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세상 일 참 알다가도 모르는 일이야. 토니는 슬쩍 곁눈질로 옆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상대방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속을 알 수 없는 푸른 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아이 컨택에 토니는 내심 깜짝 놀랐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얼굴을 덮으며 입을 나불거릴 수 있었다. 스타크 가문의 놀라운 처세술에 건배.
"흠. 그나저나 당신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런 곳에는 전혀..."
"발도 안 디딜 것 같았어?"
토니의 짖궂은 목소리에 남자, 스티브 로저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조용히 대답했다. "거의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는 사람 아닌가? 자네는." 이번에야말로 토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우와, 세상에. 캡틴 팝시클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놀랠 노 자네." 스티브의 얼굴에 떠오른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토니는 제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구 이놈의 입방정.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토니의 어린애 같은 행동에 스티브는 한숨을 쉬는 대신 작게 미소지었다. "내가 화석급이긴 하지만 죽진 않았어. 토니."
이어지는 달변에 막히는 것은 토니의 말문이었다. 어디 가서 말재주 없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는 천재로서(심지어 술 취한 채로 진행했던 연설에도 감동받은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이건 정말 초유의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양반이 오늘따라 혀에 기름칠이라도 했나 봐. 토니는 괜히 입술을 쭉 내밀고 흥흥거리며 스티브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법 무례한 시선이었지만 오히려 스티브는 말 없이 그런 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토니는 백기를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정말이지, 왜 이러는 거야. 캡틴. 폐장시간을 훌쩍 넘긴 스미소니언 박물관 앞은 아주 조용했고, 지나는 행인들도 하나 둘 점점 다른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 토니와 스티브는 공교롭게도 박물관이 문을 닫고 난 지 10분 후에 도착해서 우연한 만남에 아주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이런 건 일부러 하려고 해도 못하겠다. 토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스티브와 시선을 마주했다. 말끔한 수트 차림인 그에 비해 스티브는 눈에 띄지 않는 가죽 자켓에 청바지,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당신 그거 완전히 너드 같아. 좀 귀엽기는 하지만."
아차. 오토코렉트 수준으로 나가버린 말에 당황할 틈도 없이 스티브가 씩 웃었다. 어?
"너드 같다는 말은 들어본 것 같은데, 귀엽다는 말은 처음이군."
"어어.. 어... 응? 들어봤다고? 언제.. 아니 그보다, 당신, 웃었..."
"그렇게 말하는 자네가 귀여워서."
헉. 토니는 완전히 입을 쩍 벌렸다. 신경써서 매만진 머리와 몸에 딱 맞는 최고급 수트, 세련된 이탈리아제 가죽구두가 놀랄 정도로 무방비한 행동이었다. 귀여워? 누가, 내가? 아니 캡틴, 스티브가? 귀엽다니. 대체 무슨 소리야? 토니의 옥타코어가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다가 연기를 내뿜으며 삑삑 경고음을 울려댔다. 미확인 정보를 수신할 수 없다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토니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눈 앞에는 여전히 스티브, 캡틴 아메리카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조금 전보다 거리가 가까워진 것만 같다. 토니는 다시 눈을 두 번 정도 깜박였다. 그래도 금발의 잘생긴 청년은 사라지지 않은 채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왔다. 등에 식은땀이 쭉 흘려내렸다. 토니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했다. 오, 젠장. 들켰구나.
사실은 토니가 지난 2주일 동안 스티브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그의 행적을 추적한 것으로도 모자라(거의 스토킹 수준으로), 우연을 가장하며 헬리캐리어에 불쑥 나타난다던지 거리에서 토니 스타크를 봤다는 목격담을 만들어 낸다던지 하는 짓을 일삼고 있었다. 이는 그저 순수한 관찰이자 감시라고 토니가 자비스에게 우겨댔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기 감정에 대한 일종의 확인 작업이었다. 스티브 로저스 감시 1주일이 되던 날, 토니는 "내가 저런 꼰대한테 호감이 있을리가 없어! 외모만 취향일 뿐이야! 그래, 외모만!" 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랩실에서 홀로 외쳤었다. 같은 일을 1주일 더 시행한 후 토니는 드디어 반쯤 포기하고 직접 스티브의 뒤를 밟았으나 하필이면 본인과 딱 마주치고 만 것이었다.
"토니."
"어, 왜, 무, 뭐.. 왜?"
"선글라스 좀 벗어 보게."
"이거? 아니 이건 갑자기 왜? 그보다 잠깐, 우리 지금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토니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슬그머니 발을 뒤로 물렸다. 머리 위로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지척에 스티브가 서 있었다. 스티브는 손을 뻗어 토니의 선글라스를 신속하게,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벗겨버리고는 주머니에 쑥 집어넣었다. 그거 비싼 건데! 안경다리가 휘어지면 어떡해! 그는 속으로 외쳤다. 코 앞에 캡틴 아메리카가 다가와 있는 이 순간 비비안웨스트우드의 선글라스 따위 아무래도 좋았지만 토니는 스티브 외에 신경을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만큼 필사적이었고, 어떠한 예감이 그의 오래된 연애 레이더를 건드리는 것을 무시하고 싶었다.
"플레이보이라면서, 무드 없기는."
"어... 뭐라고?"
"이럴 땐 눈을 감아야지, 토니."
놀리는 듯한 저음의 기분좋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가 싶더니, 도톰하고 약간 거칠한 입술이 와 닿았다. 토니는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었지만 말캉하고 축축한 혀가 아랫입술을 두드리는 걸 느끼며 몸에 힘을 풀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상대의 안쪽 깊숙한 곳까지 얽히고, 마주 안은 손이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로 열정적인 키스였다. 토니는 아주 잠깐 스티브의 적극성에 그가 제법 키스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서투른 움직임에 속으로 혀를 차며 능란하게 리드해 주었다. 잠시 후 입술이 떨어지고 발갛게 물든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보다가 피식 웃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만남이 두 사람을 여기에 데려다 주었다. 오늘 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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