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vel Cinematic Universe 

Steve/Tony

Alternative Universe

Writing material by 귤자님


Lion, Man, and Love.



앤서니 에드워드 스타크- 통칭 '토니 스타크' 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 사진작가였다. 그가 찍는 모든 사진은 매혹적이었으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한 채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넓은 주택과 별장, 클래식 카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언제나 많은 여자들이 옆에 들끓었지만 스테디한 관계는 하나도 없었다. 또한 토니는 자신의 저택에 정말 가까운 이들 외엔 아무도 들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몇 번이고 파파라치나 방송사에서 그에 관해 취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으나 한 번도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에겐 유능한 집사가 있었으므로)



"지겨워."


"뭐가 말씀이십니까?"


"방송사들, 파파라치들, 사람들 전부 다. 이젠 인물사진도 질렸어. 다른 게 없을까? 자비스."


"카메라 앞에 서면 누구든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고 좋아하셨던 게 엊그제 같습니다만..."


"그게 문제야! 처음엔 그야 재미있었지. 다들 아닌 척 하고 내 앞에 서서 한껏 자신을 뽐내려고 들지만,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순간 모든 환상이 무너지거든.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땐- 오. 충격적이었다고."


"어쩐지 별로 믿음이 안 가는 군요."


"....처음은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간에, 질렸어. 그들의 욕망을 보는 것도 나한테 지나친 관심을 들이대는 것도! 끔찍해."



고개를 저으며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까지 부르르 떠는 토니를 보고 자비스는 한숨을 쉬면서도 작게 웃었다. 그의 주인은 변덕스럽고, 까다로우며, 제멋대로에다, 30대에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철없이 굴 때가 있지만 사실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주위 친구들에게 틱틱대지만 중요한 순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줄 아는 모습이라던지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미움을 사듯 얄밉게 구는 모습 등이 그랬다. 


그리고 적당히 풍족한 집안에서 자라며 취미로 잡은 카메라가 직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토니였으나 점차 유명해지면서 원치 않는 허위 스캔들이나 협박, 지나친 관심과 압박에 시달려야 했고 그것은 점점 그로 하여금 인물 사진에서 학을 떼게 만들었던 것이다. 가끔은 사진 자체를 그만둬 버릴까 싶다가도, 서투르게 막 찍어댔던 옛날 사진들에 담긴 애정과 열정을 보고 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사람 외에 다른 걸 찍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사람 말고 다른 거?"


"아예 원점으로 돌아가시는 것도 좋고요. 동물 꽤 좋아하시잖아요."


".....음. 사람하고 달리 겉과 속이 같아서 참 친근하고 좋은 녀석들이지."



자비스는 토니 앞에 화면을 하나 띄워보였다. 자연과 동물 사진 및 다큐로 유명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프리랜서 사진작가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기한은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토니는 갑자기 마음이 동하는 걸 느끼고 잠시 멍한 얼굴로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언제까지지?"


"내일이 마감이군요."


"...뭐?!?!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맙소사, 시간도 없는데! 인물 포트폴리오 따위 쓰고싶지 않다고!"


"어차피 이 근처엔 새도 많고, 운이 좋으면 곰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난 이럴 때마다 네가 무서워, 자비스."


"칭찬으로 듣죠."


"장비 챙겨줘, 당장 나가야겠어. 앞으로 24시간도 채 안 남았는데 뭘 건질 수 있을지 모르겠군."



토니는 허둥지둥 아무옷이나 골라 입으며 자비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충실한 그의 집사, 자비스는 언제 준비해둔 건지 완벽하게 식량과 물이 채워진 가방, 카메라 장비, 비상연락수단(핸드폰을 못 쓰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을 토니에게 냉큼 내밀었다. 끝내주게 유능하기는 해. 토니는 속으로 그가 지금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임에 감사했다.



"다녀올게. 요새 또 몇몇이 어슬렁거리던데, 전기 담장 맛을 보여줘도 되고."


"그러다 고소 당하십니다."


"내가 이길걸. 이따 봐, 자비스! 행운을 빌어줘!"



당신에겐 필요 없을 겁니다. 바람처럼 뛰쳐나가는 토니의 등 뒤로 자비스가 들릴락말락하게 속삭이며 웃었다. 그 후에 토니가 어떤 것과 어떤 식으로 씨름하여 사진을 찍었는지, 무슨 사진을 냈는지는 생략하기로 한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토니는 마감 10분 전에 사진을 제출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사진은 응모된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선정되어, 메인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by 치우타 2014. 4. 18. 01:11

Michael Buble - Call me irresponsible 을 듣고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 윈터솔져 스포 주의. 



