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 바람이 지나가는 에레보르에서는, 유난히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 있었다. 빌보는 오늘도 그런 날이 될 거라 확신하며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은 고풍스럽고 웅장했지만 너무 조용했고, 그의 따스하고 정겨운 샤이어의 백엔드에 비하면 부족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온기라거나, 좋아하는 책이라거나, 향 좋은 찻잎이라거나. 그런 것들.


그는 두꺼운 튜닉을 걸치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왔다. 시간이 늦은 밤이어서인지 복도에는 누구의 인기척도 없는 모양이었다. 숙련된 전사들마냥 어떠한 분위기를 감지하는 능력 따위는 없으나, 에레보르는 돌로 만들어진 요새이며 드워프들은 생각보다 그들의 느낌을 (혹자는 소리라고들 했다) 감추는 데에 서툴렀다. 물론 이것도 모든 드워프에게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는 성급한 결론이었지만 대부분은 퉁탕거리며 걸어다니거나, 왁자하게 웃고, 소란스러운 움직임들이 있었다. 

오죽하면 엘프들이 '어둠속에서 안 보고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고 했던가. 빌보는 웃을수만은 없는 추억을 떠올리며 전망대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이렇게 잠이 안 오는 날에는 별과 달을 보러 나가는 것이 일종의 예식처럼 되곤 한 탓이다. 지금까지 누구와 마주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며 그 명당 자리는 아마도 빌보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으- 조금 추운걸. 완전히 겨울이 왔군...."



완전히 보수가 끝난 전망대에는 완연한 동쪽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빌보는 어깨를 떨며 튜닉을 좀 더 여미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빛이 모여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별들이 휘황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그보다 조금 더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크고 붉은 달이었다.


오. 이건 샤이어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야.


빌보는 손끝이 시려오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시선을 달에 고정시키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질 것 같은 거대한 붉은 달은, 말없이 은은하게 빛나며 주변의 별들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것들을 보고 방에 돌아가면 비로소 잠이 들곤 했다.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차가운 건물이나 바닥, 드워프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저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그런 시간이 그에게는 꼭 필요했다. 늘 땅과 작물, 태양과 가까이 지내던 호빗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빌보?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렇게 잠시 분위기에 젖어 마음이 한창 풀어졌을 무렵, 등 뒤에서 갑작스레 날아든 음성에 빌보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어오를 뻔 했다. 그가 제대로 교육받은 집안의 호빗이 아니었다면 벌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호빗 맙소사! 소린! 당신 지금 날 놀래켜서 죽일 뻔 한거 알아요?"


"그런걸로 죽는다면 네 종족이 얼마나 더 토끼같은지를 증명할 수 있겠는걸."


"내가 전에도 그 전에도 계속 말했잖아요. 제발 놀라게 하지 말아달라고.... 세상에.. 후. 진짜, 못된 행동이라구요."


"몇 번을 말하지만, dear hobbit, 네 그 귀로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넋을 놨다는 뜻이겠지."


"....이건 그냥 귀거든요? 동물적인 어떤 게 아니라."


"어련하겠나. 그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길이 복잡할 텐데."


"음, 뭐... 잠이 안 오기도 하고. 그래서 구경삼아 나왔어요. 자주 그래요."



아차. 빌보는 흠칫하여 마지막 말을 얼버무리듯이 뭉개고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한창 에레보르의 복구와 정상화를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쁘게 일하고 있는 소린에게 있어서, 잠깐의 여유나 연애같은 건 일종의 사치에 해당되었다. 그에게 드리워진 아르켄스톤과 황금들의 질병을 걷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에스가로스와 어둠숲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것도 빌보였지만 그를 옆에 끼고 붙어있는다거나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있는 소린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빌보는 그의 가벼운 불면증이나 외로움 같은 것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저 혼자 눌러 담고, 연초의 연기에 실어 보내려고 무던히 노력했을 뿐. 하지만 조금 전의 발언에는 자기도 모르게 약간 칭얼거리는 투로...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드워프 왕은 뭐든 놓치는 법이 없었다. 설령 그것이 아주 작은 속삭임일지라도.



"자주 그랬다고? 언제부터? 몇 번이나?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아직도, 나는 네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건가? 마지막에 붙을 말은 차마 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소린의 목에 걸렸다. 그는 빌보에게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고, 하마터면 그것으로 인해 영영 그의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릴 뻔 했다. 에레보르의 지난 영광을 되찾겠다는 마음과 복수심, 보물의 빛깔에 눈이 멀어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적이 있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빌보는 그의 어리석은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었고, 샤이어가 아니라 여기 에레보르에 그대로 남아 주었다. 계절이 바뀌면 한 번 다녀오겠다는 말을 여러 번 하긴 했으나, 빌보는 문턱까지 가서는 결국 다시 돌아와 그에게 버림받을까봐 두려움에 떠는 소린을 부드럽게 포옹해주곤 했다. 그렇게 조금씩 시간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랬는데 불면증이라니. 향수병만큼은 아니어도 눈치로 보아하니 상당 시간동안 빌보를 괴롭힌 것이 분명했다. 소린은 무거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은... 너무 바쁘잖아요, 나까지 걱정거리 중 하나로 짐을 얹어주고 싶진 않았어요."


"짐? 네가 짐이라고? 걱정거리라고? 빌보, 넌 대체..."


"이럴까봐 말 안하려고 했던 거에요. ....화내지 말아요, 소린. 그저 당신을 힘들게 하기 싫었던 거였어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


"...소린."


"지금 네 앞에 있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스로르의 자손, 스라인의 아들, 두린의 적통 소린 오큰쉴드다. 에레보르를 스마우그의 발톱으로부터 빼앗고,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동족들을 다시 모았고, 그리고.. 사랑하는 이도 찾았지."



소린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윽고 손을 뻗어 빌보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이마, 뺨, 그리고 턱을 차례로 그림을 그려내는 것처럼 쓰다듬었다. 얼마만의 접촉인지, 셀 용기가 나질 않아 빌보는 손을 들어 소린의 거친 손등을 감싸쥐었다.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쪽이 더 괴롭다는 걸, 그때 알았다."


"소린......"


"그러니까 제발 뭐든 좋으니 말을 해. 집무실에 24시간 예고없이 방문해도 되는 건 너 뿐이라는 걸 잊지 마라."



진지한 분위기였지만 빌보는 순간 웃음이 새어나올뻔한 것을 꾹 참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소린은 더없이 엄숙한 얼굴에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근조근 부탁하고 있었고, 그런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긴 했지만 빌보는 그의 말에 숨겨진 장난기를 읽어낸 탓에 문장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어려웠다.



"알았어요. 집무실 방문은 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대신 당신 방으로 쳐들어 갈게요."



언제 돌아오는지 알아야 한다는 게 문제겠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빌보가 윙크해보이자, 소린은 피식 웃으며 가만히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내 방에서 잠을 자지 그래.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볼 텐데. 속삭여오는 목소리에 담겨진 애정을 느끼고 빌보도 마주 웃었다. 그럼 밤 산책도 같이 해줄거에요? 그런걸 할 여유가 있을지는 두고 보자고. 전망대 위에 걸린 붉은 달이 그들을 시기하듯이 반짝였다. 춥지만 아름다운 에레보르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by 치우타 2014. 1. 16. 2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