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는 아주 어렸을 때, 강아지 한 마리를 키워본 적이 있었다. 집사였던 자비스 외엔 누구도 토니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만을 바라봐 줄 온기가 절실했다. 그래서 키우게 된 강아지는 토니의 바람대로 무척 그를 좋아했고, 어디에 가든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꼬리를 힘차게 흔들곤 했다. 아마 그렇게 몇 년을 더 키울수 있었다면 토니의 인생이 조금쯤은 더 좋아졌을지도 모른다. 차갑게 식어버린 강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토니를 위로해준 것은 오직 자비스 뿐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절대 동물을 기르지 않았다. 고양이는 알러지가 있어서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아마 내 인생에 더 이상 애완동물은 없겠지. 토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의 앞에는 시무룩하게 귀를 내린 밝은 갈색 털의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가 있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약을 개발한 빌런한테 물어봐."

 "그러고 싶긴 한데 죽었잖아. 기분 나쁘게 청산가리나 쓰고."

 "토니, 여기서 불평하지 말고 캡틴이랑 내려가. 나 혼자 연구할 거야."


 배너는 토니의 등을 밀어 엘리베이터 안으로 쫓아냈다. 닫히는 문 너머로 토니가 인상을 팍 썼지만 하나도 안 무서웠다. 이내 조용해진 연구실엔 배너가 즐겨 듣는 클래식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스티브."
 

 토니가 부르자, 스티브는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이면서도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들었다. 리트리버 종에게는 무척 위화감이 느껴지는 푸른 눈동자엔 혼란이 가득했다. 이거 좀 귀엽네. 토니는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스티브는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아예 토니의 허벅지에 얹고 눈을 감았다. 애인이 개가 되어버린 상황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 생각이 나서, 토니는 가슴 한 켠이 뜨뜻해지는 걸 느꼈다.


 "당신이 원래대로 못 돌아와도 내가 키워줄게."

 

 드물게 토니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지만, 스티브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부비며 끙끙거렸다. 



 배너의 약이 완성되기까지는 일주일이 걸렸고, 그 동안 토니는 개가 된 스티브와 목욕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원래대로 돌아온 스티브를 포옹하자마자 토니는 "우리 개 키울까? 골든 리트리버 귀여워." 라고 말했다가 질투에 불타는 캡틴 아메리카의 공세를 대낮부터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by 치우타 2015. 5. 16. 22:23

안녕하세요~ 

조금 타이트한 일정이긴 합니다만, 우선 수요조사부터 진행하고자 합니다.


-원작스팁x무비토니 돔섭(Dom-Sub) 19금, [Black bird] 
-B6, 100p or 그 이상, 단가 미정


-수요조사 주소 : https://drive.google.com/open?id=1EytKx7KM3_k4WRYvWUMBguwK0yuKGtN6eZO78laUIss&authuser=0


-5월 말 즈음해서 선입금 받을 예정이며 성인인증도 함께 진행하겠습니다! 


-샘플 





by 치우타 2015. 5. 15. 00:10

 토니는 지금 거의 세 시간 동안 반죽된 쿠키와 오븐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부러워하는 천재, 조만장자, 플레이보이(최근엔 이 타이틀을 반납했다), 자선사업가인 그가 왜 굳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 하면 물론 당연하게도 그의 연상이자 연하인 연인- 스티브 로저스 때문이었다.



 그건 얼마 전 주말 오후, 두 사람 다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정도로 촌스러운 패션을 한 채 몰래 영화관 데이트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전엔 스티브 취향의 영화를 봤으니 이번엔 토니 취향인 영화를 골랐는데 의외로 고전영화의 리메이크 작이라 스티브도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손을 잡네 못 잡네 투닥거리다가 결국 슬그머니 누가 볼세라 꽉 붙잡고 서둘러 오토바이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향하던 도중, 근처 과자 가게에서 막 구운 쿠키 냄새가 두 사람의 후각을 자극했다. 토니야 수 많은 산해진미를 먹어온 남자로서 그닥 흥미가 동하진 않았지만(그리고 토니는 도넛을 더 좋아했다) 스티브는 발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릴 만큼의 관심을 보였다. 토니는 금세 가게의 위치를 알아냈지만 왠지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 괜히 스티브의 손을 잡아당겼다. 


