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눈부신거에 약해졌으니 토니도 경험시켜주고 싶다. 전기반으로 토니가 생화학무기에 감염됐는데 큰 이상은 없지만 나을때까진 야행성이 된다는 거랑 눈이 금색으로 변했다는거랑 빛에 눈이 약해지고 흡혈욕구 생겼으면 좋겠다.... 기반별로 적어보자면.


1. 무비: 피 대신 와인이나 마시며 24시간 특수제작 선글라스 끼고 사람들 피한지 5일째쯤 스팁이 찾아와서 서류 놓고가는데 그만 종이에 손을 베이고... 굶은 토니한테 피냄새가 훅 끼치고 토니가 스팁한테 달려들어서 손가락 핥고 묘한 분위기가 되고..


2. EMH: 토니는 증세 설명도 안하고 한달이면 괜찮아진대 신경쓰지마 ㅇㅇ 하며 스스로 치료제 만드는데 열중. 스팁이 걱정되서 방문했다가 아침햇살에 눈부셔하며 이불속으로 숨어버리는 토니를 끌어내는데 눈이 금색이고.. 스팁이 넋놓고 보다 폴인럽


3. 원작(616) : 방은 텅 비어있었다. 오던 길에 본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던 것 같았고, 그렇다면 한 군데만 남았으리라. 스티브는 지체없이 옥상으로 향했다. 온종일 찾아헤메던 사람은 소리없이 건물 끝자락에 위태하게 서서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토니." 이름을 부르자 그대로 굳어진것만 같았던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손에 샴페인(아마도 무알콜일 것이다)을 든 토니는 당장이라도 어둠에 녹아버릴것처럼 덧없고, 처연하며 그만큼 매혹적이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은 빛나고 있을 터였다.


"열흘 째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걸 알고 있네." 그 말에 토니의 날렵한 어깨가 살짝 떨렸다. 쓴웃음을 입에 물고 토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문제 없어, 스티브." 샴페인을 든 손이 아주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음을, 수퍼솔져의 시력은 놓치지 않았다.

"아직도 일주일이나 더 넘게 남았어. 그대로 있다간 쓰러질 지도 몰라." "오, 스티브. 난 아주 멀쩡해. 정말 괜찮다니까." 만일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기 전이었다면 저 말을 그대로 믿고 돌아섰을것이라고 생각하니,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만다.


스티브는 다시 한 번 느릿하게 말했다. "정말인가? 내가 그 말을 믿어도 되겠나?" 믿는다는 말에 무게를 싣자 토니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보통 고집이 아니니 왠만해선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않을 것임을 스티브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럴때는, 행동으로.


스티브는 작은 주머니칼을 꺼내 왼쪽 손목부근에 가져다 대고 상처를 내었다. 피가 방울지고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토니가 눈에 띄게 동요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뱉어냈다. "....스티브, 무슨 짓이야.. 그만둬." "이건 필요한 일이야. 토니."


샴페인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토니는 스티브에게 다가가야 할 지 멀어져야 할 지를 필사적으로 고민하며 본능을 억눌렀다. 오, 맙소사. 그의 피냄새는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세상 그 어떤 산해진미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안 돼. 제발.


"토니." 스티브가 달래듯이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이리 와." 조금은 단호한 명령조로 말하며 시선을 던지자 토니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가 되었을 때 스티브가 팔을 내밀었다. 토니는 마치 신을 조배하는 신관이 된 것처럼 조심스럽게 스티브의 팔을 잡고, 느릿하게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핥아올렸다. 뜨뜻한 혀가 간질이는 감각에 스티브는 뜻모를 지배욕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다른 손으로 토니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by 치우타 2013. 3. 25. 18:58

4. 계획된 애처로움 vs 아이구 리틀솔져 둥기둥기
토니와 같이 잘 수 있는 권한, 아니 권리, 아니아니 특혜? 특권을 얻게 된것은 생각보다 쉬웠고 신속했으나, 스티브는 다음 난관에 부딪히게 됨. 그것은 바로 불규칙적인 토니의 수면습관이었음. 물론 어떨때는 아주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게 아침에 기상하고 하루종일 움직이고 나서 평범하게 잠드는 날도 있었음. 그러나 그건 아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평소엔 랩에 틀어박히거나 이것저것 하다가 그대로 거기서 기절하거나 혹은 소파에서 아이디어 궁리하다가 잠들거나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음. 그 전에는 자기 방에서 자느라 몰랐던 스티브도 토니의 그런 수면행동패턴을 알고 나서 혀를 내둘렀음. 왜 그렇게 힘들게 자나? 한 번은 물어봤음. 너무 궁금해서. 그랬더니 토니의 대답이 걸작임. 시간이 아깝잖아, 자는 시간은 진짜 비생산적이라고. 하나라도 뭘 더 생각하는 게 낫지. 누가 세기의 천재이자 공돌이 아니랄까봐 남들과는 무척 달랐음. 사실 스티브는 이거에 대해 관여할 수 없었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음. 그러나 관여해야만 했던 것이, 토니 스타크가 옆에 있어야 잠이 왔기 때문이었음.  