스티브 로저스를 좋아한다.


토니는 그제서야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의견이 안 맞아서 다투는 건 기본이요, 성격이나 취향, 전장에서의 행동까지 어느 하나 공통점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다니. 그것도 남자한테! 90살 넘은 (그냥 숫자로만 따지면 그렇긴 하지만) 할아버지한테! 고리타분하고, 지루한데다가, 필요할 땐 인정사정없이 상대를 비꼴 수 있는 군인한테! 토니는 감정을 완전히 자각한 순간 몹시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들고 있던 스패너를 테이블에 내팽개치고 랩을 뛰쳐나왔다. 그 자리에 더 서 있다간 어떤 물건을 파손할 지 몰랐고, 환상적인 세계 최고급 네트워크로 스티브 로저스의 현재 위치와 상황 따위를 찾아볼까봐 겁이 나서였다. 그는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오기도 하는 천재였으니까.


분하고 억울하고 믿을 수 없다는 마음과, 당장에라도 찾아가 들이대며 추근덕거리고 싶은 마음이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토니는 철저하게 스티브에 관한 모든 정보를 차단했다. 섣불리 다가가서 자신을 가벼운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게 싫었고 (실제로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토니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되도 않는 말실수로 엉뚱한 인상을 주는 것도 싫었다. 페퍼 이후로 온 진심을 보여주고 싶어진 상대가 스티브 로저스였다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는 70년이 지난 후에도 신실하고 성실한 남자였다. 그토록 강박적으로 스티브에 대한 정보를 차단했던 토니였지만, 딱 한가지는 어쩔 수 없었다. 페기 카터. 몰래 이야기를 대강 전해들은 것 외에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었다곤 해도 스티브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토니는 씁쓸한 심경을 애써 감추며 카메라에 기록된 영상을 꺼버렸다. 절대 자신은 그런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시작부터 깨닫는 건 정말로,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거나 덜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토니는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스티브가 보고 싶었고, 그의 소식이 궁금했고, 자신이 그의 '관심 인물 리스트'에 들어갔으면 하고 생각했다. 이건 진짜 멍청하고 미친 짓이야. 몇 번씩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어 봤지만 사랑이란게, 원래 다 미친 짓이지 않던가. 유치하고, 무책임하고, 상대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거. 이 나이에 또 하게 될줄은 몰랐지만. 토니는 혀를 차며 머리를 벽에 박았다. (자비스는 이제 색다른 자해를 시도하시는 거냐며 약간의 비아냥이 섞인 걱정을 했다)



그리고 또 한두달이 지난 후, 이렇게 된 거 그냥 거절당하던 말던 말해버릴까? 토니는 한층 퀭해진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며 반쯤 이성을 놓아버린 생각을 했다. 여러 사건이 지나가고 스티브는 페기 카터 외에 또 다른 과거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제임스 뷰캐넌 반즈, 윈터 솔져. 그 사이에 자기가 죽을 뻔 했다는 건 그닥 놀라운 일 축에도 끼지 않았지만 (이미 죽을뻔 했다가 살아난 경험도 있었고) 중요한 건 스티브의 친우가 적으로 돌아왔다가 이젠 행방이 묘연해진 부분이 더 신경쓰였다. 아마 그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겠지. 토니는 클라우드를 띄워 그의 행방을 찾아보려다 그만두었다. 어쩐지 잡을 수 없는 그림자를 쫓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열심인 남자와, 그를 좋아하는 현대의 표상격인 남자. 도저히 어디에서도 교차점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토니는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세상에, 내가 살면서 이렇게 어려운 상대를 만난 적이 있었나? 대답은 No 였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혹은 그가 눈빛만 보내도, 모든 사람은 먼저 다가와 꼬리를 치거나 어떻게든 토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걸 오랫동안 즐겼고 언제 그랬냐는 듯 매정하게 내쳤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죗값을 이런 걸로 받는게 아닐까. 거의 자포자기격으로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꽤 그럴듯했다. 이래서 착하게 살라고 하나보다. 토니는 허허로이 웃음지었다.



