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스티브는 겨울을 딱히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타고난 지병이 많았던 탓에 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금세 건강이 나빠지는 건 힘들고 괴로웠지만 어머니가 해 주는 따뜻한 스프를 먹는다거나, 작은 난로에서 타고 있는 장작의 아름다운 불꽃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가 전쟁을 겪으면서부터 크게 바뀌고 말았다. 스티브는 겨울의 추위를, 그리고 눈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오늘은 날이 흐리군."

 "일기예보를 보니 오후엔 눈이 온대요."

 

 훈련 계획을 정리하면서 걸음을 옮기던 스티브는 순간 발을 멈췄지만 아주 찰나였던지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화제는 자연스레 뉴 어벤져스의 현재 성취도와 앞으로 해야 할 일들로 넘어갈 수 있었다. 

 

70년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이후 스티브에게 있어서 눈이란 상실이었다. 함께 자라온 친우를 눈 속에서 잃었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하이드라가 이용하던 테서렉트를 싣고 차가운 빙하 속에 처박혔다가 깨어나 보니 7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있었다. 사랑하던 여인도, 친우도, 동료도 없는 세계에 깨어난 스티브는 신체가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추위를 느꼈다. 눈이 내릴 때면 밖에 나가지 않았고 가능한한 일에 매달리며 차갑게 가라앉는 마음을 애써 무시했다.

 

[오늘 몇 시에 끝나?] 

 

 스티브의 입가에 슬몃 미소가 걸렸다. 그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답장했다. [6시쯤은 끝날 것 같네] 번개같이 다음 메시지가 날아왔다. [왠일로 이렇게 빨리 보내? 연습 좀 했어?] 토니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걸 상상하니 웃음이 더욱 새어나왔다. 옆에서 나타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은. 자네 회의 중 아닌가?]

[뭐 어때, 지루한 탁상공론 중이야. 6시라고? OK.]

 

 스티브가 가벼운 타박을 하려던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토니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어차피 훈련을 시작할 시간이 된 데다가 둘의 사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타샤가 삐딱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기에 스티브는 별 말 없이 그냥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린 다음, 복장을 갖추어 훈련에 임했다.

 

 

 훈련이 막 끝나갈 즈음, 밖에서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아, 이 정도면 쌓이진 않겠는걸. 샘을 선두로 각자 눈에 대해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스티브는 수트와 헬멧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일기예보가 빗나갔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창 밖을 보고 싶지 않았다. 토니와의 메시지 내용은 까맣게 잊은 채 오늘은 여기에서 묵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때-

 

[나 좀 봐줘, 스티브.]

 

토니의 메시지와 함께 등 뒤에서 멤버들이 웅성거리는 걸 느끼고 스티브는 무심코 몸을 돌려 창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천천히 떨어지는 눈송이 사이로 선글라스를 머리에 낀 채 손을 흔드는 토니가 서 있었다. 스티브는 아직 다른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것도 잊었는지 헐레벌떡 토니가 있는 바깥으로 뛰어갔다.

 

 "그러다 넘어지겠어, 솔져. 나 어디 도망 안 가."

 "토니, 여긴 어떻게..."

 "흠. 글쎄.. 눈이 데려다 줬지 뭐."

 

당신 보고싶어서 끝나자마자 달려왔지. 당장 나한테 키스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뒤에 로디도 있거든. 빨리 정리하고 나와. 토니가 씩 웃으면서 속닥거리고는 다시 선글라스를 꼈다. 검은 유리알 너머로 가려진 총명하고 반짝거리는 갈색 눈동자가 아쉬웠다. 그는 자꾸만 뻗어나가려는 손을 애써 억누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데려다 줬지.

 

생각없이 던진 말인지, 토니가 스티브의 마음까지 읽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지 상관없었다.