처음엔 일단 토니의 방이고, 언제든 토니가 돌아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걸로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음. 그 예상이 아예 빗나가지는 않아서, 혼자 방에 있을 때보다는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한두시간 정도는 눈을 붙이는 게 가능했음. 대체 토니의 무엇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침대 위에 널부러져있는 나이트 가운만 봐도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음. 나 이외의 누군가가 있다는 그런 안도감. 하지만 하루이틀사흘나흘닷새가 지나며 토니가 점점 침실에 오는 횟수가 뜸해지고 종내엔 사흘이상 철야를 하며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스티브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음. 이게 뭐임? 사람이 기껏 어려운 부탁(그것도 상당히 애매하고 곤란하고 미묘한)을 해가지고 성공을 거뒀더니 정작 중요한 장본인이 없어서 잠을 못잔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는 캡틴 스티브 로저스의 수첩엔 없었음. 게다가 이쯤되니 토니가 불편해서 일부러 잠을 안 자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음. 틀린건 아니었지만 최근 토니는 합금의 한계를 가지고 이것저것 실험하는 중이라 더 바쁘기도 했었음. 스티브가 있고없고 불편하고 아니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단 말임. 그러거나 말거나 사정을 모르는 스티브로서는 넘어야 할 산이 나타난 것이었으며, 오냐 그럼 내가 넘어주마 롸져댓 하고 척척 나아가기로 결정하게 되었음.


사실 같이 잘 수 있게 유도하는 부분이 제일 어려웠으므로 그 외엔 다 하찮게 보였음. 스티브는 늦은 밤 푸른 곰돌이 파자마를 입고 토니의 랩실에 기웃거렸음. 자비스가 센스있게 문을 열어주자 오늘따라 조금 조용한 랩실 가운데에 잔뜩 화면을 띄워두고 생각에 잠긴 토니가 서 있었음. 어딘가 꿈 속을 유영하는 듯한 푸른 색의 화면들과 불빛들, 침묵에 휩싸인 채 무언가를 고민하는 옆모습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 같았음. 스티브는 어쩐지 그게 싫어서 평소보다 조금 조급하게 말하고 말았음. 토니.... 약간 갈라진 듯한 목소리에 스스로가 놀라서 입을 꾹 다물자 토니가 등을 돌려 이쪽을 보았음. 어라, 이게 누구야. 캡이잖아?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짖궃은 말투완 달리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띈 토니는 어딘가 굉장히, 편안해보였음. 스티브는 잠시 그 모습에 매료되어 있다가 금방 정신을 차리고 눈을 슬쩍 비볐음. 아니.... 자네가 통 잠을 자는 것 같지 않길래.. 걱정되서. 조근조근하고 나직한 스티브의 목소리에 토니는 어쩐지 뜨끈한 시트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음.


오.. 디어 캡틴, 스윗하네. 조금 쉬었더니 그래도 아직 멀쩡해. 당신이야말로 안 자? 토니가 무심결에 응답하듯이 물은 마지막 문장을 스티브는 놓치지 않았음.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와. 노력은 해 봤지만, 역시.. 그. 말을 다 끝맺지도 않고 안절부절하며 한숨을 푹 쉬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왠지 자신도 같이 성급해지는 느낌이었음. 그거 뭐? 착실히 무덤을 파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다시 묻자, 스티브는 무척 망설이는 듯하더니 겨우겨우 느릿하게 대답을 건넸음. 그... 자네가 없어서, 못 자겠어... 도저히. 누가 들으면 이게 왠 꼬심 멘트인가요 아 40년대 구식 남자의 돌직구 나오나요~ 할만한 오해돋는 말이었지만 둘은 현재 다섯쨜 캡틴과 40대 플레이보이였음. 이렇다할 기류도 눈에 보이지 않거니와(직접적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으므로), 서로 전혀 그런 쪽으로 생각이 굴러가지 않기 때문에 다행히 파장은 그렇게 크지 않았음.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세간의 기준이고, 막상 그걸 듣는 토니는 입을 쩍 벌릴 정도의 충격이었음. 캡틴이, 지금 뭐라고 한거야? 나 없이 못 자겠다고? 맙소사 저 양반이 지금?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뭔가 받아치기 위해 시선을 딱 돌리자 거기엔... 푸른 곰돌이 잠옷을 입고 어쩔 줄 몰라하는 금발의 스티브 로저스가 있었음. 토니는 속으로 외쳤음. 안돼. 또 넘어갈 지경이야.


