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소탕작전에서 적의 공격을 받은 스티브는, 얼마 전부터 극심한 추위에 시달리며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 검사 결과에서 몸에는 이상이 없다고 나왔지만 잠이 들기만 하면 꼭 한번은 숨이 찰 정도로 추위를 느끼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뛰어나오곤 한 것이다. 토니와 배너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고심했지만 며칠 째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슬슬 스티브가 잠을 기피하기 시작할 무렵, 하루는 소파에 앉아 꾸벅 졸고있던 스티브에게 토니가 다가와 혀를 차며 모포를 덮어주었는데 그 따스함에 놀란 스티브가 눈을 번쩍 떴다. 토니도 깜짝 놀랐다. 


 "캡틴? 내가 깨웠나? 조금 더 자. 추우면 온도 높여줄게." 


미안하다는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 토니를 멍청하게 바라보며 스티브는 모포를 만졌다. 따뜻했다. 

 "이거... 데운 건가?" 


그는 거의 얼간이처럼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토니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여기서 잘 때 쓰는 거긴 한데.. 왜?"
 "...굉장히, 따뜻해."
 

 스티브는 모포에 남아있는 온기를 더 느끼려는 것처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눈 앞의 토니를 보았다. 홀린 듯이 바라봐 오는 푸른 눈동자에 토니가 움찔했다. 노친네, 얼굴만 잘생기면 다야? 그래 다겠지. 얼굴 깡패 같으니라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토니는 태연한 척 스티브와 눈을 맞췄다. 

 "잠깐 안아봐도 되나?"
 "난 되게 비싼 몸인데... ...알았어, 좋아. 잠깐이라면."

 뭐라고 투덜거리려던 토니는 꽤 절박한 스티브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스티브 자신도 반쯤 애매한 얼굴로 팔을 뻗어 작지만 탄탄한 몸을 끌어안았다. 모포보다 더 따뜻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스티브는 순간 낮게 신음을 흘리며 반사적으로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워, 캡틴! 캡! 잠깐..." 
 "....따뜻해. ....토니."
 

 어린아이처럼 스티브가 거의 토니의 품에 파고들듯이 고개를 묻었다. 토니는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며 되는 대로 지껄였지만 (내가 섹시하긴 해도- 아니, 캡틴, 왜 이래? 배너! 살려줘!) 드디어 온기를 찾은 스티브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침착했던 배너가 테스트한 결과 토니의 체온이 스티브의 추위를 없애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결국 토니는 대의를 위해 한 몸 희생하기로 하며 밤마다 스티브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마치 테디베어마냥 스티브의 품에 안긴 채 잠드는 나날 동안, 토니는 잘 생긴 스티브의 자는 얼굴과 섹시한 몸매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부리는 어리광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며칠 후, 토니는 스티브의 열렬한 고백과 포옹, 키스에 홀라당 넘어가 코를 꿰이고 말았지만 이때의 토니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눈 앞의 승리에 잔뜩 도취되어 있을 뿐이었다. 


 메데타시, 메데타시.


*무챠님이 그려주신 토니베어 아트를 허락맡고 올립니당.. 존귀대폭발!!!

 늘 토니가 스티브옆에서 안겨있을수 없어서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토니베어.


by 치우타 2015. 5. 9. 01:33

 비전은 어벤져스의 새 멤버로서 스티브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지만, 토니가 있는 어벤져스 타워로 종종 찾아가곤 했다. 울트론 사태 이후 당분간 쉴 거라며 못을 박았던 토니였지만 비전의 방문에 대해서는 어떤 태클도 걸지 않았다. 그리고 5월 8일, 네트워크로 여러 가지 지식을 흡수하던 비전은 오늘이 Mother's day (어머니의 날) 임을 알게 되었다. 

 토니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 비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무언가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공원 구석에서 제풀에 떨어진 들꽃을 모아 작은 꽃다발을 만들었다. 살아있는 생명을 억지로 꺾고 자른 것은 영 내키지 않은 탓이었다. 보안을 거쳐 토니의 개인층에 도달한 비전을 보고 토니가 돌아보았다. 약간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반짝이고 있었다.