결국 토니는 오랜 고민과 고뇌 끝에 스티브와 몇 번 만나고 (우연이든 의도적이건간에) 그의 일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우선 조금 더 가까워지기로 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시작했지만 과정이나 결과가 제법 괜찮았기에 토니는 조금씩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스티브의 행동이나 눈빛, 말투에서 그는 점점 '그냥 같이 싸웠던 동료' 에서 '괜찮은 친구가 될 지도 모르는 동료' 정도까지는 올라선 것 같았다. 못 보던 새로운 얼굴인 샘 윌슨이라는 남자보다도 아직 한참 못한 위치인건 분명했으나 토니로서는 상당히 분발한 셈이었기에 우선은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혼자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고민할 때 보다는 직접 스티브와 만나 부딪치고 대화한 덕분에 훨씬 여유가 생긴 토니는 모르는 사이에 표정도 부드러워지고, 눈빛이 깊어졌다. 그걸 가장 먼저 깨달은 건 놀랍게도 스티브였다. 약간 비꼬는 듯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이전보다 신중하고 노련해진 토니를 보며 그는 처음엔 감탄했고, 두번째에는 놀랐으며, 세번째에는 호감이 생겼다. 뉴욕 사건을 겪으며 부정적이었던 첫인상을 약간 수정하긴 했으나 그다지 관심있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다시 만난 토니는 한층 더 멋진 남자가 되어 있었다. 샘과도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가까워졌고, 버키를 찾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은 가능한한 모두 가져다 주었으며, 피로에 지친 그들에게 맥주를 사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그건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마음에 직접 와 닿는 따스함이었다. 스티브는 점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토니의 얼굴이나 말투, 행동을 조금씩 관찰하기 시작했다.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가 더없이 진지하게 가라앉아서 반짝이는 모습이라던지, 사심 없이 웃을 땐 목소리가 약간 듣기 좋게 낮아진다던지, 변장한답시고 입은 사복이 후드티인데 제법 귀여워서 놀란다던지 (여기서 스티브는 귀엽다는 단어를 재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좀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스티브는 하루가 다르게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을 더 알고 싶어졌다. 단순한 동료로서의 호감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도 모른 채 스티브가 먼저 몇 마디 말을 건네면, 토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해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스티브는 페기에게 버키 뿐만이 아니라 토니의 이야기도 조금씩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씨 좋은 봄날, 스티브는 여느 때와 같이 페기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토니에 대해 말하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페기가 불쑥 끼어들었다.



"당신, 그 사람 좋아하는구나."


"....뭐라고, 페기?"


"그렇잖아. 벌써 눈빛이 다른걸. 말투도 그렇고..."


"....내가 그랬어?"



스티브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더듬으며 괜히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페기는 치매로 기억을 계속 잃었다가 찾았다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때때로 정신을 차리곤 했다. 내가? 토니 스타크를 좋아한다고? 워낙 예상치 못한 발언인데다가 화자가 페기였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페기는 웃으며 스티브의 손을 두드렸다.



"여자의 감이라는 거야, 스티브. 그래도 잘 됐어.. 당신에게 다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페기, 나는-"


"알아. 내가 당신의 best girl 이라고 했지. 이제 당신의 길을 가도 돼, 너무 오래 잃어버리고 있었지만..."


".......페기.."


"그랬으면 좋겠어. 당신이 이 시간을 살아갔으면 좋겠어. 그게 내 바램이야..."



페기는 부드럽게 미소짓고는 작게 몇 번 기침했다. 스티브는 그녀에게 물잔을 건네며 잡은 손을 꽉 쥐었다. 이러고 나면,꼭 다시 치매증상이 돌아오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페기는 또 다시 스티브를 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고 스티브 또한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잠든 그녀의 곁을 떠나오면서 스티브는 페기의 말을 천천히 몇 번이고 곱씹었다.



한편 토니는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고백할 심산이었다. 고리타분하고, 때론 지독하게 냉소적이지만, 언제나 올바른 신념을 가진 남자, 스티브 로저스에게. 길지 않은 시간동안 아주 약간의 진전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토니로서는 그 시간이 마치 2,3년 같았다. 다행히도 지금 토니는 스티브의 '친한 동료' 쯤의 위치까지는 올라온 것 같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백따위 접어버리고 동료, 친구사이로 남는다는 선택지도 물론 고민했다. 그러나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마음이 식기를 기다리며 스티브를 좋아하기 전의 토니 스타크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 죽지는 않겠지. 우주에도 다녀왔고 테러도 당했는데 뭘 못하겠어? 약간 빗나간 느낌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곧 스티브가 타워에 도착할 것이고, 토니는 그에게 고백을 쏟아부을 것이다. 아마 최악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토니는 스티브가 제법 새끈한 차림으로 찾아온 것을 보며 생각했다. 다른 의미로 죽을 수도 있겠군. 


