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불면의 스티브 로저스, 해결책을 발견하여 후퇴 없는 전진 명령 개시.
스티브가 눈을 뜬 건 거의 점심이 되어가기 전이었음. 그 동안 토니는 기다려주느라 허리도 아프고 패널 만지는것도 지겨워서 자비스 불러다 화면 띄워놓고 이것저것 조작했음. 그리고 중간에 자세도 몇 번 바꿈. 아주 제대로 착 달라붙어있어서 편한 자세를 취하긴 힘들었지만 침대 헤드에 기대앉을 수는 있는 수준이었음. 쿠션 푹신하게 깔고 기대서 대롱대롱 매달려 잘 자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감탄했음. 진짜 뭐 이렇게 잠을 잔대. 누가 보면 애정결핍인 줄 알겠네. 손가락으로 화면을 조작하던 토니는 음... 하는 낮은 신음에 고개를 내렸음. 드디어 좀 깨나? 잠을 깨우기 위해 여러가지 신박한 문구 및 비꼼을 생각하던 토니는 그냥 다 관두고 말 없이 지켜봤음. 그 편이 스티브로서는 더 쪽팔릴테니까. 스티브가 몸을 뒤척뒤척하더니 눈을 몇 번 깜박였음. 주변이 환한 걸 보니 아침이 오긴 한 모양임. 그리고 뭔가 뜨뜻하고 커다란 걸 꽉 붙잡고 있었음. 비몽사몽한 기억으로 토니가 부르던 노래를 떠올리며 그대로 잤나, 생각하던 스티브는 주변과 다른 푸르스름한 빛이 머리 위쪽에 있는걸 알았음. ?? 하며 고개를 들자 거기엔.. 어디서 많이 본 푸른 빛을 내뿜는 동그란 것이 있었음. 아크리액터? 멍하니 그걸 바라보던 스티브는 한 삼초 후에 기겁하며 벌떡 일어났음. 그리고 빙글빙글 웃으며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자길 바라보는 토니와 눈이 마주쳤음. 굿모닝 캡틴, 엄청난 늦잠꾸러기군. 그래 밤새 나 끌어안고 잘 잤나?
내가, 자넬... 뭐라고? 당황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대답하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피식 웃었음. 끌어안았다고. 지금도 반쯤 그러고 있는데, 이제 깼으면 좀 놔주겠어? 당신은 지금 세상에서 제일 비싼 토니 스타크의 아침 시간을 한 4시간 정도 썼거든. 손가락으로 아직 어정쩡하게 걸쳐져있는 스티브의 팔을 톡톡 두드리자, 황급히 떨어졌음. 미...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어찌나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히고 말까지 더듬는 스티브를 보며 토니는 즐거운 듯 웃었음. 뭐 됐어, 불면증도 그걸로 괜찮아진 모양이니까. 브런치나 먹으러 가지. 준비는 미리 시켜뒀으니까 잘 씻고 나와. 당신 옷들 새로 몇벌 더 장만했으니까 저기 옷장 열어보고. 침대에서 먼저 일어난 토니는 입고 있던 나이트 가운을 휙 집어던지고 능숙한 솜씨로 셔츠며 바지를 금방 입었음. 드로우즈를 입고 있었기에 알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게 더 섹시하다는 생각을 하던 스티브는 소스라치며 굴러가듯 침대에서 떨어져 내려와 욕실로 달려갔음. 그러다 넘어진다, 리틀 솔져. 능글맞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거기 대꾸도 못하고 그대로 욕실안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았음. 오, 저런. 사춘기가 다시 왔나보네. 토니는 낄낄거리며 먼저 방을 나섰음.