미안하네, 기껏 와서 자도 좋다고 허락해줬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군.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풀죽은 목소리가 뒤따라왔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토니의 시선을 쉽사리 마주하지 못하는 스티브의 모습에 토니는 스티브와 동거한 이래 몇 번째인지 모를 신을 부르짖었음. 아 신이여 젠장, 귀엽잖아. 저건 악마야! 천사가 아냐! 정신 차려 토니 스타크! 속으면 안돼! 뺨을 직접 때릴 수 없어 마음속으로 자신을 후려치며 애써 마음을 다잡고 내가 요새 바쁘니 어쩔 수 없지, 수면제라도 줄까 하는 말을 꺼내려던 토니는 마침 눈치를 살피듯 고개를 들어올린 스티브와 정면으로 눈이 뙇 마주쳤음. 푸른 눈동자에는 약간 물기마저 어려 있었음. 지저스, 이건 여자뿐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존재로 하여금 모성애? 부성애? 아무튼 그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단숨에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비주얼 효과였음.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옆에서 같이 자달라는 건데 그걸 못 들어주면 내가 천하의 몹쓸 놈이 될 것 같았음. 어라 이거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데. 토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다가 결국 이번에도 입술이 먼저 움직이는 걸 막을 수 없었음. 어.. 음. 알았어, 오늘은 이만 올라갈테니 같이 가지 뭐. 그러자 스티브의 얼굴에 대번에 미소가 떠올랐음. 정말인가..? 나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안 그래도.. 미안한 듯, 하지만 그래도 기쁨이 더 큰 듯 빙긋이 웃고 있는 스티브란 상당한 비주얼 쓰나미였음. 토니가 얼빠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기실 이건 세상 사람들 전부가 그럴 거였음. (토니는 콜슨도 얼빠일거라 확신했음) 거기다 푸른 곰돌이 잠옷의 귀여움, 작은 체구까지.. 애처로움이라는 스파이시가 더해져 완벽한 매력 삼종세트를 완성하고 있었음. 토니는 어쩐지 자기가 낚이고 있다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면서도, 수줍은 듯 손을 내밀어온 스티브를 뿌리칠 수가 없었음. 나 왠지 망하고 있는 것 같아, 페퍼. 무지하게.


그날부터 토니는 반강제적이지만 규칙적으로 잠을 자기 시작했음. 회사일이든 작업이든, 해가 떠있는 중천이거나 꼭두새벽에 일어나 처리하게 되었고 늦어도 열두시쯤엔 침실로 돌아와 잠을 청하곤 함. 이게 다 스티브 때문이었는데, 어느날은 한 이틀정도 새벽 2시를 넘겨 방으로 돌아왔는데 무척 쓸쓸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그것도 무릎을 모아 안은 채로) 스티브를 발견한 토니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런 천하의 몹쓸 인간을 보았나 저렇게 어린 애를 늦게까지 기다리게 하다니!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음. 게다가 스티브는 그런식으로 토니를 신경쓰게 해서 미안하다며 오히려 눈치를 보고 있는 거임. 맙소사 진짜 이게 뭐야. 토니는 진저리치며 늦어도 12시라는 데드라인을 스스로 정할 수 밖에 없었음. 샤워를 끝내고 와서 털썩 드러누우면, 바로 가까이에서 스티브도 시트를 덮고 누웠음. 잘 자게 토니. 굿나잇 리틀 솔져. 서로에게 여상히 인사를 건네고 나면 그 다음엔 고른 숨소리만 남게 되었음. 보통 먼저 잠드는 것은 스티브였고 토니는 그런 스티브를 잠깐동안 바라보다 눈을 감는 일이 다반사였음.


그렇게 슬슬 스티브와 규칙적인 수면을 취하게 된 토니는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수준으로 연달아 찾아왔던 멘붕(같이 자고 싶네 + 자네가 없으면 잠이 안와서 2단콤보)을 서서히 극복해나갔고 이제 옆에 새근새근 잠든 금발이 없으면 심심하고 이상한 기분이 될 무렵 조금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난 천재 조만장자 플레이보이 자선사업가인데! 토니 스타크인데! 끝내주는 남자인데! 왜 이렇게 리틀 솔져한테 쩔쩔매고 있는거지? 싶은거임. 본인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크게 양보하면서까지 부탁을 들어줘서 스티브와 사이가 꽤 좋아지고 서로에게 상당히 익숙해진 것은 무척 축하할만한 일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은근슬쩍 고개를 들기 시작한 거였음. 내가 이렇게 잘 해주는데 뭔가 리틀솔져를 그만큼 낚을게 없을까, 싶기도 하고. 이것저것 궁리하던 토니는 최근 스티브가 자신에게 몹시 효과적으로 외견적인 부분을 써먹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냈음. 오호라, 그게 있구만.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요렇게 나와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토니의 입가에 모처럼 짖궂은 미소가 걸렸음. 


