스마우그로부터 되찾은 에레보르에는 매일같이 해야 할 일들이 차고 넘쳤다. 오죽하면 드워프가 아닌 빌보마저 발린이나 오리의 일을 도와야 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본래 그는 다섯군대의 전투가 끝난 후 소린과 원정대원들의 생사를 확인한 뒤 간달프와 함께 떠날 예정이었으나, 침상에 누워 거의 죽음에 이를 뻔 했던 깊은 부상들 때문에 신음하면서도 간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사죄의 말을 건네는 소린의 모습을 본 다음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둘의 사이가 평범한 원정대의 리더와 일원이 아니었다는 것도 물론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아무튼 부상에서 회복된 소린이 정무를 보기 시작한 때부터 본격적으로 에레보르는 소란스럽고 정신없는 틈바구니에 매일같이 놓여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식사를 거르는 이들이 속출하는 바람에, 보다 못한 빌보가 바르드의 도움을 받아 식재료를 조달하고 어떻게든 최소 하루 세 끼는 챙길 수 있도록 했다. 호빗의 기준으로 봤을 때 세 끼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기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경지였지만 워낙 상황이 상황이라 불평할 틈도 없었기에 빌보는 묵묵히 수긍하기로 했다(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그가 오랜 여정을 겪으며 거친 생활에 익숙해진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나날들 속에서 드워프들은 일에 몰두하느라 밥을 거르는 단계를 넘어서 잠을 빼먹거나(고의든, 까먹었든간에) 씻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호빗 맙소사! 빌보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진심으로 기함했다. 여행하는 길에 비를 맞기도 하고, 거미줄을 뒤집어쓰거나 물에 쫄딱 젖거나 하는 일들을 겪으며 그런 상황을 어느정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쩔 수 없는' 경우였을 뿐이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 중 그나마 면식이 있는 원정대원들에겐 반쯤 농담을 섞어서 넌지시 청결에 대한 화제를 던져보았지만 다들 하하 웃고 마는 것이었다. 빌보에게 있어 드워프들에 대한 선입견이 하나 더 추가된 기분이었다.


거의 닷새만에 얼굴을 마주한 소린도 사실 여기에서 제외될 순 없었던 모양인지 그는 꽤나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빌보는 이번에야말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름 비장한 얼굴로 그의 앞에 걸어가 섰다. 그림자가 지는 걸 느낀 소린이 문득 고개를 들어 푸른 눈으로 빌보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들어줘요. 소린, 씻은 지 얼마나 됐어요?"


"....충분히 무례하고도 남는 질문이군."


"나도 알아요. 하지만 오늘은 말해야겠어요. 그래서, 얼마나 된 건데요?"


"흠.... 글쎄. 닷새 정도?"


"....지금 시간 돼요?"


"휴식 시간을 묻는 거라면, 한두시간 정도는...낼 수 있을 것 같다."


"잘 됐네요. 정말 잘 됐어요."



소린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꼽아보곤 납득하는 빌보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이 작은 호빗이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틈도 없이, 빌보가 그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고 몇 마디를 더 꺼내었지만 빌보는 소린의 손을 붙잡고 가보면 알 거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마치 제 집인 양 성큼성큼 나아가는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작게 웃음지었다. 평온한 시골 동네에 앉아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하던 빌보가 언제 이렇게 에레보르에 적응한 것일까. 사실 그가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걸 듣고 가장 기뻐했던 것은 아마도 소린이었을 것이다. 붙잡기엔 그가 내뱉은 저주스러운 폭언들이 너무나 무거웠고, 보내기엔 그를 아끼는 마음이 컸던 탓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속을 끓였는데 빌보는 뜻밖에 스스로 남겠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 때 그는 사실 당장이라도 그의 호빗을 끌어안고 수 없이 고맙다고 말하며 입을 맞추고 싶었으나 체면과 기타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하여 꾹 눌러 참았다.



"여긴.... 방이잖나. 왜 대낮에 여길-"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요."


"들어가라니, 어딜?"


"당연히 욕조지 어디겠어요! 지금 당신 정말.. 굉장하다구요. 다른 드워프들은 몰라도, 소린. 당신만은 안 되죠."


"안 된다니, 대체 뭐가... 영문을 모르겠군."