스티브는 토니의 자장가에 잠이 든 걸로도 모자라서 아침까지 꽉 달라붙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 대체 이게 무슨상황인가 싶어 멘붕중이었음. 정작 토니는 재미있어하고 있긴 했지만. 어제는 미안했네, 그, 내가... 폐를 끼친 것 같군. 겨우겨우 머릿속을 정리한 다음 일하던 토니에게 사과하러 가자, 보안경을 끼고 한창 작업하던 토니가 안경을 위로 끌어올리고는 씩 웃었음. 별로 신경 안써도 되는데? 작아진 당신을 돌보는 건 지금 내 일이니까. 그 잘생긴 외모에 감사해, 당신 외모가 내 취향인 것에도. 아니었으면 그렇게까진 안 했을걸. 가볍게 던지는 듯한 말 속에 어쩐지 스티브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음. 내 얼굴이 취향이라고? 아니었으면 그렇게 안 했다고? 날 돌보는 게 일이라고? 걸리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음. 물론 돌봐.. 준다는 표현이 영 찜찜하긴 한데 문제는 그거말고 일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더 신경쓰였음. 왜일까, 그저 호의만으로 토니가 자신에게 잘해줄만한 건 없으니 저게 틀린말은 아닐텐데. 어째서인지 기분이 별로였음. 문득 스티브는 거울을 바라보았음. 금발머리에 푸른 눈, 전형적인 미국형 미남의 얼굴. 지금은 어린애가 되긴 했지만 누가 봐도 귀여운 외모였음. 이게 취향이라고? 어쩐지 벌컥 화를 내고 싶은 느낌이었지만 앞뒤가 맞지 않아 그만두었음.
자존심도 있고 여러가지 다른 것도 있어서 스티브는 그날 밤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음. 이게 원래 맞는 거임. 근데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침대에 누우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음. 어제는, 아니 아침까지는 옆에 토니가 있었는데. 덕분에 악몽도 꾸지 않고 잠들수 있었던 걸지도 모름. 스티브는 아주 가끔 얼음에 갇혔던 때의 꿈을 꾸곤 했음. 주변엔 아무도 없고, 자신을 놔두고 세계의 시간이 돌아가고, 그리고 70년. 차가운 얼음 속, 그 두려움과 외로움이 사무쳐 어쩔 때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곤 했음.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로. 그리고 여전히,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체념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잠을 청하곤 했음. 대부분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와중 어벤져스 일이 있었고, 이래저래 지내며 그 꿈은 처음보다 횟수가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정기적으로 꾸고 있었음. 그런데 토니에게 신세를 지면서부터는 전혀 단 한번도 꾸질 않았음. 다른 방에 있어도 이 곳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던 걸까. 스티브는 여러 가지를 떠올리다가 머리가 아파와 눈을 감았음. ......그런데... 잠이 안옴. 누워서 한 세시간 정도 흐른 것 같은데 잠의 편린조차도 안 옴. 혹시나 해서 토니와 브런치를 먹고 나선 운동 및 산책(이라고는 해도 집근처) 등 몸을 잔뜩 움직여서 피로감을 한껏 축적시켰지만 눈이 말똥말똥함. 뇌우도 이제 거의 끝나가는 즈음이라 신경쓰이지 않는데도 잠이 안 옴. 환장하겠음. 스티브는 뒤척뒤척거리다가 결국 그날 밤을 새고 말았음.
굿모닝, 캡틴. ...굿모닝, 토니. 캡틴의 눈가에 미미하게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걸 토니는 놓치지 않았음. 저양반이 또 못잤나보네. 습관적 불면증? 토니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그만두었음. 내가 뭘 또 고민하는 거야. 알아서 하겠지. 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 본인의 가장 중요한 프레이즈를 떠올리며 베이컨을 집어들어 입에 물고 뉴스 화면을 띄우던 토니의 눈이 말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던 스티브랑 마주쳤음.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스티브를 보고 토니는 농을 던졌음. 왜, 새삼 내가 너무 잘생겨서? 나도 알아. 그닥 답을 요구하지 않는 말을 던져두고 경제면 및 기타 여러가지를 훑는 토니를 보고 스티브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음. 저게 지금 뭐래, 하는 얼굴일게 뻔했지만 토니는 요만큼도 신경 안 썼음. 그날도 대충 무난하게 흘러갔지만 스티브는 또 잠을 못 이루고 있었음. 토니는 며칠째 워크샵에 틀어박혀서 뚱땅거리느라 방엔 거의 돌아오지 않았고 스티브는 방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뒤척였다 엎드렸다가 아주 가관이 아니었음. 결국 또 이틀째, 리틀 솔져의 잠 못드는 밤이 지나감.