 "안녕, 비전. 오늘도 왔군. 그런데... 그건 뭐야?"

꽃다발을 발견한 토니는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비전은 천천히, 공격적이지 않은 태도로 다가가 토니의 손에 있던 패널과 자신의 꽃다발을 교환했다. 토니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한테 주는 건가?"

 "그렇습니다. 오늘이 그런 날이라고 해서요."
  "오늘.. 자... 으음. 프라이데이. ....어머니의 날?"


 토니는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꽃다발과 비전에게 번갈아 시선을 던졌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푸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 와 봐." 순순히 토니에게 다가간 비전은 자기보다 작은 체구의 토니에게 끌어안겼다. 따스한 체온에 비전은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마워, 비전." 토니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비전은 희마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이제야 웃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았다.

by 치우타 2015. 5. 9. 01:29

 전투가 끝나고 난 후, 스티브는 사후처리를 위해 먼저 맨션으로 돌아가려는 토니를 붙들었다. 아이언맨의 아머 헤드가 찰칵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스티브? 무슨 일이야?" 전투로 인한 약간의 흥분과 피로감이 남아있는 푸른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갑작스럽게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어떤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침착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나? 잠깐이면 되네."

 "어.. 잠깐만. ....음, 괜찮을 것 같아. 이 일로 스케줄이 붕 떴거든."

 "그렇다면 자네 층에서 만나지. 내가 올라갈테니."

 

 어딘가 안도한 듯 부드럽게 미소짓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것만 같았다. 어벤져스의 리더로서가 아닌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을 보는 것은 아직도 그에게 처음과 같은 설레임을 안기곤 했다. 특히 이렇게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서는 더더욱.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뭔가 심각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토니는 잠깐 머리를 굴렸지만 어차피 상대가 상대인 만큼 고민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알았어. 이따 봐, 스티브." 가볍게 눈인사를 남기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토니의 뒷모습을 보며 스티브는 헤드기어를 벗었다. 땀에 젖은 금발이 옆으로 흩어졌다. 뒷정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야겠군. 그는 현장 요원들에게 여러 가지 사항을 지시한 다음 서둘러 맨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토니는 맨션에 돌아와 처리해야 할 일들을 끝내고 가볍게 한숨을 토하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오전부터 회의에 오찬, 그리고 빌런소탕, 서류 결제와 피해에 대한 복구대책. 늘상 이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처리하고 있었지만 유달리 피로감이 몸을 덮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요새 운동을 덜 해서 그런가? 뒷목을 주무르며 근처의 생수병에 손을 뻗는 순간, 방문 너머 플로어의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왔다. 누군가 방문했다는 뜻이었다. 이 시간에? 토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아홉시 반. 고개를 갸웃하는 토니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금발이었다. 스티브.


 "미안하네, 조금 시간이 걸려버렸군. 기다렸나?"

 "아니, 아니.. 실은 일을 하느라 당신이 언제쯤 올지도 생각 못하고 있었어. 들어와."


 토니는 그답지 않게 살짝 허둥거리며 스티브를 미니 바로 안내했다. 뭐라도 마시겠어? 토니의 권유에 스티브는 시원한 물이면 된다고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오늘따라 왜 저러지. 토니는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차가운 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스티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마냥 단숨에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 크게 숨을 내쉬었다.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토니는 괜히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전의 그건가? 아니면 일루미나티? 아니면 최근 회사의 캠페인이 문제인가? 리드와의 연구? 짚이는 것도 예상되는 것도 너무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토니는 새삼 자신이 어떤 인간이라는 걸 상기하며 쓴웃음을 목구멍 너머로 감추었다.


 "토니."

 "음?"

 "사실 자네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어. 겁줄 생각도 없었고. 그런데 벌써 실패한 것 같군."

 "그게 무슨 소리야."

 "긴장하고 있잖나, 그렇게 등을 꼿꼿이 세우고."