...어쩌면, 아주 조금은 눈이 좋아질 것도 같다고 생각하며 스티브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by 치우타 2016. 1. 28. 14:29

 어벤져스의 명실상부한 투탑인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 맨의 연애란, 모두가 한 번쯤 상상해본 적은 있어도 실제로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일종의 '비현실적인 무언가' 였다. 치타우리의 뉴욕 습격으로 인해 처음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시작부터 삐걱거렸으며 그 이후 토니의 말리부 저택 테러 사건, 프로젝트 인사이트를 거치는 동안에도 좋아지기는 커녕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벤져스 멤버들 및 소수의 관계자들(콜슨 등)은 조금 긴장한 표정이지만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려 있는 스티브와, 그의 탄탄한 팔 안에 휘감긴 채 심드렁한 얼굴을 한 토니가 공표한 교제 사실을 들으면서 입을 떡 벌리거나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 맨? 아니, 스티브 로저스와 토니 스타크? 어느 쪽도 전혀 어울리는 느낌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경악하며 앞뒤에서 수군거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제법 괜찮은 연애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에는 늦게까지 훈련소에 남아 있던 스티브가 정확히 여섯 시에 '퇴근'을 해서 데리러 온 토니의 차에 올라탄다던지, 하이드라 기지 급습 작전 회의때는 변함없이 으르렁 컁컁 신경전을 벌여서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놓고 끝난 다음에는 서로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간다거나 거의 포옹할 거리로 찰싹 붙어서는 속닥거리는 모습 등이 목격되면서 사람들은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 맨이라는 세기의 커플이고 뭐고 어쨌든 커플 사이는 신경쓰지 않는 게 좋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둘의 연애가 핑크빛으로 각인되고 있을 즈음, 토니는 랩실에서 혼자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어제는 평소처럼 스티브를 데리러 훈련소에 갔더니 나타샤가 눈썹을 씰룩거리며 '알콩달콩 귀엽게 연애해서 그런지 요새 얼굴이 확 폈네요, 스타크.' 라고 말한 것이 그 계기였다. 토니는 이도저도 아닌 표정을 지으면서 적당히 둘러대고 자리를 피했지만 옆에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스티브가 그의 화를 더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연애, 그래 연애 좋지. 좋고 말고. 달달하고 알콩달콩한 것도 간질간질하고 낯설긴 하지만 괜찮아. 왜 싫겠어.

중요한 건 저 놈의 노친네가 손잡고 포옹하는 거 외엔 진도를 안 나가고 있으니까 그게 문제지!

 

 토니는 괜히 허공에 손가락을 휘두르며 프로그램을 흩었다가 제자리로 모았다. 타는 속을 달랠 길이 없어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었지만, 도리어 씁쓰름한 맛이 진하게 전달되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토니 스타크인데. 애인은 미국의 전형적인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는 끝내주는 블론디 빵빵 스티브 로저스인데.

 

아직도 키스 한 번 못해봤다니!

 

 때마침 랩실의 문이 열리며 고민의 원흉인 스티브가 편안한 차림으로 들어섰다.

 

 "토니, 여기 있었나? 곧 저녁 준비가 된다고 하네만."  

 

 환한 웃음이 걸려 있는 얼굴이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사람 속도 모르고. 토니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갈게."

 "삼십 분 후에나 말인가? 안 되네. 오늘은 나랑 같이 가야겠어."

 "정말 금방 끝날거야. 5분..."

 

 ...만 기다려, 라는 토니의 말은 채 나오지도 못하고 스티브의 입 안으로 먹혀들어갔다. 부드럽게 와 닿은 입술과는 정반대로 서투르지만 열정적인 혀가 숨소리 속에 얽혀서 녹아들었다. 되게 못할 줄 알았는데 최악은 아니네. 살짝 붉게 물든 뺨을 바라보면서 토니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래도 날 혼자 보낼 건가? 토니."

 "...노친네 약아빠져서는.. 알았어. 같이 가면 되잖아."

 

 토니는 마지못해 내밀어진 커다랗고 단단한 손을 붙잡았다. 아까보다 더 활짝 웃는 선샤인 스마일이 덤으로 따라오는 건 꽤 나쁘지 않았다. 입 안에는 스티브에게서 넘어왔는지 달콤쌉싸름한 초콜렛의 맛이 남아 있었다.  

 

 

by 치우타 2016. 1. 25. 17:33

 토니는 어릴 때부터 이미 '풍족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였다. 물론 그가 정말로 간절히 바라던 평범한 행복들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토니의 작은 투정이나 불평을 들을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며 너무 욕심이 많다고들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토니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그만두었다. 



 "-그래서, 이게 네 로망이라고?"

 "...너무 유치한가?"