"그런 꼴을 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요! 왕으로서 좀 더 그... 품위라던지! 아무튼 빨리 들어가요!"



대체 왜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빌보가 투덜거리며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린의 클록을 냉큼 빼앗아 들었다. 그제서야 소린은 빌보의 말뜻을 이해하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옷가지들을 벗어 내려놓았다. 미리 준비해둔 것인지, 딱 알맞은 온도의 물이 기분 좋게 몸을 감싸오자 소린은 나직히 신음을 뱉었다. 



"언제 누가 손님으로 올 지도 모르고.. 하여튼 이런거 까먹지 말아요. 말하는 내가 더 민망할 지경인거 알아요?"


".....그렇게 걱정이면 매일 같이 들어오면 되는거 아닌가?"


"귀찮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그 정도야 뭐...."



시선을 비껴내며 대답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소린은 충동적으로 빌보를 끌어당겨 입맞추었다. 그 과정에서 손을 허우적대다가 물에 젖어버린 빌보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부러 그랬죠? 아니, 미끄러지는 것까지 생각하진 않았는데. 결국 드워프 왕의 회유와 끈질긴 유혹에 넘어간 빌보는 목욕에 동참했다가 저녁시간을 놓치는 사태를 맞이했대나 어쨌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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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홀릭 드워프들은 어쩐지 저럴것도 같아서 충동적으로 써봤는데 고자라 끝이 흐지부지함

언젠가 야한것도 쓰겠죠 뭘 ㅇㅅaㅇ  


by 치우타 2014. 1. 26. 23:52

 빌보는 느린 발걸음으로 산길을 걷고 있었다. 오늘은 모처럼 하늘이 푸르게 개어 무척이나 맑았고, 봄바람도 적당히 불어와 산책하기에는 최상의 날씨였다. 입가에 문 연초를 조금 게으른 손놀림으로 매만지며 그는 아무렇게나 근처의 바위에 앉았다. 이 시기에만 피는 꽃을 찾으러 온 길이건만 주변의 경치나 분위기에 홀려 자꾸만 이렇게 멈추어버리고 만다. 너무 늦어지면 손님이 집에 와도 만날 수가 없을 텐데. 빌보는 퍼뜩 꿈 생각이 떠올라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오늘 저녁이 될 지도 모른다. 점점 꿈을 꾸는 빈도수가 늘었고, 내용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 전 지나가듯 마을을 방문한 마법사인 간달프에게 상담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었다. 예지몽일지도 모르지, 빌보 배긴스. 언제나 자네의 주변을 정돈하며 때가 되면 찾아올 이를 기다리게. 그런 일일수록 아무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게 되니까 말이네.


 사실 빌보는 몇 달 전부터 같은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있었다. 또 재미있는 점은, 그저 반복만 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즐거운 저녁식사를 맞이하여 식탁 앞에 앉은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문객들이 줄줄이 찾아와 그의 식량창고를 거덜내 버린다. 간달프가 어째서인지 빌보를 설득하려고 하고, 그는 거절했지만 결국 따라나서게 된다. 오크들과 늑대, 거대한 곰, 환각을 보여주는 숲과 괴물 거미들... 여행은 전혀 순탄치 않았고 시련은 점점 많아지기만 했다.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반지와, 어떤 것을 찾으려는 일행들, 불을 내뿜는 용, 빛나는 돌에 얽힌 다툼과 오해, 커다란 전투- 마치 꿈 속에서 잘 쓰여진 책 한 권을 보는 것만 같은 긴박감과 스스로가 거기 참여하고 있다는 현장감에 빌보는 꿈에서 깨고 나서도 한동안 그 여운을 떨쳐낼 수 없었다. 게다가 꼭, 바로 엊그제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마치 꿈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루는 일행들 중 가장 가까웠던- 마치 연인같은 사이였던 이가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거의 죽음에 다다르는 걸 보았는데 그날은 종일 손이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꿈의 내용이 자세해지고 더욱 선명해질수록 빌보는 하릴없이 문가 근처에서 서성이거나, 벤치에 앉아 멍하니 연초를 태우는 날이 늘어났다. 책을 읽고, 시장을 다녀오고, 매일같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저녁이 되면 꼭 문 앞에 누군가 다다를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자신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절도있는 엄숙한 노크 소리가 들려오기만을. 