 스티브의 지적에 토니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괜히 수염을 매만졌다. "그게 그렇게 티가 났어?" 스티브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얼마 동안이나 알아온 사이인지 자네가 더 잘 알잖나." 그리고 보통 그럴 땐 자네가 나한테 숨기는 것이 있을 때지. 여상하게 덧붙여온 뒷말에 토니는 마시던 물을 뿜을 뻔 했다. 맙소사, 스티브! 토니가 가볍게 타박을 주자 스티브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인 모양이군." 자포자기한 얼굴의 토니가 양 손을 들어올리며 항복의 제스쳐를 취했다.


 "좋아, 캡틴 스티브. 무슨 일인지 이제 제대로 말해주지 않겠어? 내 자백이 먼저여야 하나?"

 "아니, 내 고백이 먼저니 기다리게."

 "......하아?"


 토니는 입을 쩍 벌리며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품위없게, 토니 스타크가 완전히 허를 찔린 표정으로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있었다. 스티브는 그 모양새에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손을 내밀어 토니와 맞잡았다. 토니는 그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펄쩍 뛰어오를 것 처럼 움찔대었지만 다행히 잡은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내가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그래도 좋네,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린 많이 다르고 자주 충돌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또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그게 조금은 달라졌으면 좋겠네. 적어도 둘이 있을 때에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아니라... 스티브 그랜트 로저스와 앤서니 에드워드 스타크로. 다른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같이 잠들고 싶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네가 필요해. 자네를 원해, 토니. 어떤 것보다 더. ......내 고백을 받아 주겠나?"


 스티브는 평소와 달리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열정적이고 뜨겁게 마음을 토해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그의 친우, 토니 스타크라는 사내는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볼 수 있지만 유달리 스티브에게만큼은 중요한 순간에 벽을 세우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다. 자신의 마음이 결코 순간적인 충동이 아님을 알아주길 원했다. 또한 토니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기를, 만일 아니라면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것 정도는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오랜 전략가로서의 본능은 토니가 그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반쯤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티브는 숙고 끝에 시도했고, 이제 남은 것은 판결 뿐이었다. 예스인가, 노인가.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고 스티브는 손 끝에 닿아있는 체온이 부디 자신의 편이기를 빌며 신실한 눈빛으로 토니를 바라보았다.


 "......스티브."

 "그래, 토니."

 "내 뺨을 한 번만 때려주지 않겠나?"

 "뭐?"

 "너무 세게는 말고. 내일 인터뷰가 있거든. 살살, 그래도 현실이라는 건 알 수 있게-"


 횡설수설하는 토니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본 스티브는 말 없이 팔을 잡아당겨 토니를 품에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훅 끼쳐왔다. 토니, 꿈이 아니야. 잘 들어 보게. 스티브는 토니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가슴께에 가져다 대었다. 두근 두근, 자신과 거의 비슷한 박동으로 뛰는 심장 고동이 손 끝에서부터 온 몸으로 전해졌다. 토니는 뭔가 울컥하니 차오르는 걸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스티브의 등을 마주 안았다. 넓고 탄탄한 근육이 기쁘게 닿아왔다. 


 "Yes, Steve... yes."


 토니가 거의 헐떡이듯 중얼거렸다. 내가 그 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어? 당신을 상대로. 스티브는 고백하기 전의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토니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약간 거칠어진 입술에 망설임 없이 키스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 너머로 뉴욕의 아름다운 야경이 반짝였다.




by 치우타 2015. 5. 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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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가 의외로 단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와 사귀고 조금 후의 일이었다. 타워 여기저기에 놓아둔, 가끔 두뇌회전을 위해 섭취하는 초콜렛이나 사탕, 캐러맬 같은 주전부리에서 쉽게 손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토니가 피식 웃었다. 


 "이 썩는다고 이런건 싫어할 줄 알았는데, 우리 노친네가 귀여운 데가 있군."