 토니는 얼굴이 적당히 가려지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에게는 좀 넉넉한 품의 자켓에 셔츠, 청바지, 운동화라는 시시한 옷차림을 한 채 불만스러운 얼굴로 다리를 흔들었다. 벤치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스티브는 안절부절하며 토니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입가에 한가득 떠오른 미소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던지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저걸 한 대 때릴 수도 없고,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토니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저돌적인 스티브의 고백과 적극적인 토니의 공세(라고 쓰고 지기 싫어서 되돌려주다가 코 꿰였다고 읽는다)덕분에 한 달 전부터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된 두 사람이었지만, 토니나 스티브나 외모든 복장이든 상당히 눈에 띄는 타입이라 학교 내에서 데이트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만 했는데 하루는 스티브가 토니에게 조심스럽게 어떤 제안을 해 왔다. 자신의 자켓을 입고 만나는 건 어떻겠냐고.


 "유치하다 못해 초등학생이 지나가다가 웃을 정도의 레벨이지."

 "으음... 역시...."

 "뭐.. 오늘은 날씨도 좋고 하니까, 저기 트럭에서 아이스크림 사 오면 봐줄게."

 "! 어떤 걸로?"


 토니의 가차없는 평가에 시무룩해서 고개를 푹 숙이던 스티브는 금방 회복해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무슨 맛을 좋아하는지 잘 생각해서 사와. 답을 알려주면 발전할 수 없다고, 로저스. 토니는 일부러 스티브의 성을 부르면서 윙크해 보였다. 

스티브는 바람같이 트럭 쪽을 향해 달려갔고 토니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주었다. 


 로망이라. 그것도 이런 말도 안 될 정도로 평범하고, 소박한 걸 해보고 싶다니. 바보 같이.


 하지만 토니는 스티브의 그런 점이 좋다고 생각했다. 오래 전에 자신이 잃어버린 것. 혹은, 그냥 묻어버린 것을 다시 파내어 먼지와 흙을 털어낸 다음 웃으며 내미는 듯한, 스티브의 밝은 미소나 수줍은 표정. 그런 주제에 다짜고짜 입술을 밀어붙이질 않나 사람이 울 때까지... 토니는 더 뻗어나가려던 기억의 끄트머리를 뚝 끊어냈다. 쟤랑 사귀고 나서부터 내가 아무래도 점점 이상해지는 게 틀림없어. 노려본 시선 끝에는 양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걸어오는 스티브가 있었다.


 "뭐야?"

 "딸기맛이랑, 초코맛으로 사왔어. 하나만 먹기엔 아쉽고 또... 이걸 좋아할것 같아서."

 "....합격이야. 머리 좋네."


 아이스크림을 받아들며 토니가 피식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환하게 웃는 스티브는 여전히 조금 바보 같았지만, 귀엽고, 간질간질했다. 나도 언젠가 너랑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알려 줄게. 들릴 듯 말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스티브가 조금 더 큼직하게 미소지었다. 




by 치우타 2016. 1. 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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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에 변경이 좀 있어서...!!! 정리 다시합니당

샘플은 수량조사글을 참조해 주세요 :3


통판은 제 사정상 진행이 어려워 없을 계획이며, 선입금 기준으로 50부 인쇄 계획입니다. 




Mass Effect AU, 무비 스팁토니

A5, 150p 즈음, 날개, 무광 부분uv코팅

가격 15,000

R-19 (신분증 검사 필수)


SF게임인 Mass Effect 의 세계관에서 스티브와 토니가 다투기도 하고 연애도 하는 내용입니다. 해피엔딩.


선입금 폼 : https://docs.google.com/forms/d/1BJ5eSmiGd3axX4fksn_hZaoaarnK7Q1Ysxck1sIGNy0/viewform?usp=send_form

by 치우타 2015. 11. 8. 03:58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마감일정이 너무 타이트해서 수량조사가 늦어져 부럿습니다.. 엉엉 껑껑

그래도 책은 나옵니다! 하기 수량조사 폼에 참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가격 : 17000~18000 예상

 * 표지사양 uv부분코팅 예정

 

 

 

<샘플>

 

 

 

 

 

by 치우타 2015. 11. 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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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일을 마치고 타워로 돌아오던 스티브는 문득 바닥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 두어 장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아직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한껏 시샘을 내긴 해도 아침 저녁으로는 조금씩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벌써 계절이 바뀔 때가 온 건가. 거리를 따라 늘어선 가로수들이 붉게 물드는 광경을 상상하며 그는 슬며시 미소지었다.