잘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 냅킨을 목에 걸고, 생선에 소금을 천천히 뿌리며 빌보는 오늘도 이렇게 지나가는군, 하고 체념했다. 그 때, 문 쪽에서 정확히 세 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 지금, 바로 나갑니다!"



가운을 여미고 허둥지둥 뛰쳐나가 문을 열자, 거기엔 꿈 속에서만 보던 이가 서 있었다.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의 검은 머리,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 길지 않은 수염. 정말 너무나 똑같아서 빌보는 지금이야말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따끔한 아픔이 금세 몰려와 그는 안도할 수 있었다. 



"......빌보."


"....소.....린...?"



눈 앞에 선 남자의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놀랄 겨를도 없이, 빌보 또한 어떤 이름을 주저하며 입에 담았다. 그가 꿈에서 부르던, 남자의 이름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에 무척 놀란 듯,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표정을 한 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빌보는 어쩐지 그 모습이 무척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는 성큼 거리를 좁히더니 팔을 뻗어 빌보를 가두듯 끌어안았다. 아, 꿈에서와 같구나. 낯설지 않은 체온, 차가운 바람과 바위의 냄새. 빌보는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남자의 등을 마주 그러안았다. 그 작은 움직임에 남자는 흠칫 떨더니 아예 고개를 빌보의 어깨부근에 파묻었다. 미안하다, 내가... 좀 더 일찍.... 너무 늦었을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남자의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에는 반 쯤 울음이 섞여 있었다. 


보는 그제서야 조금씩 꿈과 현실의 다리를 이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그 꿈들은 단순히 상상이 아니라, 그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아직 그걸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자신을 끌어안은 채 서투른 고백을 쏟아놓으며 울먹이는 남자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다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빌보는 넓은 등을 달래듯 토닥이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소린. 그 한 마디에 끌어안는 힘이 더욱 강해졌고, 빌보는 조금 등이 아파왔지만 어쩐지 남자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의 지루한 저녁 기다림도, 언제 가졌는지 모를 칼과 가방, 몇 가지 짐들에 대한 의문도 해결되었다. 어색하던 일상의 끝이 찾아옴과 동시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빌보는 기분 좋게 웃으며 눈을 감고 이 순간을 음미했다. 고소한 생선 냄새가, 완전히 식어 사그라들 때까지 둘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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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싶어 설명 추가. 빌보는 다섯 군대의 전투 때문에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설정으로 생각한 글입니다.

 소린은 에레보르 재건의 밑바탕을 다 마련해두고 빌보에게 달려왔지요. 그리고 해피엔딩.

by 치우타 2014. 1. 25. 23:44

 소린은 어두운 복도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일행과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닥 많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지금 스마우그에게 허무한 개죽음을 당할 생각같은 건 요만큼도 없었다. 어차피 요새 안에서의 길은 한정되어 있고 일행들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찾으며 각자 스마우그의 공격을 피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었다. 소린은 칼을 고쳐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왕가의 널따란 홀이 바로 코 앞이었다.



"소린 오큰쉴드! 거기에 있는걸 다 알고 있다. 어디에 숨어도 소용없어, 냄새가 나거든."


"느려터지고 멍청한 지렁이 주제에, 입은 쉴새없이 잘도 놀려대는군. 와서 잡아 보지 그래?"


"오, 안 되지. 이 게임의 주도권은 완전히 나한테 있다. 네가 찾는 것도, 네가 데리고 있던 것도 말이야."



사악하고 우릉대는 스마우그의 목소리가 홀 저편에서 들려왔고, 소린은 최대한 불 공격을 바로 피할 수 있도록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며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스마우그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완 다르게 어떤 여유 같은 것이 엿보였고, 말 끝부분엔 이상한 단어를 섞어 뱉고 있었다. 찾는 것? 데리고 있던 것?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아 경계하며 걸음을 늦추려던 때 스마우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네가 찾는 건 바로 아르켄스톤이라는 걸 안다. 이 번쩍이는 보석이 너희에겐 더없는 보물이니까."


"더러운 네 발 아래에 있기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물건이지. 애초부터 우리 것이었다."


"탐욕스럽고 멍청한 너희가 산으로부터 빼앗은 게 아니고? 어쨌든, 지금은 그걸로 논쟁할 생각은 없어. 다른 재미있는 게임이 준비되어 있다. 그래, 아주 흥미로운 게임이야."