 "내가 어릴 땐 설탕이 귀했거든. 그 당시엔 뭐든 그랬지만, 아주 가끔 한 스푼 정도는 맛볼 수 있었어. 정말 좋았지."


 스티브가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푸른 셔츠에 짙은 색 바지를 입은 모습은 무척 섹시하고, 잘생겼고, 또.. 그를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스티브 로저스로 보이게 만들었다. 토니는 그게 아주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물론 리더로서 명령을 내릴 때도 섹시하지만 캡틴일때는 꼬박꼬박 스타크 운운하는 것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상할 때도 있었던 것이다. 아마 토니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고 중얼거리며 작은 초콜렛을 까먹는 스티브를 흐뭇한 얼굴로 보던 토니가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 자주 들르는 가게에서 아주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들여놓았다고 한 걸 들었던 것도 같았다.  바닐라였나 딸기였나, 기억은 잘 안나는데 아무튼 뭐 생과일을 넣었다던가. "자비스? 우리 타워 근처에 거기 있잖아. 애들이 바글거리는 가게. 신메뉴 나왔지?" 아쉬운 듯 입술을 핥는 스티브를 곁눈질하며 토니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오늘 막 개시하는 것 같군요. 손님이 많이 모일 것 같습니다.] 오, 안 되지. 토니는 전화를 돌려 가게 주인에게 갤런 사이즈로 서둘러 주문을 마치고는 아이언맨 수트를 배달에 이용했다. (토니, 직권 남용이야! 스티브가 투덜거렸다)


 "자, 스티브."

 "이게 뭔가? ....아이스크림?"

 "그래. 이 근처에서 제일 맛이 괜찮은 곳이야. 오늘 신메뉴 개시! 라길래 사봤어. 별로 당신 먹으라고 그런건 아니고."


 스푼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하는 토니에게 스티브는 못 말린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지만, 다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뭐든 솔직하지 못한 것이 토니의 단점이긴 했으나 이런 게 그의 애정표현이었고, 관심이었으며, 최대한의 노력임을 알게 된 덕분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싸운 나날이 제법 길었는데. 스티브는 질릴 정도로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에 스푼을 가져가 한 입 먹어보았다. "어때?" 토니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아이스크림을 샀다는 사람치곤 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답 대신 스티브는 몸을 돌려 토니의 몸을 끌어당겼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웅얼거리는 신음이 새었지만 스티브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조용해졌다.


 "아주 맛있어. 토니."

 "노친네, 어디서 이런 거만 배워와서는...." 

 "뻐기는 걸 좋아하는 애인이 잘 가르쳐 주거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는 토니의 입에 이번엔 스푼이 들어왔다. 뜨뜻미지근했던 딸기 아이스크림은 무척 달콤하고, 부드럽고, 시원하고 맛있었지만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토니는 막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이번엔 스티브의 목에 팔을 감았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이 맛이야. 토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고 스티브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앙큼한 연인의 허리를 단단히 안았다.






by 치우타 2015. 4. 25.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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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스티브는 아무 일정이 없었기에 느긋하게 타워 내의 체력 단련실에서 운동을 즐겼다. 70년 만에 깨어나 많은 변화를 겪었고 또 새로운 친구와 적을 만나는 동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로가 쌓여 있었는지, 아무 생각없이 몸을 한참 움직이고 나자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친 스티브는 토니가 타워에 돌아왔다는 자비스의 알림을 듣고 인사나 할 요량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에 도착했다.


 "응? 캡틴? 왠일이야? 오늘 타워에 다 있고."

 "일정이 없어서 쉬고 있었지. 자네는.. 일하고 왔나?"

 "난 우리 회사의 간판이거든. 열심히 번쩍번쩍 빛을 뿌리고 왔지. 아이고, 힘들어."


 토니가 어깨를 두드리며 짐짓 엄살을 떨었다. 스티브는 좀처럼 보기 힘든 토니의 평범한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 때 어디선가 몹시 좋은 꽃향기 같은 것이 스티브의 코를 간지럽혔고 그는 무의식중에 숨을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 시선으로 무심코 꽃병이 있는지 둘러보았지만 비슷한 물건조차 없었다. 스티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나는 거지?


