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보는 느린 발걸음으로 산길을 걷고 있었다. 오늘은 모처럼 하늘이 푸르게 개어 무척이나 맑았고, 봄바람도 적당히 불어와 산책하기에는 최상의 날씨였다. 입가에 문 연초를 조금 게으른 손놀림으로 매만지며 그는 아무렇게나 근처의 바위에 앉았다. 이 시기에만 피는 꽃을 찾으러 온 길이건만 주변의 경치나 분위기에 홀려 자꾸만 이렇게 멈추어버리고 만다. 너무 늦어지면 손님이 집에 와도 만날 수가 없을 텐데. 빌보는 퍼뜩 꿈 생각이 떠올라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오늘 저녁이 될 지도 모른다. 점점 꿈을 꾸는 빈도수가 늘었고, 내용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 전 지나가듯 마을을 방문한 마법사인 간달프에게 상담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었다. 예지몽일지도 모르지, 빌보 배긴스. 언제나 자네의 주변을 정돈하며 때가 되면 찾아올 이를 기다리게. 그런 일일수록 아무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게 되니까 말이네.


 사실 빌보는 몇 달 전부터 같은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있었다. 또 재미있는 점은, 그저 반복만 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즐거운 저녁식사를 맞이하여 식탁 앞에 앉은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문객들이 줄줄이 찾아와 그의 식량창고를 거덜내 버린다. 간달프가 어째서인지 빌보를 설득하려고 하고, 그는 거절했지만 결국 따라나서게 된다. 오크들과 늑대, 거대한 곰, 환각을 보여주는 숲과 괴물 거미들... 여행은 전혀 순탄치 않았고 시련은 점점 많아지기만 했다.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반지와, 어떤 것을 찾으려는 일행들, 불을 내뿜는 용, 빛나는 돌에 얽힌 다툼과 오해, 커다란 전투- 마치 꿈 속에서 잘 쓰여진 책 한 권을 보는 것만 같은 긴박감과 스스로가 거기 참여하고 있다는 현장감에 빌보는 꿈에서 깨고 나서도 한동안 그 여운을 떨쳐낼 수 없었다. 게다가 꼭, 바로 엊그제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마치 꿈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루는 일행들 중 가장 가까웠던- 마치 연인같은 사이였던 이가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거의 죽음에 다다르는 걸 보았는데 그날은 종일 손이 떨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꿈의 내용이 자세해지고 더욱 선명해질수록 빌보는 하릴없이 문가 근처에서 서성이거나, 벤치에 앉아 멍하니 연초를 태우는 날이 늘어났다. 책을 읽고, 시장을 다녀오고, 매일같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저녁이 되면 꼭 문 앞에 누군가 다다를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자신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절도있는 엄숙한 노크 소리가 들려오기만을. 


잘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 냅킨을 목에 걸고, 생선에 소금을 천천히 뿌리며 빌보는 오늘도 이렇게 지나가는군, 하고 체념했다. 그 때, 문 쪽에서 정확히 세 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 지금, 바로 나갑니다!"



가운을 여미고 허둥지둥 뛰쳐나가 문을 열자, 거기엔 꿈 속에서만 보던 이가 서 있었다. 어깨를 조금 넘는 길이의 검은 머리,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 길지 않은 수염. 정말 너무나 똑같아서 빌보는 지금이야말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따끔한 아픔이 금세 몰려와 그는 안도할 수 있었다. 



"......빌보."


"....소.....린...?"



눈 앞에 선 남자의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놀랄 겨를도 없이, 빌보 또한 어떤 이름을 주저하며 입에 담았다. 그가 꿈에서 부르던, 남자의 이름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에 무척 놀란 듯,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표정을 한 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빌보는 어쩐지 그 모습이 무척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는 성큼 거리를 좁히더니 팔을 뻗어 빌보를 가두듯 끌어안았다. 아, 꿈에서와 같구나. 낯설지 않은 체온, 차가운 바람과 바위의 냄새. 빌보는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남자의 등을 마주 그러안았다. 그 작은 움직임에 남자는 흠칫 떨더니 아예 고개를 빌보의 어깨부근에 파묻었다. 미안하다, 내가... 좀 더 일찍.... 너무 늦었을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남자의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에는 반 쯤 울음이 섞여 있었다. 


보는 그제서야 조금씩 꿈과 현실의 다리를 이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그 꿈들은 단순히 상상이 아니라, 그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아직 그걸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자신을 끌어안은 채 서투른 고백을 쏟아놓으며 울먹이는 남자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다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빌보는 넓은 등을 달래듯 토닥이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소린. 그 한 마디에 끌어안는 힘이 더욱 강해졌고, 빌보는 조금 등이 아파왔지만 어쩐지 남자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의 지루한 저녁 기다림도, 언제 가졌는지 모를 칼과 가방, 몇 가지 짐들에 대한 의문도 해결되었다. 어색하던 일상의 끝이 찾아옴과 동시에 함께 보내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빌보는 기분 좋게 웃으며 눈을 감고 이 순간을 음미했다. 고소한 생선 냄새가, 완전히 식어 사그라들 때까지 둘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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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싶어 설명 추가. 빌보는 다섯 군대의 전투 때문에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설정으로 생각한 글입니다.

 소린은 에레보르 재건의 밑바탕을 다 마련해두고 빌보에게 달려왔지요. 그리고 해피엔딩.

by 치우타 2014. 1. 25. 2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