"게임이라고?"


"간단해. 선택을 하면 되는 게임이다. 고르는 역할은 드워프, 네가 맡게 됐지."



 스마우그는 뻐기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꼬리를 크게 움직였다. 근처의 작은 동상 하나가 그 기세에 부숴졌고, 빼앗긴 집이 훼손되기까지하는 장면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엔 없는 소린은 이를 으드득 갈며 주변을 살폈다. 흩어진 원정대 일행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고, 스마우그의 발치 근처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고르는 역할이라니, 또 무슨 사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자, 시간이 없어. 난 호수마을 놈들을 먼저 처리하고 올 생각이거든. 선택해라, 드워프. 아르켄스톤인가? 아니면 네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인가?"


"내가 이 게임 따위에 참여하길 거절하겠다면?"


"그렇게 되면 오만한 드워프, 너는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 선택해라. 어느 쪽이지?"



 소린은 고민에 빠졌다. 아르켄스톤은 그가 찾아헤매던 오랜 목표였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 어떤건지 모르는 상태에서 바로 결정을 내려도 되는지가 의문이었다. 에레보르일 수도 있고, 혹은 아예 다른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만일 그의 짐작대로 에레보르나 혹은 다른 물건이라면 아르켄스톤을 먼저 찾은 후 언제든 되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린은 마음을 정하고 몸을 숨긴 채 외쳤다.



"네가 빼앗아간 모든 것을 되찾겠지만, 지금은 아르켄스톤을 택하겠다!"


"그럼 결정된 거로군! 어디 이걸 가지고 잘 해봐라!"



스마우그의 비웃음섞인 목소리에 뒤이어 어떠한 비명같은 것이 짧게 울리고, 이내 사그라들었다. 안 돼! 누군지 모르겠지만 익숙한 외침 또한 들려왔다. 소린은 가슴 속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황급히 앞으로 뛰쳐나왔고 스마우그는 날개를 펼쳐 호수마을을 공격하기 위해 날아가 버렸다. 그 거대하고 끔찍한 덩치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쓰러진 인영 하나와,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로 물든 채 영롱하게 빛나는... 아르켄스톤이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이의 바로 근처에서 원정대원들이 슬픔과 분노, 충격에 휩싸인 채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달려가던 소린의 손 끝에서 칼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온통 피투성이인 모습으로 쓰러진 것은- 이 원정대의 마지막 일원인, 빌보였다.



"......안돼.........."



소린은 쥐어짜내듯 그 한 마디만을 뱉어냈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덜컥거렸다. 바로 눈 앞에 아르켄스톤이 있었지만 당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절망으로 가득 찬 그의 두 눈에는 핏물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빌보만이 보일 뿐이었다. 안돼, 안 돼.... 제발. 거의 기듯이 다가가 빌보를 안아올렸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촛점이 없었고, 숨을 쉬는 기색도 느낄 수 없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소린은 죽음을 맞이한 그의 사랑스런 호빗을 끌어안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다. 그가 빌보를 죽였다.




".....린, 소린!"


"....헉!"



 다음 순간 소린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깜깜한 방 안에 곧 작은 불이 켜지고,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깜박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빌보가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안 좋은 꿈을 꾸는 것 같길래 깨웠는데...."


"......꿈....이라고.."


"맙소사, 당신 무슨 식은땀을 이렇게 흘렸어요? 가운은 갈아입는게 좋겠어요. 지금 가져올-"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와 뺨을 만지더니 금세 떨어져나갔다. 소린은 침대에서 벗어나려는 빌보의 몸을 다급히 끌어안았다. 우왓. 거의 습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갑작스러운 포옹에 빌보가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소린?"


"....그냥, 이대로 잠시만..."



빌보는 떨리는 소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꽈악 잡았다. 차갑게 식은 몸이 아닌, 따스하고 부드러운 체온이 닿아오자 소린은 이것이 현실임을 직감하며 더욱 품 안의 몸을 세게 안았다. 악몽이라곤 해도 정말 질이 나빴다. 게다가 일전에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에게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는 그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기만을, 소린은 마음 속으로 바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by 치우타 2014. 1. 24. 2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