신체가 어린애로 돌아간다는 건 불편함도 많지만 여러모로 전략적인 쓸모가 있기에 좋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스티브는 그 까다롭고 비협조적이며 시니컬하고 개인적인 토니 스타크를 두 번이나 함락시키는 데에 자신의 다섯살짜리 외모를 이용했고, 그건 아직도 쭉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간혹 이런 일들이 조금 더 빨리 있었더라면 자신들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스티브 로저스는 약 한 시간째 책장과 분투하며 인내심이 슬슬 끊어져 가려는 참이었다. 하필이면 의자가 부서져서 쓸 수 없다니. 기나긴 책장과의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금만.... 더...."

다시금 까치발을 하며 손을 뻗어 보았지만 아슬아슬하게 책 모서리에 손이 닿을락말락한가 싶더니 쭉 미끄러졌다. 타고 올라가는 방법도 고민해 보았지만, 수퍼솔져인 자신이 그랬다간 책장이 보기 좋게 넘어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최악의 경우엔 그 아래 깔릴 수도 있고. 지친 숨을 내쉬며 스티브는 어깨를 풀듯 몇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지금 꼭 읽어야 하는 미술 서적이 저 위치에 있는 게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을지. 가정법은 달콤하지만 결국 씁쓸한 현실을 강조해서 보여줄 뿐 아무것도 바꿔주지 않는다. 스티브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금 팔을 최대한으로 움직일 준비를 했다. 만약, 갑자기 위로 번쩍 들어올려지지 않았다면 스티브의 팔은 책장을 향해 뻗었을 것이다.

"헤이, 리틀 솔져. 뭐 하고 있는거야?"
".....아. 토니.. 깜짝 놀랐잖나."
"어차피 여기엔 나 말고 당신밖에 없구만 뭘 그리 놀랜대. 쉴드도 여긴 함부로 못 뚫어. 그나저나 뭐 했어?"
"음, 저기 책이 필요해서."

스티브는 자연스레 대답하며 토니를 돌아보았고 순간 숨을 멈추었다. 지척에 다가온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와 약간의 따스함, 그리고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지금 자신이 애취급 당하며 번쩍 들어올려져 팔에 안긴 상태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스티브는 바보가 된 것 마냥 토니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전혀 질리지 않는 매력이 거기 있었다.

"의자가 부러졌어? 이런, 내가 바로 고쳐 주지. 책은 어느건데? 이쪽?"
"아니, 조금 더 오른쪽... 이거야."
"크기도 크네. 발돋움해서 꺼냈다간 대형참사가 발생했을지도 모르겠는데, 다음부터는 그냥 자비스를 통해서 날 불러."
"늘 바쁜 자네에게 폐를 끼치는 건 싫어서... 음. 알겠네."
"아직 리틀 솔져니까 그래도 돼."

토니는 일부러 '리틀' 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발음했고, 그제서야 스티브의 미간이 슬 찌푸려졌다. 본격적으로 항의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않아 있었으나, 지금껏 두 번이나 토니를 낚은 장본인으로서 도무지 그 부분을 확실하게 대응하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게다가 어쩐지 이런 토니의 행동은 한 번으로 그칠 것 같지 않은 그런 예감이 들어 스티브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자업자득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또한 예상대로, 토니는 한동안 스티브가 뭔가를 찾기위해 끙끙대거나 피곤해하면 번쩍번쩍 안아들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스티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라, 바로 코앞에서 토니를 응시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에 당황하고 조금은 기뻐했으며 그런 자신에게 놀라워했다.



by 치우타 2013. 3. 16. 22:29

3. 불면의 스티브 로저스, 해결책을 발견하여 후퇴 없는 전진 명령 개시.
스티브가 눈을 뜬 건 거의 점심이 되어가기 전이었음. 그 동안 토니는 기다려주느라 허리도 아프고 패널 만지는것도 지겨워서 자비스 불러다 화면 띄워놓고 이것저것 조작했음. 그리고 중간에 자세도 몇 번 바꿈. 아주 제대로 착 달라붙어있어서 편한 자세를 취하긴 힘들었지만 침대 헤드에 기대앉을 수는 있는 수준이었음. 쿠션 푹신하게 깔고 기대서 대롱대롱 매달려 잘 자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감탄했음. 진짜 뭐 이렇게 잠을 잔대. 누가 보면 애정결핍인 줄 알겠네. 손가락으로 화면을 조작하던 토니는 음... 하는 낮은 신음에 고개를 내렸음. 드디어 좀 깨나? 잠을 깨우기 위해 여러가지 신박한 문구 및 비꼼을 생각하던 토니는 그냥 다 관두고 말 없이 지켜봤음. 그 편이 스티브로서는 더 쪽팔릴테니까. 스티브가 몸을 뒤척뒤척하더니 눈을 몇 번 깜박였음. 주변이 환한 걸 보니 아침이 오긴 한 모양임. 그리고 뭔가 뜨뜻하고 커다란 걸 꽉 붙잡고 있었음. 비몽사몽한 기억으로 토니가 부르던 노래를 떠올리며 그대로 잤나, 생각하던 스티브는 주변과 다른 푸르스름한 빛이 머리 위쪽에 있는걸 알았음. ?? 하며 고개를 들자 거기엔.. 어디서 많이 본 푸른 빛을 내뿜는 동그란 것이 있었음. 아크리액터? 멍하니 그걸 바라보던 스티브는 한 삼초 후에 기겁하며 벌떡 일어났음. 그리고 빙글빙글 웃으며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자길 바라보는 토니와 눈이 마주쳤음. 굿모닝 캡틴, 엄청난 늦잠꾸러기군. 그래 밤새 나 끌어안고 잘 잤나?