 "뭐 해? 어서 가자니까."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가 나. 초코칩 쿠키 냄새."

 "....당신 언제부터 개과였어? 냄새만 맡아도 어떤 쿠키인지 안단 말이야?"

 "어렸을 때는 한참을 과자 가게 앞에서 서성이곤 했었지. 고소한 냄새가 그렇게 맛있게 느껴질 수가 없었어. 형편 때문     에 사먹는 건 꿈도 꾸지 못했지만 요즘도 가끔 쿠키나 그런 것들을 보면 생각이 나."

 

 조금 쑥스럽다는 듯 콧잔등을 긁으며 웃더니 이번엔 스티브가 토니를 이끌고 걸어갔다. 돌아가면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싶군. 전에 샀다던 그 빵도 같이 곁들여서. 망설임 없이 오토바이를 향해 걸어가는 스티브보다 오히려 토니가 몇 번이고 쿠키 가게를 돌아보았다. 달달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후, 이제 다 된 것 같은데... 이번에야말로....."


 토니는 다섯 번째의 쿠키 판을 꺼내기 위해 오븐을 껐다. 냄새 좋고. 이번엔 성공하지 않았을까? 자비스는 작업 시작 전부터 실패 확률과 오븐 온도에 대해 여러 가지를 조언했지만 이미 토니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꼭 직접 모든 걸 해보고 싶었다. 설령 장렬하게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구식 군인의 입맛에 맞게 클래식한 과정을 거치고 싶었다. 토니는 두꺼운 오븐 장갑을 끼고 천천히 오븐을 열었다. 아, 약간 탄 냄새가 나는데. 그래도 아까보다는 모양이 괜찮네. 나름 예쁘게 만든다고 틀로 찍어보기도 했지만 울퉁불퉁한 반죽이 갑자기 파티쉐의 작품마냥 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토니? 뭐하고 있나? 아까부터 찾았는데-"

 "헉, 어, 아니, 스티브? 그러니까, 당신 지금 여기 들어오면 안되는데. 자비스!"

 "자네가 뮤트해 뒀다고 해서.. 그런데 이게 다 뭐야?"


 토니의 작업실 풍경처럼 폭탄 맞은 꼴이 된 주방을 보고 스티브가 입을 쩍 벌렸다. 밀가루와 물, 계란 껍질, 말라 붙은 반죽 등이 세 시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토니가 쿠키 판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답지 않게 쭈뼛거렸다. 


 "....쿠키를 만들어 보려고 했어. 전에 당신이 먹고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말도 없이 틀어박혀 있었던 건가?"

 "내 생각보다 좀 더 오래 걸리더라고. 분야가 다르다 보니, 으악! 안 돼, 아직 먹지 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애써 변명을 늘어놓던 토니는 잽싸게 쿠키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가져가는 스티브를 보고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티브는 약간 탔지만 고소한 냄새가 나는 초코칩 쿠키를 한 입 크게 베어물었고, 토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다. 이건 실패작이야. 맛도 끔찍할거고, 탔고, 역시 요리 따윈 하면 안 돼. 적성에 안 맞다니까.


 "....맛있어."

 ".....어, 뭐? 아니 그럴리가 없는데, 그게..."

 "약간 타긴 했지만, 그래도 맛있어."


 스티브가 활짝 미소지었다. 토니는 그 웃음에 거의 넋을 놓았다. 이거 진짜 반칙이라니까. 법으로 못하게 제정해야 돼.


 "고마워, 토니. 내가 먹어본 쿠키 중에 제일 맛있었어." 