 

 "어서 와, 스티브. 일은 잘 끝냈어?"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될 것 같네. 자네가 도와준 덕분이야."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가운 한 장 차림에 커피를 마시려던 토니가 손사래를 쳤다. 당신의 인품이 그렇게 만든 거지. 촉촉하게 젖은 검은 머리를 따라 물방울이 톡, 하니 어깨에 떨어진다. 스티브는 한숨 반 웃음 반을 섞어 뱉으며 마른 수건을 손에 들었다.

 

 "또 머리를 다 말리지 않고 나왔군. 감기 걸리겠어."

 "아. 고마워."

 

 토니가 머그잔을 내려놓는것과 거의 동시에, 마른 수건을 든 스티브가 조심스레 머리의 물기를 털기 시작했다. 사실 당신이 그렇게 한 마디 하고는 머리를 말려주는 게 좋아서 자꾸 잊어버린다고 하면 화내려나. 토니는 보이지 않게 입꼬리를 올리며 얌전히 스티브의 손길을 받았다. 전투에 익숙한 투박하고 커다란 손이 머리를 도닥여오는 느낌은 늘 새롭고, 달콤했다. 가끔은 너무 어린애처럼 굴고 있는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지만 평소에 빈틈을 보이지 않는 토니가 아주 가끔씩 연인이라는 미명 하에 슬몃 기대오는 것을 스티브는 꽤 좋아하는 모양이었다(주변의 평가에 의하면).

 

 "토니."

 "...음?"

 "저건 뭔가? 못 보던 건데."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그릉거리기 시작한 토니의 목덜미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수건을 내려놓은 스티브가 침대 머리맡을 가리켰다. 심플한 디자인의 작은 테이블 위에, 장미 모양의 장식 같은 것이 있었다.

 

 "아, 저거. 수가 준 거야. 요즘 나나 당신이나 피곤해 보인다면서. 숙면에 도움이 된대."

 "자네가 그런 걸 순순히 받아오다니. 조금 놀라운데."

 "그야 지난 사흘 정도 리드를 장기 대여했더니.. 안 받으면 맞을 것 같았거든."

 

 토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과장된 제스쳐를 취해 보였고 스티브는 못 말린다는 듯이 픽 웃었다. 당신도 얼른 씻고 와. 토니의 낮은 속삭임에 스티브는 정말 번개같이 샤워를 하고 뛰쳐나왔다(그런 것도 캡틴의 자질인가? 토니가 농담했다). 입술이 맞닿고, 손가락이 얽히고, 이내 방 불이 소리도 없이 꺼졌다.

 

 

 "스티브!"

 "...어.. 음? 토니?"

 "멍하니 서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데이트 신청한 건 당신이었잖아."

 

 스티브는 가만히 서서 눈을 깜박였다. 방금 전에 토니랑 잠에 든 것 같았는데, 아닌가? 그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인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쇼윈도에 진열된 스카프와 코트. 그리고 토니.

 

 "자네 옷이..."

 "이거? 평소처럼 입으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눈에 띄니까.. 이상한가?"

 

 토니는 평범한 검은색의 티에 품이 넉넉한 후드를 걸치고 있었다. 청바지에 운동화라는 완벽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평소에 늘 입고 있던 정장을 벗으니 조금은 더 앳된 분위기가 풍겼다. 거리를 무심히 지나는 아가씨들 몇몇과 남자들이 힐끔거리며 토니 쪽을 돌아보는 걸 본 스티브는 왠지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아주 잘 어울리네. 귀여워."

 "뭐?"

 "칭찬이니까 인상은 쓰지 말게."

 "남자에게 귀엽다는 건 매력없다는 거랑 거의 동급이라고, 스티브."

 "토니."

 

 달래듯 이름을 부르자 토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당신은 오늘도 잘생겼군. 약간 아저씨 같긴 하지만. 목소리에는 심통이 담겨 있었으나 그런 주제에 더없이 진지해서 스티브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금방 마음이 풀어진 두 사람은 사이 좋게 거리의 사람들 속에 녹아 들었다.

 

 "어디 갈까? 당신이 정해봐."

 "내가 말인가?"

 "신청한 건 당신이니까 우선권이 있지."