내가, 자넬... 뭐라고? 당황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대답하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피식 웃었음. 끌어안았다고. 지금도 반쯤 그러고 있는데, 이제 깼으면 좀 놔주겠어? 당신은 지금 세상에서 제일 비싼 토니 스타크의 아침 시간을 한 4시간 정도 썼거든. 손가락으로 아직 어정쩡하게 걸쳐져있는 스티브의 팔을 톡톡 두드리자, 황급히 떨어졌음. 미...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어찌나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히고 말까지 더듬는 스티브를 보며 토니는 즐거운 듯 웃었음. 뭐 됐어, 불면증도 그걸로 괜찮아진 모양이니까. 브런치나 먹으러 가지. 준비는 미리 시켜뒀으니까 잘 씻고 나와. 당신 옷들 새로 몇벌 더 장만했으니까 저기 옷장 열어보고. 침대에서 먼저 일어난 토니는 입고 있던 나이트 가운을 휙 집어던지고 능숙한 솜씨로 셔츠며 바지를 금방 입었음. 드로우즈를 입고 있었기에 알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게 더 섹시하다는 생각을 하던 스티브는 소스라치며 굴러가듯 침대에서 떨어져 내려와 욕실로 달려갔음. 그러다 넘어진다, 리틀 솔져. 능글맞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거기 대꾸도 못하고 그대로 욕실안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았음. 오, 저런. 사춘기가 다시 왔나보네. 토니는 낄낄거리며 먼저 방을 나섰음.


스티브는 토니의 자장가에 잠이 든 걸로도 모자라서 아침까지 꽉 달라붙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 대체 이게 무슨상황인가 싶어 멘붕중이었음. 정작 토니는 재미있어하고 있긴 했지만. 어제는 미안했네, 그, 내가... 폐를 끼친 것 같군. 겨우겨우 머릿속을 정리한 다음 일하던 토니에게 사과하러 가자, 보안경을 끼고 한창 작업하던 토니가 안경을 위로 끌어올리고는 씩 웃었음. 별로 신경 안써도 되는데? 작아진 당신을 돌보는 건 지금 내 일이니까. 그 잘생긴 외모에 감사해, 당신 외모가 내 취향인 것에도. 아니었으면 그렇게까진 안 했을걸. 가볍게 던지는 듯한 말 속에 어쩐지 스티브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음. 내 얼굴이 취향이라고? 아니었으면 그렇게 안 했다고? 날 돌보는 게 일이라고? 걸리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음. 물론 돌봐.. 준다는 표현이 영 찜찜하긴 한데 문제는 그거말고 일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더 신경쓰였음. 왜일까, 그저 호의만으로 토니가 자신에게 잘해줄만한 건 없으니 저게 틀린말은 아닐텐데. 어째서인지 기분이 별로였음. 문득 스티브는 거울을 바라보았음. 금발머리에 푸른 눈, 전형적인 미국형 미남의 얼굴. 지금은 어린애가 되긴 했지만 누가 봐도 귀여운 외모였음. 이게 취향이라고? 어쩐지 벌컥 화를 내고 싶은 느낌이었지만 앞뒤가 맞지 않아 그만두었음.


자존심도 있고 여러가지 다른 것도 있어서 스티브는 그날 밤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음. 이게 원래 맞는 거임. 근데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우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음. 어제는, 아니 아침까지는 옆에 토니가 있었는데. 덕분에 악몽도 꾸지 않고 잠들수 있었던 걸지도 모름. 스티브는 아주 가끔 얼음에 갇혔던 때의 꿈을 꾸곤 했음. 주변엔 아무도 없고, 자신을 놔두고 세계의 시간이 돌아가고, 그리고 70년. 차가운 얼음 속, 그 두려움과 외로움이 사무쳐 어쩔 때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곤 했음.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로. 그리고 여전히,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체념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잠을 청하곤 했음. 대부분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와중 어벤져스 일이 있었고, 이래저래 지내며 그 꿈은 처음보다 횟수가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정기적으로 꾸고 있었음. 그런데 토니에게 신세를 지면서부터는 전혀 단 한번도 꾸질 않았음. 다른 방에 있어도 이 곳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던 걸까. 스티브는 여러 가지를 떠올리다가 머리가 아파와 눈을 감았음. ......그런데... 잠이 안옴. 누워서 한 세시간 정도 흐른 것 같은데 잠의 편린조차도 안 옴. 혹시나 해서 토니와 브런치를 먹고 나선 운동 및 산책(이라고는 해도 집근처) 등 몸을 잔뜩 움직여서 피로감을 한껏 축적시켰지만 눈이 말똥말똥함. 뇌우도 이제 거의 끝나가는 즈음이라 신경쓰이지 않는데도 잠이 안 옴. 환장하겠음. 스티브는 뒤척뒤척거리다가 결국 그날 밤을 새고 말았음.


