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은 어두운 복도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일행과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닥 많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지금 스마우그에게 허무한 개죽음을 당할 생각같은 건 요만큼도 없었다. 어차피 요새 안에서의 길은 한정되어 있고 일행들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찾으며 각자 스마우그의 공격을 피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었다. 소린은 칼을 고쳐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왕가의 널따란 홀이 바로 코 앞이었다.



"소린 오큰쉴드! 거기에 있는걸 다 알고 있다. 어디에 숨어도 소용없어, 냄새가 나거든."


"느려터지고 멍청한 지렁이 주제에, 입은 쉴새없이 잘도 놀려대는군. 와서 잡아 보지 그래?"


"오, 안 되지. 이 게임의 주도권은 완전히 나한테 있다. 네가 찾는 것도, 네가 데리고 있던 것도 말이야."



사악하고 우릉대는 스마우그의 목소리가 홀 저편에서 들려왔고, 소린은 최대한 불 공격을 바로 피할 수 있도록 기둥 사이를 가로지르며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스마우그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완 다르게 어떤 여유 같은 것이 엿보였고, 말 끝부분엔 이상한 단어를 섞어 뱉고 있었다. 찾는 것? 데리고 있던 것?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아 경계하며 걸음을 늦추려던 때 스마우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네가 찾는 건 바로 아르켄스톤이라는 걸 안다. 이 번쩍이는 보석이 너희에겐 더없는 보물이니까."


"더러운 네 발 아래에 있기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물건이지. 애초부터 우리 것이었다."


"탐욕스럽고 멍청한 너희가 산으로부터 빼앗은 게 아니고? 어쨌든, 지금은 그걸로 논쟁할 생각은 없어. 다른 재미있는 게임이 준비되어 있다. 그래, 아주 흥미로운 게임이야."


"게임이라고?"


"간단해. 선택을 하면 되는 게임이다. 고르는 역할은 드워프, 네가 맡게 됐지."



 스마우그는 뻐기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꼬리를 크게 움직였다. 근처의 작은 동상 하나가 그 기세에 부숴졌고, 빼앗긴 집이 훼손되기까지하는 장면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엔 없는 소린은 이를 으드득 갈며 주변을 살폈다. 흩어진 원정대 일행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고, 스마우그의 발치 근처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고르는 역할이라니, 또 무슨 사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자, 시간이 없어. 난 호수마을 놈들을 먼저 처리하고 올 생각이거든. 선택해라, 드워프. 아르켄스톤인가? 아니면 네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인가?"


"내가 이 게임 따위에 참여하길 거절하겠다면?"


"그렇게 되면 오만한 드워프, 너는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 선택해라. 어느 쪽이지?"



 소린은 고민에 빠졌다. 아르켄스톤은 그가 찾아헤매던 오랜 목표였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 어떤건지 모르는 상태에서 바로 결정을 내려도 되는지가 의문이었다. 에레보르일 수도 있고, 혹은 아예 다른 것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만일 그의 짐작대로 에레보르나 혹은 다른 물건이라면 아르켄스톤을 먼저 찾은 후 언제든 되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린은 마음을 정하고 몸을 숨긴 채 외쳤다.



"네가 빼앗아간 모든 것을 되찾겠지만, 지금은 아르켄스톤을 택하겠다!"


"그럼 결정된 거로군! 어디 이걸 가지고 잘 해봐라!"



스마우그의 비웃음섞인 목소리에 뒤이어 어떠한 비명같은 것이 짧게 울리고, 이내 사그라들었다. 안 돼! 누군지 모르겠지만 익숙한 외침 또한 들려왔다. 소린은 가슴 속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황급히 앞으로 뛰쳐나왔고 스마우그는 날개를 펼쳐 호수마을을 공격하기 위해 날아가 버렸다. 그 거대하고 끔찍한 덩치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쓰러진 인영 하나와, 그에게서 흘러나온 피로 물든 채 영롱하게 빛나는... 아르켄스톤이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이의 바로 근처에서 원정대원들이 슬픔과 분노, 충격에 휩싸인 채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달려가던 소린의 손 끝에서 칼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온통 피투성이인 모습으로 쓰러진 것은- 이 원정대의 마지막 일원인, 빌보였다.



"......안돼.........."



소린은 쥐어짜내듯 그 한 마디만을 뱉어냈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심장이 덜컥거렸다. 바로 눈 앞에 아르켄스톤이 있었지만 당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절망으로 가득 찬 그의 두 눈에는 핏물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빌보만이 보일 뿐이었다. 안돼, 안 돼.... 제발. 거의 기듯이 다가가 빌보를 안아올렸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촛점이 없었고, 숨을 쉬는 기색도 느낄 수 없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소린은 죽음을 맞이한 그의 사랑스런 호빗을 끌어안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다. 그가 빌보를 죽였다.




".....린, 소린!"


"....헉!"



 다음 순간 소린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깜깜한 방 안에 곧 작은 불이 켜지고,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깜박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빌보가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안 좋은 꿈을 꾸는 것 같길래 깨웠는데...."


"......꿈....이라고.."


"맙소사, 당신 무슨 식은땀을 이렇게 흘렸어요? 가운은 갈아입는게 좋겠어요. 지금 가져올-"



부드러운 손길이 다가와 뺨을 만지더니 금세 떨어져나갔다. 소린은 침대에서 벗어나려는 빌보의 몸을 다급히 끌어안았다. 우왓. 거의 습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갑작스러운 포옹에 빌보가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소린?"


"....그냥, 이대로 잠시만..."



빌보는 떨리는 소린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꽈악 잡았다. 차갑게 식은 몸이 아닌, 따스하고 부드러운 체온이 닿아오자 소린은 이것이 현실임을 직감하며 더욱 품 안의 몸을 세게 안았다. 악몽이라곤 해도 정말 질이 나빴다. 게다가 일전에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에게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는 그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기만을, 소린은 마음 속으로 바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by 치우타 2014. 1. 24. 2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