 "그럼.. 센트럴 파크."

 

 스티브는 말을 꺼내놓은 다음에야 아차 하는 마음에 토니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토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 이 시간이면 딱 좋군. 가자고. 그런 다음 덥석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어벤져스 멤버들 앞에서야 일부러 과시 겸 괴롭힘(?)용으로 스킨쉽을 과장되게 해올 때도 있었지만, 밖에서는 스티브의 이미지라던지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해서 최소한의 접촉만을 하곤 했었다. 이런 백주 대낮의 뉴욕 거리에서 깍지 낀 손이라니. 기쁜 마음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는 했으나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기에 차마 말은 못하고 스티브는 토니의 옆얼굴을 흘끔 넘겨보았다. 거기엔 불안이나 두려움이 아닌, 순수한 애정과 즐거움이 반짝이고 있었다.

 

 "스티브?"

 "아무것도 아닐세. 가지."

 

 스티브는 행여나 놓칠 세라 깍지 낀 손을 더욱 세게 마주잡았다. 꽉 잡힌 손이 제법 아플 법한데도 토니는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오, 이건 좀 장관이네."

 

 토니가 감탄하며 발을 앞으로 딛었다.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스티브도 약간 입을 벌린 채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센트럴 파크 안쪽의 산책로에는 제각기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들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마치 동화 속의 그림처럼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토니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근처에 떨어져 있던 낙엽을 슬슬 주워모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넋을 놓고 있던 스티브의 머리 위로 흩뿌렸다.

 

 "토니."

 "하하, 잘 어울리는데. 당신 파란 자켓이랑, 이 낙엽들. 그림 같아."

 "자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는 것이 스티브의 지론이었다. 물론 거기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겠지만 이 경우엔 토니가 먼저 도발해온 것이므로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스티브 역시 예쁘게 모인 낙엽을 모아 토니에게 뿌려 주었다. 두 사람은 십대 어린애들마냥 낄낄거리며 한동안 그렇게 낙엽을 서로 주고받았다. 어느 순간 스티브가 토니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고, 토니가 얌전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면서 귀여운 낙엽 전쟁은 끝이 났다.

 

 "스티브."

 "왜 부르나."

 "행복해?"

 "더할나위없이, 무척."

 

 토니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됐어. 솔직하고 애정어린 그 표정에 스티브 또한 이끌리듯이 환하게 웃었다. 낙엽이 바람에 춤추듯 휘날렸다.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자 토니가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속삭였다.

 

 "꿈이야, 스티브. 이제 일어나야지."

 

 

 스티브는 눈을 번쩍 떴다. 여전히 방 안은 어두웠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다 꿈이었나. 아쉬운 감정이 마음 한 구석을 덮는 것을 느끼며 그는 손을 뻗어 품 안의 토니를 확인했다. 작은 움직임에도 쉬이 잠을 깰 정도로 예민한 그가 거의 미동도 없이 숨소리만 내면서 쿨쿨 자고 있었다. 수의 선물이 효과를 본 모양이군. 스티브는 살그머니 토니를 좀 더 끌어당겨 안았다. 으음, 하는 소리를 작게 내면서도 토니는 깨지 않았다.

 

 센트럴 파크에서의 데이트는 비록 꿈이었지만, 곧 가을이 오고 나뭇잎이 물들어 낙엽이 지면 다시 한 번 데이트를 신청할 것이다. 후드를 입은 토니의 손을 잡을 수 없다고 해도 좋다. 함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스티브는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래, 가을이 오면.

 

 

*놜님의 그림을 보고 충동적으로 연성한 글입니다. 정말 너무너무 예쁘고 포근한 두 사람이 좋아요.

 +허락받고 놜님 그림을 모셔왔습니다!!!! (_noirnoir) 

 

by 치우타 2015. 9. 9. 17:12

[독점 공개] ‘알콩달콩세기의 히어로 커플과 만나다

    치우타 기자

 

*편의상 두 히어로는 간단히 이름으로만 표기하였습니다.

 

 지난 23, 본 기자는 세기의 히어로 커플인 캡틴 아메리카-아이언맨의 하루를 독점 취재하기 위해 찾아갔다.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 어벤져스 최상층은 무척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홀의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리는데 주위가 조용했다. 약속 시간은 823일 오전 10.