 "캡틴?"


 스티브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토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그는 짧게 덧붙이며 넥타이를 풀러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정리해 두라는 충고가 목 언저리까지 올라왔지만 스티브는 애써 눌러 참았다. 타워의 주인은 토니였고, 여긴 그의 프라이빗 플로어였기에 아무도 간섭할 권리 따윈 없었던 것이다. 대신 스티브는 인사나 하러 왔다는 말을 던지며 다시 한 번 공기 중의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아. 정말 좋은 냄새로군. 꽃이 아니면 향수인가? 스티브는 피곤한 얼굴로 조끼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는 토니를 응시했다.


 "스타크."

 "응? 왜, 무슨일이야?"

 "향수 쓰나?"

 "어... 뭐 쓰기도 하지. 오늘은 아니었지만."


 그런건 갑자기 왜? 라고 물으려던 토니는 흠칫 몸을 움츠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스티브가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되게 좋은 냄새가 나는데.. 꽃은 아닌 것 같고. 자네한테서..." 그는 약간 꿈꾸는 듯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내 바디로션이 좀 비싼거긴 한데..워! 잠깐, 캡..." 


 이제 스티브는 숫제 토니의 목에 코를 묻고 숨을 쉬고 있었다. 뜨거운 숨결이 간지러우면서도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헤이, 캡, 캡틴, 스티브! 이게 무슨...!" 토니는 황급히 그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스티브의 팔이 토니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바람에 헛된 시도로 돌아갔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토니는 덜컥 허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토니... 좋은 냄새......"

 "잠깐, 맙, 소사... 당신... 알파야....?"

 "알파..? 그게 뭐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좋아..."


 반쯤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스티브는 무척 섹시했다. 토니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이 알파의 그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젠장, 제기랄! 어떻게 몰랐을까, 수퍼 솔져 혈청을 맞은 남자는 그 형질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어딜 봐도 알파의 성향에 속한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언제나. 조금씩 스티브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들으며, 토니는 제 몸이 멋대로 알파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느껴야만 했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인 거야.


 "자비스, 플로어 잠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연락도 차단해, 내가 바쁘다고.. 흑, 해....."

 [보안 등급 변경. 플로어 락 설정되었습니다.]

 "스티브, 캡틴.. 당신이 먼저 들이댄 거니까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

 "토니.... 토니. 만지고 싶어."

 

 토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상기된 얼굴의 혈기왕성한 젊은 알파가 바로 앞에서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 까짓거 이왕 망했으니 제대로 즐겨 보자고. 천천히 다가오는 입술에 기꺼이 제 것을 겹치며 토니는 스티브의 목에 팔을 감았다.



by 치우타 2015. 4. 8. 23:24

 스티브 로저스 - 캡틴 아메리카는 평생을 옳지 않은 것들과 싸워온 남자였다. 허약한 몸으로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동네 깡패들을 그냥 놔두지 못했고, 수퍼솔져 세럼으로 새로 태어난 다음에는 동료들을 이끌며 하이드라와 맞섰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몸을 아끼지 않았던 그를 사람들은 존경했고, 추앙했으며 진정한 영웅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삶을, 평범한 일상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그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스티브는 늘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더욱 바르고 올곧은 모습을 가지는 것이 영웅의 자격이라고 믿었다. 토니 스타크를 만나기 전까지는.


 토니는 여러모로 그의 기준에서 한참 모자란, 혹은 벗어난 인물이었다. 철조망 위에 눕느니 그걸 잘라버리는게 낫다고 말하는 그는 무척 가벼워 보였고, 겉으로 보여지는 이미지에만 신경쓰는 일종의 Big man 같았다. 쇼맨쉽을 보여주는 그런 작자들처럼. 스티브는 처음부터 그와 날카롭게 충돌했고 서로를 상처입히는 말을 내뱉었다. 뉴욕에 쏘아진 핵미사일을 짊어지고 우주로 날아가는 토니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토니 스타크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렸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재단한 것이었다. 스티브는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모르는 만큼 토니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헤이, 캡! 내가 매력적인건 알겠지만 뒤를 보는게 좋겠어!"


