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넓은 복도와 홀을 비추는 불빛만이 남아 약하게 반짝이는 늦은 밤, 소린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내려갔다. 모양새를 보아하면 꼭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정작 그의 펜 끝이 만들어내고 있는 문장이란 아주 시덥잖은 내용들 뿐이었다. 에레보르 재건의 현황, 앞으로 해야 할 일들, 필리와 킬리의 교육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 그 밖에 원정대원들의 근황 등 누가 보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할만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약간 두서없는 내용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줄을 조금 더 추가한 후, 소린은 펜을 내려놓았다. 손의 압력에서 벗어난 종이가 제멋대로 도르르 말리어 원래 모습을 되찾았고 잘 말린 것을 리본으로 묶은 다음 겉봉투에 인장을 찍고 나면 비로소 오늘 하루가 끝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그의 마지막 일과를 받아들 인물이란 바로- 샤이어, 백엔드의 빌보 배긴스였다.
여러 가지 일들을 겪고 난 후, 소린은 기실 빌보로 하여금 에레보르에 좀 더 체류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여기에서 그의 요청이란 꽤 간절할 때에는 무척 절실하게 들리지만 소린의 급한 성정이 섞이고 나면 강압적이거나 혹은 방임적인 어조를 띄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오랜 여행과 낯선 경험으로 심신이 지쳐버린 빌보는 정중하게 사양하고 간달프와 함께 그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겨우 이틀정도 쉬고 난 뒤 짐을 꾸려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당장에라도 붙잡아 품에 가두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였으나, 그는 이제 막 되찾은 '집' 인 에레보르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지위를 가진 이들은 때론 어떤 것을 희생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소린은 쓴 속내를 애써 감추고 말없이 그들을 배웅했다.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사랑하는 이를 돌려보낸 지 반 년. 계절은 벌써 여름에 들어서고 있었다. 봄도 여름도, 바뀌는 모든 계절을 함께 감상하고 싶었건만 야속하게도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으며, 시일이 흐를 수록 비어있는 옆자리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게 해줄 뿐이었다. 문득 가슴 속을 치받아오르는 어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린은 이미 굳게 눌린 인장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못쓰게 되어버린 봉투는 치워버리고, 편지의 마지막에 충동적으로 짧은 문장을 추가했다.
I missed you so much, my dear hobbit.
그리고 얼마 후 외로운 산에도 슬슬 녹음이 뚜렷해지기 시작할 무렵, 소린은 평소보다도 더 헐레벌떡 뛰어온 필리와 킬리로부터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의 호빗이, 빌보 배긴스가- 에레보르에 마악 도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말을 듣고 잠시동안 서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건 발린이었다.
"그렇게 보셔도 서류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소린. 정말로 그가 왔으니까요."
".....그게 정말인가?"
"그와 관련된 일로, 감히 왕께 거짓을 고할 자가 여기 있다고 보십니까? 아닐 걸요."
발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린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이건 절대로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뛰쳐나갔다'는 뜻이었다. 그 기세에 종이가 몇 장 바닥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졌고, 발린은 고개를 저으며 그것들을 주워다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저렇게도 좋으실까. 근래 반년 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급한 얼굴로 일이고 뭐고 내팽개친 채 달려나가는 소린이라니,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소린은 급한 발걸음으로 (사실 뛰고 있었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쳐 에레보르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가던 길에 지나치는 드워프들이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는 요만큼도 없었다. 몇몇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개중에는 원정대원들의 얼굴도 보였다. 이 젠장할 놈의 복도는 끝이 없군! 대체 어디까지 이어진 거야? 쓸데없이 규모만 커서...! 만약 그의 이런 생각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들었다면 어이없다못해 황당한 얼굴로 그를 보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소린은 지금 절박하고 다급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 드디어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조랑말의 머리를 쓰다듬는 익숙한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까운 곳에 보푸르와 오리, 노리가 서서 그를 맞이하고 있던 참이었다. 푸른색의 벨벳 자켓에 밝은 색 스카프, 곱슬거리는 짙은 금발, 자그마한 체구와 부피가 꽤 컸던 것으로 짐작되는 가방. 그가 기억하던 마지막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이렇게나 그를 뒤흔들 수 있는 호빗이란 딱 한 명 뿐이었다.
"빌보......?"
"....소린! 당신은 지금 바쁘다고-"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빌보가 돌아서서 놀란 얼굴로, 하지만 기쁜 듯이 미소지었다. 그의 입술에서 몇 마디 말이 미끄러져 나오기도 전에 소린은 앞으로 튕기듯 몸을 내던졌고 다음 순간 두 팔 안에 온전히 따스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레 뜨거운 포옹을 선사해오는 그에게 빌보는 무척 당황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낑낑거리며 소린에게 눌린 팔을 빼내고 넓은 등을 마주안았다. 소린은 순간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단 둘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다른 드워프들도 있었다. 왕으로서 꼴나사운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이성을 최대한 풀가동시켜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러나 메인 목소리까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여길... 혼자서, 위험하게..."
"당신이 편지에 그렇게 썼잖아요. 보고 싶다고."
".....내가?"
"써 놓고도 잊어버린건 아니겠죠. 그러면 화 낼건데."
"아니, 아니... 그런것은 아니다. 하지만, 겨우 그것 때문에...."
소린은 팔을 풀어내고 빌보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아주 예전에 그랬듯이 혹시나 그에게 상처는 없는지 조심스레 살피며 더듬거리듯 말을 이었다. 여전히 목소리는 형편없이 잠긴 채였다. 가관이군. 소린은 그 부분에 대해 빠르게 포기하고는 시선을 다시 위로 올려 빌보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농담이죠? 겨우 그거라니. 처음이었잖아요."
"......뭐가?"
"그렇게 매일같이 편지를 주구장창 보냈으면서, 보고싶다고 솔직하게 쓴 거 말이에요."
"............"
뚱하니 입을 다물어버린 드워프 왕을 보고 빌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알고보면 소린은 꽤나 외로움을 타는 남자였다. 그걸 의무감과 복수, 책임 등 다른 것들로 메꾸고 감춰두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누구보다도 혈육을 아끼며 동족들을 염려하는 드워프였기에, 당연히 특별한 이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오히려 충만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아온 빌보가 견디기 쉬웠던 것에 비해 소린은 매일 새롭게 젖어드는 그리움과 외로움에 괴로워했을 것이었다. 이 무뚝뚝하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소린이 아무도 모르게 편지를 매일 썼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증거였다.
"그래서 내가 만나러 왔죠. 그러지 않고선 당신은 거기 앉아서 보고싶다는 말만 쓰고 한숨만 푹푹 쉴 것 같았으니까."
".....못 보던 사이에 말재주가 늘었군, 빌보."
"흠. 당신 말솜씨가 줄어든 게 아니고요?"
빌보가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씩 웃었다. 소린은 어쩐지 약이 올라서 다시 한 번 그를 꽈악 끌어당겨 안았다. 으악, 숨막혀요! 그렇게 힘 조절 안하면 아프다니까, 소린! 작은 항의와 비명을 무시하며 소린은 품에서 느껴지는 실재를 즐겼다. 꿈이 아니었다. 신기루가 아니었다. 빌보가 여기에 왔고, 지금 품 안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소린은 모든 걸 소유한 왕이 된 기분이었다. 등 뒤로 다가오는 필리와 킬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린은 빌보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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