작아져서 꼬맹이 몸이 됐지만 수퍼솔져 혈청은 여전해서, 잠을 조금 못잔다고 미칠듯한 피로가 몰려오지는 않았음. 다만 스티브는 어느 정도 신경이 곤두서있는 상태였음. 왜 내가 잠을 잘 수 없지? 대체 이유가 뭐지? 혼자서 열심히 고민하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수면제는 먹어도 듣질 않으니 패스) 도대체 해결 방안이 눈에 보이질 않으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음. 차라리 임무를 하던가 뭔가 다른일이라도 잔뜩 쌓여있으면 좋겠는데 몸이 이러니까 할 수 있는 건 아주 제한적이었음. 안절부절한 스티브의 상태를 자비스가 넌지시 토니에게 보고하자, 토니는 공구를 내려놓았음. 할 게 없어서 저런 모양이군. 자비스, 미술용품 좀 구입해와. 스케치북이랑 유화든 뭐든 크레파스든. 오후즈음 저택에 미술용품 세트가 도착했고 토니는 그걸 스티브 침실 옆의 서재 겸 갤러리 비스무리한 곳에 놓아두라고 했음. 어이 캡틴, 할 거 없으면 그림이라도 그려. 의미없는 운동을 반복하던 스티브에게 허공을 통해 토니의 말이 들려왔음. 그림? 스티브가 반문하자 토니가 말했음. 당신 침실 옆에 서재, 거기 가봐. 맨날 운동만 하기도 지겹지 않아? 필요한 거 있으면 따로 말하고. 목소리가 사라지자 스티브는 서재로 가보았음. 미술용품이 잔뜩 있었고 캔버스와 스케치북과, 앉기 좋은 높이의 의자도 있었음.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이것도 결국 토니의 배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임을 깨닫고 스티브는 오랜만에 기분좋게 웃었음.
연필 스케치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원껏 그림을 그리다보니 어느새 해가 졌음. 안 먹겠다는 토니에게 굳이 달려가 질질 끌고와서 저녁을 같이 먹으며 스티브는 내내 행복한 얼굴이었음. 그림이 그렇게도 좋은가?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는데. 토니는 스티브를 흘끔흘끔 보다가 어느새 자기도 스르르 풀린 표정으로 웃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함. 부드럽게 풀어진 표정의 토니를 보고 스티브는 깜짝 놀랐음.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거의 매일같이 투닥거리거나 비꼬거나 장난스러운 표정만 봐왔기 때문인지 좀 신선한 충격이었음. 그러고 보니 자비스나 더미 등 자신의 창조물들을 대할 땐 언제나 웃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함. 새삼스레 토니를 다시 보게 된 느낌이었음. 꽤 온화한 분위기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토니는 다시 랩실로 내려갔으며 스티브는 서재의 그림용구를 정리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음. 오늘은 좋은 일도 있고 했으니 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시트를 덮고 베개를 베고 누웠음. ...그러나 그런 두근거림도 무색하게 스티브는 잠이 오질 않았음. 한 서너시간을 그러고 있으며 오늘도 밤샘이구나 하고 포기하려던 참에 발소리가 들려왔음. 조금 보폭이 있는 그 걸음은 자신의 방을 지나쳤고 문이 열렸음. 토니? 스티브는 자기도 모르게 방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았음. 토니의 침실에 불이 들어와 있더니, 이윽고 샤워소리가 들리고 문 여닫는 소리가 조금 시간을 두고 들렸음. 젖은 발소리, 그리고 푹 쓰러지는 소리 이후엔 정적. 스티브는 어쩐지 신경쓰여서 토니를 보러 갔음.
거기엔 가운만 입고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린 토니가 쓰러져 잠들어 있었음. 요 며칠동안 쉬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뭔가 하나라도 끝낸 모양이었음. 은은한 바디샴푸와 샤워코롱향이 풍겨왔음. 이러고 자다간 감기 걸릴 텐데. 스티브는 두리번거리다 수건을 발견하고 토니의 머리에 조심스레 가져다 댔음. 깊이 잠들었는지 미동도 않는 토니를 보며 대강 물기를 털어내고 수건을 다시 겉어내자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잠든 토니의 얼굴이 보였음. 피곤해 보이지만 얼굴에 떠올라 있는 만족감에 어쩐지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찾아오지 않던 수마가 갑작스레 덮치는 기분이 들었음. 스티브는 눈을 깜박이며 애써 뒤로 물러나려고 했음. 안돼.. 이러다 또 여기서 잠들면.. 하지만 이틀동안 수면을 취하지 못한 신체는 빠르게 생존본능으로 바늘을 움직였고, 결국 스티브는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엎어져 잠든 토니의 옆에 푹 쓰러지고 말았음. 아침에 또 무슨 소릴 들을지, 하고 생각한 게 스티브의 그날 밤 마지막 기억이었음.