 "비행기 태우지 마. 그러다 추락하면 생명 보험도 안 돼."

 "빈 말이 아니라는 건 증명해 줘야 알겠군."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스티브는 토니를 들쳐맨 채 주방을 나섰다. 눈치 빠른 자비스가 불을 끄며 내일은 정리해주는 사람을 불러야 겠다고 프로그래밍했다. 불이 꺼진 주방에서는 달달한 냄새가 아침까지 남아 있었다.



by 치우타 2015. 5. 10. 23:03

 지난 소탕작전에서 적의 공격을 받은 스티브는, 얼마 전부터 극심한 추위에 시달리며 잠에서 깨기 시작했다. 검사 결과에서 몸에는 이상이 없다고 나왔지만 잠이 들기만 하면 꼭 한번은 숨이 찰 정도로 추위를 느끼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뛰어나오곤 한 것이다. 토니와 배너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고심했지만 며칠 째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슬슬 스티브가 잠을 기피하기 시작할 무렵, 하루는 소파에 앉아 꾸벅 졸고있던 스티브에게 토니가 다가와 혀를 차며 모포를 덮어주었는데 그 따스함에 놀란 스티브가 눈을 번쩍 떴다. 토니도 깜짝 놀랐다. 


 "캡틴? 내가 깨웠나? 조금 더 자. 추우면 온도 높여줄게." 


미안하다는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 토니를 멍청하게 바라보며 스티브는 모포를 만졌다. 따뜻했다. 

 "이거... 데운 건가?" 


그는 거의 얼간이처럼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토니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여기서 잘 때 쓰는 거긴 한데.. 왜?"
 "...굉장히, 따뜻해."
 

 스티브는 모포에 남아있는 온기를 더 느끼려는 것처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눈 앞의 토니를 보았다. 홀린 듯이 바라봐 오는 푸른 눈동자에 토니가 움찔했다. 노친네, 얼굴만 잘생기면 다야? 그래 다겠지. 얼굴 깡패 같으니라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토니는 태연한 척 스티브와 눈을 맞췄다. 

 "잠깐 안아봐도 되나?"
 "난 되게 비싼 몸인데... ...알았어, 좋아. 잠깐이라면."

 뭐라고 투덜거리려던 토니는 꽤 절박한 스티브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스티브 자신도 반쯤 애매한 얼굴로 팔을 뻗어 작지만 탄탄한 몸을 끌어안았다. 모포보다 더 따뜻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스티브는 순간 낮게 신음을 흘리며 반사적으로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워, 캡틴! 캡! 잠깐..." 
 "....따뜻해. ....토니."
 

 어린아이처럼 스티브가 거의 토니의 품에 파고들듯이 고개를 묻었다. 토니는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며 되는 대로 지껄였지만 (내가 섹시하긴 해도- 아니, 캡틴, 왜 이래? 배너! 살려줘!) 드디어 온기를 찾은 스티브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침착했던 배너가 테스트한 결과 토니의 체온이 스티브의 추위를 없애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결국 토니는 대의를 위해 한 몸 희생하기로 하며 밤마다 스티브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마치 테디베어마냥 스티브의 품에 안긴 채 잠드는 나날 동안, 토니는 잘 생긴 스티브의 자는 얼굴과 섹시한 몸매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부리는 어리광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며칠 후, 토니는 스티브의 열렬한 고백과 포옹, 키스에 홀라당 넘어가 코를 꿰이고 말았지만 이때의 토니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눈 앞의 승리에 잔뜩 도취되어 있을 뿐이었다. 


 메데타시, 메데타시.


*무챠님이 그려주신 토니베어 아트를 허락맡고 올립니당.. 존귀대폭발!!!