 전투 중에 폭탄 해체라는 위험한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토니는 여유롭게 스티브를 걱정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폭탄은 빌런의 술수로 터지게 되었지만 공중에 높이 날아올라가서 처리하고 내려온 토니는 다치고 긁힌 아머 속에서도 개구진 웃음을 지어보였다. 스티브는 그 순간, 토니에게 사랑에 빠졌다. 정말 우습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미 벌어진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당신이 날 왜 좋아하는지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어."

 "자네는 매력적이잖아. 귀엽고, 섹시하고.. 잘났지. 게다가 뻐기는 모습이 아주 사랑스러워."

 "오케이, 거기까지. 더 들으면 내가 닭이 되어버릴 것 같아."


 토니는 진저리를 치며 스티브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현대의 아이콘, 섬세하고 미래지향적인 남자. 토니 스타크는 이렇게 따뜻하고 또 누구보다도 영웅적인 사람이었다. 스티브는 팔 안의 기적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웃었다. 당신이 내 영웅이야, 토니. 속삭임에 귓가가 새빨개지는 토니를 보며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by 치우타 2015. 4. 4. 22:47

 스티브는 괜히 맞닿은 운동화의 코끝을 문질렀다. 지금이 몇 시더라. 조금 전 확인한 시계가 제대로 가고 있다면 이제 겨우 오후 네 시였다. 토니와 약속한 시간은 다섯 시였으나, 스티브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서두르다가 그만 한 시간 전에 공원에 도착하고 만 것이다. 가죽 자켓에 브이넥 티셔츠, 청바지에 운동화라는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으로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눈에 띄나? 스티브는 제 덩치와 외양을 생각하며 슬그머니 숲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평일 오후시간대여서 그런지 아이들이 제법 있었지만 대부분 잔디가 깔린 앞뜰에서 놀고 있었다.


 [스티브, 내일 오후 시간 있어? 다섯 시쯤.]

 "괜찮은데. 무슨 일인가?"

 [날씨도 좋으니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눈치없기는. 센트럴 파크에서 봐.]

 "센트럴 파크? 거긴 사람이 많을텐데.."

 [저녁엔 그렇지도 않아. 아무튼 내일 봐, 스위티.]


 보통은 스티브 쪽에서 비어있는 시간에 대해 물어보거나, 페퍼를 통해 토니의 스케줄을 듣고 미리 계획을 짜서 협의하는 정도였던 탓에 이런식으로 토니가 먼저 데이트를 요청해오는 것은 퍽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스티브는 전날 밤부터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뭘 입지, 꽃이라도 사가지고 갈까? 너무 시선을 끈다고 안 좋아하려나. 체크무늬 셔츠는 다 찢어버리겠다고 협박했었는데... 스티브는 거의 첫사랑과 데이트하는 소년 같았다. 그는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까지 했다. 벌써 진도는 다 뺀 연인 사이였지만 토니와 밖에서 만나는 건 언제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아."


 숲길로 들어서자 조금씩 꽃망울을 수줍게 내민 색색의 꽃들이 보였다. 이제 여기에도 봄이 거의 다 왔군. 뉴욕은 겨울이 혹독하고 긴 편이라 점점 봄이 짧아지고 있다는 뉴스를 얼마 전에 봤었기에, 더욱 반가운 광경이었다. 스티브는 천천히 걸음을 늦추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무와, 꽃과, 바람의 내음이 폐 깊숙히까지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스티브?"


 순간 그는 우뚝 발을 멈췄다. 아직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인데. 생각하는 머리와는 다르게 이미 고개는 돌아가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토니?" 놀라다 못해 거의 얼이 나간 스티브의 표정을 보고 토니가 씩 웃었다. 개구진 미소였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약속 시간은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그러는.. 자네야말로. 어떻게, 여기.."