굿모닝, 캡틴. ...굿모닝, 토니. 캡틴의 눈가에 미미하게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걸 토니는 놓치지 않았음. 저양반이 또 못잤나보네. 습관적 불면증? 토니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그만두었음. 내가 뭘 또 고민하는 거야. 알아서 하겠지. 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 본인의 가장 중요한 프레이즈를 떠올리며 베이컨을 집어들어 입에 물고 뉴스 화면을 띄우던 토니의 눈이 말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던 스티브랑 마주쳤음.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농을 던졌음. 왜, 새삼 내가 너무 잘생겨서? 나도 알아. 그닥 답을 요구하지 않는 말을 던져두고 경제면 및 기타 여러가지를 훑는 토니를 보고 스티브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음. 저게 지금 뭐래, 하는 얼굴일게 뻔했지만 토니는 요만큼도 신경 안 썼음. 그날도 대충 무난하게 흘러갔지만 스티브는 또 잠을 못 이루고 있었음. 토니는 며칠째 워크샵에 틀어박혀서 뚱땅거리느라 방엔 거의 돌아오지 않았고 스티브는 방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뒤척였다 엎드렸다가 아주 가관이 아니었음. 결국 또 이틀째, 리틀 솔져의 잠 못드는 밤이 지나감.


작아져서 꼬맹이 몸이 됐지만 수퍼솔져 혈청은 여전해서, 잠을 조금 못잔다고 미칠듯한 피로가 몰려오지는 않았음. 다만 스티브는 어느 정도 신경이 곤두서있는 상태였음. 왜 내가 잠을 잘 수 없지? 대체 이유가 뭐지? 혼자서 열심히 고민하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수면제는 먹어도 듣질 않으니 패스) 도대체 해결 방안이 눈에 보이질 않으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음. 차라리 임무를 하던가 뭔가 다른일이라도 잔뜩 쌓여있으면 좋겠는데 몸이 이러니까 할 수 있는 건 아주 제한적이었음. 안절부절한 스티브의 상태를 자비스가 넌지시 토니에게 보고하자, 토니는 공구를 내려놓았음. 할 게 없어서 저런 모양이군. 자비스, 미술용품 좀 구입해와. 스케치북이랑 유화든 뭐든 크레파스든. 오후즈음 저택에 미술용품 세트가 도착했고 토니는 그걸 스티브 침실 옆의 서재 겸 갤러리 비스무리한 곳에 놓아두라고 했음. 어이 캡틴, 할 거 없으면 그림이라도 그려. 의미없는 운동을 반복하던 스티브에게 허공을 통해 토니의 말이 들려왔음. 그림? 스티브가 반문하자 토니가 말했음. 당신 침실 옆에 서재, 거기 가봐. 맨날 운동만 하기도 지겹지 않아? 필요한 거 있으면 따로 말하고. 목소리가 사라지자 스티브는 서재로 가보았음. 미술용품이 잔뜩 있었고 캔버스와 스케치북과, 앉기 좋은 높이의 의자도 있었음.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이것도 결국 토니의 배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임을 깨닫고 스티브는 오랜만에 기분좋게 웃었음. 


연필 스케치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원껏 그림을 그리다보니 어느새 해가 졌음. 안 먹겠다는 토니에게 굳이 달려가 질질 끌고와서 저녁을 같이 먹으며 스티브는 내내 행복한 얼굴이었음. 그림이 그렇게도 좋은가?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는데. 토니는 스티브를 흘끔흘끔 보다가 어느새 자기도 스르르 풀린 표정으로 웃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함. 부드럽게 풀어진 표정의 토니를 보고 스티브는 깜짝 놀랐음.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거의 매일같이 투닥거리거나 비꼬거나 장난스러운 표정만 봐왔기 때문인지 좀 신선한 충격이었음. 그러고 보니 자비스나 더미 등 자신의 창조물들을 대할 땐 언제나 웃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함. 새삼스레 토니를 다시 보게 된 느낌이었음. 꽤 온화한 분위기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토니는 다시 랩실로 내려갔으며 스티브는 서재의 그림용구를 정리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음. 오늘은 좋은 일도 있고 했으니 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시트를 덮고 베개를 베고 누웠음. ...그러나 그런 두근거림도 무색하게 스티브는 잠이 오질 않았음. 한 서너시간을 그러고 있으며 오늘도 밤샘이구나 하고 포기하려던 참에 발소리가 들려왔음. 조금 보폭이 있는 그 걸음은 자신의 방을 지나쳤고 문이 열렸음. 토니? 스티브는 자기도 모르게 방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았음. 토니의 침실에 불이 들어와 있더니, 이윽고 샤워소리가 들리고 문 여닫는 소리가 조금 시간을 두고 들렸음. 젖은 발소리, 그리고 푹 쓰러지는 소리 이후엔 정적. 스티브는 어쩐지 신경쓰여서 토니를 보러 갔음.