다행히도 아침에 먼저 깬 건 스티브였음. 커다란 창 밖으로 밝아오는 아침 햇살에 눈을 떠보니 어제와 같은 포즈로 토니가 옆에 잠들어있었음. 스티브는 부스스하게 일어나 눈을 부비며 멍하니 앉아있었음. 근 이틀만에 잠을 자서 그런가 굉장히 나른한 기분이었고 거기에서 금방 빠져나오고 싶지가 않았음.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신체는 이미 움직일 준비를 끝마치고 어서 잠을 쫓으라고 채근하고 있었지만 스티브는 기지개를 펴고 다시 토니를 내려다보았음. 가지런하고 긴 속눈썹, 조금 까칠해진 것 같은 수염, 패인 이마. 토니는 가까이서 보면 굉장히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스티브는 문득 깨달았음. 유려한 말투와 태도, 노래하는 듯한목소리, 관중에의 쇼맨십 때문에 언제나 그는 번쩍이는 플래시에 파묻힌 화려한 남자로서의 이미지가 있었음. 그런데 또 일상에 들어와 보면 사소한 부분에서 더욱 매력을 발산하는 남자였음. 생각에 잠겨있던 스티브를 현실로 끌어올린 건 끙, 하는 토니의 낮은 신음소리였음. 스티브는 재빨리 일어나 머리를 정돈하고 파자마를 털었음. 토니에게서 왜, 내 옆이 그렇게 자기 좋던가? 하는 식의 비아냥을 듣지 않기 위한 일종의 완전범죄.. 아니 뒷처리.. 아니 아무튼 사후처리 그런 거였음. 다행히 느릿하게 잠이 깬 토니는 스티브가 자신에게 아침먹으라는 말을 하러온 줄 짐작했고, 지난 밤에도 자신과 같이 잠들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음. 스티브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만 자고 일어나라고 타박을 주곤 후다닥 침실에서 빠져나왔음.
이틀간의 불면 그리고 숙면을 통해 스티브가 얻은 결론은 하나였음.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은데 어쩔 수 없는 결과같은 그런거 있잖음. 토니가 자장가를 불러줬던 날 이후로 혼자 있던 이틀은 또 잠을 설쳤고, 어제 토니 보러왔다가 기절하듯이 푹 잔 하루. 거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토니의 유무였음. 있느냐 없느냐. 대체 자신이 언제부터 이런 응석받이 꼬맹이마냥 된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인이나 그런건 차치하더라도 현실적인 면을 보자면 '토니 스타크가 있으면 잠을 잘 수 있다' 였음. 이게 왠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신이시여. 둘이 거의 한달 가까이 동거하면서 싸우던 시절보단 가까워진게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인데.... 왜죠.. 멘붕해봤자 내린 결론은 바뀌지 않음. 결국 스티브는 여기에 현명하게 대처하기로 마음먹음. 캡틴 아메리카, 테서랙트와 망설임없이 바다로 돌진하던 결단력있는 이 남자는 일단 바꿀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거기 적응하는 데에는 선수였음. 군인이니까. 그래야 한다면 응당 하는게 맞음. 그리고 그게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더욱 그랬음. 그래서 스티브는, 좀 뻔뻔해지기로 했음. 토니가 어떤 반응을 보이건간에 밀어붙여야 한다면 그런 편이 더 좋음. 리틀 솔져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모른 채 토니는 토스트나 우적우적 씹고 있었음.
"토니, 바쁜가?"
"? 무슨 일이야, 캡틴. 별로 그렇진 않은데 왜?"
"좀..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서."