 "일이 조금 일찍 끝났거든. 변장할 시간이 없어서 일단 여기쯤 온 다음 연락하려고 했는데 익숙한 금발 글래머가...."

 

 토니는 히죽거리며 다가오더니 스티브의 팔이며 허리며 엉덩이(토니! 스티브가 작게 타박하곤 지지 않겠다는 듯 토니의 엉덩이를 만졌다)쪽을 쓰다듬었다. "와우, 탄탄해. 그리고 섹시해. 오늘 복장 정말 최고야. 고민 좀 했나봐?"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에는 장난기와 더불어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담겨져 있었다. 스티브는 그만 웃어버렸다.


 "자네가 체크무늬 셔츠를 찢겠다고 했잖아."

 "아주 좋아. 누가 쳐다보는 건 좀 질투나지만, 어쨌든 끝내줘."


 쪽 소리를 내며 부벼오는 입술에 응하며 스티브는 토니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내 얼굴이랑 몸만 목적인 모양인데.." 스티브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토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어 왔다.


"뭐? 내 목적은 당연히 스티브 로저스지, 노친네야. 빨리 키스나 마저 해." 

"밖에선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땐 언제고?"

"봄이잖아, 스티브. 나도 봄에는 설렌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둔 꽃띠 처녀처럼... 응? 빨리."


 칭얼거리는 몸을 더욱 세게 품에 가두면서, 스티브는 벅찬 마음으로 기쁘게 토니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두 사람의 호흡과 심장소리 너머로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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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토니 전력 60분, '봄' 주제 연성. 테마곡은 Beatles - Till there was you. 

노래에 맞는 연성을 하려고 했는데 너무 늘어지고 재미도 없길래 그냥 뽀뽀나 시켰습니다. 


by 치우타 2015. 3. 28. 21:47

 세상 일 참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야. 토니는 슬쩍 곁눈질로 옆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상대방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속을 알 수 없는 푸른 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아이 컨택에 토니는 내심 깜짝 놀랐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얼굴을 덮으며 입을 나불거릴 수 있었다. 스타크 가문의 놀라운 처세술에 건배.


 "흠. 그나저나 당신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런 곳에는 전혀..."

 "발도 안 디딜 것 같았어?"


 토니의 짖궂은 목소리에 남자, 스티브 로저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거의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는 사람 아닌가? 자네는." 이번에야말로 토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우와, 세상에. 캡틴 팝시클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놀랠 노 자네." 스티브의 얼굴에 떠오른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토니는 제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구 이놈의 입방정.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토니의 어린애 같은 행동에 스티브는 한숨을 쉬는 대신 작게 미소지었다. "내가 화석급이긴 하지만 죽진 않았어. 토니." 


 이어지는 달변에 막히는 것은 토니의 말문이었다. 어디 가서 말재주 없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는 천재로서(심지어 술 취한 채로 진행했던 연설에도 감동받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이건 정말 초유의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양반이 오늘따라 혀에 기름칠이라도 했나 봐. 토니는 괜히 입술을 쭉 내밀고 흥흥거리며 스티브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법 무례한 시선이었지만 오히려 스티브는 말 없이 그런 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토니는 백기를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정말이지, 왜 이러는 거야. 캡틴. 폐장시간을 훌쩍 넘긴 스미소니언 박물관 앞은 아주 조용했고, 지나는 행인들도 하나 둘 점점 다른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 토니와 스티브는 공교롭게도 박물관이 문을 닫고 난 지 10분 후에 도착해서 우연한 만남에 아주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이런 건 일부러 하려고 해도 못하겠다. 토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스티브와 시선을 마주했다. 말끔한 수트 차림인 그에 비해 스티브는 눈에 띄지 않는 가죽 자켓에 청바지,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당신 그거 완전히 너드 같아. 좀 귀엽기는 하지만." 