거기엔 가운만 입고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린 토니가 쓰러져 잠들어 있었음. 요 며칠동안 쉬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뭔가 하나라도 끝낸 모양이었음. 은은한 바디샴푸와 샤워코롱향이 풍겨왔음. 이러고 자다간 감기 걸릴 텐데. 스티브는 두리번거리다 수건을 발견하고 토니의 머리에 조심스레 가져다 댔음. 깊이 잠들었는지 미동도 않는 토니를 보며 대강 물기를 털어내고 수건을 다시 겉어내자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잠든 토니의 얼굴이 보였음. 피곤해 보이지만 얼굴에 떠올라 있는 만족감에 어쩐지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찾아오지 않던 수마가 갑작스레 덮치는 기분이 들었음. 스티브는 눈을 깜박이며 애써 뒤로 물러나려고 했음. 안돼.. 이러다 또 여기서 잠들면.. 하지만 이틀동안 수면을 취하지 못한 신체는 빠르게 생존본능으로 바늘을 움직였고, 결국 스티브는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엎어져 잠든 토니의 옆에 푹 쓰러지고 말았음. 아침에 또 무슨 소릴 들을지, 하고 생각한 게 스티브의 그날 밤 마지막 기억이었음. 


다행히도 아침에 먼저 깬 건 스티브였음. 커다란 창 밖으로 밝아오는 아침 햇살에 눈을 떠보니 어제와 같은 포즈로 토니가 옆에 잠들어있었음. 스티브는 부스스하게 일어나 눈을 부비며 멍하니 앉아있었음. 근 이틀만에 잠을 자서 그런가 굉장히 나른한 기분이었고 거기에서 금방 빠져나오고 싶지가 않았음.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신체는 이미 움직일 준비를 끝마치고 어서 잠을 쫓으라고 채근하고 있었지만 스티브는 기지개를 펴고 다시 토니를 내려다보았음. 가지런하고 긴 속눈썹, 조금 까칠해진 것 같은 수염, 패인 이마. 토니는 가까이서 보면 굉장히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스티브는 문득 깨달았음. 유려한 말투와 태도, 노래하는 듯한목소리, 관중에의 쇼맨십 때문에 언제나 그는 번쩍이는 플래시에 파묻힌 화려한 남자로서의 이미지가 있었음. 그런데 또 일상에 들어와 보면 사소한 부분에서 더욱 매력을 발산하는 남자였음. 생각에 잠겨있던 스티브를 현실로 끌어올린 건 끙, 하는 토니의 낮은 신음소리였음. 스티브는 재빨리 일어나 머리를 정돈하고 파자마를 털었음. 토니에게서 왜, 내 옆이 그렇게 자기 좋던가? 하는 식의 비아냥을 듣지 않기 위한 일종의 완전범죄.. 아니 뒷처리.. 아니 아무튼 사후처리 그런 거였음. 다행히 느릿하게 잠이 깬 토니는 스티브가 자신에게 아침먹으라는 말을 하러온 줄 짐작했고, 지난 밤에도 자신과 같이 잠들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음. 스티브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만 자고 일어나라고 타박을 주곤 후다닥 침실에서 빠져나왔음.


이틀간의 불면 그리고 숙면을 통해 스티브가 얻은 결론은 하나였음.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은데 어쩔 수 없는 결과같은 그런거 있잖음. 토니가 자장가를 불러줬던 날 이후로 혼자 있던 이틀은 또 잠을 설쳤고, 어제 토니 보러왔다가 기절하듯이 푹 잔 하루. 거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토니의 유무였음. 있느냐 없느냐. 대체 자신이 언제부터 이런 응석받이 꼬맹이마냥 된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인이나 그런건 차치하더라도 현실적인 면을 보자면 '토니 스타크가 있으면 잠을 잘 수 있다' 였음. 이게 왠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신이시여. 둘이 거의 한달 가까이 동거하면서 싸우던 시절보단 가까워진게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인데.... 왜죠.. 멘붕해봤자 내린 결론은 바뀌지 않음. 결국 스티브는 여기에 현명하게 대처하기로 마음먹음. 캡틴 아메리카, 테서랙트와 망설임없이 바다로 돌진하던 결단력있는 이 남자는 일단 바꿀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거기 적응하는 데에는 선수였음. 군인이니까. 그래야 한다면 응당 하는게 맞음. 그리고 그게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더욱 그랬음. 그래서 스티브는, 좀 뻔뻔해지기로 했음. 토니가 어떤 반응을 보이건간에 밀어붙여야 한다면 그런 편이 더 좋음. 리틀 솔져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른 채 토니는 토스트나 우적우적 씹고 있었음.