나는 정확하게 950분에 도착한 참이었고 취재 내용은 어제 다시 한 번 확인을 받아낸 상태였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생각하는 동안 갑자기 어디선가 사람의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니, 저 안쪽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로 토니가 잠이 덜 깼는지 뭐라 웅얼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그림자처럼 역시 살짝 까치집을 지은 금발 머리의 스티브가 따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수첩에 속기를 시작했다. 거의 홀에 가까워진 두 사람은 나를 발견했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경실색했다.

 

토니 : 으악! 뭐야! 누구야!

스티브 :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지?

: , 월간 스토니에서 나온 기자에요. 어제 전화 드렸던...

토니는 여전히 뜨악한 표정이었지만 그제야 스티브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취재 건이 잠시 잊혀져있던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어제 뉴욕엔 사건이 있었던 참이었다(타이밍 한번 끝내주기는).

 

스티브 : 미안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겠습니까? 토니, 빨리 씻고 나오자.

토니 : 월간 스토니?

스티브 : 당신이 수락한 독점 취재 있잖아.

토니 : .. 기억났어. 오케이.

: 천천히 하세요. 많이 피곤하시죠?

토니 : 죽을 것 같아. 어제 이 양반이-

 

 다음 순간 스티브는 날렵하게 토니를 옆구리에 끼고 다시 방 안으로 사라졌다. 뭔가 좋은 취재거리를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 평소처럼 말끔해진 두 사람은 어딘가 머쓱한 얼굴로 미술관에 가자고 했다. 근처에 인상파 화가의 전시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은근슬쩍 깍지를 껴 얽어매듯 맞잡는 두 손을 훔쳐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관은 제법 한산했다. 처음 30분은 토니도 스티브가 해 주는 설명을 들으며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곧 움직이지도 새롭지도 않은 그림에 흥미를 잃었는지 쉼터용 벤치에 가서 털썩 앉았다. 그대로 스티브와 그림을 보기에도 어쩐지 어색해서 나는 토니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손에 자그마한 패드를 들고 뭔가를 바쁘게 두드리다가 날 눈치 채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그림 보는 건 별로 안 좋아 하시나 봐요.

토니 : 어차피 다 옛날 거잖아. 나름 희소가치가 있지만 관심 없어.

: 그러면 왜 여기로 오신 거예요?

토니 : 난 스티브가 좋으면 뭐든 상관없어. 원래는 다 내가 빌리려고 했는데 그러지 말라고 뜯어 말리잖아. 이걸 보고 싶어서 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면서. 하여간 꼬장한 노친네.

 

 토니는 투덜거리면서 다리를 덜렁거렸지만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스티브의 모습을 보고 있기만 해도 좋다는 것처럼, 간질간질하고 따스한 웃음이었다. 왠지 그런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해서 취재용 질문도 잊고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금방 가죽 재킷이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넋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스티브가 어느새 걸어와 나와 토니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티브 :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까?

: , 그게-

토니 : 당신이 꼬장하다고.

스티브 : 토니.

 

 스티브는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한 손으로 토니의 허리에 팔을 감고 뺨에 키스를 떨어뜨렸다. 아무리 사람들이 없다고는 해도 미술관에서 이래도 괜찮은가? 오히려 내 쪽이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이 이상한 조합(찰싹 달라붙은 남자 둘과 어정쩡한 여자 하나)에 관심 따위 없는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두 사람과 나는 미술관에 딸려 있는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여기는 문자 그대로 우리 외에 아무도 없었는데, 아예 가게 입구에 작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오늘은 점심시간에 휴무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들여보내주는 거지? 나는 토니를 바라보았고 그는 손가락을 입가에 붙이며 쉿, 이라고 중얼거렸다. 스티브는 토니에게 방금 본 전시가 얼마나 좋았는지에 대해 감상을 피력하느라 보지 못했다. 나도 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르며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토니 : 여기 브런치는 신선하고 아주 괜찮아. 커피도 수준급이지.

스티브 : 와 본 적이 있나?

토니 : 그야 당연하지. 유명한 곳이거든. 봄가을엔 여기 자리 없어서 난리 나.

스티브 : 누구랑.. 아니야. 신경 쓰지 말게.

토니 : 질투해? 스티비? 당신 이럴 때마다 귀엽더라.