 늘 토니가 스티브옆에서 안겨있을수 없어서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토니베어.


by 치우타 2015. 5. 9. 01:33

 비전은 어벤져스의 새 멤버로서 스티브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지만, 토니가 있는 어벤져스 타워로 종종 찾아가곤 했다. 울트론 사태 이후 당분간 쉴 거라며 못을 박았던 토니였지만 비전의 방문에 대해서는 어떤 태클도 걸지 않았다. 그리고 5월 8일, 네트워크로 여러 가지 지식을 흡수하던 비전은 오늘이 Mother's day (어머니의 날) 임을 알게 되었다. 

 토니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 비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무언가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공원 구석에서 제풀에 떨어진 들꽃을 모아 작은 꽃다발을 만들었다. 살아있는 생명을 억지로 꺾고 자른 것은 영 내키지 않은 탓이었다. 보안을 거쳐 토니의 개인층에 도달한 비전을 보고 토니가 돌아보았다. 약간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반짝이고 있었다.


 "안녕, 비전. 오늘도 왔군. 그런데... 그건 뭐야?"

꽃다발을 발견한 토니는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비전은 천천히, 공격적이지 않은 태도로 다가가 토니의 손에 있던 패널과 자신의 꽃다발을 교환했다. 토니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한테 주는 건가?"

 "그렇습니다. 오늘이 그런 날이라고 해서요."
  "오늘.. 자... 으음. 프라이데이. ....어머니의 날?"


 토니는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꽃다발과 비전에게 번갈아 시선을 던졌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푸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리 와 봐." 순순히 토니에게 다가간 비전은 자기보다 작은 체구의 토니에게 끌어안겼다. 따스한 체온에 비전은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마워, 비전." 토니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비전은 희마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이제야 웃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았다.

by 치우타 2015. 5. 9. 01:29

 전투가 끝나고 난 후, 스티브는 사후처리를 위해 먼저 맨션으로 돌아가려는 토니를 붙들었다. 아이언맨의 아머 헤드가 찰칵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스티브? 무슨 일이야?" 전투로 인한 약간의 흥분과 피로감이 남아있는 푸른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티브는 갑작스럽게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어떤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침착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나? 잠깐이면 되네."

 "어.. 잠깐만. ....음, 괜찮을 것 같아. 이 일로 스케줄이 붕 떴거든."

 "그렇다면 자네 층에서 만나지. 내가 올라갈테니."

 

 어딘가 안도한 듯 부드럽게 미소짓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것만 같았다. 어벤져스의 리더로서가 아닌 스티브 로저스의 얼굴을 보는 것은 아직도 그에게 처음과 같은 설레임을 안기곤 했다. 특히 이렇게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서는 더더욱. 말투나 표정으로 보아 뭔가 심각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토니는 잠깐 머리를 굴렸지만 어차피 상대가 상대인 만큼 고민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알았어. 이따 봐, 스티브." 가볍게 눈인사를 남기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토니의 뒷모습을 보며 스티브는 헤드기어를 벗었다. 땀에 젖은 금발이 옆으로 흩어졌다. 뒷정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야겠군. 그는 현장 요원들에게 여러 가지 사항을 지시한 다음 서둘러 맨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토니는 맨션에 돌아와 처리해야 할 일들을 끝내고 가볍게 한숨을 토하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오전부터 회의에 오찬, 그리고 빌런소탕, 서류 결제와 피해에 대한 복구대책. 늘상 이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처리하고 있었지만 유달리 피로감이 몸을 덮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요새 운동을 덜 해서 그런가? 뒷목을 주무르며 근처의 생수병에 손을 뻗는 순간, 방문 너머 플로어의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왔다. 누군가 방문했다는 뜻이었다. 이 시간에? 토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아홉시 반. 고개를 갸웃하는 토니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금발이었다. 스티브.


 "미안하네, 조금 시간이 걸려버렸군. 기다렸나?"

 "아니, 아니.. 실은 일을 하느라 당신이 언제쯤 올지도 생각 못하고 있었어. 들어와."