스티브의 취향에 맞춘 식사가 끝나고, 아이스크림(토니)과 커피(스티브) 라는 평소와는 전혀 반대지만 어쨌거나 클래식한 디저트가 나오고 나자 토니는 지금이 그 때임을 직감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이놈의 목은 왜 중요할 때 말을 안 듣는 거야? 아이스크림으로 목을 다시 축이며 스티브를 바라보자, 그도 마침 토니를 바라보았다. 말하기도 전에 죽겠어. 토니는 심호흡을 했다.



"있잖아, 스티브..." "저기, 토니."


동시에 튀어나온 서로의 이름과 목소리에 둘은 동시에 눈을 크게 뜨며 침묵했다. 당신이 먼저 말해, 아냐 자네가 먼저 말하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드라마의 한 장면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두 사람은 결국 토니가 두 손을 들고 우선권을 획득하겠다는 제스쳐를 하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날 무책임하다고 해도 돼."


"....뭐?"


"그냥, 끝까지 들어줘.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도 없겠지. 난 천재지만, 아니 이게 아니고... 그렇게 모든 것에 현명한 건 아니야. 난 그저.. 당신이 좋아. 나는 예측 불가에다가, 터무니없기까지 해. 하지만.. 이것만큼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당신을 좋아한다는, 사랑한다는 거. 착각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냐. 얼토당토 않겠지만 정말, 당신에게 푹 빠져버렸어. .....당신을 좋아해, 스티브."


"....스타...토니."


"답을 못 들어도 좋아. 그냥, 그냥 나는... 말하고 싶었어. 참을 수가 없었지. ...날 싫어해도 괜찮아. 들어준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아니, 잠깐..."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 앞으로는 수트 입고 다녀도 되니까-"


"잠깐, 토니. 좀 닥쳐봐."



횡설수설하며 고백을 줄줄 늘어놓은것도 모자라 이젠 혼자만의 결론으로 치달으려는 토니를 보고 스티브는 황급히 제지했다. 군대 시절의 버릇대로 말투가 험악해진 건 고의가 아니었으나 상당한 효과가 있었는지 토니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려졌고, 스티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잠깐이라고 하면 좀 들어. 자네는 그게 문제야. 너무 달려나가는 거."


"....그.... 미안해. 내가..."


"조용히,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


"솔직히 놀라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도 말할 게 있었어. 생각도 안 해봤던 건데 듣고 보니 맞는 것도 같고."



뭐가? 라고 되묻고 싶어 토니의 입술이 순간 달싹였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스티브 때문에 토니는 다시 얌전히 침묵을 지켰다. 세상에, 그 토니 스타크를 이렇게 오랫동안 조용하게 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이 자리에 나타샤가 있었다면 가장 어이없어 했을 것이다) 스티브는 묘하게 승리감 같은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당신이 좋아. 토니."


"......아, 그렇.... 뭐???!"


"나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쉬운 결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해."


"그, 아니, 어떻, 말도 안, 잠깐만, 나 지금 굉장히 정박아처럼 말하고 있어. 맙소사. 스티브? 정말이야? 당신이..."


"내가 아무리 현대식 농담이 늘었다지만 이런 걸 주제로 삼진 않아. 너무하군."


"농담이라고 안 했어... 그보다.. 아니,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토니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다는 머리도 정작 중요한 순간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니, 세상은 이래서 공평하다고 하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습관적으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려던 찰나 따뜻한 손이 쓱 내밀어졌다. 



"자해하는 취미가 있는줄은 몰랐는데."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놀라서..."


"플레이보이라더니 다 거짓말이었나?"


"아니거든? 지금 날 뭘로 보고...!"


"그럼, 테이블에 머리 박는 거 말고 지금 뭘 해야 될까? 토니. 그 좋은 머리 좀 굴려 봐."


