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린은 불가 앞에 앉아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크 무리를 따돌린 것은 좋았지만, 조랑말 없이 걷고 뛰어서 움직여야 하는 그들이 언제고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계속해서 도망치듯 달려온 길에 모두 지쳤는지 얕은 숨을 내쉬며 곯아떨어졌다. 특히 평소에 크게 코를 골며 자던 봄부르조차 걱정될 정도로 조용하게 숙면하고 있는 상태였다. 불이 지나치게 약해지진 않도록 불쏘시개와 작은 장작으로 조절하며, 그는 문득 시선을 바로 옆의 호빗- 빌보에게 돌렸다. 빌보는 약간 불편한 자세로 담요를 거의 얼굴까지 끌어올린 채 잠에 빠져 있었다. 소린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쓰다듬었고, 빌보가 그 기척에 어깨를 조금 들썩였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에레보르를 잃고, 인간들의 도시와 황야를 떠돌며 그는 내내 겨울의 차가운 삭풍과 희뿌연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뜨거운 불 앞에서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동안 죽어간 동족들과 불을 뿜는 용을 떠올렸고, 소식을 모르는 아버지와 목이 잘린 할아버지의 얼굴이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소린은 결코 어떤 것도 용서하거나 잊어버릴 수 없었다. 좋은 것은 그에게 사치였으며 사람들의 값싼 동정이나 무심한 눈길, 호기심에 더욱 경계하고 날을 세웠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고, 타인에게 정을 주거나 받을 생각따위 요만큼도 하지 않았다. 


....이 작고 경이로운 호빗을 만나기 전까지는.


  소린은 이번엔 빌보의 뺨을 살며시 매만졌다. 힘들고 괴로운 여정일 텐데도,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부지런히 그와 다른 드워프들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때로는 더 좋은 길을 제시하기도 하고, 지름길을 찾아내기도 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무겁고 지친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빌보는 한낮에 떠오른 태양처럼 따스했고, 부드러운 존재였다. 그의 옆에 있으면 고향을 잃은 후로 느껴보지 못했던 정착감, 안도감 같은 것이 조심스럽게 마음 구석 어딘가에 자리잡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더불어 욕심이 났다. 언제까지고 복수와 의무에 떠밀려 방황하는 삶이 아닌, 정착하여 그 자리에 충실하는 그런 삶이. 그리고 그것은 빌보의 옆에서라면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려한 에레보르의 황금빛 방 대신에 소박한 백엔드의 난롯가 앞에서 나란히 앉아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일상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코 가질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던 작은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이 그 때는 아니었다. 아마도 소린이 원하는 평범한 삶이란 힘든 여정의 끝에서 스마우그를 물리치고 에레보르를 되찾은 다음, 동족들의 삶을 다시 일구고, 그 자리를 여동생과 조카들에게 물려준 후 비로소 그가 얻을 수 있는 최후의 보상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언제쯤 올까. 그때까지 너는 내 옆에 있어 줄까. 따스한 옆자리를 내게 내어 줄까. 세상 모르고 잠든 빌보에게 들리지 않을 질문을 던지며, 소린은 가만히 몸을 숙여 빌보의 이마에 입술을 찍어눌렀다. 


by 치우타 2014. 1. 21. 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