 토니는 그답지 않게 살짝 허둥거리며 스티브를 미니 바로 안내했다. 뭐라도 마시겠어? 토니의 권유에 스티브는 시원한 물이면 된다고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오늘따라 왜 저러지. 토니는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차가운 잔에 물을 따라 건넸다. 스티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마냥 단숨에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 크게 숨을 내쉬었다.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토니는 괜히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지. 전의 그건가? 아니면 일루미나티? 아니면 최근 회사의 캠페인이 문제인가? 리드와의 연구? 짚이는 것도 예상되는 것도 너무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토니는 새삼 자신이 어떤 인간이라는 걸 상기하며 쓴웃음을 목구멍 너머로 감추었다.


 "토니."

 "음?"

 "사실 자네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어. 겁줄 생각도 없었고. 그런데 벌써 실패한 것 같군."

 "그게 무슨 소리야."

 "긴장하고 있잖나, 그렇게 등을 꼿꼿이 세우고."


 스티브의 지적에 토니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괜히 수염을 매만졌다. "그게 그렇게 티가 났어?" 스티브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얼마 동안이나 알아온 사이인지 자네가 더 잘 알잖나." 그리고 보통 그럴 땐 자네가 나한테 숨기는 것이 있을 때지. 여상하게 덧붙여온 뒷말에 토니는 마시던 물을 뿜을 뻔 했다. 맙소사, 스티브! 토니가 가볍게 타박을 주자 스티브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인 모양이군." 자포자기한 얼굴의 토니가 양 손을 들어올리며 항복의 제스쳐를 취했다.


 "좋아, 캡틴 스티브. 무슨 일인지 이제 제대로 말해주지 않겠어? 내 자백이 먼저여야 하나?"

 "아니, 내 고백이 먼저니 기다리게."

 "......하아?"


 토니는 입을 쩍 벌리며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품위없게, 토니 스타크가 완전히 허를 찔린 표정으로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있었다. 스티브는 그 모양새에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손을 내밀어 토니와 맞잡았다. 토니는 그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펄쩍 뛰어오를 것 처럼 움찔대었지만 다행히 잡은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내가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그래도 좋네,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린 많이 다르고 자주 충돌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또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그게 조금은 달라졌으면 좋겠네. 적어도 둘이 있을 때에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아니라... 스티브 그랜트 로저스와 앤서니 에드워드 스타크로. 다른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같이 잠들고 싶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네가 필요해. 자네를 원해, 토니. 어떤 것보다 더. ......내 고백을 받아 주겠나?"


 스티브는 평소와 달리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열정적이고 뜨겁게 마음을 토해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그의 친우, 토니 스타크라는 사내는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볼 수 있지만 유달리 스티브에게만큼은 중요한 순간에 벽을 세우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다. 자신의 마음이 결코 순간적인 충동이 아님을 알아주길 원했다. 또한 토니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기를, 만일 아니라면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것 정도는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오랜 전략가로서의 본능은 토니가 그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반쯤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티브는 숙고 끝에 시도했고, 이제 남은 것은 판결 뿐이었다. 예스인가, 노인가.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고 스티브는 손 끝에 닿아있는 체온이 부디 자신의 편이기를 빌며 신실한 눈빛으로 토니를 바라보았다.


 "......스티브."

 "그래, 토니."

 "내 뺨을 한 번만 때려주지 않겠나?"

 "뭐?"

 "너무 세게는 말고. 내일 인터뷰가 있거든. 살살, 그래도 현실이라는 건 알 수 있게-"


 횡설수설하는 토니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본 스티브는 말 없이 팔을 잡아당겨 토니를 품에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훅 끼쳐왔다. 토니, 꿈이 아니야. 잘 들어 보게. 스티브는 토니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가슴께에 가져다 대었다. 두근 두근, 자신과 거의 비슷한 박동으로 뛰는 심장 고동이 손 끝에서부터 온 몸으로 전해졌다. 토니는 뭔가 울컥하니 차오르는 걸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스티브의 등을 마주 안았다. 넓고 탄탄한 근육이 기쁘게 닿아왔다. 