 

 나는 이번 취재를 위해 열심히 준비했던 질문 리스트를 조용히 접어 넣었다. 두 사람은 내가 옆에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그저 좋다며 웃었고, 이미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어쩐지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아 조금 미묘한 기분이었지만 행복한 연인의 한때를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날 행복하게 해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토니는 급한 이사회 일정 때문에, 스티브는 뉴 쉴드의 업무 때문에 이동해야 해서 나를 잡지사 근처까지 바래다주었다. 입구에 들어가는 척 하며 고개를 슬쩍 내밀었더니 두 사람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잠시라도 떨어진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운 것 같았다. 스티브와 토니는 영문 모를 수신호를 몇 개 나누고는 각자 다른 길로 급히 뛰었다(토니는 금세 차가 와서 태우고 갔다).

 

 이번 취재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들은 세간에서 부풀리고 경솔하게 떠드는 것처럼 뭔가 엄청나게 다르거나 특별하지 않다는 거였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데이트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눈만 마주쳐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뜨거운 입맞춤을 나눈다. 잠시간의 헤어짐도 아쉬워하며 한참 손을 놓지 못한다.

 

 지구를 지키는 히어로지만, 평범한 커플이기도 한 두 사람이 앞으로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한다. 이 기사를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by 치우타 2015. 9. 7. 19:38

 토니는 아침 해가 밝아오기 조금 전에 비몽사몽한 상태로 작게 뒤척였다. 지금 몇 시지. 품 안에 끌어안은 캡틴이 따뜻하고 든든한 나머지 오늘은 조금 더 늦잠을 자고 싶은 기분이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부빈 순간, 뺨에 닿아온 감촉이 평소와는 아주 다르다는 걸 깨달은 토니가 문자 그대로 두 눈을 번쩍 떴다.

 

 "자비스, 불."

 

 주인의 말에 충실히 복종한 자비스가 방 안의 조도를 높이자 방금 전까지 토니가 끌어안고 있던 것의 실체가 드러났다. 부드러운 금빛의 갈기를 가진 리트리버 캡틴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는 캡틴이 맞지만, 시트만 살짝 덮은 채 거의 알몸으로 누워있는 건 어제 막 실종 소식을 접한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였다. 토니는 손을 들어 뺨을 세게 꼬집었다. 당연하지만 무척 아프고 얼얼했다.

 

 "자비스."

 [Yes, sir.]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주인님의 상태는 정상입니다. 조금 잠이 부족한 것 외에는요.]

 "그럼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토니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캡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난 어제 멍멍이 캡틴을 안고 잤는데, 왜 사람 캡틴이 들어와 있는 거야? 토니의 혼란을 불식시켜주기라도 할 것처럼 자비스가 대답했다.

 

 [그 캡틴이 바로 캡틴입니다.]

 "....뭐?"

 [전에 명령하신 것처럼 밤에는 특수 기능 카메라가 작동합니다만, 어제 이런 게 찍혔습니다.]

 

 자비스는 공중에 작은 스크린을 띄워 올렸다. 토니가 손을 휘둘러 적외선 모드로 바꾸자, 잠든 토니와 멍멍이 캡틴이 보였다. 우리 캡틴이 확실하군. 토니는 팔짱을 끼고 화면을 보다가 옆에 자던 캡틴에게서 급격한 온도 변화가 일어나는 걸 보고 영상을 확대했다. 약간의 몸부림(저러는 동안에도 난 잠이나 잤단 말이야? 토니는 입을 떡 벌렸다)을 끝내고 개의 형태에서 사람으로 변한 캡틴은 다시 미동도 없이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곧 영상이 꺼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토니는 머리를 양 손으로 쥐어 뜯으며 사정도 모르고 여전히 쿨쿨 잘 자고 있는 캡틴을 내려다 보았다. 코라도 잡아 비틀어줄까보다. 충동적인 생각으로 조각같은 얼굴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으음..."

 

 토니는 그야말로 화들짝 놀라 펄쩍 뛰다가 넓은 침대 위로 볼썽사납게 굴러버렸다. 갑작스런 사태에 토니가 끙끙거리며 일어나거나 말거나 캡틴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자신의 팔을 발견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는 바람에 허리에 걸쳐져 있던 시트가 흘러내렸고 늠름한 하반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토니는 드디어 참았던 비명을 내질렀다.

 

by 치우타 2015. 9. 4.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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