"뭘 해야 되다니? 당연히-"



키스, 라고 말하려던 입술은 다음 순간 부드러운 감촉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약간 거칠지만 따스하고, 다정한 입맞춤에 토니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흠, 아무래도 플레이보이 타이틀 반납해야 될 것 같은데. 스티브가 웃으며 속삭이자 토니는 발끈해서 그의 멱살을 붙잡고 딥키스를 되돌려주었다. 잔에 담긴 커피와, 먹다 만 아이스크림이 다 식고 녹아버릴 때까지 두 사람은 한데 엉켜 떨어질 줄을 몰랐다. 

  

by 치우타 2014. 4. 14. 02:47

토니는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 끼워진, 투박한 금빛의 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걸 언제 받았더라. 벌써 희미해진 기억의 끄트머리를 애써 더듬으며, 토니는 괜시리 목을 조여오는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했다. 숨이 트이는 느낌에 가볍게 공기를 들이마시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기가 폐부를 천천히 채워갔다. 조금 떨어진 키친에선 맛있는 커피의 향기가 솔솔 풍겨나오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도 토니는 데이트 장소를 쉽사리 바꾸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자비스가 준비하는 최상의 드립 커피도, 이 낡은 집에서 마시는 커피보다는 못했다.



"오늘은 조금 진하게 내렸는데.. 어떨지 모르겠군."


"음, 향기 좋고. ....와우, 이 정도면 바리스타로 취직해도 되겠어. 끝내주네."



솔직하게 칭찬하자 금세 기쁨으로 얼굴을 물들이며 푸른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스티브의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설레어 버리고 말았기에 토니는 늘 진정할 수가 없었다. 최근엔 쉴드 일을 돕는답시고 여기저기 불려다녔는데 (물론 모든 임무는 닉의 뒤치닥거리였지만) 근육도 더 탄탄해지고, 머리를 조금 스포츠형으로 다듬어서인지 예전보다는 현대적인 인상이 되었다. 길을 가다 돌아보는 사람도 늘어났으며, 그에게 대놓고 데이트 비스무리한 제안을 해오는 이들도 많아졌다. 물론 토니는 요만큼도 그런 것들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고- 대신 속으로 그들을 어떻게 응징할지에 대해 잠깐씩 고민했다가 치우곤 했다. (내가 이 나이먹고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사실 스티브는 이런 토니의 생각들을 다 꿰뚫고 있었다. 90살 넘은 할아버지 청년치고는 꽤 날카로운 직감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것도 다 모르는 사이 토니가 무방비하게 감정의 파편을 조금씩 흘리고 다녀준 덕분이었다는 것을, 스티브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보통의 토니는 무척이나 유연하면서도 한 치의 틈도 없는 남자였다. 일견 가볍고, 때론 천박하게 느껴지는 표현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모두의' 셀러브러티였지만 그 자신의 진심은 보이지 않는 벽으로 촘촘히 둘러싸여 있었다. 스티브는 그의 외모가 토니 취향에 완벽한 스트라이크에 들어갔다는 점이 토니 스타크의 '연인' 으로서의 자격 중 하나기도 했지만, 몇 번 토니와 감정적으로 (때로는 이성적으로도) 부딪치면서 그의 튼튼한 가드가 어떤 것에 강하고 약한지를 파악해낼 수 있었으므로 지금의 발전적인 관계에 이를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토니는 스티브의 부드러운 시선을 애써 피하며 머그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 만큼 놀아봤다는 플레이보이 토니 스타크가 실은 덩치 큰 연인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평범한 남자가 된다는 걸,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스티브는 숨길 수 없는 행복을 다시금 입가에 걸었다. 토니의 눈이 또 정처없이 허공을 헤매기 시작했다.



"토니."


"어? 왜, 커피 맛있다, 그런데 식으니까 좀 별로네. 응? 뭐라고?"


"사랑해."


"...누가 노친네 아니랄까봐 이런 말도 막 기습적으로 하고 그래, 좀 로맨틱하게-"


"키스하면서 할 수는 없잖나. 지금 할 거야."


"뭐? 잠깐, 이봐-"



항의의 말은 입술 안으로 먹혀들어갔다. 스티브는 조금 꿍꿍이 있는 웃음을 꾹 눌러담으며, 토니의 까칠한 입술에 제 입술을 부볐다. 여기에 열이 생겨나고, 점차 은밀한 방향으로 가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다. 스티브가 천천히 토니를 끌어들여 제 품 안에 가둔 것처럼, 사실은 모두 이렇게 연인이 된다. 토니 스타크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by 치우타 2014. 3. 29. 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