 "Yes, Steve... yes."


 토니가 거의 헐떡이듯 중얼거렸다. 내가 그 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어? 당신을 상대로. 스티브는 고백하기 전의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토니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약간 거칠어진 입술에 망설임 없이 키스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 너머로 뉴욕의 아름다운 야경이 반짝였다.




by 치우타 2015. 5. 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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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가 의외로 단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와 사귀고 조금 후의 일이었다. 타워 여기저기에 놓아둔, 가끔 두뇌회전을 위해 섭취하는 초콜렛이나 사탕, 캐러맬 같은 주전부리에서 쉽게 손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토니가 피식 웃었다. 


 "이 썩는다고 이런건 싫어할 줄 알았는데, 우리 노친네가 귀여운 데가 있군."

 "내가 어릴 땐 설탕이 귀했거든. 그 당시엔 뭐든 그랬지만, 아주 가끔 한 스푼 정도는 맛볼 수 있었어. 정말 좋았지."


 스티브가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푸른 셔츠에 짙은 색 바지를 입은 모습은 무척 섹시하고, 잘생겼고, 또.. 그를 캡틴 아메리카가 아닌 스티브 로저스로 보이게 만들었다. 토니는 그게 아주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물론 리더로서 명령을 내릴 때도 섹시하지만 캡틴일때는 꼬박꼬박 스타크 운운하는 것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상할 때도 있었던 것이다. 아마 토니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고 중얼거리며 작은 초콜렛을 까먹는 스티브를 흐뭇한 얼굴로 보던 토니가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 자주 들르는 가게에서 아주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들여놓았다고 한 걸 들었던 것도 같았다.  바닐라였나 딸기였나, 기억은 잘 안나는데 아무튼 뭐 생과일을 넣었다던가. "자비스? 우리 타워 근처에 거기 있잖아. 애들이 바글거리는 가게. 신메뉴 나왔지?" 아쉬운 듯 입술을 핥는 스티브를 곁눈질하며 토니가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오늘 막 개시하는 것 같군요. 손님이 많이 모일 것 같습니다.] 오, 안 되지. 토니는 전화를 돌려 가게 주인에게 갤런 사이즈로 서둘러 주문을 마치고는 아이언맨 수트를 배달에 이용했다. (토니, 직권 남용이야! 스티브가 투덜거렸다)


 "자, 스티브."

 "이게 뭔가? ....아이스크림?"

 "그래. 이 근처에서 제일 맛이 괜찮은 곳이야. 오늘 신메뉴 개시! 라길래 사봤어. 별로 당신 먹으라고 그런건 아니고."


 스푼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하는 토니에게 스티브는 못 말린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지만, 다시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뭐든 솔직하지 못한 것이 토니의 단점이긴 했으나 이런 게 그의 애정표현이었고, 관심이었으며, 최대한의 노력임을 알게 된 덕분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싸운 나날이 제법 길었는데. 스티브는 질릴 정도로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에 스푼을 가져가 한 입 먹어보았다. "어때?" 토니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아이스크림을 샀다는 사람치곤 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답 대신 스티브는 몸을 돌려 토니의 몸을 끌어당겼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웅얼거리는 신음이 새었지만 스티브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조용해졌다.


 "아주 맛있어. 토니."

 "노친네, 어디서 이런 거만 배워와서는...." 

 "뻐기는 걸 좋아하는 애인이 잘 가르쳐 주거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는 토니의 입에 이번엔 스푼이 들어왔다. 뜨뜻미지근했던 딸기 아이스크림은 무척 달콤하고, 부드럽고, 시원하고 맛있었지만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토니는 막 진리를 깨달은 사람처럼, 이번엔 스티브의 목에 팔을 감았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이 맛이야. 토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고 스티브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앙큼한 연인의 허리를 단단히 안았다.






by 치우타 2015. 4. 25.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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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스티브는 아무 일정이 없었기에 느긋하게 타워 내의 체력 단련실에서 운동을 즐겼다. 70년 만에 깨어나 많은 변화를 겪었고 또 새로운 친구와 적을 만나는 동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로가 쌓여 있었는지, 아무 생각없이 몸을 한참 움직이고 나자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친 스티브는 토니가 타워에 돌아왔다는 자비스의 알림을 듣고 인사나 할 요량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에 도착했다.