 아차. 오토코렉트 수준으로 나가버린 말에 당황할 틈도 없이 스티브가 씩 웃었다. 어? 


 "너드 같다는 말은 들어본 것 같은데, 귀엽다는 말은 처음이군."

 "어어.. 어... 응? 들어봤다고? 언제.. 아니 그보다, 당신, 웃었..."

 "그렇게 말하는 자네가 귀여워서." 


 헉. 토니는 완전히 입을 쩍 벌렸다. 신경써서 매만진 머리와 몸에 딱 맞는 최고급 수트, 세련된 이탈리아제 가죽구두가 놀랄 정도로 무방비한 행동이었다. 귀여워? 누가, 내가? 아니 캡틴, 스티브가? 귀엽다니. 대체 무슨 소리야? 토니의 옥타코어가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다가 연기를 내뿜으며 삑삑 경고음을 울려댔다. 미확인 정보를 수신할 수 없다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토니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눈 앞에는 여전히 스티브, 캡틴 아메리카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조금 전보다 거리가 가까워진 것만 같다. 토니는 다시 눈을 두 번 정도 깜박였다. 그래도 금발의 잘생긴 청년은 사라지지 않은 채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왔다. 등에 식은땀이 쭉 흘려내렸다. 토니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했다. 오, 젠장. 들켰구나.


 사실은 토니가 지난 2주일 동안 스티브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그의 행적을 추적한 것으로도 모자라(거의 스토킹 수준으로), 우연을 가장하며 헬리캐리어에 불쑥 나타난다던지 거리에서 토니 스타크를 봤다는 목격담을 만들어 낸다던지 하는 짓을 일삼고 있었다. 이는 그저 순수한 관찰이자 감시라고 토니가 자비스에게 우겨댔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기 감정에 대한 일종의 확인 작업이었다. 스티브 로저스 감시 1주일이 되던 날, 토니는 "내가 저런 꼰대한테 호감이 있을리가 없어! 외모만 취향일 뿐이야! 그래, 외모만!" 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랩실에서 홀로 외쳤었다. 같은 일을 1주일 더 시행한 후 토니는 드디어 반쯤 포기하고 직접 스티브의 뒤를 밟았으나 하필이면 본인과 딱 마주치고 만 것이었다.


 "토니."

 "어, 왜, 무, 뭐.. 왜?"

 "선글라스 좀 벗어 보게."

 "이거? 아니 이건 갑자기 왜? 그보다 잠깐, 우리 지금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토니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슬그머니 발을 뒤로 물렸다. 머리 위로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지척에 스티브가 서 있었다. 스티브는 손을 뻗어 토니의 선글라스를 신속하게,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벗겨버리고는 주머니에 쑥 집어넣었다. 그거 비싼 건데! 안경다리가 휘어지면 어떡해! 그는 속으로 외쳤다. 코 앞에 캡틴 아메리카가 다가와 있는 이 순간 비비안웨스트우드의 선글라스 따위 아무래도 좋았지만 토니는 스티브 외에 신경을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만큼 필사적이었고, 어떠한 예감이 그의 오래된 연애 레이더를 건드리는 것을 무시하고 싶었다.


 "플레이보이라면서, 무드 없기는." 

 "어... 뭐라고?"

 "이럴 땐 눈을 감아야지, 토니."


 놀리는 듯한 저음의 기분좋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가 싶더니, 도톰하고 약간 거칠한 입술이 와 닿았다. 토니는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었지만 말캉하고 축축한 혀가 아랫입술을 두드리는 걸 느끼며 몸에 힘을 풀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상대의 안쪽 깊숙한 곳까지 얽히고, 마주 안은 손이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로 열정적인 키스였다. 토니는 아주 잠깐 스티브의 적극성에 그가 제법 키스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서투른 움직임에 속으로 혀를 차며 능란하게 리드해 주었다. 잠시 후 입술이 떨어지고 발갛게 물든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보다가 피식 웃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만남이 두 사람을 여기에 데려다 주었다. 오늘 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by 치우타 2015. 3. 1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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