시끄럽게 울리던 음악의 볼륨을 조금 더 줄이고 토니가 돌아보자, 거기엔 흰색 셔츠에 검은 멜빵 바지, 흰 양말을 신은 스티브가 서 있었다. 얼마 전에 구입한 옷인데 스티브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은 있단 말이야. 완전 귀엽네. 진짜 아들이라고 뻥이나 쳐볼까...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는 걸 알았는지 짧게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토니는 망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나한테 할 부탁이라는 게 뭔데? 길어지는 거면 거기 앉던가. 토니는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고(스티브가 앉을 수 있도록 높이를 바꾼 의자였다) 스티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조금 어려운 부탁이기는 하네만. 뜸을 들이는 걸 보며 토니는 어쩐지 안절부절한 기분이 되었다. 뭐길래 저렇게 꼼지락거리는 거야?
"뭔데.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봐."
"사실은, 내가 요새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는데..."
"오. 뇌우 때문 아니었어? 이제 끝난 것 같은데 아직도?"
"그건 놀라서 그런 거고, 아무튼... 수면에 문제가 좀 있네. 그래서... 해결방법을 찾았는데, 도움이 필요한 일이거든."
"설마, 나?"
토니가 스스로에게 손가락을 향해보이자 스티브는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니 대체 뭐길래. 토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몇 가지 선택지를 떠올려보았다. 자장가를 불러달라는 건 아닐거고, 패스. 방을 옮겨달라는 거? 그건 자비스가 해도 될텐데. 방 환경이 바뀐걸 알아챘나? 그럴리 없고. 팽팽 돌아가는 쿼드코어 두뇌는 그 다음에 들려온 스티브의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일시정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자네랑 같이 자고 싶네."
토니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 다음에는 스티브의 존재를 의심했고, 그 다음에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를 의심했다. 뭐라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주 멍청한 목소리가 쥐어짜듯 목구멍에서 흘러나왔고, 눈 앞의 리틀 솔져는 확신을 담은 눈동자로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했다. 자네랑 같이 자고 싶네. 어려운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 도저히 그러지 않고서는 잠이 오질 않아서.. 스티브의 말은 마치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배우의 대사처럼 멀찍하니 들렸다. 대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같이 자고 싶다고? 스티브 로저스가 토니 스타크랑? 아니, 존재론적인 부분은 집어치우고서라도 왜 저렇게 표현이 미묘해? 아니아니 다 됐고 누가 누구랑 같이. 맙소사. 토니는 혀가 꼬인듯한 기분에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플레이보이, 천재, 독지가, 조만장자로 살아오면서 이런 경우는 어디에서도 겪은 적이 없었다. 삐걱거리는 뇌속의 연산을 다잡으며 간신히 안 돼의 ㅇ을 발음하려던 순간, 스티브가 풀죽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역시.. 무리한 부탁이겠지. 미안하네, 잊어버리게. 내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어."
스티브의 얼굴에는 절망감과 부끄러움, 두려움,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이 떠올라 있었다. 토니는 다시 제가 하려던 말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미국의 태양, 미국의 상징, 캡틴 아메리카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토니는 마치 자신이 대역죄인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잘못한 건가? 내가 거절할 것 같으니 저러는 거야? 왜? 내가 왜? 뭘 했다고! 억울한 마음은 저 밑에서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작아진 스티브 로저스는, 정말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저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예전처럼 핵을 집어들고 치타우리 모선에 꼬나박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굳어버린 혀를 움직여 토니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내뱉았다.
"아니, 그, 어...젠장. 무슨 언어장애도 아니고.. 당신더러 한 말 아니야! 내가 그렇다는, 미치겠군. 그런 표정 하지 마. 거절도 못하겠네. 알았어 알았다고 내 방에서 자!"
"......정말인가?"
더듬거리면서도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토니의 말에, 스티브가 한 템포 정도 늦춘 대답을 돌리며 얼굴에 화색을 띄었다. 아 제발 그렇게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이 금발에 벽안을 가진 천사라는 이름의 대악마야! 토니는 마음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 그렇게 안 오면 와서 자라고. 난 상관 없... 으니까. 마지막 말을 조금 더듬고 말았지만 스티브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오 신이시여, 당신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 안했는데 지금은 좀 불러야겠습니다. 나한테 왜 이래요? 뭐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토니가 그렇게 소리없이 절규하는 동안, 스티브는 일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하다며 랩을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스티브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도 토니는 이걸 평생 모를 것이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상대한 건 어려진 모습으로 사람 마음약하게 만드는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라, 백전노장의 캡틴 아메리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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