 "응? 캡틴? 왠일이야? 오늘 타워에 다 있고."

 "일정이 없어서 쉬고 있었지. 자네는.. 일하고 왔나?"

 "난 우리 회사의 간판이거든. 열심히 번쩍번쩍 빛을 뿌리고 왔지. 아이고, 힘들어."


 토니가 어깨를 두드리며 짐짓 엄살을 떨었다. 스티브는 좀처럼 보기 힘든 토니의 평범한 표정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 때 어디선가 몹시 좋은 꽃향기 같은 것이 스티브의 코를 간지럽혔고 그는 무의식중에 숨을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 시선으로 무심코 꽃병이 있는지 둘러보았지만 비슷한 물건조차 없었다. 스티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나는 거지?


 "캡틴?"


 스티브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토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그는 짧게 덧붙이며 넥타이를 풀러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정리해 두라는 충고가 목 언저리까지 올라왔지만 스티브는 애써 눌러 참았다. 타워의 주인은 토니였고, 여긴 그의 프라이빗 플로어였기에 아무도 간섭할 권리 따윈 없었던 것이다. 대신 스티브는 인사나 하러 왔다는 말을 던지며 다시 한 번 공기 중의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아. 정말 좋은 냄새로군. 꽃이 아니면 향수인가? 스티브는 피곤한 얼굴로 조끼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는 토니를 응시했다.


 "스타크."

 "응? 왜, 무슨일이야?"

 "향수 쓰나?"

 "어... 뭐 쓰기도 하지. 오늘은 아니었지만."


 그런건 갑자기 왜? 라고 물으려던 토니는 흠칫 몸을 움츠렸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스티브가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되게 좋은 냄새가 나는데.. 꽃은 아닌 것 같고. 자네한테서..." 그는 약간 꿈꾸는 듯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내 바디로션이 좀 비싼거긴 한데..워! 잠깐, 캡..." 


 이제 스티브는 숫제 토니의 목에 코를 묻고 숨을 쉬고 있었다. 뜨거운 숨결이 간지러우면서도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헤이, 캡, 캡틴, 스티브! 이게 무슨...!" 토니는 황급히 그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스티브의 팔이 토니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바람에 헛된 시도로 돌아갔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토니는 덜컥 허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토니... 좋은 냄새......"

 "잠깐, 맙, 소사... 당신... 알파야....?"

 "알파..? 그게 뭐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좋아..."


 반쯤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스티브는 무척 섹시했다. 토니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이 알파의 그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젠장, 제기랄! 어떻게 몰랐을까, 수퍼 솔져 혈청을 맞은 남자는 그 형질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어딜 봐도 알파의 성향에 속한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언제나. 조금씩 스티브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들으며, 토니는 제 몸이 멋대로 알파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느껴야만 했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인 거야.


 "자비스, 플로어 잠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연락도 차단해, 내가 바쁘다고.. 흑, 해....."

 [보안 등급 변경. 플로어 락 설정되었습니다.]

 "스티브, 캡틴.. 당신이 먼저 들이댄 거니까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

 "토니.... 토니. 만지고 싶어."

 

 토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상기된 얼굴의 혈기왕성한 젊은 알파가 바로 앞에서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 까짓거 이왕 망했으니 제대로 즐겨 보자고. 천천히 다가오는 입술에 기꺼이 제 것을 겹치며 토니는 스티브의 목에 팔을 감았다.



by 치우타 2015. 4. 8. 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