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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굴리는 작업은 생각보다 쉬웠으나, 문제는 애써 뭉쳐두면 자꾸 스르르 풀어져 내리고 만다는 점이었다. 뭔가 이렇게 단단한 느낌으로 덩어리가 되는 게 아니라 포슬한 눈가루를 억지로 모아둔 것 같았다. 빌보는 어정쩡하게 모아진 눈덩이들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샤이어에는 눈이 거의 오질 않으니 이런 식으로 뭔가를 만들 생각은 해 본적도 없었거니와 운이 좋은 날엔 그저 되는대로 뭉쳐서 눈싸움에 뛰어들기에 바빴다. 눈뭉치, 눈덩이.... 제자리를 맴돌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드리던 빌보는 다음 순간 고개를 번쩍 들어 근처의 작은 웅덩이를 보았다.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것과 비슷하게, 눈뭉치를 조금 적시면 좀 더 단단하게 뭉쳐지지 않을까? 그는 고민하는 걸 그만두고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무서운 기세로 일을 처리해나가던 소린이 빌보가 어딘가로 향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빌보 자신이 예상한 대로 점심 즈음이었다.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제안서를 읽었으며 온갖 집무와 시스템, 에레보르의 보물을 관리하거나 드워프들의 불만에 대해서도 조금씩 따로 조사하고 있던 그로서는 숨 쉴 시간도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빠르던 늦던 언제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점심식사도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법이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발린의 차분한 목소리에 소린은 드디어 펜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빌보는? 어디 갔지?"
"아까 성문 쪽으로 나가는 것을 봤습니다만."
"나갔다고? 어딜? 데일에 간다고 하던가? 아니면 호수마을?"
"진정해요, 소린. 그는 성문 바로 근처에 있다고 아까 보푸르가 알려왔습니다."
"성문 근처... 다행이군. 최근 늑대들이 심심찮게 내려온다고 해서 걱정이라.... 별 일 없겠지."
"어차피 그도 꽤 터프한 사내잖습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발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소린은 어쩐지 머쓱한 기분이 되어 괜시리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너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말라고는 했건만, 그래도 점심은 같이 먹고 싶었는데. 그는 심술이 삐죽삐죽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수염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들어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빌보.
"...?! 방금 그거 뭐지?"
빌보는 급작스레 끼쳐온 한기에 놀라 몸을 움츠리며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따란 평지와 웅장한 에레보르의 성, 그리고 새하얗게 쌓인 눈과 자신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산에서 심심찮게 늑대나 들개가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빌보는 서둘러서 눈뭉치를 다듬었다. 몸통에 조금 두꺼운 나무를 끼우고, 머리에는 머리칼처럼 약간의 재주를 부려서 풀로 꾸미고, 코까지 바로 세워준 다음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펴고 섰다. 조금 전까지 힘 없이 흘러내리던 눈뭉치가 있던 자리에는 귀여운 사이즈에 비해 꽤나 엄숙한 표정을 한 눈사람이 있었다.
"생각보다 꽤 닮은 것 같아. 특히 얼굴이."
"그렇군. 연구 열심히 했는걸."
"맙소사, 세상에! 소린!! 당신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심장마비를 유도했다간 국물도 없을 줄 알아요!"
등 뒤에서 갑작스레 불쑥 튀어나온 소린의 모습에 빌보는 소릴 꽥 지르며 돌아섰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니고 대체 이게 몇 번째인지 이젠 안 그런 적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소린은 이런 식으로 빌보를 놀래키곤 했다. 전투에 익숙한 드워프 왕으로서 기척도 내지 않고 살금살금 빌보의 등 뒤로 다가와서는 귓가에 속삭이거나, 포옹하거나, 일부러 더 놀라는 모습을 보려고 큰 목소리를 내거나 하는 식의 아이같은 장난이었다. 저 여유로운 얼굴에 눈이라도 던져주지 않고는 도저히 못 견디겠는걸. 빌보는 이내 침착한 얼굴로 발 아래의 눈을 금세 뭉쳐서 덩어리로 만들었다.
"그 눈사람은 나인가? 머리도 만들었군."
"그래요. 당신이에요, 나중에 보여주려고 했더니만.... 에잇!"
작은 손이 앞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소린의 얼굴은 기가 막힌 스트라이크 눈덩이를 정면으로 맞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빌보의 손 힘이 약했다는 것이고, 눈이 단단하게 뭉쳐지지 않아 크게 만드는 것이 어렵다는 거였다. 소린은 입가에 짖궂은 미소를 한가득 떠올렸다.
"후회할텐데, 빌보."
"그렇게 만들 수 있으면 해 봐요! 아니면 그 시간에 던지던가!"
또 다시 눈덩이가 날아왔고 이번엔 여유롭게 고개를 틀어 피해낸 소린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어깨에 눈뭉치를 맞았다. 잠시 말문을 잃고 어깨와 빌보를 바라보는 소린이 좀 귀여워서 빌보는 애써 참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오, 지금 웃었다 이거지. 소린의 승부욕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불길이었다. 가여운 빌보는 상대의 어떤 스위치를 켰는지도 모른 채 활짝 웃으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쯤 눈에 파묻히게 해 두고, 그대로 성에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소린은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노련한 손놀림으로 눈을 조금 단단하게 뭉쳤다.
-결국 눈싸움은 빌보의 완전한 패배로 돌아갔고, 벨트 없는 챔피언이 된 소린은 기진맥진한 빌보를 들고 그대로 침실에 직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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