"토니, 바쁜가?"
"? 무슨 일이야, 캡틴. 별로 그렇진 않은데 왜?"
"좀..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서."

시끄럽게 울리던 음악의 볼륨을 조금 더 줄이고 토니가 돌아보자, 거기엔 흰색 셔츠에 검은 멜빵 바지, 흰 양말을 신은 스티브가 서 있었다. 얼마 전에 구입한 옷인데 스티브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은 있단 말이야. 완전 귀엽네. 진짜 아들이라고 뻥이나 쳐볼까...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는 걸 알았는지 짧게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토니는 망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나한테 할 부탁이라는 게 뭔데? 길어지는 거면 거기 앉던가. 토니는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고(스티브가 앉을 수 있도록 높이를 바꾼 의자였다)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조금 어려운 부탁이기는 하네만. 뜸을 들이는 걸 보며 토니는 어쩐지 안절부절한 기분이 되었다. 뭐길래 저렇게 꼼지락거리는 거야?

"뭔데.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봐."
"사실은, 내가 요새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는데..."
"오. 뇌우 때문 아니었어? 이제 끝난 것 같은데 아직도?"
"그건 놀라서 그런 거고, 아무튼... 수면에 문제가 좀 있네. 그래서... 해결방법을 찾았는데, 도움이 필요한 일이거든."
"설마, 나?"

토니가 스스로에게 손가락을 향해보이자 스티브는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니 대체 뭐길래. 토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몇 가지 선택지를 떠올려보았다. 자장가를 불러달라는 건 아닐거고, 패스. 방을 옮겨달라는 거? 그건 자비스가 해도 될텐데. 방 환경이 바뀐걸 알아챘나? 그럴리 없고. 팽팽 돌아가는 쿼드코어 두뇌는 그 다음에 들려온 스티브의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일시정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자네랑 같이 자고 싶네."

토니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다음에는 스티브의 존재를 의심했고, 그 다음에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를 의심했다. 뭐라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주 멍청한 목소리가 쥐어짜듯 목구멍에서 흘러나왔고, 눈 앞의 리틀 솔져는 확신을 담은 눈동자로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했다. 자네랑 같이 자고 싶네. 어려운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 도저히 그러지 않고서는 잠이 오질 않아서.. 스티브의 말은 마치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배우의 대사처럼 멀찍하니 들렸다. 대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같이 자고 싶다고? 스티브 로저스가 토니 스타크랑? 아니, 존재론적인 부분은 집어치우고서라도 왜 저렇게 표현이 미묘해? 아니아니 다 됐고 누가 누구랑 같이. 맙소사. 토니는 혀가 꼬인듯한 기분에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플레이보이, 천재, 독지가, 조만장자로 살아오면서 이런 경우는 어디에서도 겪은 적이 없었다. 삐걱거리는 뇌속의 연산을 다잡으며 간신히 안 돼의 ㅇ을 발음하려던 순간, 스티브가 풀죽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역시.. 무리한 부탁이겠지. 미안하네, 잊어버리게. 내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어."

스티브의 얼굴에는 절망감과 부끄러움, 두려움,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이 떠올라 있었다. 토니는 다시 제가 하려던 말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미국의 태양, 미국의 상징, 캡틴 아메리카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토니는 마치 자신이 대역죄인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잘못한 건가? 내가 거절할 것 같으니 저러는 거야? 왜? 내가 왜? 뭘 했다고! 억울한 마음은 저 밑에서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작아진 스티브 로저스는, 정말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저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예전처럼 핵을 집어들고 치타우리 모선에 꼬나박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굳어버린 혀를 움직여 토니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았다.

"아니, 그, 어...젠장. 무슨 언어장애도 아니고.. 당신더러 한 말 아니야! 내가 그렇다는, 미치겠군. 그런 표정 하지 마. 거절도 못하겠네. 알았어 알았다고 내 방에서 자!"
"......정말인가?"

더듬거리면서도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토니의 말에, 스티브가 한 템포 정도 늦춘 대답을 돌리며 얼굴에 화색을 띄었다. 아 제발 그렇게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이 금발에 벽안을 가진 천사라는 이름의 대악마야! 토니는 마음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그렇게 안 오면 와서 자라고. 난 상관 없... 으니까. 마지막 말을 조금 더듬고 말았지만 스티브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오 신이시여, 당신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 안했는데 지금은 좀 불러야겠습니다. 나한테 왜 이래요? 뭐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토니가 그렇게 소리없이 절규하는 동안, 스티브는 일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랩을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스티브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도 토니는 이걸 평생 모를 것이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상대한 건 어려진 모습으로 사람 마음약하게 만드는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라, 백전노장의 캡틴 아메리카라는 사실을. 



by 치우타 2013. 3. 16. 2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